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2)

8

* * *

꿈인 것 같은데 기분이 무척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누굴까.’

누가 나를 이다지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는 걸까.

이런 느낌은 익숙지 않았다.

아니, 전혀 알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좋았다.

더 오래 쓰다듬어 줬으면 싶었다.

더 오래…….

그러나 야속하게도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꿈에서 깨기 싫은데 깨고 말았다.

‘안 돼.’

너무나 아쉬워서 억지로라도 꿈에 계속 머무르려는데 이상했다.

이젠 더 이상 꿈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만지던 손길 또한 꿈이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손길이 내 머리카락 주변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살포시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앞에는 아까 쓰러지기 직전과 마찬가지로 에이든이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깨어나자 본 그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담겨져 있었다.

“에이든……?”

“네, 접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내 나는 고개를 쭉 빼서 주변을 살폈다.

내 방이었다.

“메리는…….”

메리가 보이지 않아 그녀를 찾았다.

“메리는 어디 있죠?”

“제가 있겠다고 하고 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 그러면 제가 깨어날 때까지 에이든이 곁에 있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그가 계속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위를 가리켰다.

“싫습니까?”

바로 손을 거둘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에이든이 내게 물었다.

“싫은 건 아닌데…….”

이런 밀접한 접촉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도 모르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내가 어색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에이든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그가 내게서 멀어지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에게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전투는 어떻게 됐죠?”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 하는데 마무리를 잘했는지 궁금했다.

“피니아에 쫓겨 도망가고 난 이후로는 하거스가 더 이상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아, 다행이네요. 기사들은요? 우리의 피해는 얼마나 되나요?”

“아군의 큰 피해는 면했습니다. 벨리타 덕분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그럼에도 그 허망한 죽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몸은 어떻습니까?”

“음,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은 것 같아요.”

잠시 가만히 내 안의 힘을 느껴 보았다.

처음 같지는 않지만 반 이상은 회복이 된 듯했다.

“너무 무리했습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부러졌다.

“하지만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거예요.”

내 말에 에이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적당히 조절할게요. 제가 이 힘을 쓰는 게 처음이라 어느 정도로 조절해서 써야 하는지 잘 몰랐어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이러면 된 거죠?”

나는 그가 설교를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이제 보니 과보호 수준은 리안보다 에이든이 더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는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과하긴 하지만 그의 걱정과 보호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얼마나 지났죠?”

창밖을 쳐다보니 깜깜한 밤이었다.

하거스와의 전투도 늦은 밤이었는데 지금도 밤인 걸 보니…….

‘몇 시간 안 지난 건가? 설마 하루가 지났을 리는…….’

“이틀이 지났습니다.”

“네?”

너무 놀라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조심히…….”

“이틀이나 지났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은, 지금 경계는, 아, 괜찮다고 했죠.”

“네, 그러니 더 쉬어도 됩니다. 지금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있고 기사들도 휴식 중입니다.”

“그렇구나.”

나는 안도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에이든이 내가 뒤로 훌러덩 넘어가지 않도록 머리를 받쳐 주었다.

“고마워요.”

내 말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해독제는 어떻게 됐어요? 놈들이 또 쳐들어올 텐데 그때는 해독제가 반드시 필요해요.”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공작님께서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이제껏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긴 하죠. 제발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네,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해독제를 떠올리다 보니 전투 때 온몸이 굳었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금세…….’

아, 그러고 보니 그가 괜찮은지 물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몸 상태에 관해 입을 열었다.

“에이든은, 에이든은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항상 괜찮다고 하잖아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렇게 손가락 움직여 봐요.”

그의 말을 믿긴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는 말짱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항상 좋다, 괜찮다 하는 사람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손을 움직이라고 시켰다.

“이렇게 말입니까?”

에이든이 손가락을 하나둘씩 움직였다.

“움직이네요. 다행이에요.”

휴, 하며 숨을 내쉬는데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요?”

갑자기 웃는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흘겼다.

“우리가 이제 꽤 많이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 아닌데.”

순간 그를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잔뜩 굳히며 대답했다.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습니까?”

그러자 에이든의 표정과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나는 그를 조금 더 놀릴 심산으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제가 큰 착각을 했습니다. 벨리타가 제게 좀 다정하게 대해 줬다고 착각이나 하고-.”

“잠깐만요!”

나는 빠르게 그의 입을 막았다.

그에게서 더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여기 남자들은 농담을 잘 모르나?

리안도 그렇고 에이든도 그렇고 도대체가 내가 놀리려고 말을 던지면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면 다들 속을 정도로 내가 연기를 잘하는 건가?’

아무튼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고작 재미 때문에 농담을 던진 나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나는 곧장 그에게 사과했다.

“네?”

에이든이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장난이었어요.”

“장난이었다고요?”

“네…… 에이든이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꽤 친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장난도 치는 거죠.”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장난을 쳤던 상대는 리안뿐이었다.

리안은 진짜 벨리타를 몰랐기에 나는 리안에게 벨리타가 아닌 나 자체를 거리낌 없이 보여 줬다.

근데 지금 나는 리안을 대하는 것과 비슷하게 에이든을 대하고 있었다.

물론 리안과 에이든에 대한 감정은 확연하게 달랐지만 말이다.

‘어떻게 에이든과 이렇게 지낼 수 있게 된 거지?’

내 마음의 변화가 놀랍도록 신기했다.

“친해서 장난을 친 거였습니까?”

“어, 네, 맞아요. 친해서 그런 거예요.”

“친해서…….”

“네.”

‘친하다’라는 말에 꽂혔는지 그가 단어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제 착각이 아니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이 눈을 곱게 접으며 편안하게 웃음 지었다.

그 순간 가끔 그를 보면서 느꼈던 가슴의 울렁거림이 또 시작되었다.

* * *

다음 날, 하거스가 다시 성으로 쳐들어왔다.

아직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체액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해독제 없이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수호수인 피니아를 불러냈다.

케인은 지금 해독제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기에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반지를 갖고 있지 않아 철의 가문의 수호수를 불러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이든도 수호수만 불러내지 못할 뿐이지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철의 능력.

불의 가문인 내 몸에서 불이 솟아져 나오듯 철의 가문의 사람들에게선 철이 액체처럼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창, 검, 방패 등 어떤 모양이든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격의 효과는 국소적이었다.

반지가 없다면, 수호수를 불러낼 수 없다면 아무리 능력을 이용해 공격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넓은 범위의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반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지금은 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저번에 한번 경험을 해서 그런지 힘을 잘 조절할 수 있었다.

피니아가 다시 한번 붉은빛을 뽐내며 하거스들을 휩쓸었다.

놈들이 저번과 마찬가지로 뒤꽁무니를 빼며 물러났다.

마물들이 보이지 않자 감시를 위한 몇몇의 기사들만 놔두고 모두 철수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며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메리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지.”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대답했다.

“하지만…….”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해독제만 만들면 괜찮아질 거야.”

“아가씨…….”

그럼에도 메리의 얼굴엔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 자야겠다.”

“아, 네, 얼른 주무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시고요.”

“응, 알았어. 잘 자.”

“주무세요, 아가씨.”

메리가 방을 나가자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데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내 방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접니다, 아가씨.”

목소리의 주인은 리안이었다.

“어? 들어와.”

리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거기 의자에 앉아.”

내 말에 리안이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리안의 표정이 꽤 심각했다.

“너도 내가 걱정돼서 온 거야?”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나 그렇게 약하지 않다니까.”

“하지만 아가씨…….”

“메리에게도 말했지만 해독제가 만들어질 때까지만 버티며 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하아, 알겠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걱정하고 지키고 싶어 하듯이 나도 그런 거야. 나는 너희 모두와 함께 멀쩡히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어.”

“저도 그렇습니다.”

“응, 그러니까 내가 전에 했던 말 잊지 마.”

“네, 알겠습니다.”

“피곤하다. 리안도 피곤하지? 얼른 돌아가서 쉬어.”

“……네.”

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나갈 줄 알았던 리안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나는 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쉬세요, 아가씨.”

“응.”

그렇게 리안이 돌아가기 위해 방문을 막 열려던 때였다.

똑똑-.

‘또 누가 찾아온 거지?’

“문 좀 열어 줄래?”

리안이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에이든이 서 있었다.

“에이든?”

내가 그를 반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에이든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나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리안이 에이든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가 보겠습니다.”

“어? 응, 그래.”

그런데 리안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그 생각도 에이든이 방 안에 들어오자 머릿속에서 금세 지워졌다.

리안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는 에이든을 향해 히죽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나를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을 뽑자면 딱 이 셋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메리, 리안, 그리고……

이 남자였다.

“제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

“맞습니다. 몸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저 이번에는 안 쓰러졌다고요.”

“압니다. 그래도 지쳤지 않습니까. 그 힘을 쓸 때마다 몸과 정신이 얼마나 극한으로 몰리는지 알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진짜로 괜찮아요.”

걱정해 주는 마음도 좋았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조금 덜 걱정하기를 바랐다.

그 이후로 에이든과 대화를 계속했다.

대화의 대부분은 내 몸 상태에 대한 걱정이었다.

말과 달리 힘을 쓰고 난 후 피로가 몰려왔는데 그와 있으니 어쩐지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일을 위해서는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럼 쉬어요, 벨리타.”

“에이든도 잘 자요.”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에이든이 나가고 잠시 후 나는 귀신같이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도 회복을 위해서 쉬고 있는데 며칠 간격으로 쳐들어올 거라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하거스가 하루 만에 또 성을 공격했다.

“아가씨, 오늘은 절대 안 돼요!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다는 걸 잊지 마세요.”

메리가 내게 갑옷을 입히면서 신신당부했다.

“아가씨!”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메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메리,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아가씨……!”

“갈게.”

뒤에서 메리가 계속 나를 불렀지만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에서 놈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방어하는데 오늘은 유독 다른 날과 달랐다.

그들의 힘이 좀 더 세진 느낌이 들어서 나는 빠르게 그들을 훑었다.

‘뿔이 커.’

놈들의 머리에 달려 있는 뿔이 그전보다, 어제보다 훨씬 거대했다.

“공녀님!”

“저기 있는 놈들은 전에 쳐들어온 놈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질적으로 다르다니요?”

“뿔의 크기가 다른 놈들에 비해 최소 두 배 이상은 큰 것 같다.”

“네? 그러면……!”

“위축되지 마라.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에겐 공녀님과 수호수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싸우자!”

기사들이 모두 나와 수호수 피니아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피니아를 불러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혹여 불러내더라도 이전과 같은 폭발적인 힘은 불가능했다.

오늘 성을 침략한 놈들은 가뜩이나 어제보다 더 강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피니아 없이 상대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었다.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껏 싸웠다.

놈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면 베어 내고, 사다리를 올리면 죽을힘을 다해 밀어냈다.

그런데 점점 성벽 안으로 진입하는 하거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뿔의 크기가 그들의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공녀님!”

“으아아악!”

놈들에게 밀린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안 되겠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부족한 힘이나마 보태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반지의 힘을 끌어모아 피니아를 불러냈다.

피니아를 보자마자 기사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니아가 성벽에 있는 놈들부터 공격했다.

붉은 꼬리에 스친 놈들의 몸이 활활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기사들은 연신 환호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 광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내 안의 힘은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고 이를 대변하듯 피니아의 꼬리 또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피니아는 성벽까지 침범했던 하거스들만을 처치한 채 스르르 사라졌다.

나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녀님!”

성벽 너머 훨씬 많은 적들이 남아 있는데 갑자기 사라진 수호수에 기사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주변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지? 수호수는?”

“고, 공녀님! 수호수가 사라졌습니다……!”

“아가씨!”

그런 그들 사이에서 리안이 급박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안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나는 그에게 기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괜찮아.”

“아가씨!”

“괜찮다니까. 피니아는 더 이상 불러내지 못하겠지만 싸울 힘은 있어.”

그렇게 말하며 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네.”

리안이 마지못해 그리 대답하며 내 뒤를 따랐다.

그런데 기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나는 기사들의 사기를 다시 올리기 위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수호수를 불러낼 수 없다. 하지만 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수호수 없이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기사들이 저마다 힘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할 수 있다.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호수는 수호수일뿐, 승리의 씨앗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니 싸우자, 발테우스를 위하여.”

순간 정적이 일었다.

‘틀린 건가.’

나는 결국 내 동료들에게 더 이상 어떠한 힘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갑자기 리안이 내 말을 따라 하며 이제껏 듣지 못했던 커다란 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발테우스를 위하여!”

나는 그런 리안이 고마워 그를 쳐다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잠시 후 또 누군가가 나와 리안을 따라 똑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발테우스를 위하여!”

그리고 다른 기사들도 함께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발테우스를 위하여!”

“와아아아아!”

다행이었다.

기사들의 사기가 다시 솟아올랐다.

나는 내 곁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들을 빠르게 훑으며 눈빛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런 내 시선의 끝에 에이든이 걸렸다.

그가 나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도 따라 외쳤다.

“발테우스를 위하여! 가자!”

때마침 하거스가 다시 성벽 너머에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온 힘을 합쳐 하거스를 공격했다.

공격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뿔이 큰 놈들의 연이은 공격에 기사들의 수는 점점 적어졌고 살아 있는 이들은 지쳐 갔다.

“으아악!”

“캬악!”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만이 성에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불의 힘을 이용해 놈들을 태우고 태우고 또 태웠다.

‘하아…… 해독제는 아직인가.’

해독제라도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을 텐데 옆에서 힘없이 픽 쓰러지는 이들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 밤새 싸우고 또 싸웠다.

슬슬 동이 트려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거스는 달이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가장 강해진다고 했으니 해가 뜨면 물러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래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을 끌어모아 싸웠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어둠이 걷히고 햇빛이 온 세상을 밝혀도 놈들의 힘은 살짝 약해졌을 뿐 전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리 쪽이 점점 밀려난다는 걸 느꼈는지 더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아아아악!”

그때 내 옆에 있던 기사가 하거스에게 당했다.

그의 온몸에 체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너무 긴 싸움에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나도 모르게 닦아 주기 위해 손을 갖다 대려 했다.

“아가씨!”

그런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리안이 황급히 다가와 내 손목을 잡으며 저지했다.

“만지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정신 차려야 해.”

“아가씨께서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맞아, 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어.”

리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놈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엄청난 크기의 뿔을 달고 있는 하거스와 눈이 마주쳤다.

“캬악!”

놈이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저놈이다.’

저놈이 이 극악무도한 놈들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저 대장 놈을 해치워야 한다.

곧 내 머릿속은 온통 대장을 죽여야 한다는 말로 가득 찼다.

그래야 이 싸움이 끝날 것이라는 걸 강하게 직감했다.

놈도 그걸 느꼈는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손에 불을 일으키면서 놈에게 계속 공격을 해 댔다.

하지만 역시 보통의 하거스와는 차원이 다른지 놈은 내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그 대장 놈을 따라 수백의 하거스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놈들이 동시에 엄청나게 크게 도약하며 위로 껑충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위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불덩이를 최대한 크게 만들며 공격을 쏟아부었다.

‘맞았다!’

대장 놈이 드디어 내 공격을 맞고 잠시 주춤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놈들이 자신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뭐, 뭐야.’

공격하지 않고 왜?

하지만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놈들의 피가 공중에서 사방에 흩뿌려졌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저 피를 맞았다가는 독에 중독돼서 결국 죽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피할 곳이 없었다.

놈들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체액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다.

“아가씨!”

근처에 있던 리안이 나를 구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벨리타!”

에이든도 멀리서 나를 보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두 사람에게 지었다.

‘안녕.’

……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몸이 굳을 때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고 싶었다.

그때였다.

순간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돌풍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주위를 에워쌌다.

“으악, 뭐지?!”

“이게 어디서 오는 바람이지?”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이들도 이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날아갈 정도로 흉흉한 바람이 일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중 그 누구도 날아가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날아가지 않도록 피하며 그 주변만 날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우리를 지켜 주기라도 하듯 비껴간 바람이 하거스들을 향해 불어닥쳤다.

그러곤 바람이 놈들을 성벽 너머로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머리 위로 뿌려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놈들의 피 또한 우리에게 닿기 직전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바람이라니…….”

“바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이가 지그시 든 두 중년의 기사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바람은…… 진즉에……!”

바람은 성벽에 있던 마물들을 다 몰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잠시 뒤, 바람이 적들을 다 몰아내고 성벽에 아군들만 남아 있게 되자 바람의 기세 또한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하거스가 다가오지 못하게 강 위에는 강바람과 합쳐져 더 거대해진 바람이 계속 머물러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며 이 바람이 어디서 시작된 건지 추적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딘지 묘하게 눈에 익으면서도 낯선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은 리안의 것과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눈을 굴려 리안을 찾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리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딜 봐도 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리안!”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리안을 불렀다.

그러자…….

“네, 아가씨.”

눈앞에 있는 남자가 리안을 대신해 대답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목소리가 리안의 것보다 훨씬 낮았다.

“리안……?”

나는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리안을 다시 한번 불렀다.

“네, 아가씨, 접니다.”

허리까지 오는 긴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숲을 연상시키는 짙은 녹색의 눈동자로 나를 보며 또다시 대답했다.

“어떻게…….”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짧았던 머리는 길어지고, 소년이었던 남자는 갑자기 순식간에 어른이 됐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왜?

그리고 바람은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이 리안이라고 하는 남자를 쳐다봤다.

“진짜 리안 맞아……?”

“네, 맞습니다.”

주위에 있던 기사들도 리안을 보고는 술렁거렸다.

“저 남자가 아까 그 소년이라고?”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해?”

“말이 되는 소리야?”

“아까 그 바람은 도대체…… 뭐지?”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나 역시 궁금하기만 했다.

“벨리타!”

리안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에이든이 나를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그는 차마 내게 닿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괜찮아요, 에이든.”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싱긋 웃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어디 피가 묻었다거나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말짱해요. 여기, 그러니까 어, 리안…… 이 구해 준 것 같아요.”

너무나도 금세 훌쩍 커 버린 남자를 보며 리안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리안이라고요?”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렇…… 죠?”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반말이 아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리안이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가씨.”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걸 보면 리안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때 성벽 너머에서 마물들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악!”

“카아악!”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빠르게 벽 근처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봤다.

바람을 넘지 못하고 밀려난 놈들이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곤 이쪽을 흉악한 얼굴로 노려보더니 이내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날이 밝아서 힘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었다.

바람이 날아와 모두를 구하긴 했지만 그전에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전력을 잃었다.

여기서 더 싸우다간 정말로 전멸할 수도 있었다.

어서 서둘러서 전력을 가다듬고 힘을 보충하기 위해 쉬어야만 했다.

“일단 들어가죠. 들어가서 얘기해요.”

“알겠습니다.”

“저, 리안도 들어가…… 자.”

또 하마터면 존댓말을 할 뻔한 걸 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가까스로 바꿨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모두의 눈이 우리에게 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리안에게 향하고 있었다.

우선은 리안과 얘기를 나눠야 했다.

그러고 난 뒤 이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황태자의 시종이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 당장 뵙고 싶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황태자가 있는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지휘통제실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리안이 뒤에서 머뭇거렸다.

저런 모습을 보면 또 리안 같았다.

“리안, 아마 너 때문에 전하께서 부르신 걸 거야. 그러니 들어가자.”

나는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황태자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기는 한 것도 없는 주제에 피곤해하기는.’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나와서 검을 들고 싸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황실이 이 정도 취급받게 받지 못하는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왜 황실보다 세 공작가가 제국민에게 더 신망이 높은지 말이다.

‘저렇게 행동을 하니 아무도 존중을 해 주지 않지.’

나는 속으로 황태자와 황실에 대해 구시렁거렸다.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방금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살갑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황태자로서 황실을 대표해서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공작가와 달리 아무런 힘도 없어서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습니다.”

‘알긴 아는구나.’

기사들도 황족들과 똑같이 타고난 힘이라곤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서 싸웠다.

그런데 황태자라는 사람이 힘이 없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나는 전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내 동료들의 죽음을, 내 사람들의 죽음을 바로 코앞에서 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만 소중히 여기는 황태자가 나는 너무나 괘씸했다.

나와 에이든, 그리고 리안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우리를 부른 이유를 말했다.

“방금 전투에서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그 바람이 모두를 구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황태자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내 뒤쪽을 쳐다봤다.

“저 사람이 그 바람을 일으킨 자가 맞습니까?”

리안을 가리키는 거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리안이라고 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거였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에이든이 황태자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흐음, 바람이라…….”

황태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황태자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예전에 바람의 가문이 있었습니다.”

“바람의 가문이요?”

“공작가는 불의 가문과 철의 가문, 그리고 물의 가문 이렇게 세 가문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나와 에이든이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일입니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에, 바람의 가문이 멸문했고 그때 공작 부인과 그녀의 아들이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두 사람에 대한 흔적조차 찾지 못해서 다들 죽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가문이라니…….

“그런 큰일을 저희는 왜 모르는 거죠?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한 번은 들었을 텐데요.”

바람의 가문이 있었다면 분명 어디에서든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벨리타의 기억에서도 그리고 소설 속에서도 바람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못 들으셨을 겁니다. 바람의 가문에 대한 모든 것은 전 제국민에게 함구령이 내려졌으니까요.”

“함구령이요?”

“그렇습니다. 만약 바람의 가문에 대한 그 어떤 말이라도 발설 시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을 한다고 했으니, 그 누구도 말할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그 가문과 관련된 이가 살아 있었다니. 그렇다면 당신이 클레이튼 루덴입니까?”

클레이튼 루덴?

너무나 낯선 이름이었다.

이 남자가 리안이 아니라 클레이튼 루덴이라고?

나는 뒤돌아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그가 자신이 누군지 인정하자 기분이 묘했다.

마치 내가 거둔 아이가, 방금까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멀리 떠나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리안입니다.”

그런데 그가 서둘러서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은 여전히 자신은 내가 알던 리안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뜻은 루덴 가문을 되찾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되찾을 겁니다. 되찾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리안이자 클레이튼 루덴이라는 남자가 황태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되찾아야 할 이유라……. 하지만 수도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대는 반역자의 아들일 뿐입니다.”

‘뭐? 반역자?’

“그러니까 루덴 가문이 반역을 일으켜서 멸문을 당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며 곧바로 황태자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황실에 대한 반역으로 루덴 가문의 가주인 켄드릭 루덴과 가신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했던 모든 이들이 참수당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서 도망친 사람이 아까 말했듯이 공작 부인인 아리엘 루덴과 클레이튼 루덴 공자입니다.”

그런데 황태자의 태도가 꽤 특이했다.

반역죄를 지은 가문의 생존자를 앞에 둔 것치고 그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께서는 절대 반역을 저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기억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리안을 거뒀을 때 그는 분명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성장과 함께 기억을 되찾은 건가?

이미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뭐, 그건 이따가 물어보면 되니까.’

지금은 내가 모르는 얘기를 내뱉고 있는 두 남자의 대화에 집중을 해야 할 때였다.

“반역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증명할 수 있습니까?”

“…….”

황태자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후 생각을 끝냈는지 결심이 서린 목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반드시 증명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문을 되찾겠습니다.”

그런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런 말들을 하는 남자가 도저히 리안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리안이라고 했지만 내가 아는 리안은 아니었다.

이제 리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향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그 소년은 없어졌다.

충심을 보이며 한없이 진지했던 그 소년은 사라졌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냈다는 것이 순간 서글퍼져서 눈물이 핑 돌았다.

“벨리타?”

에이든이 나를 부르자 나는 감정을 재빨리 추스르고 그를 쳐다봤다.

“괜찮습니까?”

“……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까 어디 다치신 건 아닙니까?”

그때 줄곧 내 뒤에 서 있던 클레이튼이라는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폈다.

“괜찮아요. 말씀 계속 나누세요.”

이 사람은 리안이 아니니까 이제 말을 놓으면 안 된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내가 또 말을 높이자 리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세 분 다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시고 다음에 다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황태자가 우리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이만 가 보라며 재촉했다.

우리는 황태자에게 인사를 한 뒤 지휘통제실을 나왔다.

“아가씨…….”

나오자마자 그가 나를 불렀다.

“아가씨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세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 먼저 가서 쉬어요.”

“……네, 그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이든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클레이튼이라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제 방으로 가요.”

“……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걸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은 뒤로 우리는 서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내기엔 우리 둘 다 급격한 피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다음 가장 궁금한 것부터 그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죠?”

몇 번 말을 높였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가 그를 대하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지 그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저는 이제 아가씨가 아니에요. 아직은 당신의 지위가 완전하게 회복된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제 지위가 회복된다고 해도 아가씨는 영원히 저의 주인입니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주인이라뇨……!”

나는 불편한 얼굴로 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곳은 신분이 명확하게 나눠진 사회였다.

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 사이의 변화된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지금 상황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사정 때문에 그가 거리를 떠돌다 서커스단에 들어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그는 클레이튼 루덴이었다.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건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계속 부정을 해서 시간 낭비하느니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판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아가씨…… 제발…….”

내가 계속 단호하게 나가자 그가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호소했다.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한번은 확실히 말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나는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리안.”

그가 내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위치로 돌아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선택하고자 리안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완고하기만 하던 내가 리안이라고 부르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내가 너를 리안이라고 부르는 것도 말을 낮추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내 말에 리안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리안.”

“네, 아가씨.”

이제는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로 리안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하긴 리안은 언제나 그랬다.

나를 잘 따르고 내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할 정도였다.

나는 그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네 얘기를 듣고 싶어.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리안이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건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거야?”

“아니에요!”

그가 빠르게 부정했다.

“저는 아가씨께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알았으니 진정해. 그럼 차근차근 말해 줄래?”

드물게 흥분한 리안을 달래며 나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어 내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을 하기 시작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했을 때 아가씨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를 구할 힘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던 찰나 뭔가가 온몸에서 방출됐습니다. 곧 그것이 바람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때는 제 몸이 성장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황태자 전하와 대화하는 걸 보니 많은 걸 알고 있던데 그럼 지금까지 내게 거짓말을 한 거야?”

“전혀 아닙니다. 몸이 커지기 전까지는 정말로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힘이 발현되면서 잃었던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잃었던 기억?”

역시 아까 내가 추측한 게 맞았구나.

‘그럼 그렇지.’

리안이 나를 속인 건 아니라는 말에 어쩐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아가씨를 처음 만났던 그때 저는 정말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제가 누군지, 왜 거리를 떠돌고 있었는지,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는 모든 게 기억이 나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리안이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리안의 말을 들으며 생각해 봤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리안을 가둬 놨던 뭔가가 풀린 걸까?

나를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힘이 필요하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 그를 묶어 놨던 힘이 풀린 것인가?

‘아!’

아까 전에 분명 황태자가 루덴 가문이 멸문된 건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22년도 더 전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변한 리안의 외관을 유심히 살펴보니 확실히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아까 황태자 전하께서 네 가문의 일이 20년도 더 전의 일이라고 했잖아? 그럼 너는 지금 몇 살이야?”

이제 모든 기억을 되찾았으니 자신이 몇 살인지 분명 알 것이다.

“스물여덟입니다.”

“스물여덟?”

“네.”

스물여덟이라니, 나보다 무려 여섯 살이나 많잖아.

열여섯이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하루아침에, 아니 단 몇 초 사이에 스물여덟의 청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어른이 된 리안을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키는 원래도 나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컸는데 지금은 거기에 반 뼘 정도가 더 컸다.

아까 에이든과 나란히 서 있는 걸 봤는데 두 사람의 키가 비슷했다.

체격도, 테이블 위에 놓인 손도 훨씬 커져서 내가 알던 리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얼굴…….’

처음 만났을 때도 리안은 무척이나 예뻤다.

남자아이가 곱상하게 생겨서 리안이 크면 엄청난 미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내 믿음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잘생긴 미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회색빛이 도는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시간의 흐름을 확연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리안의 겉모습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동자였다.

녹음이 우거진 초록빛 숲과 같은, 나를 또렷이 쳐다보던 그 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치자 이제는 어디에도 없던 리안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듯했다.

“아가씨?”

“아, 미안. 잠시 생각을 하느라고.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울컥한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스물여덟이라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맞다, 그러니까 스물여덟이면 언제…….”

리안에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물으려다 순간 머뭇거렸다.

이 얘기를 리안에게 묻는 게 맞는 건지 망설여졌다.

멸문을 당했다는 걸 보면 과거의 일은 그에게 분명 상처일 텐데 그 상처를 괜히 다시 헤집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라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아가씨. 저는 아가씨께 무엇이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리안이 내 맘을 눈치채곤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네가 떠올리기 싫다면 나는 네게 묻지 않을 거야.”

어차피 바람의 힘 때문에 리안의 존재가 모두에게 드러났다.

그렇기에 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 이미 온 수도에 리안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때 아버지께 루덴 가문에 대해 물어보면 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으려고 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리고 직접 아가씨께 제 얘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내게 자신이 겪은 것들을 알려 주고 싶다는 리안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제가 네 살 때였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리안이 자의든 타의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리안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었다.

* * *

24년 전.

제국력 402년.

그날은 유난히 햇살이 반짝거리던 봄날이었다.

날이 좋아서 딱 밖에서 놀기 좋은 때였다.

그래서 발테우스의 네 공작가 중 하나인 바람의 가문, 루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자인 클레이튼 루덴은 반짝이는 태양빛을 받으며 정원에서 유모와 함께 놀고 있었다.

“공자님, 이거 보세요.”

“우아!”

유모가 여러 꽃잎을 클레이튼의 머리 위로 뿌려 주었다.

클레이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깔깔댔다.

그렇게 유모와 한창 놀고 있던 그때, 한 남자가 급박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곤 서둘러 말에서 내리더니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클레이튼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놀이에 집중했다.

그런데 잠시 후, 저택 밖으로 몇몇의 사람들이 나왔다.

그중에는 아까 들어갔던 남자와 클레이튼의 어머니인, 루덴 공작 부인도 있었다.

“클레이튼!”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머니이!”

클레이튼이 어머니를 부르며 짧은 다리로 달려간다고 갔지만 그녀가 그에게 다가온 것이 더 빨랐다.

“이리 온.”

어머니가 그를 품에 안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듯이 어머니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들어가자.”

“네에!”

클레이튼은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 주는 것이 좋아 품에 깊숙이 파고들며 까르르 웃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아까 말을 타고 온 남자가 곁으로 다가왔다.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셔야 합니다.”

“공작님께서는, 공작님께서는 정말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제 곧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칠 겁니다. 그러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런데 다른 이들도 피해야 하지 않겠나.”

“공자님이 살아 계셔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남자의 목소리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어쩌다 루덴 가문이 반역죄로 누명을…….”

‘반역?’

클레이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어린 클레이튼에게는 반역이라는 단어가 너무 어려웠다.

“어머니이, 바녁이 뭐예여?”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던 클레이튼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마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남자의 말에도 어머니의 발은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때 클레이튼의 눈에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그와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아…….”

머리 위에서 어머니의 물기 어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구나.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너희를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해서.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이나 가는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그때 맨 앞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는 클레이튼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저택의 집사였다.

“아닙니다, 마님. 저희는 주인님과 마님께 충분히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멀리 도망가십시오. 절대 잡히지 마십시오. 루덴 가문의 희망이자 훗날 다시 가문을 되찾을 분은 클레이튼 도련님뿐입니다.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십시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쾅쾅-!

저택 밖 저 멀리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실 기사단이 왔나 봅니다!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가십시오!”

“모두들 몸조심하게.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세.”

“네, 그러겠습니다.”

“마님, 가시죠!”

아까 말을 타고 왔던 남자가 어머니를 재촉했다.

바닥에 콕 박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어머니의 발이 떨어졌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안은 채 남자를 따라 미친 듯이 뛰었다.

“어머니이!”

몸이 흔들거려 불편했다.

그래서 그만 뛰라는 의미로 아무리 어머니를 불러도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침실에 도착했다.

“이곳의 비밀 통로는 두 분만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맞네, 나와 공작님을 제외하곤 누구도 열지 못하는 곳이지. 클레이튼을 잠시 받아 주게.”

어머니가 그를 남자에게 넘겼다.

“싫어어어!”

클레이튼은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게 무서워서 싫다고 소리를 질렀다.

“클레이튼.”

어머니가 눈을 맞대며 그를 불렀다.

“지금부터 절대 소리를 내지도, 울지도 말아야 한단다. 그래, 이건 놀이야. 새로운 놀이인데 누가 누가 더 입을 꾹 다물고 있는지 대결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우웅, 녜.”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싫다고 말하려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는데 용케 눈물을 흘리지는 않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그에게도 너무나 잘 보여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면 슬픈 어머니의 모습은 사라지고 항상 그를 보며 웃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착하다, 내 아들. 끝까지 잘하면 상을 줄게.”

“와아- 상 조아. 흐업!”

상을 준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소리를 내다 작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니가 그런 그를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마님……!”

남자가 다시 어머니를 재촉하자 어머니가 침대 근처로 갔다.

그러곤 침대 근처에서 뭘 만진 다음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침대를 밀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남자가 클레이튼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어머니의 옆에서 함께 침대를 밀었다.

침대가 점점 밀려나자 바닥이 드러났다.

그다음 어머니는 바닥을 막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그러자 얼마 후 갑자기 바닥의 문이 열리고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얼른 들어가십시오.”

그런데 밖이 엄청나게 소란스러웠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클레이튼의 귓가에 꽂혔다.

“어머니이…….”

말을 하지 않기로 했음에도 그 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클레이튼은 불안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안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가십시오!”

“자네는……!”

“두 분이 저택을 무사히 빠져나가시게 하는 것이 공작님께서 제게 내리신 마지막 임무입니다. 그러니 어서 가십시오!”

남자가 클레이튼을 번쩍 들은 뒤 어머니의 품에 그를 안겼다.

어머니가 그를 안은 뒤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이 있어서 내려가기는 수월했다.

“공작 부인, 잠시만요.”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를 남자가 불렀다.

“받으십시오. 공작님께서 마님께 반드시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건 반지…….”

“네, 그리고 부디-.”

“으으악! 안 돼!”

이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도련님, 루덴 가문을 반드시 되찾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의 수모와 모욕을 되갚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남자는 자신의 말만 빠르게 내뱉은 뒤 바로 바닥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사방이 캄캄했다.

어머니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머-.”

“쉿!”

어머니가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조용히. 알겠지? 응?”

클레이튼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닫힌 문 위에서 뭔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침대를 제자리로 갖다 놓는 소리였다.

쿵-!

그다음은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그다음은 사람들의 고함 소리, 그다음은 비명 소리, 그다음은 여럿이 몰려드는 발소리, 그다음은…….

곧 주변이 고요해졌다.

“…….”

“…….”

클레이튼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절대 입을 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떼 한 번 쓰지 않고 조용히 어머니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가자, 아가.”

여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어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그리 말하며 발을 뗐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공간의 생김새가 얼추 보였다.

어머니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길이 나 있는 방향으로 클레이튼을 안고 서둘러서 걸어갔다.

한 십여 분 정도를 걷자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어머니가 그를 내려놓고 아까처럼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뭔가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문을 열었다.

밖은 이미 해가 진 것인지 방금까지 있던 공간처럼 깜깜했다.

그들을 추격하는 눈을 피해 움직이기엔 적격이었다.

그때까지도 클레이튼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대견했는지 어머니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밖으로 나왔다.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숲인 듯했다.

그런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어스름히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힘들지도 않은지 아까부터 안고 있는 그를 내려놓지 않았다.

아니다.

분명 힘들 것이다.

왜냐면 어머니의 숨소리가 무척이나 거칠었기 때문이다.

클레이튼이 어머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다음 내려 달라는 행동과 함께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걸어가겠다는 의미였다.

어머니가 잠시 그를 응시한 뒤 바닥에 내려 주더니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해 주었다.

“고마워, 내 아기. 가자, 클레이튼.”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클레이튼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두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절대 잡히지 않을 곳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숲속에서 숨어 지낸 지 며칠이 지났다.

갑자기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클레이튼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어머니를 따라 어딘가로 갔다.

도착한 곳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는 광장이었다.

그때 두 사람의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래?”

“저기 붙어 있는 벽보를 보니 반역죄라는데?”

“루덴 가문이 반역을?”

“그렇다네.”

“어이구야, 이게 무슨…….”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게지.”

“아무렴. 그렇게 다 가지고도 남의 것을 욕심내니 결국 저 모양 저 꼴이지.”

그들에게는 한 가문의 몰락이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뿐 어떤 연민도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반역이 아니야.”

어머니가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덴 가문은, 공작님께서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고…….”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억울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되뇌었다.

“어머니…….”

클레이튼은 조용히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정신이 번쩍 든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 아가…… 미안하구나. 네게 너무나 미안해.”

그러곤 그를 품에 가득 안았다.

“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누명을 벗을 것이다. 오늘의 이 수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서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둥둥-!

어머니의 품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둥-!

“400년의 위세 있던 가문도 이렇게 가는구나.”

“아무렴, 영원한 건 없지.”

“그런데 저기 공작님 목에 한 거 보이지? 저게 그거인가?”

“맞는 거 같네. 들리는 말로는 저것이 공작가의 힘을 제어한다더군.”

“저것 때문에 루덴 공작님께서 힘을 쓰질 못하시는 거구만. 그런데 저것을 철의 가문에서 만들었다고?”

“그렇다네.”

“하긴, 이번 반역의 무리들을 잡는 데에도 철의 가문이 큰일을 했다고 하던데.”

“이제는 바이언의 시대인 것인가.”

“네 공작가는 손이 귀하지 않던가. 그런데 넷 중 유일하게 곧 두 번째 아기님이 태어나시니 사실상 네 가문 중 가장 우위를 점하는 거지.”

“물의 가문은 작년에 공자님께서 태어나셨지?”

“그렇지. 불의 가문은 아직이고.”

“아기님들이 많이 태어나셔야 발테우스를 지켜 주실 터인데.”

“그렇지. 우리는 다 그분들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게지.”

“요 몇 년간 마물들이 잠잠하더니……. 그런데 루덴 공작님이 그 흉측한 마물을 이용해서 반역을 꾀했다는 거지?”

“마물을 등에 업고 황제가 되려고 했다더군.”

“허허, 거 참.”

둥둥-!

북이 드디어 세 번째 울리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다.

클레이튼은 어머니의 품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 또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서 광장을 떠나 슬금슬금 숲으로 숨어 들었다.

그 후 그들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추적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어머니는 점점 나이가 들어갔지만 클레이튼은 여전히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클레이튼, 자, 약 먹을 시간이야.”

클레이튼은 어머니의 손에서 물병을 받아 그 안의 내용물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

그가 지금 마신 것은 그의 신체의 성장을 늦춰 주는 물약이었다.

물약으로 인해 그 후로 22년이 지났지만 클레이튼은 아직 열두 살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물의 가문의 방계 출신이었다.

그래서 특별한 물약을 제조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다만 직계 혈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계만큼 강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늘은 밤에 잠시 어디를 다녀올 거야. 그러니 문 잘 잠그고 있어야 해. 알았지?”

“네, 어머니.”

시간이 지나 밤이 되었다.

아까 어머니의 당부대로 클레이튼은 문을 잠그고 혼자서 이불 속에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 가문에 대한 모든 것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가 단 하나뿐인 바람의 가문의 후계자임을 절대 잊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가문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라며 그때까지 학문도 무예도 게을리하지 않게 했다.

사실 클레이튼은 천재였다.

그는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22년 전, 가문이 몰락했을 때의 날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금방 돌아온다던 어머니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를 가신 거지?’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어머니는 어딜 갔다 온다고 하면 꼭 제시간에 돌아오셨다.

이렇게 늦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그리고 문을 잘 닫고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을 어기고 집 밖으로 나와 서성였다.

깊은 숲속의 외딴 집 주변에서는 웬만해선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았다.

그저 풀벌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나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 짐승들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만 들릴 뿐이지 사람의 말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귓가에 꽂혔던 걸지도 몰랐다.

근처는 아닌데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클레이튼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아!”

“잡아!”

‘잡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여럿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클레이튼은 소리가 나는 지점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러자 아래서 어머니가 몇십 명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머니를 부르려다 순간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가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그에게 어딘가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게 어딘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심히 들키지 않게 어머니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얼마 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 작은 동굴이 보였다.

이곳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은신처로 만든 곳이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서 웬만한 성인 남자는 들어올 수도 없었다.

체구가 작은 어머니나 아이인 그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클레이튼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어머니는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머니…….’

밖으로 다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는데 동굴 근처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를 부르자 어머니가 그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빠르게 동굴로 들어왔다.

“클레이튼, 괜찮니?”

그녀가 그를 품에 꽉 껴안으며 물었다.

“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는요?”

“나도 괜찮단다.”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 누군데 어머니를 쫓고 있는 건가요?”

“잠잠해지면 네게 다 말해 줄 테니 지금은 이곳에 숨어 있자.”

“네, 어머니.”

그렇게 두 사람은 동굴 안에서 밖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를 쫓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있지?”

“어디로 간 거야?”

“분명 여기로 올라갔는데!”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진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너무 어두워 작은 동굴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횃불에 비친 얼굴을 보며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리자마자 클레이튼은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그가 무슨 의미로 쳐다보는지 안다는 듯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왜…….’

낯익은 얼굴의 남자는 22년 전 저택의 사용인들을 대표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던 남자였다.

“에이, 젠장!”

“잡을 수 있었는데.”

“더 샅샅이 뒤져 보자고. 반드시 찾아야 해. 반드시 공작님께 데려가야만 해.”

“가자!”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공작님?’

누구를 말하는 걸까.

세 공작 중 누구를 가리키는 거지?

의문을 가득 품은 채 그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와중 어머니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속에서 우러나온 깊은 좌절감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어머니…….”

클레이튼이 그녀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디자.”

“……네.”

그렇게 그들은 밤새 동굴 안에 숨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는지 안으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낮에 움직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나가기 전에 잠시 밖을 유심히 살폈다.

추격자는 어제 이미 멀리 갔는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하며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잠시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구나.”

클레이튼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이 산속을 수색했다면 그 집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죠?”

“우선은 예전에 살던 곳으로 가자.”

“예전이면…… 네, 그렇게 해요.”

그들은 몇 년을 주기로 집을 옮겨 다녔다.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찾던 이들에게 위치를 들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그전의 집들은 안전할 것이다.

“가자, 클레이튼. 물건들은 나중에 잠잠해지면 찾으러 오는 거로 하자꾸나.”

“네, 어머니.”

중요한 물건들을 집 안에 두지 않은 것도 현명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도망치던 그날 가지고 온 물건들은 항상 거주지에서 떨어진, 둘만 아는 곳에 묻어 두었다.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며 산길을 빠르게 걸어 올라갔다.

아랫길로 가는 것보다 산을 타고 넘는 것이 들키지 않고 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둠에 숨어 빠르게 걸어가고 있던 때였다.

이미 이곳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의 발소리가 아닌 또 다른 이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이튼은 순간적으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뒤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렇게 앞만 보며 미친 듯이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찾았다!”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산속에서 메아리쳤다.

“어디야?”

“이쪽이야!”

추격자들이 두 사람과의 간격을 서서히 좁히기 시작했다.

클레이튼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더 빨리 내달렸다.

하지만 그의 체력을 어머니가 따라 주지 못했다.

“어머니!”

어머니의 속도가 더뎌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저들에게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가자. 헉, 갈 수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하지만 그가 보기엔 어머니는 이미 한계였다.

평지도 아닌 오르막길을 계속 뛰었기 때문에 숨이 벅찬 것이 확연히 보였다.

“어머니…….”

“가자, 얼른. 헉헉.”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앞장서서 어머니를 이끌었다.

그런데 신은 더 이상 그들의 편이 아니었나 보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와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또한 비가 오면 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산길을 오르기가 더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어머니의 발이 미끄러졌다.

“으윽…….”

어딜 다친 건지 어머니가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어머니!”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

클레이튼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승냥이 같은 인간들이 그들에게로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클레이튼! 가!”

그때 어머니가 주저앉은 채 그에게 먼저 가라며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두고 절대 혼자 갈 수 없었다.

“어머니, 업히세요.”

“뭐?”

“얼른요. 업히세요!”

어머니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아들의 의지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어머니를 업고 일어나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간 어머니의 지도 아래 체력 단련을 한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이토록 작은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을 홀로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클레이튼은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들 여유가 없었다.

클레이튼은 어머니와 함께 다시 산을 올라탔다.

“클레이튼.”

“어머니, 저와 어머니는 지금까지 함께였으니 끝까지 함께할 거예요.”

“미안하다, 내 아들.”

클레이튼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어머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에 그는 빠르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할 체력을 산을 오르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성인 남자들을 클레이튼이, 그것도 사람을 등에 업은 채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그들의 모습이 온전하게 다 보일 정도로 가까이 추격해 왔다.

“이번에는 절대 안 놓친다!”

“잡아!”

추격자들이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을 위협했다.

“클레이튼, 나를 놓고 가!”

“싫어요!”

“클레이튼! 제발 너라도 도망가야 해!”

“저는! 저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등에 업힌 어머니가 계속 자신을 놓고 가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어머니를 놓고 가든, 저들에게 잡히든 둘 다 그에게는 죽음을 의미했다.

어머니 없이는 살 의지도 희망도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은 다 어머니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두고 가라니!

차라리 잡혀서 함께 죽는 것이 나았다.

“클레이튼……!”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살아남았을 때부터 클레이튼이 누구인지 매일매일 상기시켜 줬다.

루덴 가문의 유일한 희망, 루덴 가문이 다시 일어서는 그날까지 그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저 하나 살자고 어머니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함께 도망치기 위해 온 힘을 다 짜내 내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래로 강이 흐르는 막다른 절벽에 다다랐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알아채고는 방향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코앞까지 추격자가 오고 있었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었다.

“클레이튼, 내려 다오.”

“네?”

“얼른!”

그는 단호한 목소리에 놀라 어머니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놨다.

그녀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클레이튼의 앞에 섰다.

맞은편에서 보면 그가 어머니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때마침 추격자들이 두 사람을 찾아내 몇 걸음 앞에 멈춰 섰다.

“드디어 찾았군요.”

“자네, 자네를 믿었는데 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루덴 가문을 저버릴 수 있어!”

22년 전의 기억과는 다르게 확연히 나이가 들어 버린 집사에게 어머니가 노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마님,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22년 전 충심을 보여 줬던 그 집사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저 남자의 탓만은 아니었다.

그걸 어머니도 아는지 목소리가 금세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내게 어떻게…….”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루덴 가문이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을 저는 이제 놓았습니다.”

배신자임에도 그의 목소리에서는 슬픔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마님께서도 포기하십시오.”

22년이나 기다렸다.

무려 22년이나 억울함과 분통을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하라는 말에 클레이튼은 울컥했다.

그래서 냅다 소리 지르려는 순간 어머니가 좀 더 빨랐다.

“싫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련하십니다. 그런데 공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집사가 그제야 클레이튼에 대해 알아차렸다.

“저 뒤에 있는 아이는 누구죠?”

하지만 집사는 그가 클레이튼인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와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눈치챌 게 분명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클레이튼을 품에 감싸 안았다.

“하나, 둘, 셋 하면 저기 절벽 아래로 뛰는 거야. 알았지?”

클레이튼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가 느낄 공포감과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들에게 잡히면 안 돼. 저들에게 잡히면…… 그래, 차라리 뛰어내리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비장했다.

클레이튼 역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어머니와 같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대체 그 아이는 누굽니까. 제게 넘기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집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집사에게 보이지 않게 로브로 그의 얼굴을 꼼꼼히 감쌌다.

“가자. 하나, 둘.”

클레이튼은 눈을 꼭 감았다.

“셋!”

그리고 어머니가 셋을 외치는 순간 눈을 뜨며 그녀와 함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뭐, 뭐야!”

“안 돼!”

절벽 위에서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빗소리에 섞여서 점점 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풍덩-!

칠흑같이 어두운 강이 두 사람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기 때문에 강의 수위는 꽤 높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붙들고 놓지 않았다.

“어머니!”

“클레이튼!”

죽지 않기 위해서 서로를 부르며 계속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엄청나게 빠른 강물의 속도에 몸이 끝을 모르고 떠내려갔다.

너무 많은 물을 먹었고,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이후 죽지 않고 깨어났을 때는 서커스단의 막사 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인한 기억 상실증이었다.

그다음은 벨리타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를 구원해 준 한 줄기 빛과 같은 그녀를 만나고, 그는 그녀의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2년 만에 기억을 되찾았다.

* * *

“그럼 그때, 어머니는…….”

나는 조심스럽게 리안에게 물었다.

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제가 깨어난 뒤로는 뵙지 못했습니다.”

“아…….”

안타까움에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기억나니 찾을 겁니다. 반드시 어머니를 찾을 겁니다.”

“그래, 나도 도와줄게. 꼭 찾자.”

“감사합니다, 아가씨.”

서글프게 미소 짓는 리안을 보자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간신히 닿기 전에 거두었다.

“아, 미안.”

나는 황급히 그에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원래 제게 잘 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가 제 머리를 내게 갖다 댔다.

“하지만 이제는…….”

나는 뒤로 살짝 물러서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리안이 굳은 얼굴로 머리를 바로 했다.

“아가씨…….”

“음, 기억이 다 돌아왔으니 이제 스물여덟이잖아. 그리고 가문이 복권되면 루덴 공작가의 공자, 아니지, 이젠 공작이 될 거야. 그러니 우리 지금부터 호칭을 제대로 하자.”

“…….”

“아직은 어색하고 힘들 수도 있어. 그런데 원래 그랬어야 하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드디어 대화가 통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헤이츠 가문의 공녀 벨리타 헤이츠입니다.”

리안, 아니 클레이튼이 그에게 내민 손을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내 전과 달리 확연히 커진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저는 클레이튼 루덴입니다.”

“반가워요.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 * *

우리는 그 이후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해가 하늘 높이 떴다.

잠을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겨서인지 피곤했음에도 정신은 또렷했다.

‘리안.’

아직은 클레이튼이라는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았지만 적응해야 한다.

그는 이제 리안이 아니라 클레이튼 루덴이니까 말이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리안은 사리지지 않았다.

리안은 클레이튼의 안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슬퍼하지 않아도 돼.’

그는 클레이튼이지만 또 여전히 리안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그간 전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바람의 가문.

클레이튼 루덴.

반역죄.

공작 부인의 실종.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아니, 근데 진짜 웃기네.’

갑자기 원작의 제목이 떠올라 열이 확 뻗쳐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공작 가문이 네 개가 있는데 왜 제목이 ‘세 가문의 사랑과 전쟁’이냐고.

“하……!”

진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읽었던 소설에 빙의를 했다 뿐이지 내가 원작을 안다고 해서 도움을 받은 건 하나도 없었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헤어졌지, 세 가문이 아니라 네 가문이라지.

‘설마 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냐, 아닐 거야.’

그리고 어차피 시기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원작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원작을 떠올리며 뭔가를 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맞지 않는다고 열을 내는 것 또한 내게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원작에 대한 생각을 깔끔하게 털어 버렸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슬슬 잠이 몰려왔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다시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눈을 떠 창문을 바라보니 달빛이 어스름히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설마 또 하루가 지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오래 자진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메리를 불러 물어보려다가 벌써 잠들었을 거라 생각해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봤다.

고요한 걸 보니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듯했다.

‘오늘도 놈들이 쳐들어왔다면…….’

생각하기도 싫어서 머릿속에서 하거스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래도 이제 리안이 있으니 좀 더 수월하게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리안의 말로는 반지를 어디에다 숨겨 뒀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지금 그에겐 반지가 없다는 것이고 곧 수호수를 불러낼 수 없다는 뜻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거스가 연달아 쳐들어오지 않고, 내가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전에 케인이 해독제를 만든다면…….

나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가 바로 일어났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밤 산책을 나갈 생각이었다.

끼익-.

성안이 너무나 조용해서 문을 여는 소리가 크게 들려 순간 살짝 놀랐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성안을 거닐며 차가운 바람을 쐬니 어쩐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도 생각한 거지만 반역자를 앞에 둔 황태자의 반응이 꽤 특이했다.

어쨌든 루덴 가문은 아직 누명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반역 가문이었다.

근데 아까 클레이튼에게 되찾을 수 있냐고, 확신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뭔가를 아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황태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때, 놀랍게도 진짜로 내 앞에 황태자가 나타났다.

“헤이츠 공녀.”

“황태자 전하?”

아니, 아니지.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황태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발테우스의 빛나는 작은 태양이자 고귀하신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나세요, 공녀.”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숙였던 허리를 펴며 황태자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제가 곁에 온 것도 모르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터지다 보니 생각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네. 저, 근데…….”

이왕 눈앞에 나타난 거 궁금한 거나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곧바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에 대해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한 가지요?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해 드리지요.”

황태자가 흔쾌히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그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잠시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전하께서는 루덴 가문이 반역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흐음, 공녀께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하의 반응이 클레이튼 루덴 공자를 반역자의 아들로 대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까?”

“네, 만약 반역이 확실한다면 그가 루덴 가문의 공자라는 걸 알았을 때 바로 감옥에 가뒀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참형에 처하겠지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반역자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

“그리고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닙니까. 공작 가문의 힘은 이럴 때 가장 필요하지요. 공녀께서도 아시다시피 한 제국의 황실이 공작 가문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황태자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덴 가문에 대한 것은 수도에 돌아가면 황제 폐하께서 처리하실 겁니다. 저는 북부가 마물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할 뿐입니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지금 이곳은 전쟁터였고 힘이 있는 이가 어느 때보다 가장 절실했다.

“자,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네, 없습니다.”

사실 궁금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케인과 무슨 거래를 했길래 자꾸 내 앞에 케인을 데려다 놓느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쟁터에서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인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무시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됐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네, 저 또한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공녀께서는 루덴 공자를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루덴 공자는 제가 2년 전에 여행을 떠났을 때 한 마을에서 만났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모습이 아닌 어린아이였습니다. 서커스단에서 학대를 받고 있어서 어쩌다가 아이를 구하게 됐고 그 인연으로 제가 거두게 됐습니다.”

“신기한 인연이군요.”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헤이츠 가문…… 그래요, 어쩌면 헤이츠 가문과 연이 닿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군요.”

황태자가 뜻 모를 소리를 하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죠?”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에 돌아가면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그는 그렇게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내게 말해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황태자는 춥겠지만 나는 별로 춥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황태자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공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왜 맥시어스 공작이 공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

뭐라는 거야.

나를 평가하는 듯한 말에 순간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황태자의 앞에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 순 없기에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황태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혹시나 황태자가 케인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전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오지 않는 잠을 간신히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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