소설리스트

10화(4권) (10/12)

10

“저는…….”

막 에이든이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거세지더니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

눈앞의 광경을 보는 순간 벨리타는 기사가 말한 폭설이 시작된 것임을 인지했다.

그리고 곧 깜깜한 하늘에서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눈덩이가 미친 듯이 떨어졌다.

“피해야 해요!”

벨리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에이든을 향해 말했다.

“에이든은 이곳 폭설에 대해서 못 들었어요?”

“급하게 나오느라고 듣지 못했습니다.”

에이든도 벨리타를 따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벨리타는 그의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됐으리라 생각해 에이든을 부축하려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고맙습니다.”

사실 에이든은 벨리타의 부축을 받을 정도로 몸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와 접촉한 이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몸 상태가 괜찮아졌다.

하지만 에이든은 벨리타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녀와 닿는 것을 거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닿을 수 있다면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기에.

다만 그녀의 다른 쪽 손이 피에 젖은 붕대로 감싸여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에 의해 상처를 입은 손이었다.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짙은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에이든의 상태를 눈치 챈 벨리타가 서둘러서 입을 열었다.

“손은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타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그 기사가 제게 그러길, 이곳은 한번 폭설이 오면 며칠 내내 와서 자칫하면 발이 묶이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아요.”

“……그런 것 같습니다.”

“네, 그러니 어서 성으로 돌아가요.”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눈보라 속에서 말을 타고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가야 했다.

“히이잉!”

그런데 갑자기 폭설에 흥분한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의 고삐를 잡을 새도 없이 두 말이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 안 돼! 돌아와!”

벨리타가 큰 목소리로 말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말발굽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휘이-!”

에이든이 뒤늦게 휘파람을 불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떡하죠?”

벨리타가 불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걸음으로 지금 아게르 성까지 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피할 곳을 찾아봐야 할 듯합니다.”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벨리타가 에이든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두 사람이 피할 곳을 찾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죠.”

에이든이 먼저 벨리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보라 속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벨리타는 아주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항상 그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커다란 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벨리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에이든의 손을 꽉 붙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 30여 분 정도를 걸어간 듯했다.

뭉텅이로 내리는 눈에 의해 길바닥에 눈이 점점 쌓여 갔다.

그로 인해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피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두워서 더 찾기도 힘들었다.

힘을 이용해서 불을 불러일으키려고도 했지만 엄청난 바람에 모두 허사였다.

“에이든, 괜찮아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벨리타가 에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마주잡은 손에서 에이든의 떨림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벨리타가 다시 한번 에이든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습니다……. 견딜 만합니다.”

벨리타의 경우 불의 힘에 의해 체온이 남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래서 이 정도 강추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괜찮는 말과 달리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얼고 입이 경직되어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서 빨리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제발 동굴이라도…….’

이곳에서 어쩌면 에이든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에도 두 사람이 피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에이든의 몸을 좀 따뜻하게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벨리타는 바로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잠시만요.”

두 사람의 마주잡은 손으로 인해 에이든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안아요.”

“……네?”

다짜고짜 멈추더니 자신을 안으라는 말에 에이든이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어서요!”

하지만 벨리타의 단호한 음성에 에이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둘러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벨리타를 안기가 무섭게 따뜻한 열기가 에이든의 온몸 구석구석에 퍼지기 시작했다.

“따뜻해요?”

벨리타가 힘을 이용해서 그에게 온기를 전해 주는 거였다.

“……네, 그렇습니다.”

에이든은 그녀의 이런 다정함에 순간 울컥했다.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에이든의 몸에서 찬기가 어느 정도 사라질 때까지 서로를 꽉 껴안았다.

어쩐지 안고 있는 동안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의 품 안에 있으니 그의 손을 붙잡은 것 이상으로 불안함과 초조함이 싹 사라지고 평온해졌다.

그를 도와주고 있는 것은 그녀인데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그였다.

“좋아…….”

“네?”

“……네? 아, 아니에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자 벨리타가 움찔하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이제 좀 따뜻해진 거 같으니 다시 피할 곳을 찾아봐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타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려는데 에이든이 그녀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손…… 잡고 가야 합니다.”

“아, 맞아요…….”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맞잡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데 아까와 다르게 서로를 너무나 크게 의식해서인지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차올랐다.

벨리타의 신경이 온통 에이든과 잡은 손으로 쏠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건 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벨리타가 작게 속삭였던 말을 못 들은 척 되물었지만 사실은 듣는 순간 그의 심장에 콕 박혔다.

‘좋다고 했어.’

주어를 말하지 않아 뭐가 좋다는 건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좋다고 말했다.

정확한 의미조차 모르면서도 에이든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깊게 의식한 채 두 사람은 또 30여 분을 헤맸다.

이제는 눈이 종아리까지 쌓여서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그에 따라 손을 통해서 또다시 에이든의 몸에 한기가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든.”

아까와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벨리타가 에이든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벨리타,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서 몸을 피할 곳을 찾도록 하죠.”

다행히 아까보다는 그의 목소리가 괜찮았다.

“알겠어요. 우리 서둘러요. 하지만 힘들어지면 제게 꼭 말해요. 알았죠?”

괜찮다는 말에 안도를 하면서도 걱정을 놓지 못하며 벨리타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벨리타의 도움을 받으면 잠시나마 온기가 몸에 돌 수는 있었다.

하지만 힘을 계속 사용한다면 벨리타에게도 무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는 절대로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괜찮다는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를 생각하고, 아까의 일을 곱씹으니 정말로 이 시린 추위가 견딜 만했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잘 보이지 않는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 저기 보여요?”

뭘 발견한 것인지 벨리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이든은 벨리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간신히 쳐다봤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 밑에 숨겨진 동굴이 있었다.

“동굴이군요.”

“네, 얼른 가요.”

두 사람은 빠르게 동굴로 접근했다.

동굴의 입구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지만 완전히 다 막혀 있지는 않았다.

폭설이 계속 내린다면 조만간 입구가 눈덩이로 막힐 게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안에서 고립된다는 것이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지금은 이 거센 바람과, 몸을 잡아먹을 듯한 하얀 눈덩이를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들어가요.”

벨리타와 에이든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를 제외하곤 사방이 막혀 있어서 바람이 강하게 불지 않았다.

벨리타는 황급히 손바닥에 불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동굴 안이 금세 환해졌다.

“무너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에이든이 손으로 동굴 벽을 만지며 내부를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럴 것 같아요. 여기서 폭설이 멈출 때까지 있는 게 좋겠어요.”

“네, 그렇게 하죠.”

그렇게 둘은 간신히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벨리타는 먼저 동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불을 놓았다.

불이 타오를 매개체가 없어도 가능한 그녀의 능력이었다.

“춥죠?”

벨리타가 에이든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매서운 눈보라도 피했고 칠흑 같던 어둠도 가신 이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벨리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힘껏 버티고 있는 듯했지만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기에 괜찮다는 그의 말이 지금 딱히 신뢰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벨리타는 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에이든의 커다란 품 안에 얼굴과 몸을 파묻었다.

그의 체향이 코 속 가득히 들어오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런 반면 에이든은 긴장했는지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벨리타는 아까처럼 그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벨리타, 이러지 않아도-.”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은 좋았지만 폭설이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힘을 이렇게 계속 쓰게 둘 수는 없었다.

벨리타를 떼어 놓기 위해서 어깨에 손을 데려는데 그녀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제가 추워서 그래요.”

그의 품속에서 그녀가 웅얼거렸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물론 그녀도 아예 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춥다고 말하는 사람이 타인에게 온기를 나눠 준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에이든도 저를 꽉 안아 줘요. 네?”

고개를 빼꼼 빼들며 그를 쳐다보더니 안아 달라고 하는 그녀의 말에 에이든의 사고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이성적으로 뭔가를 따진다는 건 역시 벨리타의 앞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고 에이든은 품 안 가득히 벨리타를 감싸 안았다.

벨리타의 웃음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따뜻해요.”

한참을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안고 있는데 벨리타가 입을 열며 말했다.

“저도 따뜻합니다.”

“그렇죠? 역시 추위를 가시게 하는 데에는 사람의 체온만 한 것이 없어요.”

“제가 벨리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겁니다.”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있으니 따뜻한 걸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타는 에이든을 안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손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허리도…….”

벨리타가 그의 체온이 낮아져 목숨이 위험해질 상황을 걱정하듯 에이든 또한 벨리타의 상처가 덧날까 봐 걱정됐다.

“저는 괜찮아요. 아까 치료도 제대로 했잖아요. 그렇죠?”

벨리타의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럼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출혈량이 꽤 커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치료가 다 된 상태였는지라 정확히 어떻게 치료했는지는 모르지만 에이든이 그녀를 허투루 치료하진 않았을 거였다.

치료한 상처가 또 터져 버려서 다시 피가 나긴 했지만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이런 자잘한 상처는 그녀의 목숨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든은 아니었다.

그가 혹시라도 저체온증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의 고통보다는 그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또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더니 에이든의 체온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벨리타가 고개를 들어 그의 목 부근에 시선을 한 번 준 뒤 더 위쪽에 있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줄곧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음, 우리 할 얘기가 있죠?”

에이든이 입을 열기 쉽게 벨리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곤 이내 결심했는지 에이든의 입이 달싹거렸다.

“저는…….”

벨리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쳐다봤다.

“저는 사실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에이든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입에서 되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바,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말까지 더듬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닮았는데…….”

벨리타의 말이 맞았다.

에이든은 누가 봐도 바이언 공작이나 아델라와 닮았기에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가 바이언의 핏줄이 아니라는 의심을 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 바이언가에서는 공자가 태어났다.

바이언 공작 부인이 아들을 낳고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얘기는 제국 내의 귀족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벨리타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이든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에이든이 서글픈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건 진짜 에이든 바이언이 사고로 죽고 난 뒤에 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겁니다.”

“진짜 에이든 바이언이 죽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이언 공작이 서커스단에서 지내던 저를 공작가로 데리고 왔고요.”

서커스단이라는 말에 벨리타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서커스단에서 찾는다는 사람이…….”

“네, 제 진짜 동생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

벨리타는 이제야 그가 왜 그렇게 서커스단에 목을 매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처음 봤을 때와 그다음에 봤을 때 실망에 차 있던 얼굴들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렇다면…… 바이언 공작이 에이든을 서커스단에서 데려갔을 때 그때 동생과 헤어진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표정이 이제는 체념을 한 것인지 너무나 담담했다.

“어떡해요…….”

그 모습이 더욱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시간은 남았고 계속 찾다 보면 언젠간 만나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다행히 포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저도, 저도 도울게요. 에이든이 동생을 찾도록 제가 도울게요.”

동생을 만나 그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벨리타는 그를 위해 뭐든 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벨리타.”

“정말로요. 수도로 돌아가면 우리 함께 찾아봐요. 알았죠?”

벨리타가 에이든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며 약속했다.

“알겠습니다.”

에이든이 그녀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벨리타는 에이든을 보며 그를 꼭 도와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계속 들었다.

진짜 에이든 바이언이 아닌데 어떻게 철의 힘을?

“그리고 바이언 공작가에 입성한 순간부터 이 목걸이를 차게 되었습니다.”

“바이언 공작이 에이든을 통제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채운 건가요?”

“맞습니다. 바이언 공작은 이 목걸이로 제 생각과 행동을 통제했고, 저는 공작을 대신해 온갖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더러운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자 쓰게 웃었다.

서커스단에서 한낱 곡예만을 부렸던 소년은 공작가에 들어가자마자 겉으로만 귀족이었을 뿐 가문의 개가 되었다.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고, 하지 않는다고 버티면 공작에게서 견디기 힘든 학대를 당했다.

바이언 공작은 가문의 번성과 유지를 위해서 직접 손을 더럽히는 대신 에이든을 이용했다.

목걸이로 인해 에이든은 공작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은 에이든을 자신의 아들이 아닌 대용품이라 생각했고 쓰임새가 다하면 버리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럼 저를 공격한 것도…….”

“네, 바이언 공작의 수작입니다.”

이제야 복잡했던 퍼즐이 하나둘씩 맞아 들어갔다.

바이언 공작은 벨리타를 줄곧 마차 사건의 범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을 죽이려고 한 벨리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그것조차 바이언 공작이 관여된 일이라면…….

벨리타는 자신이 한 것도 아닌 일로 죽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하고 분했다.

마차 사건이 일어난 건 바이언 공작과 정말 무관하다 해도 조사하는 동안 그가 정말 제 딸의 짓을 몰랐을까?

“미안합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그를 안고 있던 팔에 잔뜩 힘을 준 것을 에이든이 알아채곤 벨리타에게 사과했다.

“에이든이 왜 사과해요? 에이든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제가 벨리타를 상처 입혔습니다.”

“아니에요. 이건 바이언 공작이 한 거예요. 저는 절대 공작을 용서할 수 없어요. 수도에 돌아가는 즉시 모든 진실을 밝힐 거예요.”

벨리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이든이 진정하라는 듯이 벨리타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행동에 벨리타의 마음이 귀신 같이 다시 평정을 되찾자 에이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까의 의문점에 대해 그가 말을 해 줄 기미가 보이자 벨리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니면서 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목걸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걸이가 없다면 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거겠네요?”

“네, 저는 이 목걸이를 통해 누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델라 바이언 공녀와요?”

아델라와 연결되어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말이었다.

“네, 그래서 누님의 몸이 급작스럽게 안 좋아지거나 쓰러지면 그 충격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옵니다.”

“아, 그렇다면 그때…….”

벨리타는 승마 대회 때 에이든이 갑자기 쓰러졌던 걸 기억해 냈다.

“승마 대회 때 쓰러진 게 아델라 바이언 공녀가 마차 사건으로 쓰러져서 그런 거였어요?”

“맞습니다. 그리고…….”

에이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여기까지 그녀에게 말을 해 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어떤 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요?”

“누님께서 혹시나 죽게 된다면 저 또한 죽습니다.”

“뭐라고요?”

에이든의 말에 너무 놀라서 순간 저도 모르게 일어나려고 벨리타의 몸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에이든이 그녀를 꽉 안고 있어서 엉덩이만 잠시 뗐을 뿐이었다.

“죽는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물론 아델라가 죽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에이든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벨리타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 주었다.

“벨리타.”

에이든이 자신을 부르자 벨리타가 간신히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에이든의 자수정 같은 눈을 바라보니 떨렸던 몸이 신기하게도 딱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그에 대한 해결책이 단번에 떠올랐다.

“목걸이! 목걸이를 무력화시키면 돼요!”

“목걸이를 말입니까?”

“네, 분명 제 힘이 그 목걸이가 에이든에게 힘을 가하지 못하게 하는 게 틀림없어요. 에이든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죠?”

“하지만 너무 많은 힘을 쓰게 되면…….”

“괜찮아요.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어요.”

“힘이 들지 않았다니, 무슨 뜻입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오웬 에스트에게 해 봤는데 금방 목걸이의 색이 바래지더라고요. 마치 힘을 잃은 것 같이요. 물론 에이든이 하고 있는 건 바이언 공작에 의한 거라 더 강력한 힘이 들어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하고 싶어요. 하게 해 줘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타가 에이든의 품에서 벗어났다.

“오웬 에스트요?”

“네.”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아 벨리타는 대답을 하면서도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너무나 의욕적이고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더 이상 벨리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정말로 벨리타가 그의 목걸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그는 이제 그녀에게서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만약 너무 힘들면 그만둬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건 싫었다.

그렇기에 그는 벨리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네, 그럴게요.”

벨리타는 맘에도 없는 대답을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벨리타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붓더라도 반드시 이 목걸이만은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다짐하며 두 손바닥에 강한 열기를 모았다.

저번에 한 번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에이든이 겉옷을 살짝 내린 뒤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자 연보라색의 목걸이가 밖으로 드러났다.

벨리타는 두 손을 그대로 목걸이로 갖다 댔다.

그리고 목걸이를 폭파시킬 기세로 힘을 가했다.

확실히 오웬 에스트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꽤 오랜 시간 힘을 쏟아부었음에도 그때와는 다르게 쉽게 색이 변하지 않았다.

“벨리타…….”

에이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벨리타를 불렀다.

벨리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목걸이에만 집중했다.

‘제발.’

힘이 통해서 그가 앞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벨리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쏟아냈다.

수호수만 불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반지의 힘까지 끌어 모았다.

하지만 역시나 목걸이는 질겼다.

바이언 공작의 힘을 그녀가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막 떠오르려고 할 때쯤이었다.

“어? 변했어요!”

에이든이 차고 있던 목걸이의 색이 오웬 에스트 때와 비슷하게 연보라색에서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색이 변했다는 벨리타의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내려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지금까지 그를 옥죄었던 목걸이의 색이 변해 있었다.

“어때요?”

“잘…… 모르겠습니다.”

“목걸이의 힘이 아직도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는 건가요?”

“네, 다만…….”

“다만?”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홀가분해진 느낌입니다.”

“그럼 성공한 걸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에이든은 조용히 뒷말을 삼켰다.

“목걸이, 목걸이를 풀어 봐요.”

벨리타가 다급하게 그에게 말했다.

“네?”

“힘을 잃었다면 목걸이를 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겠군요.”

평생 목걸이를 빼고 싶었지만 뺄 수 없었기에 차마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벨리타가 알려 주었다.

에이든은 조심히 목걸이에 손을 댄 뒤 연결고리를 해체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바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 * *

그 후 우리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었고 그가 내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럼 원래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서커스단에 있었으니 에이든도 번호로 불렸나요?”

“아닙니다. 제 이름은…… 이든이었습니다.”

“이든이요? 이든이면…….”

이든은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내게 가르쳐 준 이름이었다.

“맞습니다. 그게 제 진짜 이름입니다.”

“이든…….”

나는 그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웅얼거렸다.

“처음입니다.”

“네?”

“제 진짜 이름을 가르쳐 준 사람은 벨리타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에이든의 동생을 제외하고는 이든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내가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럼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이든이라고 부를까요?”

“……좋습니다. 저 또한 벨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벨…….

그와는 달리 벨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여행 내내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서 썼던 이름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진짜 이름은…….

아마도 평생 그에게 가르쳐 줄 수 없겠지.

내가 벨리타가 아니라는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었다.

“좋아요. 이든.”

나는 이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쓸데없는 상념을 애써 지우기 위해 그를 보며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며 그 또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대화들을 나누면서 틈틈이 밖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폭설이 쉬이 그치질 않아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든, 춥죠?”

지금 우리는 동굴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로 동굴 안을 어느 정도 훈훈하게 만들어 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북부의 엄청난 추위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괜찮…… 습니다.”

“괜찮지 않잖아요. 이렇게 떨고 있으면서.”

말과 달리 몸을 으슬으슬 떨고 있는 모습에 나는 그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다음 그의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그의 두 손을 맞잡았다.

에이든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 풀어요.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장난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그를 놀리듯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어쩔 수 없습니다.”

“뭐가요?”

“벨과 함께 있으면서 긴장이 되고 떨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흐음, 그래요?”

나만 보면 떨린다는 그의 고백 같은 말에 나도 덩달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커다란 그의 몸을 확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내가 그를 온전히 품에 가두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손끝이 서로 닿지는 않았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에이든의 몸이 아까보다 더 크게 움찔거렸다.

“이러면요?”

“…….”

“이러고 있으면 더 떨려요? 내 체온 때문에 따뜻하긴 하죠?”

“…….”

그런데 내 물음에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안고 있던 팔을 그대로 둔 채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만 들어 그를 쳐다봤다.

“네? 어때요?”

그의 대답을 꼭 듣고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황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즐거웠다.

그래서 대답을 요구하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던 그때.

“좋아합니다.”

“……네?”

“벨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

나를 좋아한다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뭐라 말할지 몰라 뜸을 들이고 있었더니 에이든이 바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제가 벨을 마음에 품어도 됩니까? 저 같은 자가 감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런데 자신을 낮추며 자학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말을 자르며 크게 흥분했다.

“왜 그렇게 말해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마음이 아팠다.

그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욱더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제발.”

“그러면…… 제가 벨을 좋아해도 됩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상대의 허락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내 허락을 받고 싶어 했다.

자신이 나를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벨…….”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엔 반대로 그가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우리는 조금 떨어진 뒤 눈을 마주했다.

“…….”

“…….”

“제가 좋아요?”

“네, 좋습니다.”

“저도…… 저도 이든이 좋아요.”

그의 고백에 대한 내 대답을 들을 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는지 에이든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장 환한 미소를 짓더니 그가 더없이 황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벨…….”

“이든…….”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입술을 맞대면서도 이 순간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다.

그의 고백을 듣고, 그와 키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더 깊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 *

폭설은 동굴 안에서 두 밤을 지새운 뒤에야 멈췄다.

우리는 입구를 불로 녹여 낸 후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곳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환한 빛이 눈 안으로 들어오자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눈을 감고 눈이 환한 빛에 적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뜨자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폭설이 내리고 난 후의 세상은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와……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네요.”

동굴 밖으로 조심히 발을 한 발짝 내디디니 눈이 허벅지 중간까지 닿았다.

“아무래도 좀 녹여야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습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을래요?”

“알겠습니다.”

에이든이 내 뒤로 물러서자 나는 손에 불의 힘을 불러 일으켰다.

순백의 공간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왠지 조금 아쉬웠지만 망설이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불로 눈을 녹였다.

눈이 녹으며 서서히 흙바닥이 드러났다.

나는 뒤돌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마주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빠르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성은 이 북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어디에 있어도 잘 보였기에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아게르 성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어?”

아까까지만 해도 들리지 않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가 오고 있어요.”

“그렇군요.”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아무리 목적지가 보인다 한들 말을 타고 왔던 거리를 걸어서 가자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굴 안에서 3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버텼다.

아무리 평범한 이들보다 체력이 좋다고 해도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를 데리러 온 누군가가 아닐까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던 중 말이 점점 가까워졌다.

잠시 후 말을 타고 온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변한 모습 또한 익숙해진 클레이튼과 나의 호위 기사인 윌리엄이었다.

“아가씨!”

윌리엄이 나를 부르며 급하게 말에서 내렸다.

클레이튼 또한 초조했던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도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밤늦게 나가셨다는 분이 이틀째 돌아오시지 않고, 저희 또한 폭설로 인해 발도 묶여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미안해, 경.”

그를 걱정시켰다는 미안함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녀님.”

“아, 루덴 공작님.”

클레이튼 또한 내게 뭐라 말하려는지 입을 달싹이려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먼저 선수를 쳤다.

“죄송해요. 잔다고 한 사람이 사라져서 걱정이 많으셨죠.”

“하아, 그러니까 왜-.”

하려던 말을 끊고 갑자기 클레이튼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내 옆에 있던 에이든을 차갑고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든도 클레이튼의 눈을 피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아니, 노려봤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지려 하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수습을 하려던 순간, 클레이튼이 먼저 내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얼른 돌아가도록 하죠.”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클레이튼의 말에 나는 서둘러서 대답했다.

“아가씨, 메리 님이 아가씨께서 사라졌다는 걸 안 뒤로는 지금까지 식사도 일절 안 하고 잠도 자지 않고 있습니다.”

“뭐? 메리가?”

“네…… 그렇습니다.”

“정말 미안해. 얼른 가자.”

나에 대한 걱정에다 메리까지 잘못될까 봐 두 배로 걱정이 됐을 윌리엄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며 서둘러 돌아가기로 했다.

“공녀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클레이튼이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가겠다는 말에 나는 에이든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자님께서는 제 말을 타고 가시죠.”

윌리엄이 말했다.

그렇게 해서 클레이튼의 말에는 내가, 윌리엄의 말에는 에이든이 함께 탔다.

“어, 그런데 길이 나 있네요?”

말을 타고 가고 있는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신기해서 클레이튼을 살짝 돌아보며 묻자 그가 손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곤 우리가 가던 길 말고 옆에 잔뜩 쌓여 있던 눈들을 단번에 바람으로 날려 버렸다.

아하, 내가 녹인다면 그는 날려 버리는구나.

곧바로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때 클레이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죄송해요.”

아까 윌리엄에게도 그랬듯 나는 그에게 거듭 사과했다.

“사과를 받고자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

그가 무슨 뜻으로 말을 꺼낸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이언 공자는…….”

“어, 그게 있잖아요. 지금은 공작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다 오해예요. 에이든은 저를 해치려 하던 게 아니었어요.”

이유를 말할 수가 없어서 그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에이든에 대해 오해한 것은 풀어 줘야 했다.

“하지만 바이언 공자가 직접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오해예요. 아, 설마 누구에게 말하거나 하셨어요? 에이든이 저를 상처 입혔다고……?”

에이든과 나의 일에 대해 클레이튼이 누구에게라도 말을 했을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녀님의 안위보다 그게 더 중요한 겁니까?”

“그게…… 지금은 더 중요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에이든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 공작님께서도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그때 공작님께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연회 때 있었던 일은 절대 발설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얘기했다.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러겠습니다.”

“감사해요.”

뒤에서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그런 그와 달리 나는 클레이튼에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전신에 안도감이 싹 퍼졌다.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가 됐고…….’

클레이튼이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자 나는 조용한 틈을 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차근차근 생각했다.

말을 타니 아게르성까지 금세 도착했다.

그 후 성에서 별다른 일 없이 휴식을 취하며 우리는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아게르성의 사람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성을 떠났다.

원래 있었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마물을 토벌하러 갔던 이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아델라는 날이 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벨리타가 안전하게 돌아온다는 것에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했던 일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녀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벨리타에게 모든 사실을 들킨 그날 아델라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마차 사건이 그녀의 자작극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중에서도 케인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벨리타에게 향한 케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한 일이었는데 벨리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절대 안 돼.’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무조건 벨리타의 짓으로 만들어야만 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마물이 북부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하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마물 토벌에 쏠렸고 마차 사건의 범인을 밝히는 것은 뒤로 미뤄진 것이었다.

거기다 벨리타까지 토벌대에 합류하게 되자 아델라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마물 토벌대가 수도를 떠난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우선 오웬 에스트를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벨리타를 마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갈 아주 좋은 말인 줄 알았더니 오히려 역공을 당할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웬 에스트를 처리하기 위해 그의 목에 채운 목걸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의 정신을 조종해 모든 건 벨리타가 시켜서 한 짓이라는 유서를 남기게 한 뒤 자살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힘을 썼음에도 오웬 에스트의 목걸이와 전혀 연결이 되질 않았다.

‘뭐야.’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지?

‘이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힘을 쏟아 부어도 오웬 에스트와 연결이 되질 않았고 결국 그를 조종하는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며칠 후 늦은 밤 조사단의 감옥에 몰래 침입하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경비가 더욱더 삼엄해져서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벨리타의 짓이 분명했다.

오웬 에스트를 처리하려고 했던 방법이 모두 엉망이 되어 버리자 아델라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왜 내가 하는 일에 번번이……!’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골똘히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마물 토벌대가 대승을 거두고 곧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특히 벨리타가 그곳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자 아델라의 마음은 더욱더 타들어 갔다.

‘어떡하지?’

곧 돌아올 텐데 어떻게 해야…….

그런데 그 순간 아델라의 머릿속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녀만 없으면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벨리타만 없다면 케인도 내게 돌아올 것이고 마차 사건의 진실 따위가 밝혀질 리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전쟁터의 한가운데였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도 전혀 이상한 곳이 아니었다.

‘에이든을 이용해야겠어.’

오랜 시간 동안 동생 노릇을 한 그를 이용하는 것에 약간의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바이언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이가 아니었고 그녀의 진짜 가족도 아니었다.

아델라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일에 그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이번 일에 그보다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토벌대가 돌아오기 전에, 벨리타가 수도로 복귀하기 전에 그녀를 없애야만 했다.

아델라는 이번에는 오웬 에스트가 아닌 에이든과 연결하기 위해서 힘을 쏟아냈다.

첫 연결은 쉬웠다.

마물 토벌에서 체력을 다 소비해서 그런지 에이든의 저항은 무척이나 약했다.

그의 눈을 통해 북부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가구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에이든의 방인 듯했다.

‘벨리타 헤이츠를 찾아서 죽여.’

아델라는 지체하지 않고 목걸이를 통해 에이든에게 명령을 내렸다.

피시전자의 정신을 조종해 시전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힘이었기에 연결만 잘되면 수월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야가 원래로 돌아왔다.

연결이 끊긴 거였다.

‘체력이 바닥나서 저항을 못할 줄 알았더니…….’

아델라는 다시 시도했다.

그런데 처음과는 다르게 두 번째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에이든의 의지가 강력해서 그녀가 그에게 연결될 수 없게 막고 있었다.

그와 몇 시간 동안이나 힘겨루기가 지속됐지만 아델라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녀가 먼저 지쳤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아델라는 에이든에게 계속해서 힘을 쏟았다.

‘벨리타 헤이츠를 죽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명령에도 에이든은 끈질기게 버텨 냈다.

이렇게 그가 저항할 줄 몰랐던 아델라는 자신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반지를 빌렸다.

종종 반지를 통해서 부족한 힘을 보충했기 때문에 반지를 얻는 건 쉬웠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뒤 그녀는 다시 힘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폭발적인 힘이 느껴지자 곧 에이든과 순식간에 연결되었다.

에이든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벨리타가 보였다.

역시 하늘은 그녀의 편이었다.

아마도 벨리타가 에이든을 찾아온 것이리라.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아델라는 힘을 더 쏟아 부으며 에이든이 벨리타를 죽이도록 조종했다.

그녀의 시야에 벨리타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반지의 힘에 에이든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담고 있는 물건이었기에 결국 에이든은 이 힘에 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에이든을 통해 벨리타를 상처 입히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벨리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에이든과의 연결이 끊겼다.

아델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벨리타가 아니라 그녀의 방이었다.

‘안 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아델라는 곧바로 다시 에이든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더 이상 그녀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목걸이가 고장이 나서 말을 안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포기가 되질 않았고 그녀는 몇 번이고 힘을 쏟아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허사였고 얼마 뒤 모든 체력이 바닥난 아델라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깜깜한 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델라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다시 악착같이 에이든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다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보였던 방이 아니라 밖이었다.

에이든이 밖으로 나온 듯했다.

‘벨리타 헤이츠를 죽여.’

아까의 기회를 날린 것이 아쉬웠지만 그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었다.

명령에 따라 벨리타가 있는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또 에이든과 힘겨루기를 하던 때였다.

저 멀리서 벨리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보 같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제 발로 찾아오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다시 한번 찾아온 기회였다.

아델라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힘을 쥐어짜 냈다.

하지만 그녀는 시작도 하기 전에 또 실패하고 말았다.

벨리타가 아까와 똑같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곧 에이든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도대체 뭐지?’

왜 벨리타가 다가오기만 하면…….

설마?

아델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한쪽의 힘을 다른 한쪽이 눌러 버리는 것.

그게 가능하다면…….

그러나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그 이후로 아델라는 더 이상 에이든과 연결되지 못했고, 에이든을 이용해서 벨리타를 해치우려고 했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벨리타가 돌아오면 모든 게 끝이다.

생각해 보니 일전에 오웬 에스트에게도 그녀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았었다.

벨리타의 짓이 분명하다고 아델라는 확신했다.

‘오웬 에스트라도 없애야 해.’

벨리타를 죽일 수 없다면 처음 계획대로 어떻게 해서든, 극단적인 수를 써서라도 오웬 에스트만은 죽여야 했다.

아델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 * *

마물 토벌대가 수도에 도착하기 하루 전, 마차 사건 조사단이 쓰던 저택이 큰 화염에 휩싸였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거대한 불길이 순식간에 저택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저택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조차 몸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불행히도 그들 중 대부분이 화마에 휩싸여 죽었고 살아남은 몇몇은 갑작스런 화재로 인한 충격에 지하 감옥에 있던 오웬 에스트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수도 기사단이 잿더미로 변한 저택을 수색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오웬 에스트로 추정되는 불에 탄 시체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마물 토벌대가 수도로 돌아왔다.

토벌대가 수도 근처에 다다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는 이른 아침부터 토벌대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준비로 정신없었다.

오후가 되자 황태자를 필두로 한 토벌대가 수도의 입구를 통과했다.

많은 제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발테우스 만세!”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 만세!”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 전하 만세!”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 소리가 곳곳을 가득 메웠다.

벨리타는 천천히 말을 타고 가며 그 순간을 만끽했다.

처음 토벌대가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토벌대의 해산식 역시 황궁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모두들 수고 많았소. 그대들의 용기와 지혜 덕분에 발테우스 제국은 앞으로도 무한한 번영을 누릴 것이오.”

황제가 발코니에 나와서 마물 토벌대의 기사들을 격려하며 승리를 축하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승전 축제를 열 것이니 부디 축제를 즐겨 주길 바라오.”

“와아아아!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 만세!”

“발테우스 만세!”

황제의 축하 연설을 끝으로 광장에는 악기 연주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승전 축제의 시작이었다.

* * *

해산식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통과해 저택 앞에 다다르자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벨리타!”

“벨리타!”

두 분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빠르게 말에서 내린 뒤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께서 먼저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나 또한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드디어 어머니의 곁에 돌아왔다는 것을 체감했다.

“벨리타.”

“어머니.”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다행이구나.”

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젖어 들었다.

“어머니, 저 잘 돌아왔으니 울지 마세요.”

“기뻐서, 기뻐서 그래.”

“이 좋은 날 왜 우시오.”

“벨리타가 무사히 돌아오니 좋아서 그래요.”

나는 작게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등 뒤에 있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잘 돌아왔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눈물 젖은 상봉을 끝낸 후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셋이서 식사를 했다.

거의 나 혼자만 먹고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먹고 있는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나를 기다렸는지 알기에 나는 더 씩씩하게 행동했다.

“그러니까 네가 데려왔던 그 리안이라는 아이가…… 루덴 가문의 공자였다는 말이냐? 이름이…… 그래, 클레이튼 루덴이었지 아마?”

“네, 맞아요, 아버지.”

식사를 하면서 나는 아게르성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부모님께 모두 털어 놓았다.

그중 내가 그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바람의 가문에 대한 것이었다.

클레이튼은 아게르성에서의 입지와 다르게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황궁 감옥에 갇혔다.

황제의 명이었다.

루덴 가문이 만약 정말로 누명을 쓴 것일지라도 가문이 아직 복권되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반역자의 아들이었다.

클레이튼은 기사들에게 잡혀가면서도 내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를 위해서, 아니 리안이었던 클레이튼을 위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일단 루덴 가문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정보를 모아야 했고 거기엔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를 구하려다 갑자기 소년이 어른이 되었다고? 직접 보지 못해서 그런지 도저히 믿기 힘들구나.”

“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 순간을 보았어요.”

“흐음, 그렇군.”

“루덴 공작 부인이 물의 가문의 방계였죠, 아마?”

“맞소.”

“루덴 공작 부인이 성장을 더디게 하는 물약을 루덴 공자에게 먹인 듯하네요.”

“그런 것 같소. 그래서 20년이 넘도록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거겠지. 그때 도망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지금까지 별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두 분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순간 부모님이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지금까지 네게 바람의 가문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던 것은 함구령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래, 벨리타. 그 일에는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엮여 있어서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단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버지의 말에 동조했다.

“만약 그 아이가, 아니 클레이튼 루덴이 네 목숨을 살려 준 일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그랬듯 계속 침묵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고심하는 듯했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입을 여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좋다. 나 또한 루덴 공작이 그렇게 간 것에 대해서 항상 마음의 짐이 있었으니 이번에 그 짐을 털어내고 싶구나.”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클레이튼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2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귀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바이언 공작과 기사들이 들이닥쳤지. 그러고는 곧바로 루덴 공작을 붙잡더니 그가 힘을 쓰지 못하게 바이언 공작이 손을 썼다.”

“힘을 쓰지 못하게 손을 썼다고요?”

“그래,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를 순식간에 공작의 목에 채웠다.”

아마 에이든과 오웬 에스트가 하고 있던 목걸이와 비슷한 종류인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처음 듣는 얘기인 양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 게 가능한 건가요?”

그리고 정말 처음 듣는 얘기라면 할 수 있는 질문을 아버지에게 물었다.

“가능하다. 하지만 그 힘은 우리 가문엔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철에게 불은 상극이라 철의 힘을 불의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것이지.”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이제야 내가 어떻게 에이든과 오웬 에스트의 목걸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렇…… 군요.”

“아무튼 그날 루덴 공작을 포박한 뒤 바이언 공작이 그러더구나. 루덴 공작이 반역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럼 그전까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하셨나요?”

“전혀 몰랐지. 그래서 더 의아한 것이고 말이다.”

하긴 아버지는 제국의 네 공작 중 한 사람이었고 제국 곳곳에 그의 눈과 귀가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다른 공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반역을 저지른 건가요?”

“마물이다.”

“마물이요?”

“그래, 마물을 이용해서 황가를 무너트리려 했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글쎄다……. 그때에는 그것이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이언 공작이 내놓은 증거와 증인이 워낙 확실했기에 누구도 루덴 공작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지.”

“증거요?”

“그 당시 한창 제국 곳곳에서 마물들이 들끓을 때라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특히 서쪽에서 밀고 들어오던 파푸스 놈들의 기세가 심상찮았는데 바람의 가문에서 놈들이 수도에 도착하면 성문을 열어 주겠다고 약조한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루덴 가문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었지.”

“하지만 그건…….”

“그래, 위조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증거와 함께 증인도 나타나서 그 증거를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증인이 누구였나요?”

“루덴 공작의 최측근인 기사였다. 그자가 루덴 공작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문을 열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고 증언하더구나.”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 그리고 증인…….

한 가문을 멸문시키기 위한 모든 증거들이 너무 딱딱 맞아 떨어져서 그런지 왠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나 또한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었는데 지나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루덴 공작이 참수되고 가문이 망해 버린 뒤였지.”

“아버지께서는 그럼 루덴 가문이 누명을 썼다는 증거를 찾아내신 건가요?”

“그건 아직 찾지 못했다. 너는 그 아이, 아니지 클레이튼 루덴에게서 어떤 것도 듣지 못했느냐?”

“그가 말하길 루덴 가문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누명을 반드시 벗을 거라고요.”

“누명을 벗는다라…….”

“만약 루덴 가문이 정말로 억울하게 멸문당한 것이라면 저는 그를 돕고 싶어요.”

내 말에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려 20년 전의 일이고 황실이 엮여 있는 문제이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정말로 누군가의 거짓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부모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네 뜻은 알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꾸나. 그보다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

“뭔가요?”

“마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사용하던 저택에 불이 났다.”

“네? 불이 났다고요?”

“그래, 순식간에 불이 번져서 그곳에 있던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었다면 설마…….

“감옥에 있던 자는요? 감옥에 있던 자는 어떻게 됐죠?”

“그자도 불에 타서 뼈만 남은 채로 발견됐다고 하더구나.”

“아…….”

아델라 아니면 바이언 공작의 짓이 틀림없었다.

“범인, 범인은 잡았나요?”

“잡지 못했다. 바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라 아직 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그것도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라니, 내가 돌아오기 전에 오웬 에스트를 죽이려고 했던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피곤할 텐데 어디를 가려고 그러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잠시 조사단이 쓰던 저택에 다녀올게요. 금방 올 거예요.”

“호위를 데려가거라.”

“네, 그럴게요.”

식사를 끝낸 후 나는 바로 집을 나섰다.

원래 내 호위는 거의 리안이 담당했는데 마차 앞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만 있자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가자.”

“네, 아가씨.”

그래도 윌리엄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차를 타고 조사단의 저택으로 향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대문 앞에 마차를 세운 뒤 나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인 지하 감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택과 주변은 원래의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엄청나게 큰 불길이 이곳을 집어삼켰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나를 겨냥하는 것일까?’

내가 그랬다고 몰아갈 생각인가?

나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람까지 죽인 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나무가 아닌 돌이라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감옥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도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거기서 오웬 에스트도, 어떠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 * *

해산식이 끝난 후 에이든은 바이언 공작가로 돌아왔다.

저택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잠시 동굴에서 벨리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그런데 목걸이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공작이 알았을 텐데 어떡하죠?

-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 어떤 방법이요?

- 우선 이 목걸이를 다시 차고 있을 생각입니다.

- 하지만 금방 들통이 날 텐데요. 에이든이 위험해지거나 하면…….

- 괜찮을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뚜렷한 방법은 있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없어도 있는 척을 한 것이었다.

‘하아.’

아마도 지금 저택으로 들어간다면 새로운 목줄을 차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절대로 다신 바이언의 개가 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니, 다시 말하면 두 번 다시는 벨리타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의 선택은 오직 하나였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에이든은 우선 공작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공작의 반응은 그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목걸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뭐지?’

목걸이의 힘을 이용해서 벨리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공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에이든은 공작의 앞에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무실을 나왔다.

‘그렇다면…….’

에이든은 바로 아델라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델라와 마주했을 때 그녀의 시선이 그의 목 부근에 잠깐 닿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또한 목걸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과는 달리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뭔가를 숨기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대할 뿐이었다.

* * *

승전 연회가 황궁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연회 참석을 위해 아침부터 매우 분주했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메리.”

오늘의 연회는 승전 연회이니만큼 수도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지방 귀족들까지 참석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우리 가문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부모님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도착하니 확실히 이전의 연회와는 달랐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마차들이 끝을 모르고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옆의 문으로 빠르게 통과했다.

마차들의 수로 짐작했지만 연회장 안은 역시나 많은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귀족들이 정말 많이 왔네요.”

“승전 연회이니 당연하지. 특히 지방 귀족들은 황궁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이럴 때밖에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올 수밖에 없지.”

“그렇군요.”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니 순간 클레이튼이 떠올랐다.

‘토벌대에서의 공로를 생각하면 그도 이곳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인데…….’

연회에 참석하기는커녕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여러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헤이츠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파레스 백작, 오랜만이오.”

“헤이츠 공녀님께서 이번 마물 토벌대에서 큰 활약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역시 헤이츠 가문의 차기 가주다우십니다.”

“허허, 큰 활약은 무슨. 제국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입가는 내려갈 줄을 몰랐고 나를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제국에 헤이츠 가문이 있어서 매우 든든합니다. 그나저나 루덴 가문의 공자님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크흠, 그렇소.”

바람의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클레이튼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이미 제국 곳곳에 퍼진 듯했다.

“아이의 모습에서 갑자기 성인으로 변했다던데, 그것도 사실입니까?”

“맞소.”

“그렇다면-.”

“크흠,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나눠야 하니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십시다.”

백작이 자꾸 아버지에게서 뭔가를 캐내려고 하자 아버지가 불쾌한 얼굴로 백작의 말을 단칼에 끊어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러면 언제든 불러 주신다면 다음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가지.”

“네, 아버지.”

아버지를 따라서 움직이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에이든!’

에이든은 오늘도 너무 멋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를 향해 활짝 웃는데 그 옆에 있는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싹 굳었다.

그런데 그런 나와 달리 아델라는 나를 비웃는 듯이 입가에 조소를 담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그녀는 금방 자신이 내게 지었던 표정을 감쪽같이 숨기고는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 사람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간간이 에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럴 때면 그와 나는 아무도 몰래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런데…….’

나를 보며 미소를 짓다가도 나를 보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을 이따금씩 훔쳐볼 때면 그는 왠지 슬퍼 보였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와 대화를 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를 따로 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망설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곧장 내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다가왔다.

“헤이츠 공작님,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맥시어스 공작, 오랜만이오.”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는 내게 줄곧 시선을 던졌다.

“헤이츠 공녀.”

그러곤 아버지와의 대화 후에 본격적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맥시어스 공작님.”

“공녀, 몸은 어떻습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수도로 돌아오기 전에 공녀께서 폭설에 휘말려 성에 며칠 만에 돌아오셨던 일 때문에 몸이 상하시진 않았을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폭설이라니?”

“폭설이라니요?”

하아.

그걸 왜 여기서 말하는 거야?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폭설 때문에 발이 묶였던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저 인간이 여기서 그걸 불어 버렸다.

하여튼 미운 인간은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설마 공녀께서 말씀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네,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실수를 한 건 알고?

“벨리타, 무슨 말이냐. 네가 폭설에 휘말렸었다니?”

“별일 아니에요, 아버지, 어머니. 잠시 성 밖에 나갔다가 폭설이 내려서 움직이지 못했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성 밖에는 왜 나간 것이냐?”

“그건…… 잠시 일이 있어서요.”

여기서 에이든을 찾으러 갔었다고 말을 한다면 그와 관련된 일까지 드러날 수 있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아낀다고 저 남자의 입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바이언 공자와 함께 실종됐었는데 저 또한 두 분이서 그날 왜 성 밖을 나가셨는지 궁금합니다.”

“바이언 공자라니?”

하, 진짜 미치겠네.

우선 흥분한 아버지부터 진정시켜야 할 듯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큰 목소리가 이미 연회장 안을 울렸는지 많은 귀족들이 우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바이언가의 사람들 또한 포함이었다.

나는 에이든과 잠시 눈을 마주치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버지,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돌아가서 설명할게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그래요, 여보. 보는 눈이 많아요. 진정해요.”

“크흠, 알겠소.”

내가 설명한다는 말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다행히 아버지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매서운 눈으로 케인을 노려봤다.

그러곤 그에게 한마디를 하려고 하는 순간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뿌우-.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일어나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시종의 커다란 목소리에 따라 앉아있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 또한 문가를 주시했다.

황제의 뒤를 따라 황후, 황태자, 그리고 여러 황족들이 줄지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를 제외한 황가의 사람들이 상석에 가서 자리를 잡자 황제의 축사가 시작됐다.

황제의 축사 대부분은 이번 마물 토벌대의 노고에 대한 치하였다.

특히 케인이 해독제를 만든 것에 대해서 장황하게 칭찬을 했다.

그가 해독제를 만들었기에 우리가 전투에서 수월하게 싸운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케인만 추켜세우는 것은 마땅찮았다.

잠시 후 듣기 싫었던 축사가 끝나자 곧바로 악기 연주가 흘러나왔다.

연주와 함께 귀족들이 홀을 가득 채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은 별로 추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춤을 추러 나간 부모님을 쳐다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좀 됐음에도 이제 나는 그가 어디에 있든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아까 잘못 본 것이 아닌지 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확실히 그의 눈빛에 짙은 슬픔이 보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혹시나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연회장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잠시 후 뒤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연회가 한창이어서 정원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인적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정원 안으로 더욱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쯤이면 됐다 싶어 멈춰 선 뒤 환하게 웃으며 뒤로 돌았다.

그러자 에이든이 나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이든!”

방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의 앞에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벌려 허리를 감으며 에이든의 품에 푹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나의 적극적인 스킨십에 그가 살짝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내 에이든의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그러다 아까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오늘 기분은 어때요?”

그리고 그에게 지금 기분에 대해 물었다.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네.”

“흐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더욱 더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

이미 내가 뭔가를 알아차리고서 묻는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에이든의 대답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에요? 내게 말해 줄 수 없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서운하기 보다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그의 허리와 등을 그가 했던 것처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벨.”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눈물을 흘리고 있진 않았지만 마치 그가 울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훑어 주었다.

그가 그런 내 손을 잡더니 자신의 뺨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가 결심했는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동생이…….”

동생이라면 그때 동굴에서 말했던 서커스단에서 헤어진 그 동생을 말하는 듯했다.

“동생이 왜요? 동생을 찾았어요?”

내가 말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동생을 찾았으면 이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겠지.

나는 설마 하면서도 제발 내가 상상한 그 일이 아니길 그 잠깐 사이에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언제나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동생이 죽었습니다.”

“도, 동생이 죽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믿을 수 없는 일에 나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놀란 나는 서둘러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그를 쳐다봤다.

‘아…….’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차오르는 슬픔을 이겨 낼 수 없는지, 그의 얼굴은 보고 있기만 해도 심장이 저리고 마음이 아파 왔다.

“이든…….”

나는 그의 원래 이름을 조심히 불렀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무슨 일인지 아는 것보다 그를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를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안는 모양새가 되어 그가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내 마음을 그가 느꼈는지 이내 머리 위에서 끅끅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가 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조차도 그의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듯 마음대로 속 시원히 울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욱더 꽉 끌어 안았다.

더 울어 버리라고, 마음 속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털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족을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아 원래 있던 가족이 없어진다는 감정은 잘 몰랐다.

그래서 아마 원래의 나라면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부모님이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이제는 알 수 있어서 내 눈에서도 그와 똑같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에이든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나도 얼른 눈물을 훔쳐 내곤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눈물로 인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눈물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눈가가 빨갰다.

물론 그가 보는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댄 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훑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내게 고정한 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다 울었어요?”

에이든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거짓말.”

어떻게 이 잠깐의 시간으로 큰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마 그는 내가 더 걱정할까 봐 일부러 참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거짓말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풀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 아닙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벨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으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그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 이 순간 너무나 안도가 됐다.

그렇게 또 잠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연회에 오기 전에 잠시 헤모아에 다녀왔습니다.”

“헤모아를요?”

“네, 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갔다 왔습니다.”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라면…….”

“북부로 떠나기 전에 수하 몇몇에게 동생의 얼굴을 그려서 주었습니다. 북부에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서커스단은 자주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닌지라 기회를 놓치면 안 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런데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수하 하나가 저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동생은 아니고 동생의 그림을 보고서 아는 척을 했다고 했습니다.”

에이든이 갑자기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건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그에게 진정하라며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헤모아에 데려다 놨다는 말에 헤모아로 가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구였나요?”

“이제는 저처럼 어른이 돼서 처음엔 몰라봤는데 자세히 보니 예전에 서커스단에 함께 있었던 아이였습니다.”

“정말요?”

“네, 그런데 그 애가 하는 말이…….”

더 이상 말을 하기 힘든지 에이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괜찮다고 하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나는 뭐라 더 말하는 대신 그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 주었다.

“그 애가 하는 말이 동생이 이미 예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이라면 언제요?”

“제가 서커스단을 떠난 후 다음 날이라고 했습니다.”

“떠난 후 다음 날이요?”

“……네, 어느 날 서커스단에 바이언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공작가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제겐 동생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공작이 제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무슨 제안을요?”

“서커스단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학대를 당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곳의 아이들은 항상 굶주려 있습니다. 곡예를 하려면 몸이 가벼워야 한다며 어른들이 식사를 제대로 챙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리안이나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서커스단에서 그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이언 공작은 저를 우선 데려가고 제가 말을 잘 들으면 동생도 공작가로 데리고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서 따라갔습니다. 서커스단에 계속 있는 것보단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리고 내가 잘하면 동생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래서 공작을 따라갔습니다.”

확실히 누구라도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어린아이였다면 재고 따질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자마자 목걸이를 찼습니다.”

“가자마자요?”

목걸이가 그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그리고 그때부터 공작이 목걸이로 저를 조종했고 잘못하면 체벌을 가했습니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은 더한 지옥이었습니다.”

“그럼 동생은…….”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동생을 데려오기는커녕 돌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동생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서커스단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믿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기 시작한 겁니다.”

“…….”

“그리고 오늘에서야 제가 한 행동들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든…….”

나는 조심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에이든이 슬픈 미소와 함께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아까 동생이 제가 서커스단을 떠난 후 다음 날 죽었다고 했죠?”

“네…….”

“그 애의 말로는 그 다음 날 검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커스단을 쳐들어왔고 그곳에 있던 이들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음을 알게 되자 나는 경악하여 에이든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서커스단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그날 막사 밖에서 놀려고 잠시 몰래 나갔다가 화를 피했다고 했습니다. 서커스단 막사로 다다른 순간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놀라, 숨어서 그 모든 참극을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짓을……!”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잔혹한 일에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차올랐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크게 말이 나왔을 텐데요. 사람들이 한순간에 한자리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죽인 후 일부러 불을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생도…….”

에이든이 더 이상 말을 잇기 힘든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며 그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아니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딱 한사람밖에 없었다.

바이언 공작.

그가 에이든을 데려간 후 모든 것을 묻어 버리기 위해 애꿎은 사람들까지 죽인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에이든이 진정했는지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렇지만 그런 그를 보는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너무 화가 나고 안쓰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아마도…….”

너무 끔찍하고 역겨워서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내 말을 알아차렸는지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커스단을 도륙한 이들의 검에는 한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니콘의 형상을 한 문장이었죠.”

유니콘의 형상이라면 역시 내가 생각한 이가 맞았다.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도대체 몇 명을 죽인 건가요? 정말 하…….”

아까 일었던 분노가 서서히 몸과 마음을 잠식하자 손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나는 에이든의 뺨에 댔던 손을 얼른 내려 주먹을 꽉 쥐려 했다.

그런데 에이든이 내 손을 잡아채는 게 더 빨랐다.

그러더니 내 손을 붙잡곤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진정해요.”

“어떻게 진정을, 하아…….”

당사자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모양새가 순간 부끄러워 나는 입을 다물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정해야 해.

진정하고 어떻게 할지 제대로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주범을 절대로 용서하면 안 된다.

세상에 모든 일을 까발리고 어떻게 해서든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나는 표정을 굳히고 에이든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용서할 생각 없습니다.”

다행이었다.

혹시나 에이든이 맘을 약하게 먹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저질렀던 모든 죄를 다 치르게 하겠어요.”

에이든의 일뿐만 아니라 나의 일,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이의 일까지.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서 끝까지 갈 것을 그의 앞에서 다짐했다.

나는 에이든을 다시 품에 가득 안았다.

그에게 내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의 마음이 단 일 초라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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