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7/12)

7

* * *

아델라를 만나고 온 후 나는 다시 조사단의 아지트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서 온 세상이 깜깜해진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이곳을 지키는 이 몇몇을 빼고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변이 조용했다.

나는 지하 감옥 근처에서 대기했다.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은 일부러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입구에 기사들이 서 있으면 멀리서 보고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가서 일부러 들쑤셔 놨기 때문에 만약 아델라가 한 짓이 맞는다면 그녀는 분명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중이었다.

한 인영이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만 봐도 상대는 가녀린 여자였다.

‘왔구나.’

오게 하기 위해 그랬음에도 내심 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뒤엉켜 착잡함이 밀려왔다.

그녀가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심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재빨리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수면향을 피웠구나.’

향이 가시길 얼마간 기다렸다 코와 입을 단단히 막은 뒤 안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감옥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수면향에 당한 듯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네 목에 있는 것이 진정으로 터지길 바라는 것이구나.”

“아니,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네, 저는 공녀님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네가 내일 모든 걸 다 실토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닙니다, 공녀님! 공녀님께서 시키신 일은 절대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맞습니다.”

내가 갑자기 중간에 끼어들며 대신대답하자 두 사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고개를 돌린 탓인지 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의 모자가 벗겨지면서 횃불 아래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델라.”

“고, 공녀님……!”

오웬 에스트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벨리타.”

그런 반면 아델라의 표정은 놀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이 예전에 내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누이는 몸이 약한 만큼 마음도 약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아니, 그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아델라는, 그의 누이는 몸은 약할지언정 누구보다도 단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내게 모든 것을 들키고도 저렇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올라가서 얘기할까요?”

“좋아요.”

앞으로 나눌 이야기가 이곳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둘만 있을 곳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지하 감옥을 나와 저택의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원 깊숙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서로를 마주했다.

“제가 오늘 방문했을 때 아델라를 떠본다는 걸 눈치챈 건가요? 저를 보곤 너무 태연해 보여서요.”

“아뇨, 몰랐어요. 그저 공녀의 목소리를 듣고 올 게 왔다는 생각을 했죠.”

왠지 그녀가 무척 낯설었다.

먼저 이름을 부르자고 했던 사람이 이제 내게 공녀라고 부르고 있었다.

병약하고 안쓰럽기만 하던 그녀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당당하고 고고한 태도에, 나는 순간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했다.

“왜 그랬어요?”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내가 정말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제게 왜 그랬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 줬다.

“이유를 정말 몰라요?”

이유를 물어본 건 난데 오히려 그녀가 내게 따져 묻고 있었다.

“맥시어스 공작님 때문인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분이 제게 어떤 마음을 가지시든 저와 상관없다고요.”

“네, 하지만 상관없지는 않죠.”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케인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나와는 절대로 엮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결국 씨알도 안 먹힌 소리였다.

“제게 향하던 공작님의 관심과 애정을 모두 가져가 버렸으니까요.”

하 참, 어이가 없었다.

“그건 제가 원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화가 나요. 기분이 더러워요. 분해요.”

“네?”

“공녀의 그 무심한 태도가 더 역겹다고요.”

생각도 못한 말에 순간 기분이 멍해졌다.

지금 내게 역겹다고 한 게 아델라가 맞나?

“내가 원하는 걸 모두 다 갖고도 전혀 기쁘지 않아 하는 태도가, 여유로운 모습이 구역질 나요.”

“그래서 그랬어요?”

“…….”

“친한 척을 해서 안심하게 만들어 놓고 뒤통수를 치려고 한 거예요?”

“맞아요. 그런데 결국 실패했네요.”

“왜 이렇게 뻔뻔해요? 왜 제게 미안해하지 않는 거죠? 지금 아델라가 내게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저를 모함해서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잖아요.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 거예요?”

“그럼 제게 돌려줘요.”

“뭐라고요?”

“제게 모든 걸 돌려 달라고요. 맥시어스 공작님의 사랑도, 에이든의 애정과 관심도 모두 다 돌려주세요. 그러면 공녀에게 무릎 꿇고 사과할게요.”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 없는 걸 달라고 하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사람을 믿은 대가가 이거였나?

차라리 가깝게 지내지 말걸, 과거의 바보 같은 내 결정에 후회만 밀려왔다.

“정말 잘 지내려고 했는데, 남자 때문에 처음부터 어긋난 사이를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리석네요.”

그래, 그녀의 말대로 너무나 어리석었다.

“에이든도 아나요?”

아델라가 순간 조소를 터트렸다.

“그 애가 알고 있었다면 가만히 있었을까요? 저는 그 애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봤어요. 그래서 에이든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단번에 알았죠.”

“…….”

“그런데 그거 알아요? 에이든이 공녀에게 마음이 있든 없든 그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애는 우리 바이언가에 종속됐으니까 말이에요.”

“가족이면서 종속됐다느니 그런 말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어떻게 동생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비록 내게 형제는 없지만 그녀의 말이 너무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

그런데 아델라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러면서 계속 혼잣말을 해 대더니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올렸다.

그리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내일 모든 걸 다 밝히겠어요.”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바로 선전포고했다.

“증거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했다는 걸 밝히겠다고요?”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어요.”

“제 호위 기사요? 저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요. 특히 저에 관해서는.”

“아뇨, 제가 하게 만들 거예요.”

“어떻게요?”

“그걸 제가 왜 말해야 하죠?”

“방법이 없는데 있다고 하니 안쓰러워서요. 그에 반해 제겐 공녀가 범인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차고 넘치죠.”

얘, 여주 아니었어?

나는 순간 정말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델라 바이언이 맞는지 다시 한번 의심이 갔다.

이 소설 도대체 뭐야.

왜 남주고 여주고 다 바뀌어서 나를 이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지?

하지만 질 순 없었다.

‘정신 바짝 차려.’

그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절대 이대로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일 봐야 알겠죠. 정말 내게 아무것도 없는지는 말이에요.”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를 쳐다봤다.

그러자 태연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일었다.

정말 아주 살짝 일어난 균열이기에 간신히 그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것 같네요.”

“그렇겠죠.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아델라가 정원을 나가고 얼마 뒤에 나도 저택의 정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 때문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곧 다시 만날 그녀와의 전면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일이 터져 버렸다.

북쪽 경계에 마물들이 나타나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습격한 것이다.

제국은 급하게 토벌대를 꾸렸다.

이번 토벌에는 아버지가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불편한 점은 없도록 가시는 날까지 곁에서 챙겨 드리고자 했다.

그런데 의욕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출정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께서 훈련 중에 사고를 당하시고 말았다.

“아버지!”

나는 부모님의 침실로 들어가 아버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아버지의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아버지?”

“그러니 적당히 좀 하라니까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됐잖아요, 여보.”

“크흠!”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헛기침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토벌 도중 예전 같은 힘이 나오지 않아 혹시라도 기사들이 가문을 깔볼까 봐 밤에 훈련을 하시다가 어깨에 무리가 가서 근육이 파열됐다고 하더구나.”

참 어떻게 보면 모든 일에 열정적인 아버지다웠다.

“그래도 출전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으로 어떻게 가요.”

“갈 수 있소.”

어머니의 설득에도 아버지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아버지, 지금 이 상태로는 말도 제대로 못 타실 거예요.”

그래서 나도 가세하여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크흠. 너는 마차 사건도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가야 한다.”

“마차 사건은 돌아와서 다시 수사하면 돼요. 아버지께서 이런 몸으로 출정을 하신다는데 어떤 자식이 가만히 있겠어요? 제가 갈게요, 아버지.”

“벨리타…….”

어머니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머니, 걱정하시 마세요. 저는 두 분의 딸이잖아요. 북쪽에 가서도 잘 해낼 수 있어요.”

“여보, 그렇게 해요. 저도 웬만해선 벨리타가 가지 않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갈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누가 가야 한다면 아픈 당신 대신 벨리타가 가는 게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어머니였기에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소. 내가 미련하게 다쳐서 결국 내 딸을 전쟁터에 보내는구나. 미안하다, 벨리타.”

“아니에요, 아버지. 언젠가 가야 할 곳이었어요. 좀 더 빨리 간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니까요.”

나는 아버지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우리에게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불의 힘이 있다. 그러니 이 힘만 있으면 너는 안전할 것이다.”

불의 가문.

그리고 불의 가문의 힘

“네게 이 반지를 넘겨주겠다.”

그것은 아버지의 왼손에 껴 있는 붉은 반지였다.

반지는 불의 가문의 수호수인 피니아를 불러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제가 그 반지를 낄 자격이 있을까요?”

“물론.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반지를 낄 자격이 없지.”

아버지의 목소리와 표정은 단호했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는 내게 더 큰 용기와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나를 믿어 주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결국 마차 사건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나는 토벌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 * *

북쪽 경계에서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마물 토벌대는 수도에서 약 3만, 그리고 제국의 여러 영주들의 성에서 약 7만 명을 각출하기로 결정했다.

도합 10만 명 규모의 대군이었다.

수도군의 총 지휘관은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가 맡았다.

그 밑으로는 세 공작 가문인 나와 에이든, 케인이 기사들을 통솔하기로 했다.

토벌대를 꾸리고 북쪽까지 가는 동안의 긴 시간과, 혹시 모를 긴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평소에는 서로 으르렁거리지만 힘을 합쳐야 할 순간이 언제인지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 가문의 힘이 합쳐지니 출정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드디어 출정식 전날이었다.

황실에서 성대하게 연회를 열었다.

마물 토벌에 참전하는 귀족 그리고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고 제국을 위해 희생하는 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연회였다.

오늘 나는 튀려는 의도가 아니라 불의 가문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금실로 자수를 넣은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계급이 낮은 기사들은 황실에서 따로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귀족들은 황궁에 있는 커다란 홀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연회장에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한창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케인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보자마자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헤이츠 공작님.”

“맥시어스 공작.”

나와 어머니도 케인에게 차례로 인사했고 그 후에는 아버지와 그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공작도 이번에 출정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들었소.”

“네, 그렇습니다. 제국의 공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맥시어스 공작은 후계가 아직 없지 않소. 이번 토벌대에 빠져도 됐을 터인데.”

“후계보다는 제국을 먼저 생각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래도 나는 공작이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공작이 없으면 맥시어스 공작가는 대가 끊기게 되는 것이오.”

아버지의 말대로 후계가 없으면 출정의 의무에서 한발 물러나도 인정해 주었다.

그렇기에 케인은 이번 토벌대에 합류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번 출정을 고집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제국은 물의 힘을 쓰는 가문을 영영 잃게 되는 엄청난 손실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황제뿐만 아니라 황태자, 그리고 여러 귀족들이 그의 출정을 만류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사서 고생하는 성격인가.’

참 여러모로 인생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싶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결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크흠.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말하진 않겠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헤이츠 공녀와 둘이서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벨리타와 말이오?”

아니, 나는 갑자기 왜?

나는 케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거절해 달라는 뜻이었다.

“네, 마차 사건의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녀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공녀, 괜찮겠습니까?”

케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얘기하면 될 것을 둘이 따로 얘기할 필요가 있소?”

‘역시!’

저번에 마차 사건 때문에 회의에 참석했다 돌아온 아버지가 그랬다.

케인이 무슨 일인지 편을 들어 줘서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원래 이놈 저놈 하면서 부르던 케인의 호칭을 제대로 불렀었다.

그래서 혹시나 아버지의 케인에 대한 맘이 풀린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역시 내 아버지였다.

‘그럴 리가 없지.’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얘기하겠습니다.”

케인이 금방 체념한 뒤 바로 내게 말을 걸었다.

“헤이츠 공녀, 그날 오웬 에스트를 심문하셨습니까?”

“네, 했어요.”

“그자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그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온갖 대화 소리로 인해 너무 시끄러웠다.

그래서 대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이 있는 건 싫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건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본 뒤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어머니, 잠시 공작님과 얘기를 나누고 올게요. 이곳은 너무 소란스러워서 안 되겠어요.”

“크흠. 알았다. 다녀오거라.”

“네. 가죠, 공작님.”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케인을 데리고 테라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때마침 연회장 안으로 바이언 공작가의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이언 공작, 아델라,

그리고…….

에이든.

아델라와 에이든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오늘도 아주 멋졌다.

아델라와 있었던 일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는 내 눈에 너무나 완벽했다.

“갑시다, 공녀.”

“아, 네. 가요.”

케인이 내게 채근하자 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뜨거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케인과 함께 비어 있는 테라스로 들어갔다.

테라스에 들어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양 뺨을 스쳤다.

방금 본 에이든 생각에 순간 멍해지려는 걸 서늘한 바람이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다.

“공녀.”

“네, 그러니까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할게요.”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에이든의 얼굴을 억지로 흩트리려고 노력하며 케인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오웬 에스트를 심문하던 날, 바이언 공자도 왔다가 일이 생겨서 일찍 가셨어요.”

“바이언…… 공자입니까?”

“네?”

아, 호칭.

그날 아델라가 내 호칭을 정정해서 나도 이제 그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절로 에이든이 아닌 바이언 공자라는 호칭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바이언 공자가 맞잖아요. 무슨 문제 있나요?”

나는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그에게 반문했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계속하시죠.”

케인의 표정이 기분 좋게 풀어진 게 보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답게 뭔가를 짐작한 듯했다.

하지만 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는 다 귀찮았다.

그래서 나는 원래 하려던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저 혼자 오웬 에스트를 심문했는데 갑자기 발작을 해서 계속할 수가 없었어요.”

“발작이요?”

“네, 몸부림을 치더니 곧바로 정신을 잃었어요.”

“발작의 원인은 알아내셨습니까?”

“아뇨, 그런데 의심 가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돌아가면 그자에 대해 더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조사단의 기사들에게 몇 가지 명령을 내리고 왔어요.”

“그렇군요. 저도 도왔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서 힘드셨겠습니다.”

나는 아니라는 뜻으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그럼 공작님께 드릴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나가죠.”

“공녀.”

테라스를 나가기 위해 발을 막 떼려는데 케인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네?”

“제가 이번 토벌대에 합류한 이유는 공녀 때문입니다.”

“네?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에게 무슨 뜻이냐며 물었다.

“공녀를 제 눈에 닿지 않는, 그것도 위험한 곳에 홀로 보낼 수는 없어서입니다.”

들으면서도 너무 기가 차서 어이가 없었다.

가만 보면 이 남자는 사랑꾼 행세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2년 전에 아델라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면서 내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떡하니 떼어 준 것도 그랬다.

그리고 뭐?

나를 위해서 참전한다고?

설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나?

“공작님.”

나는 무감각한 눈으로, 그런 말 따위에 전혀 감동받지 않았다는 태도를 보이며 그를 불렀다.

“제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요?”

“……아닙니다.”

“제가 누군가가 지켜 줘야만 하는 존재로 보이세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공녀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런 겁니다.”

“저 또한 공작님과 마찬가지로 한 공작가의 일원입니다. 그리고 저는 불의 가문의 차기 가주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지켜 줘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아뇨, 진짜로 저 때문에 토벌대에 합류할 생각이시라면 그만두세요. 공작님께서 그런 식으로 제게 부담을 주실 생각이라면 말입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공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케인이 내게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나는 그의 사과를 별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부모님을 찾았다.

부모님은 다른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어버지.”

“벨리타, 공작과 대화는 다 끝난 것이냐.”

“네.”

“벨리타, 인사하렴. 여기 이분은-.”

그때였다.

어머니가 막 나를 앞에 서 있는 귀족에게 인사시키려던 참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좌중을 압도하는 문지기의 커다란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이 연회의 주최자인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였다.

연회장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하던 양을 멈추고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를 따라 황후와 황태자, 그리고 황실 사람으로 보이는 몇몇이 홀 안으로 들어왔다.

귀족들은 모두 예를 갖춰 그들을 맞이했다.

상석에 황제가 앉자 그 옆에는 황후가, 그 밑으로 황태자와 다른 이들이 앉았다.

부모님과 나도 우리의 자리에 앉아 황제를 응시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맙소. 무엇보다 제국에 대한 그대들의 충심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그래서 황실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터. 황태자가 친히 토벌대를 총지휘할 것이오. 그대들은 황태자를 따라 북쪽 경계로 가서 제국민들을 구하고 극악무도한 마물들에게 제국의 강함과 건재함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오.”

황제의 연설이 끝나자 귀족들이 모두 일어나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발테우스 제국 만세!”

“발테우스 제국이여, 영원하라!”

곧이어 연회의 진짜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는 음악이었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홀 가운데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디 불편한 거니?”

어머니가 걱정이 담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니요, 공기가 답답해서 그래요.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조심히 다녀오렴.”

“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나섰다.

‘또 정원에나 갈까.’

연회는 그간 몇 번 왔지만 그다지 내가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조용하게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 더 좋았다.

밤이어서 그런지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이제는 꽤 찼다.

내일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아무래도 밖에서 머무르기엔 썩 적당한 날씨는 아니었다.

‘조금만 있다 들어가자.’

그렇게 생각하곤 정원으로 가기 위해 발을 떼려던 때였다.

등 뒤에서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누군가도 나처럼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헤이츠 공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차분하면서도 가냘픈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걸 보니 그녀가 일부러 나를 따라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정을 가다듬은 뒤 뒤돌아보려는데 내가 돌 새도 없이 나를 부른 사람이 먼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이언 공녀.”

아델라였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델라를 보자마자 나는 바로 나를 따라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아까 공작님과 테라스로 들어가는 걸 봤어요.”

“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는데, 그게 잘못됐나요?”

“혹시 무슨 얘기를 하셨죠?”

아델라는 이제 나를 향한 질투와 시기를 숨기지 않았다.

“제가 그걸 바이언 공녀께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공작님께 어디까지 말했죠? 설마 공녀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했나요?”

아델라는 내 얘기는 듣지도 않고 자신의 말만 하며 나를 닦달했다.

“……진짜로 말했어요?”

“…….”

나는 일부러 입을 다문 뒤 매서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아니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델라의 목소리가 꽤 커졌다.

“헤이츠 공녀!”

“공녀나 공작님이나 정말 본인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네요.”

분노로 얼굴이 잔뜩 상기된 그녀를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자신의 감정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으려고 하죠.”

“…….”

“두 분 참 잘 어울리는데.”

‘안타깝네요.’라고, 나는 명백한 조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충고하죠. 공작님의 마음을 갖고 싶다면 그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세요. 이런 쓸데없는 행동으로 사람 기분 더럽게 하지 말고요.”

더럽다라는 말은 아델라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약간의 후련한 기분과 함께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아델라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변했다.

방금 전까지 뻔뻔하게 따져 묻던 아델라는 어디 가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럽다…… 고요?”

목소리 또한 방금 전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바뀌었다.

“공녀께서 저를 이 정도로 미워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어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노력했는데 역시 공녀께서는 저를 죽이고 싶으실 정도로 싫으신 거겠죠…….”

“아니, 저기-.”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 죄송해요. 흑흑.”

그녀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공녀, 지금 뭐 하는-.”

“누님.”

그때 등 뒤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등지고 있고, 아델라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어서 그가 나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런 반면 아델라는 에이든이 나오는 걸 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연기를…….’

이제 보니 연기력을 타고난 건 내가 아니라 아델라였다.

에이든이 아델라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울고 있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에이든과 아델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까지 그의 눈에 나에 대한 적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 눈이, 나를 다정하게 바라봤던 저 눈빛이 곧 변할 거라는 두려움에 차마 눈을 맞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급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저는 공녀를 울릴 말도,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데려가세요.”

그리고 더 이상 살갑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이츠 공녀, 죄송해요. 공녀 앞에서 나타나서 죄송해요. 공녀에게 저는 죄인인데, 제가 꼴도 보기 싫을 텐데 죄송해요. 에이든, 나 어떡하니? 공녀가 나를 이 정도로 미워하니 어떡하면 좋아.”

아델라가 불쌍한 척 피해자인 척 연기를 계속하자 순간 짜증이 확 일었다.

“아니에요. 제가 가죠.”

그래서 내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빠르겠다는 판단에 몸을 움직였다.

“벨리타.”

에이든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뒤돌아 문으로 향했다.

막 문지기가 문을 열 때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런 뒤 에이든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애초에 서로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앞으로는 정중한 호칭으로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부모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셨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 쪽으로 다가가 두 분 옆의 내 자리에 앉았다.

“바람은 잘 쐬고 왔니?”

“네, 어머니.”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밖이 많이 쌀쌀한 모양이구나. 손이 다 떨리는 걸 보니.”

“……네?”

어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내려다봤다.

정말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가득 감쌌다.

그러자 떨림이 귀신같이 멈추었다.

“그러게 밖에서 너무 오래 있지 말지.”

“죄송해요.”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셨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는 이만 가자.”

“……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뜻밖의 도움으로 연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 부모님이 잠깐 보자며 나를 불렀다.

길진 않을 거라는 말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버지 어머니께서 나란히 소파에 앉아 계셨다.

“앉거라, 벨리타.”

“네, 아버지.”

두 분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내일 너는 우리 헤이츠 가문의 명예를 짊어지고 출정을 하는 것이다.”

“알고 있어요.”

“저번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 불의 가문의 힘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걸 말이다.”

“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그러면 반지를 왼손 세 번째 손가락에 껴 보거라.”

“왼손 세 번째 손가락이요?”

“그래.”

나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붉은 알이 박힌 반지를 왼손 세 번째 손가락에 꼈다.

‘어?’

순간 반지를 통해서 몸 안에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엄청나게 커다란 힘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광활하고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뜨거운 불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느껴지는구나.”

“네, 느껴져요.”

“그 힘을 절대 잊지 말거라.”

“네, 그럴게요.”

“불의 가문의 반지의 힘은 왼손 세 번째 손가락을 통해서 가장 강력하게 이어진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지를 절대 빼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나는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다음 날 황궁 앞의 광장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나는 갑옷을 입고서 수만의 기사들 앞에 섰다.

갑옷이라는 걸 오늘 아침 난생처음으로 입었는데 생각보다 그 무게가 엄청났다.

이걸 입고 움직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다.

계속 입고 있으니 그 무게에도 슬슬 익숙해져 갔고 이제는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 내 양옆에는 나와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는 케인과 에이든이 있었다.

확실히 두 남자는 키도 몸집도 월등해서 그런지 갑옷을 입은 모습이 나만큼 벅차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되도록 두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정면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 정면에는 에디얼 황태자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잠시 뒤 황제가 발코니로 나왔다.

출정하는 기사들과 그런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제국민들이 모두 황제와 제국을 연호했다.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 만세!”

“발테우스 제국 만세!”

황제가 이들에게 시선을 주며 어제 연회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연설로 토벌대의 사기를 드높였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너도 나도 함께 의지를 다졌다.

“이번에 기필코 마물의 씨를 말리고 말겠어!”

“맞아! 제국의 강함과 무서움을 그놈들에게 확실히 알려 주자고!”

“내 나라 발테우스를 짓밟는 놈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

“본때를 보여 주자!”

“우와아아아아!”

광장에 모인 약 3만의 기사들이 포효를 내질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리가 모여서 내는 소리는 대지를 흔들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뿌우우우-!

그와 동시에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출발 신호였다.

“우리에겐 승리만이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와아아아아아!”

황태자 에디얼의 당찬 구호에 맞춰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제국력 426년, 전설로 회자될 마물 토벌대의 시작이었다.

* * *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진군이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이 점점 추워졌다.

가뜩이나 겨울이 시작됐는데 여러모로 걱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토벌대의 사기는 끝을 모르고 점점 치솟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끝나면 참전한 기사들에겐 항상 어마어마한 포상이 주어졌다.

올해는 제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대풍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전과는 포상의 규모가 확실히 다를 것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얘기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북쪽 경계에 닿기 위해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래야 마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으, 날이 점점 추워지네.”

수염을 덕지덕지 기른, 파란 머리의 중년 기사가 몸을 잘게 떨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북쪽은 1년 내내 춥다고 하던데 큰일입니다.”

그 옆에서 터덜터덜 걷고 있던 갈색 머리의 젊은 기사가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수도 치안대에서 함께 일하던 사이였다.

각자 마물 토벌대에 자원했는데 우연찮게도 또 같은 소속이 되었다.

제국의 수도는 겨울에도 웬만해선 온난한 기후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수도에서만 지냈던 그들에게 이런 살을 에는 추위는 난생처음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헤이츠 공작가가 있으니 걱정 없을 걸세.”

불의 힘을 가진 헤이츠 공작가.

이런 날씨에 딱 안성맞춤인 능력이었다.

“하긴. 그런데 이번에는 공작님이 아니라 공녀님이 대신 참전하셨던데, 그분께서는 마물들을 상대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제 스물둘이라고 들었는데 있으시겠는가? 그래도 헤이츠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가 아니신가. 그 능력을 의심할 순 없지.”

“그렇긴 하죠.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세 공작 가문도 그렇고 그들을 따라 젊은 귀족들이 많이 참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세대교체인 것이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니 말일세.”

중년의 기사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갈색 머리 기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네, 그거 아나?”

“뭘 말입니까?”

“제국에 공작 가문이 세 곳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수염을 살살 쓰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자신들의 얘기를 몰래 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거였다.

“무슨 말인데 그러십니까?”

“그게, 자네는 어려서 모르나 본데…….”

사내는 뜸을 들이면서 동료에게 아까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전에 나와 약속합세. 오늘 들은 건 누구에게도 절대 발설하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무엇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십니까?”

젊은 기사가 굳게 다짐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은 말이야.”

“네, 말씀하십시오.”

어떤 이야기길래 이렇게 말을 질질 끄는지, 젊음 기사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렸다.

“공작가가 원래는 네 곳-.”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딱 붙어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나?”

“악! 깜짝이야!”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막 내뱉으려고 하던 그때, 두 사람과 함께 수도 치안대에서 일하던 다른 기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기사 또한 나이가 제법 많은 듯 흰 머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거의 한 뼘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던 와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자 중년의 기사는 너무 놀라서 그만 뒤로 자빠질 뻔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아니 사람이 오면 온다고 인기척을 내야 할 것 아닌가!”

중년의 기사가 과도하게 흥분하며 화를 냈다.

“거 참, 자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가?”

화낼 일도 아닌데 성질을 부리는 모습에 두 사람에게 다가왔던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예민하지! 예민하고말고! 나는 그렇게 몰래 다가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네!”

“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네.”

“다시는 그러지 말게!”

“알겠네. 미안하대두.”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성을 내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남자가 사과했다.

그런데 그때 젊은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공작가가 뭐 어떻다는 이야기를 하시려고-.”

“무슨 이야기는! 난 아무 말도 안 했네! 아무것도 아니니 더 이상 묻지 말게!”

중년의 기사가 손사래까지 치며 할 말 없다고 말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먼저 말을 걸어 놓고는 갑자기 토라진 모습을 보며 젊은 기사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 후 그들은 오늘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이제 곧 내일이면 북쪽 경계에 도착한다.

그래서 이렇게 밖에서 야영을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황태자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마주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케인이나 에이든과는 개인적으로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각자 통솔하는 기사단이 있고 각 가문 단위로 떨어져서 이동했기에 어지간해서는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번씩 우연히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어떻게든 내게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바쁘다며 매번 자리를 피했다.

지금 나는 야영지에 위치한 개인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일 북쪽 경계 지역의 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투에 돌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어떻게든 푹 쉬어야만 했다.

하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아델라와의 일이 있은 이후로 맘 편히 잠을 잔 적이 없었기에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시간만 보내느니 밖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막사 밖으로 나갔다.

깊은 밤이었다.

곳곳에서 활활 타고 있는 횃불들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기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빠르게 야영지를 벗어났다.

야영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날짜를 따지자면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었지만 이곳의 시간은 달랐다.

여름에도 서늘한 이곳은 벌써부터 혹독한 추위로 인해 강물이 얼음장 같았다.

차가운 강물에 환한 달이 반사돼 마치 달이 두 개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겉에 걸친 두툼한 로브의 깃을 여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생각은 여러 개였지만 결국은 하나였다.

나는 과연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토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설사 이 토벌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원작의 힘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나의 끝은 죽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

내가 죽지 않아서 모든 것이 뒤틀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원작의 유일한 악역이었던 나의 죽음이 이 소설을 행복한 결말로 이끄는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그럼 진짜 너무하잖아.’

만약 그렇다면 진짜 너무했다.

아니, 그럼 소설의 해피엔딩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해?

‘생각해 보니까 확 열이 받네.’

“후아.”

갑자기 뻗친 열에 나는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추운 날씨가 빠르게 열을 식혀 주었다.

그리고 다시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서야 하는 걸까?

내가 먼저 그들을-.

“벨리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던 생각이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로 인해 단번에 끊겼다.

목소리의 주인은 듣는 순간 알았다.

나는 표정을 굳히며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제가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바이언 공자.”

“미안…… 합니다.”

위아래로 달이 두 개가 떠 있어서 사방이 환했다.

그래서 내게 사과하는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또 어떤 말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아니지, 마음을 정리할 게 뭐 있어.’

그저 그에게 느꼈던 호감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면 될 뿐이었다.

애초에 그와의 사이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 그뿐이었다.

“바람을 쐬러 나오셨나 보네요.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옆에서 곧장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리타, 왜 저를 피하는 겁니까?”

왜 피하냐는 그의 말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하시려고요?”

여행에서 돌아와 황궁에서 에이든을 봤을 때, 그는 그때도 그랬다.

그를 반가워하지 않는 나를 보고선 자신이 불편하냐고 물은 사람이었다.

그래, 그때는 몰랐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에 그리 자주 있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도 그는 매우 바빠 보였다.

수도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마차 사건으로 인해 그는 내내 수도에 있었다.

그리고 출정식 전날 연회에서 아델라가 그에게 울며 나를 몰아가는 걸 보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그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저는 그저…….”

“한 가지만 묻고 싶네요.”

그와 말을 섞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 황당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 하나를 곧장 던졌다.

“마차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제부터 아셨죠?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나는…….

분노가 이성을 잠식하려 했지만 두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인내심을 발휘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조사단에 합류하지 않았을 겁니다.”

단호한 저 말에 나는 왜…….

왜 이리도 안도가 되는 걸까.

“누님이, 그러니까 누님이 왜, 하아…….”

그런 반면 그는 속이 답답한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웬 에스트를 잡았던 시기를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오웬 에스트 수색에 며칠째 허탕을 치던 날, 우리는 밖이 아니라 수도 안을 수색해 보기로 결정했었다.

에이든의 의견 때문이다.

멀리 가지 않았을 거란 말.

분명 근처에 있을 거라는 말.

“그럼 알고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맞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그날 누님이 깨어났다는 것도 기억하십니까?”

“네.”

느릿하게 끄덕여지는 고개와 달리 생각은 빠르게 돌아갔다.

설마, 뒤를 밟은 건가?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에이든은 자신의 누나를 의심한 걸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얘기를 마저 들어야만 했다.

“그날 누님은 깨어난 뒤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않고 외출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겠죠. 누님은 특히 몸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더 외출을 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용인들이 말렸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나갔다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아, 뒤를 밟은 건 아니었구나.

“그래서 분명 급한 용무를 보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를 갔을까, 혹시 누구를 만난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끝에 오웬 에스트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나는 그가 말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을 그에게 던졌다.

“그런데 그런 추론도 마차 사건이 아델라의 짓이라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벨리타, 아, 미안합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호칭을 정정했다.

“공녀께서도 그랬겠지만 저 역시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점점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은 결국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에이든의 말이 맞았다.

마차 사건을 조사하면서 나는 계속 풀리지 않는 의문을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닌데 모든 정황이 나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니라면, 이런 짓을 벌일 만한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누군가를 곤경에 빠트리고자 한.

그리고 이걸 에이든 또한 눈치채고 있던 거였다.

“저는 제가 한 짓이 아님에도 범인을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켰을까.

그가 나와 아델라 둘 중 하나를 믿어야 한다면, 그는 아델라를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왜, 어떻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공녀가 제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겪은 공녀는 그럴 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걸 믿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기엔, 그렇다면…… 네?”

뭐라 답하려다 나를 믿었다는, 믿는다는 그 말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그가 나를 나 자체로만 보고 있었던 것과 달리 나는…….

나는 그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원작에 얽매여, 내 앞에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사람을 그저 원작에 갇혀 의지도 없이 움직이는 거라고 마음대로 판단했었다.

아델라와 그를 분리하지 않고 아델라에게 당한 분풀이를 그에게 했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나는 이 남자를 마주할 자격이 없었다.

“여전히 제가 보기 싫으십니까?”

그런데 내 행동을 착각했는지 에이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니에요! 저는, 에이든에게-!”

화들짝 놀라 고개를 위로 치켜들면서 변명을 하려다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친근한 척하지 말라는 소리를 해 놓고 내가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닿도록, 내 진심이 닿도록 계속 중얼거렸다.

그때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저도 다시 벨리타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자 그가 조금 전보다 더 환한 미소를 내게 보여 주었다.

‘아…….’

너무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저만큼 아름다운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더없이 완벽한 미소였다.

“벨리타?”

그를 너무 오래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네. 아무튼 제가 에이든을 오해했어요. 사과드릴게요.”

“괜찮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니에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됐었는데 미안해요.”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거듭 사과했다.

“그런데 그 오웬 에스트 있잖아요.”

나는 이 말을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에이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도 오웬 에스트와 비슷한 목걸이를 차고 있는 걸 알기에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 목걸이에 대해 물었을 때 그의 무덤덤하면서도 체념한 표정이 잊히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 목걸이에 대해 답해 줄 사람은 에이든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오웬 에스트를 심문한 날 우연히 그의 목에서 목걸이를 봤어요.”

에이든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목걸이라면…….”

“에이든과 비슷한 재질의 목걸이였어요.”

내 말에 그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율리타에서 에이든이 쓰러졌던 것처럼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목이 졸린 것처럼 말을 다 뱉지 못하고 기절했어요.”

“…….”

“제가 아델라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건 그녀가 오웬 에스트가 있는 감옥에 왔기 때문이에요.”

“누님이 말입니까?”

“네.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날 공작저에 에이든도 공작님도 안 계셨더라고요. 아무튼 그날 아델라의 몸이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떠보려고 간 것이기도 했어요. 일부러 단서 하나를 흘렸어요. 그러곤 그날 밤 아델라가 지하 감옥에 나타났죠.”

“무슨 단서였습니까?”

“오웬 에스트의 몸에서 증거를 발견했다는 거였죠.”

“목걸이를 뜻하는 거군요.”

“아델라가 그러더라고요. 오웬 에스트는 절대 아무 말도 못할 것이라고요. 저는 그게 목걸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추측이 맞나요?”

내 말에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맞습니다.”

“아, 그럼 그 목걸이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거네요?”

“네, 맞습니다.”

“그러면 왜…….”

‘왜 당신이 그걸 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려다 말이 쏙 들어갔다.

2년 전 그때 봤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체념, 무력함, 허탈함,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려는 모습이 내 눈에 그대로 보였다.

그 이후 그는 목걸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목걸이에 대해 캐내는 건 그만두었다.

다만 오웬 에스트에 관해 그와 더 얘기를 나눈 뒤 야영지로 함께 돌아왔다.

“이제 저를 피하지 않는 겁니까?”

그가 대놓고 내게 물었다.

“이제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에 맞게 나 또한 확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산뜻한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미로 악수를 하자는 거였다.

내 뜻을 이해했는지 몇 번 잡아 본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살포시 감쌌다.

“따뜻합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당연하죠. 저는 불의 가문이니까요.”

원래부터 타고난 힘에 의해 체온이 남들보다 높긴 하지만 반지를 낀 후 몸의 체온이 좀 더 상승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마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나만 거의 추위를 느끼지 않을 터였다.

“이건 역시 그 반지입니까?”

“네, 맞아요. 아버지께서 빌려주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맞잡은 손을 놓으려는 찰나, 언뜻 그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내 손을 잡지 않은 그의 반대쪽 손을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반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반지가 없네요?”

“네, 없습니다.”

어? 왜지?

반지를 끼고 와야 하지 않나?

토벌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을 더욱더 증폭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꼭 필요한 것이 가문의 반지였다.

그런데 왜 에이든은 끼고 오질 않았지?

“바이언 공작님께서 주시지 않았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이 너무나 담담했다.

그래서 내가 별거 아닌 걸로 심각하게 반응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꼭 필요한 건 아니었나 봐.’

“아, 내일부터 엄청나게 바빠질 텐데,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아요. 이만 들어가요.”

그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벨리타…….”

그래서 맞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데 그가 놓지 못하게 손에 힘을 주었다.

“네?”

“아니, 아닙니다.”

나에게 꼭 뭔가를 말할 것처럼 굴더니 아니라며 그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자 싱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들어가죠.”

“네, 그래요.”

그 후 그가 내 개인 막사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눕자마자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몸이 매우 가뿐했다.

‘역시 사람은 잠을 제대로 자야 해.’

숙면을 취했을 뿐인데 몸과 마음의 상태가 최상이었다.

“아가씨, 저예요.”

메리의 목소리였다.

이번 토벌대에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음에도 메리는 꼭 자신이 따라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말을 타지도 못해 고생길이 훤함에도 그녀는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거부하지 못해, 결국 메리는 여기까지 힘들게 우리를 따라왔다.

“들어와.”

메리의 시중을 받으며 갑옷으로 갈아입은 뒤 식사를 했다.

“아마 오늘 오후 중에 성에 도착할 거야. 조금만 더 힘내.”

“고생이라뇨, 아가씨.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여기까지 걸어왔잖아.”

“아가씨와 다른 기사님들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시는데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에요.”

메리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윌리엄 경은 봤어?”

“네, 어제 잠깐 봤어요.”

“잘했어. 아, 나 리안 좀 불러 줄래? 할 말이 있거든.”

“리안이요?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리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잠시 리안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리안?”

“네, 접니다.”

“들어와.”

나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으며 리안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리안과 메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리안을 잠시 응시했다.

키는 나보다 한 뼘 넘게 크고 갑옷을 입고 있어서 꽤 듬직했지만 아직 얼굴에는 소년의 티가 확연히 남아 있었다.

그러자 아직 성인도 아닌 리안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 씁쓰름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응, 내가 할 말이 있어서. 메리,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줘.”

“네, 알겠어요, 아가씨.”

메리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리안을 좀 더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리 앉아.”

“네, 알겠습니다.”

리안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좀 어때?”

“뭐가 말입니까?”

“몸의 상태라든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렇구나. 하아…….”

갑자기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너도 그렇고 메리도 그렇고 왜 이 험한 곳까지 따라온 건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리안의 경우도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꼭 오지 않아도 됐다.

근데 메리와 입을 맞췄는지 꼭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저는 아가씨 계신 곳은 어디든 갑니다.”

대사 역시 메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내 주변엔 충심이 너무 강한 이들만 있다. 그치?”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혹시나 그들을 잃게 될까 봐 불안했다.

리안도, 메리도 그리고 윌리엄도 내게는 이제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그들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될까 봐 두려웠다.

“리안, 만약에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꼭 도망쳐.”

전투에 참여한 기사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리안에게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아직 어려. 그러니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제가…… 제게 비겁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리안이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간 이 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네가 어떻게 해서든 살길 바라.”

이 토벌에서 아무리 세 공작 가문이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 말은 누군가는 죽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게도 그들이 내 사람들은 아니길 바랐다.

“네 목숨을 소중히 여겨. 네 목숨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됐어. 그리고 네 마음은 언제나 고마워.”

나는 이제는 손을 쭉 뻗어야만 닿는 그의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흩트려 놓았다.

“가자.”

“네.”

우리는 야영지를 떠나 북쪽의 경계로 향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북쪽 경계에 있는 아게르성은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거대한 방어성이었다.

양쪽의 가파른 절벽의 끝과 끝을 잇는 높고 두꺼운 성벽 곳곳에는 기사들을 배치함으로써 마물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성벽 바로 앞에는 폭이 넓고 깊은 강이 흐르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쳐들어올 수 없는 요새였다.

수도에서 온 토벌대가 성안으로 진입하자 그들을 마중 나온 이들이 성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제국 곳곳에서 출발해 마물 토벌에 합류하기로 했던 7만 여의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와아아! 황태자 전하께서 드디어 오셨다!”

“황태자 전하 만세!”

“발테우스 만세!”

성안의 주민들이 자신들을 지키러 온 토벌대를 밝은 목소리로 환영했다.

그때 아게르성의 성주 펠릭스 아게르가 황태자와 토벌대에게 다가왔다.

“발테우스의 빛나는 작은 태양이자 고귀하신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성주가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기사와 성안의 주민들 또한 동시에 황태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모두 일어나시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의 말에 몸을 일으킨 성주는 그 뒤에 있던 벨리타, 에이든, 케인을 포함하여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성주가 황태자와 몇몇 귀족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하오?”

황태자가 성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성주에게 물었다.

“나흘 전까지 소규모 전투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잠잠합니다.”

그들은 성 안팎의 지도와 작전에 필요한 여러 물품들이 가득한 지휘통제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황태자와 성주, 그리고 여러 귀족들이 둘러앉았다.

“성주, 설명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의 명령에 성주가 지도를 가리키며 전쟁의 진행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쪽 경계에는 여러 마물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 가장 수가 많은 것이 하거스입니다. 그리고 이번 침략도 그들의 짓입니다.”

“하거스?”

“네, 하거스는 사람의 형상을 한 마물로 머리에 뿔이 달려 있고 크기는 보통 사람의 1.5배 정도입니다. 온몸의 피부가 마치 피를 흘린 것 같이 붉습니다. 그들 중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뿔이 큰 놈들입니다.”

“뿔의 크기?”

“네, 뿔이 클수록 더 강합니다.”

“얼마나 강하다는 뜻이오?”

“저희도 아직 얼마만큼 큰 놈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 자기 머리통만 한 뿔을 가진 놈이 무리 전체를 이끈다고 합니다.”

성주의 말을 듣자 벨리타는 순수하게 궁금증이 일어났다.

‘머리통 크기라니, 그 정도 크기면 목이 지탱이 가능한가? 목이 부러지는 거 아니야?’

하긴 마물이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대장 격의 놈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거스는 주로 독과 무력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그들의 체액에는 맹독이 있어서 물리면 곧 사지가 굳고, 수 분 내에 심장이 굳어서 죽습니다.”

“독이라면 해독제는 있소?”

“아뇨, 없습니다.”

성주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또한 하거스는 재생력이 뛰어납니다. 하거스의 모든 힘은 뿔에서 온다고 하니 독이나 재생력 모두 뿔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뿔이 큰 만큼 재생력과 독성도 강하겠군.”

“맞습니다. 그래서 하거스를 상대할 때는 뿔을 뽑아 버리거나 목을 제대로 잘라야 합니다. 잘게 상처를 입혀 봤자 바로 회복을 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반 기사들의 경우는 근접전을 해야 한다는 건데 놈들을 모두 소탕하기 위해서는 해독제가 반드시 필요하겠군.”

“하지만 해독제는 제국이 생긴 이래로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거스 토벌 때마다 제국의 피해가 상당했습니다.”

“흐음…….”

황태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휘통제실에 있던 귀족들 모두가 황태자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소. 여기까지 오느라 다들 피곤이 쌓였을 테니 오늘은 그만 마무리하는 게 좋겠소.”

“네, 알겠습니다, 전하.”

“아, 맥시어스 공작은 잠시 나를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가 케인만 남기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케인을 제외한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맥시어스 공작.”

“네, 황태자 전하.”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가 케인에게 해독제의 제조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케인 맥시어스는 물의 가문의 가주였다.

물의 가문은 해독에도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

이 제국에서 맥시어스 가문의 사람보다 해독에 능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맥시어스 가문이 대대로 존재했음에도 지금까지 하거스 독의 해독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희망보다는 절망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케인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오지 않아도 될 이곳까지 왔다.

그녀를 잃는다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케인이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필요한 재료와 물품, 그리고 인력을 지원할 테니 어떻게 해서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이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공작도 피곤이 많이 쌓였을 테니 가서 쉬세요.”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케인이 지휘통제실에서 나왔다.

혹시나 벨리타가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요즘 그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벨리타가 바이언가의 이들과 사이가 단단히 틀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차 사건 때문일 거라고 그는 추측했다.

마차 사건의 모든 정황이 벨리타를 가리키자 멍청하게도 바이언가에서는 벨리타를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공녀가 그럴 리가 없지.’

물론 그전의 그녀는 자신의 맘을 얻기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다.

벨리타는 그를 예전의 그 마음 그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서 떠났단 걸 그녀는 너무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델라를 위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케인은 그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씁쓸했다.

‘마차 사건…….’

누가 벨리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걸까.

과연 누가…….

아직 완벽하게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의심스러운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확정 짓기에는 성급했기에 말을 아낄 뿐이었다.

무엇보다 벨리타가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도 나쁘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녀를 손가락질해도 그만 그녀를 믿어 주면 되니까, 그만 그녀를 사랑해 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그 일로 바이언가와 완전히 틀어진다면 그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었다.

그래, 신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다시 되돌려놓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 *

“벨리타.”

지휘통제실에서 나와 방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에이든이 앞서 가고 있던 벨리타를 보곤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다.

“에이든.”

그에 벨리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는 잘 잤습니까?”

“네? 네, 잘 잤어요.”

그는 마치 그녀가 여태까지 제대로 잠을 못 잤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물었다.

“저도 오랜만에 잘 잤습니다.”

“왜요? 불면증이 있으세요?”

“네,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에이든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불면증이 심했다.

그의 상황이, 주변이 그를 마음 편히 자도록 놔두지 않았다.

특히 요새 벨리타와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더욱더 잠에 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는 이례적으로 짧지만 깊은 숙면을 취했다.

다 벨리타 덕분이었다.

그녀를 알게 된 뒤로 어둠뿐이었던 그의 세상에 한 줄기 빛이 피어났다.

그 빛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그 수많은 질문들의 답을 묻지 않아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땐 그의 마음속에 있던 공허함이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닿고 싶었다.

잡고 싶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서서히 균열이 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균열이 완전히 깨져 버렸을 때,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겐 애초부터 선택권 따윈 없었다.

그게 몹시도 그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단 하루라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어차피 전부를 욕심 부리기엔 그는 너무나도 하찮은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아주 잠시만, 그 순간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 정도면 그에게는 더없이 충분했다.

* * *

‘불면증이라니.’

오래전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그의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샘솟았다.

그런데 잠을 못 잔다는 사람치고는 눈 밑이 깨끗했다.

‘역시 타고나는 거지.’

나는 고작 며칠 잠을 설쳤다고 눈 밑이 거뭇거뭇한데 말이다.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우리 성을 좀 돌아볼래요?”

“네? 성을 말입니까?”

“네, 이 성의 구조를 파악해 놓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몸을 더 피곤하게 해야 오늘도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심리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걸 해결할 수 없다면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불면증을 일시적으로나마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럴듯한 해결책을 들은 에이든의 표정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그렇죠? 그럼 어디부터 갈까요?”

“우선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전체를 훑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좋아요. 가요.”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성의 꼭대기인 탑으로 올라갔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와 밑을 내려다보니 성과 그 주변부가 한눈에 확 들어왔다.

“저기가 그 하거스라는 마물들이 사는 곳인가 봐요.”

성 앞의 넓은 강 건너,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습한 기운이 가득한 것이 딱 봐도 마물들의 주거지 같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에이든은 하거스를 본 적이 있어요?”

“아뇨, 다른 마물은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마물이요? 어디서요?”

“몇 년 전에 다른 마을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마을에 쳐들어왔던 마물과 마주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이제 곧 보게 될 테지만 먼저 봤다는 에이든의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했다.

“그 마을 사람들을 해치려 해서 죽였습니다.”

“에이든 혼자서요?”

“다행히 수가 많진 않았습니다.”

“와, 그래도 대단하네요!”

눈을 빛내며 그를 치켜세우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쉽게 죽던가요?”

“물론 쉽게 죽진 않았습니다. 목숨이 꽤 질긴 놈들이거든요.”

“아, 그래도 바이언가의 검이라면 단번에 목을 베었겠네요.”

“…….”

제국이 생겨났을 때부터 철의 가문인 바이언가에 내려온 검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검은 무척 날카롭고 견고하여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것은 물론, 원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 검에 닿은 것은 모조리 철가루로 변해 공기 중에 흩날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그럼 에이든도 이번에 그 검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 검은 제게 없습니다.”

“네?”

“그 검은 공작님께 있습니다.”

“어, 왜죠?”

바이언 공작 이제 봤더니 피도 눈물로 없는 야박한 사람이네.

아들이 전쟁터에 가는데 반지도 안 주고 검도 안 줬다고?

자신의 아들이 여기서 어떻게 돼도 좋다는 거야?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아 나도 모르게 물음표를 달며 물었다.

“저는 그 검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요.”

받을 자격이 없다?

나처럼 지금은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건가?

그런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저는 제가 가진 힘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 걱정은 별로…….”

‘안 했어요.’라고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건 거짓말이었으니까 말이다.

차마 그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말아요.”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제가 웃는 게 싫으십니까?”

그러자 에이든이 얼굴을 굳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좋으면 좋았지 전혀 싫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말을 그에게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제가 웃는 게 좋으십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내게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고 있었다.

“대답 안 할래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민망한 마음에 대답을 피했다.

“그럼 제 맘대로 생각하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짝 웃으며 예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후로 우리는 성을 돌아다니면서 뭐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는지 파악했다.

마지막엔 에이든이 나를 성안에 배정된 내 방까지 데려다줬다.

“쉬어요.”

“네, 오늘은 푹 자요, 에이든.”

“벨리타 덕분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포근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성안에서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났다.

마물들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훈련만 하며 보내는 날들이었다.

‘근데 요새 케인이 안 보이네.’

안 보이니 너무 좋긴 해서 별생각 없이 넘겼다.

그렇게 또 해가 저물고 오늘 하루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나 싶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다.

뿌우-!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성 전체를 잡아먹을 듯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나는 바로 침대 근처에 매달려 있는 종을 울렸다.

그러자 울리기가 무섭게 방 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들어와.”

“부르셨어요?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마물들이 쳐들어온 것 같아.”

“네? 이 밤중에요?”

“응, 나 얼른 갑옷 입혀 줘.”

“네, 알겠어요!”

지금도 뿔피리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얼른 서둘러 줘!”

“네, 네!”

메리의 도움으로 단단히 갑옷을 장착한 후 빠르게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벨리타.”

“에이든.”

에이든도 갑옷은 입은 채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역시 밤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요. 들어가요.”

“네.”

지휘통제실에 들어가니 성주와 몇몇 귀족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공녀님, 공자님, 오셨습니까.”

“상황이 심각한가요?”

나는 바로 성주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물었다.

“경계선인 울타리 주변으로 몰려든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 공격을 시도하진 않았지만 달이 가장 높게 뜬 순간 시작될 겁니다.”

“황태자 전하는요?”

“아, 저기 오십니다. 전하.”

“인사는 됐소.”

그곳에 있던 이들이 황태자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하자 황태자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상황을 설명하시오.”

“네, 그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성벽 너머 경계에 하거스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수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성주, 맥시어스 공작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소?”

“공작님께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하, 그럼 해독제 없이 전투에 나가야 한단 말이군.”

아, 이제야 케인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황태자가 케인에게 해독제를 만들라고 명했구나.

그때였다.

뿌우우우-!

뿌우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더 길게, 그리고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성주님!”

밖에서 성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주님! 마물들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대들은 각 부대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벽으로 가시오. 그리고 그들이 성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할 것이오.”

“네, 알겠습니다.”

“네, 황태자 전하!”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들 황급히 통제실을 벗어났다.

순간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 서로 알 수 있었다.

‘무사해야 해요.’

‘무사해야 합니다.’

그와 가는 길이 갈라졌다.

나는 곧바로 내 소속 기사들을 데리고 전속력으로 성벽으로 달려갔다.

쿵쿵-!

“크아아악!”

“으아악!!”

경계 쪽은 완전 아비규환이었다.

밤이었음에도 곳곳에 걸린 타오르는 횃불로 인해 낮만큼 환한 상태였다.

성벽 밖에서는 하거스가 성을 넘기 위해서 계속해서 달려들고 있었고 성벽 안에서는 그런 마물들을 막기 위해서 기사들이 있는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성을 넘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했다.

놈들이 떼거리로 헤엄을 쳐서 살얼음 낀 강을 건넜다.

그중에는 기사들의 화살에 당했는지 물에 둥둥 떠 있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강을 건너 성벽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큰 몸으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위치로!”

“네!”

기사들이 자신들의 위치로 향했다.

“크악!”

“놈들이 절대 성벽을 타고 오르지 못하게 하라!”

“네!”

기사들에게 쉬지 않고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놈들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눈동자에 열기가 몰려들었다.

반지 때문인지 예전에 한번 이 능력을 썼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힘이 솟구쳤다.

나는 눈을 감기가 무섭게 곧바로 눈을 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서 느껴지는 열기를 이용하여 놈들의 수를 빠르게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 백, 천…….

그런데 아무리 세도 끝이 나질 않았다.

‘너무 많아.’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어림잡아도 몇천은 돼 보였다.

지금 여기 있는 기사들의 수는 원래 성의 기사들 1만에 지원으로 온 10만, 도합 약 11만 정도여서 숫자로는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닌 인간과 마물의 대결이었다.

숫자는 무의미했다.

우선 그들이 성벽에 더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강가 너머 하거스가 떼로 모여 있는 곳 바로 앞에 일렬로 커다란 불을 놓았다.

바닥부터 거세게 타오르는 붉은빛에 의해 놈들의 움직임이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놈들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불길로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캬아아악!”

고통에 일그러진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그때였다.

성벽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사다리가 걸쳐졌다.

아무리 마물이라도 생각을 하는 놈들도 존재했는지 머리를 쓴 것이다.

놈들은 불에 타고 있는 곳을 건너뛰어 바로 위로 올라올 계획이었다.

하거스가 순식간에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 사다리에 올라탔다.

“사다리를 밀어내라!”

내 명에 기사들이 장대를 가져와 사다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다리의 무게에 그 위에 타고 있는 놈들의 무게까지 더해지니 쉽게 밀리지 않았다.

“악!”

“더! 더 힘을 줘!”

“밀어!”

쿵!

여러 명이 힘을 합치자 사다리가 성벽에서 멀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여파로 흙먼지가 사방에 흩날렸다.

“크아악!”

마물들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신경질적으로 포효했다.

“이쪽도 도와줘!”

도와 달란 기사의 말에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고, 공녀님!”

내가 사다리에 손을 얹자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밀어!”

“네, 네!”

구호와 함께 사다리를 있는 힘껏 밀고 있는데 강에서부터 올라온 마물이 어느새 성벽을 타고 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악!”

뿔이 그다지 크진 않았는데 놈이 갑자기 어찌할 새도 없이 내 쪽으로 도약했다.

그러곤 바로 코앞까지 오더니 뿔로 나를 들이받으려고 했다.

“공녀님!”

나는 재빠르게 사다리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고 손끝에 불을 끌어모았다.

그런데 공격을 하려는 찰나 놈의 목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안이었다.

리안은 지시대로 하거스의 머리와 몸을 완전히 분리해 냈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

“압니다. 하지만 아가씨께 어떤 사소한 위협도 없게 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알아. 고마워.”

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에 불을 불러일으킨 김에 이걸 써먹기 위해서 사다리로 다가갔다.

“다들 떨어져라.”

“네?”

“어서!”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사다리에서 떨어지게 한 다음 나는 그곳에 커다란 불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손으로 화력을 조정했다.

순식간에 사다리 전체에 불이 옮겨붙었다.

“쿠아아악!”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마물들이 커다란 화염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강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무로 만든 사다리도 불로 인해 금방 소각돼서 재만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거스는 끊임없이 성벽을 넘으려고 시도했고 결국 하나둘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죽어! 죽으라고!”

기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하거스의 목을 차례차례 날려 댔다.

“으아악! 안 돼! 사, 살려 줘!”

그렇게 미친 듯이 마물들을 죽이고 있던 중 갑자기 한 기사가 흥분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뭐, 뭐야.”

“몸이, 몸이 굳고 있어! 손가락이 안 움직여!”

“뭐라고?”

“아,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다고!”

하거스의 체액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기사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고 잠시 후 기사의 움직임이 아예 멈췄다.

온몸이 굳은 그 기사는 비명을 끝까지 다 뱉지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그 기사를 본 다른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어, 어떻게……!”

“해독제가 정말 없는 거야?”

“우리 다 저렇게 죽는 거냐고!”

기사들이 저마다 공포 어린 비명을 내뱉으면서 자신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깨끗한 갑옷 상태에 안도를 했고 어떤 이는 방금 전 죽은 기사의 다음이 자신이 될 거라고 직감한 듯 경악했다.

‘해독제가 필요해.’

하거스를 죽이기 위해서는 목을 날려야 했고, 그 목을 날리기 위해서는 근접해서 검으로 베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목을 베면서 뿜어져 나온 피가 기사들에게 튀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누구라도 백이면 백 죽는 그런 싸움은 할 수 없었다.

그건 기사들의 사기에도 전혀 좋지 않았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그들에게 줘야 했다.

그러려면 해독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케인.’

케인이 해독제를 만들고 있기에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독제가 없었고 우리는 이 상태로 싸워야만 했다.

“하거스의 체액이 갑옷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여며라!”

“네! 알겠습니다!”

“투구도 제대로 쓰고!”

“네!”

다들 빠르게 몸을 추스르고 다시 마물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밤하늘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상황도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물들은 계속 들이닥쳤고 우리는 그들을 끊임없이 막아 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오늘 그들을 다 막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생각했다.

세 공작 가문이 황실보다 더 신임을 받는 이유는 딴 게 아니었다.

이런 전투에서 힘을 이용해 피해를 줄여 더 많은 아군을 살렸기 때문에 지지를 받는 것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독제가 만들어질 때까지만이라도…….’

그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한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마물들과 기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뛰어서 성벽 중에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간 뒤 반지의 힘을 집중해서 한곳으로 끌어모았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 온몸을 감쌌다.

엄청나게 뜨거웠다.

너무나 뜨거워서 오히려 내 몸이 불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꾹 참고서 나는 마지막까지 힘을 끌어모아 불의 가문, 헤이츠의 수호수인 피니아를 불러냈다.

“피니아!”

그러자 반지가 더욱 붉게 빛나더니 그곳에서 뭔가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몸 전체가 불로 뒤덮인 거대한 새였다.

피니아가 불꽃으로 이루어진 긴 꼬리를 흩날리며 어둠 속을 휘젓고 있었다.

“뭐, 뭐지?”

“뭐야?”

“불이잖아!”

“공녀님이다! 공녀님께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존재로 인해 기사들이 크게 놀랐다.

몇몇은 새 마물인 줄 알고 기겁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헤이츠 가문 소속 기사 중 누군가가 피니아를 알아보고 외쳤다.

“공녀님께서 수호수를 불러내셨다!”

“와아아아!”

기대감이 잔뜩 담긴 기사들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니아, 가라!”

나는 수호수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한가로이 밤하늘을 선회하던 피니아가 내뿜는 커다란 불꽃들이 마물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하거스의 비명 소리가 성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방에 퍼진 불꽃이 성벽 위에 있던 놈들을 집어삼킨 뒤 성벽에 붙어 있던 놈들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한 놈도 빠뜨리지 말고 없애 버려!”

더 하라는 내 명에 피니아가 경계에 있던 놈들에게로 눈 깜짝할 새 다가갔다.

피니아에게 저항하며 멍청하게 들이대던 놈들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거라 판단했는지 놈들이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숲 전체를 태울 각오를 하고 피니아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숲의 절반이 타들어 갔다.

붉게 타오르는 숲으로 인해 사방이 훤했다.

이제 하거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는 반지 안으로 피니아를 다시 불러들었다.

그런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힘을 방출해서 그런지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처음 쓰는 거대한 힘에 적당히 조절하는 방법을 몰랐다.

내가 얼마만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힘을 써 댄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눈이 감기며 바닥에 쓰러지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쳐다봤다.

“에이든.”

“벨리타.”

언제 다가왔는지 에이든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의 품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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