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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야제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은 아버지의 언짢은 기분으로 인해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나는 부모님께 할 말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한 후 입을 뗐다.
“황태자 전하께서 초대하셨던 연회에 간 날,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저와 다시 잘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뭐라고?!”
“벨리타, 그게 무슨 말이니!”
“공작 이놈을!”
내 말에 아버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차의 의자를 쿵 하고 내려쳤다.
“그 뻔뻔한 자식을 내가!”
“여보, 벨리타의 얘기를 우선 끝까지 들어 봐요.”
“당연히 싫다고 했죠. 어머니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분께 어떠한 마음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 잘했다.”
내 대답에 아버지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제가 싫다는데도 포기하질 않으셨어요. 절대 받아 줄 수 없다고, 포기하라고 수차례 얘기했지만 도저히 말이 통하질 않았어요.”
“나 참, 어이가 없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으며 내게 계속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얼마나 끈질긴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요. 고아원 사업으로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간 날, 제가 올 거라는 걸 안 사람처럼 황태자 전하의 궁에서 절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하!”
“그날도 제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억지를 쓰시는데 마침 바이언 공자가 전하를 뵈러 오셨던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공작님에게서 벗어나도록 저를 도와주셨어요.”
“바이언 공자가 말이냐?”
“네, 그 후 바이언 공녀의 병문안을 갔을 때 공자를 다시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전야제에서 저와 춤을 춰 줄 수 있는지 청하게 된 거예요.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분명 또 억지를 부리며 저를 괴롭힐 걸 예상하고요.”
황태자궁에서 케인을 만난 이후 병문안을 갔을 때는 에이든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야 말이 맞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병문안 가서 본 게 아니고 그를 따로 만났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더 화를 낼 게 뻔했다.
“크흠.”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헛기침에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가 들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불편한 뭔가로 인해 기분이 언짢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영식이 있을 텐데 왜 하필 바이언 공자인 것이냐.”
“왜냐면 그가 에이든 바이언이기 때문이에요.”
“무슨 뜻이냐?”
“지금 제국에는 공작 가문이 단 세 가문밖에 없어요.”
“그렇지.”
“우리 가문을 빼고 맥시어스 공작가에 대적할 수 있는 가문은 오로지 바이언 가문뿐이에요. 그리고 마침 바이언가에 아직 미혼인 에이든 바이언이 있고요.”
내 말은 무척이나 일리 있는 소리였다.
만약 내가 케인을 퇴치하기 위해 방패로 내세운 사람이 케인보다 낮은 계급의 귀족이었다면 케인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거기다 케인은 아델라와 일방적으로 파혼했다.
바이언가에 어느 정도 마음의 빚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남자 성격에, 더군다나 내게 하는 것만 봐도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바이언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라고 보기 좋게 지어 내며 말을 마쳤다.
“우리 딸이 역시 똑똑하네요.”
어머니가 내 대답을 듣곤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런 반면 아버지는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다운 날카로운 촉이었다.
‘뭐라고 쐐기를 박아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아버지를 완전히 설득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이던데.”
“네?”
“너희 두 사람이 춤을 췄을 때 말이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했을 뿐이에요.”
“그래?”
“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신 분한테 차갑게 대하는 게 더 예의 없는 거 아닌가요?”
“크흠, 그렇긴 하지.”
“네, 그러니까요.”
“그래서 맥시어스 공작은 제대로 떼어 놓은 것이냐.”
“아뇨, 오늘 보니까 똑같아요. 그래서 답답하고 미치겠어요.”
“우리에게 무조건 말했었어야지.”
“2년 전의 일도 그렇고 그분과 관련된 문제로는 더 이상 어머니 아버지께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저 혼자 해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
2년 전에 파혼을 당했을 때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부모님이 그런 걱정을 또다시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맥시어스 공작은 내가 처리하마. 그러니 너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바이언 공자와도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거라.”
“아버지께서요?”
“그래, 나는 네 말대로 네 아버지다. 딸이 힘들다고 하는데 어느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느냐. 그리고 그놈은, 아무튼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
이왕 부모님이 알게 된 거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케인을 퇴치해 준다니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믿음이 갔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걱정을 끼쳐서 죄송해요.”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고개 숙이지 말거라.”
“그래, 벨리타. 너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 당당하게 있으면 돼.”
“네, 어머니 아버지.”
그날 부모님과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주 오랜만에 두 발을 쭉 뻗고 푹 잘 수 있었다.
* * *
계속해서 골머리를 썩였던 고민이 곧 사라질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오늘부터 승마 대회가 시작되었다.
승마 대회는 남자와 여자가 나눠서 경기를 치르는데 오늘은 귀족 영애들이 참가하는 예선전이 있는 날이었다.
예선전에 참가하기 위해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뒤 저택 밖으로 나갔다.
나가니 이번에 나와 함께할 늘씬한 갈색 말 한 마리가 촉촉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포르타.”
포르타는 이번에 나와 승마 대회에 나가게 될 이 말에게 지어 준 이름이었다.
페오라트에서 알게 된 말인 ‘포르타 드비아’의 앞쪽 단어를 딴 것이다.
‘포르타 드비아.’
이상하게 그 말이 잊히지 않고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도 뜻이 마음에 착 와 닿아서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이 바로 인생 최대의 행복의 날’이라는 의미가 뭔가 마음을 굉장히 들뜨게 하면서도 설레게 했다.
이번 승마 대회에서 우승해 함께 행복을 누리자는 뜻으로 특별히 말의 이름을 ‘포르타’로 지은 것이다.
포르타의 목 부근을 쓰다듬으며 교감을 나눴다.
“우리 잘해 보자. 알았지?”
내 말에 포르타가 푸르륵- 하며 경쾌한 콧소리를 냈다.
나는 포르타를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뒤 근처에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내 명령과 함께 우리는 경기장으로 출발했다.
* * *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몇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승마 대회는 그곳에서 치러졌는데 저택에서 약 4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대회의 인기를 실감하듯 예선전임에도 관중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경기장이 아닌 구석에 있는 연습장으로 가니 포르타가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디딤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등자에 오른쪽 발을 넣고 날렵하게 포르타의 위로 올라탄 뒤 고삐를 쥐었다.
최고급 안장으로 인해 승마감은 좋았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메리, 내가 말에서 떨어지는 거 봤어?”
헤모아에서 떨어진 적이 있지만 그건 에이든과 나만 아는 일이었다.
“그래도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해요.”
“알았어.”
“그럼 저는 저쪽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마체에 댄 다리와 고삐를 쥔 손에 동시에 힘을 주었다.
“가자.”
신호를 주자 포르타가 점점 속도를 내며 달렸다.
얼마간의 연습을 하고 나니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포르타와 함께 경기장으로 나섰다.
“와아!!”
관중석에서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귀를 찢을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내 앞 차례의 경기가 막 끝난 참이었다.
말 위에서 주변을 쭉 둘러봤다.
사람들의 흥분 가득한 모습을 보니 생동감이 느껴졌다.
‘기분 좋다.’
“벨리타 헤이츠 공녀님 맞습니까?”
“그렇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경기 진행 요원을 따라가니 출발선이 보였다.
그 앞에 서니 이제야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승마 대회 예선전의 룰은 간단했다.
이 거대한 경기장을 스무 바퀴 돌아서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승리였다.
오늘은 여자들이 참가하는 예선전이었고 내일은 남자들이 참가하는 예선전이었다.
예선전에서 이기면 바로 본선이자 결승전이었다.
예선전은 한 번에 열 명이 승부를 겨뤘다.
그리고 거기서 일등을 한 사람만이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출발선에 서자 내 양옆으로 아홉 명의 영애들이 보였다.
그들이 내게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몇몇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자 곧 준비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포르타, 우린 할 수 있어. 알지?”
포르타를 격려하는 말이자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뿔피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길게 울리면 출발이었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관중들도 경기장의 출발선에 선 이들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쿵쿵대는 소리가 심장을 내려쳤다.
이렇게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지배한 순간은 오랜만이었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뿌우-!
그리고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와아!!”
“가라!!”
고요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사람들의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등자에 놓인 발로 포르타의 몸통을 힘 있게 건드렸다.
포르타가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예선전은 압도적으로 일등을 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아마 벨리타의 실력이라면 무난하게 우승까지 하지 않을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며 피로를 풀었다.
메리가 옆에서 목욕 시중을 들어 주었다.
“아가씨, 진짜 멋있으셨어요!”
“그래?”
“네, 거기서 ‘저분이 제 아가씨랍니다!’라고 소리 치고 싶었다니까요.”
메리가 나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치고 나가시는데, 진짜 아무도 따라잡지 못했다니까요. 아가씨의 실력이라면 무조건 우승이에요, 우승!”
같은 생각이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는 못하는 게 없으셔요.”
메리가 황홀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 앞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내일은 남자들 예선전이고, 아가씨는 3일 뒤에 결승전이죠?”
“응, 맞아.”
“그럼 회복 제대로 하셔야겠네요.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
“아냐, 됐어.”
“아니에요. 우리 아가씨 우승하셔야 해요. 얼른요.”
“아이참. 알았어. 고마워.”
메리가 내 몸에 근육통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아주 열심히 마사지를 해 줬다.
그래서 그런지 연습으로 인한 약간의 피로를 제외하면 정말로 며칠 내내 몸이 가뿐했다.
그리고 그런 메리 덕분에 나는 결승전에서도 예선전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격차를 선보이며 우승했다.
* * *
내가 우승을 한 여자부 결승 다음 날인 오늘은 남자들이 참가하는 승마 대회의 결승전이었다.
메리를 통해 에이든이 결승전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와의 약속대로 결승전을 보러 가야 했다.
준비를 마친 뒤 마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출발했다.
이곳에 몇 번을 왔지만 관중석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경기장이 제일 잘 보이는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안을 둘러보니 결승전에 참가하는 이들이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 유독 내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에이든이었다.
그는 승마복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타이트한 남색의 승마 재킷은 그의 넓은 어깨와 등판을 더욱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거기다 다리에 딱 달라붙은 흰 바지와 검은색의 부츠 또한 그의 길고 튼실한 하체를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뭔들 안 어울리겠어.’
저 얼굴에, 저 키에, 저 몸매에 안 어울리는 건 없을 터였다.
그의 완벽한 외양을 쳐다보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더니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꼭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아 보였는데 잠시 뒤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러곤 마치 엄청난 걸 찾은 것처럼 환하게 웃음 지었다.
‘잘해요.’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그에게 말했다.
앞줄에 앉았다지만 거리감이 있어서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아델라는 아직 안 왔나?’
온다고 했으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중석을 둘러봐도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지위가 높은 귀족들의 자리는 정해져 있어서 다른 곳에 앉아 있을 리는 없었다.
‘설마 몸이 다시 안 좋아졌나?’
그 생각이 번뜩 들자 아델라의 몸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병문안을 한번 더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경기장에 있는 이들 중 에이든 말고 다른 익숙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케인도 결승전에 올라왔구나.’
케인의 외양도 뭐, 나쁘진 않았다.
물론 남주가 못생기면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케인은 붉은색의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색이 너무 강렬해서 눈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 괜히 쳐다봤어.’
하지만 나는 곧 후회했다.
시선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케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보란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뿌우-!
한 번의 뿔피리 소리가 경기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결승전에 참가하는 이들이 출발선에 일렬로 섰다.
뿌우- 뿌우-!
뿔피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뿌우-!
뿔피리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순간 출발선에 있던 이들이 동시에 말과 함께 튀어 나갔다.
나는 빠르게 눈을 움직이며 에이든의 위치를 찾았다.
그는 케인과 함께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지지 마요.’
다른 사람과 에이든이 붙었어도 에이든을 응원했겠지만 케인과 붙으니 제발 에이든이 지지 않기를, 꼭 우승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의 실력이 비슷한 건지 경기를 하는 내내 둘은 계속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나머지는 이미 두 사람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오직 둘만이 치열한 자리싸움과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제발.’
그렇게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고 한참을 달리다, 드디어 승부는 마지막 바퀴에 진입했다.
이 마지막 한 바퀴로 인해 올해 승마 대회의 우승자가 정해지는 것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하고 긴장감 있는 경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경기보다 관중석의 열기가 더 대단했다.
하긴 어제는 결승전임에도 너무 싱겁게 끝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내가 너무 초반부터 치고 나가서 중간에 이미 다른 참가자들과 한 바퀴 이상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와아!!”
“달려! 달려!”
결승선을 반 바퀴 앞두고도 두 사람은 누구 하나 앞서는 이 없이 똑같이 달렸다.
그때였다.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에이든의 상태가 이상했다.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를 못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한 손이 목 부근에 가 있는 게 보였다.
‘목?’
쿵-!
그리고 순식간에 에이든이 말에서 떨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가 타고 있던 말은 그를 버리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케인 다음이었다.
“와아!!”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왜 저러는 거지?”
커다란 함성과 사람들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하지만 내겐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에 허덕이는 에이든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관중석과 경기장 사이의 담을 넘어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에이든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 이미 그의 수하들이 그를 업은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에이든!’
상태가 많이 심각한 것 같아 초조해졌다.
도대체 뭐지?
왜 갑자기 낙마를 한 거지?
왜 말을 타다가 목을……?
잠깐, 목이라고?
율리타에서의 일이 순간 떠올랐다.
율리타에서 그를 구했을 때도 그는 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목걸이 때문인가?’
또 목걸이가 뭔가 잘못된 걸까?
보지 못해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꽤 설득력 있는 추론이었다.
결국 나는 에이든을 따라잡지 못했다.
부리나케 뒤쫓아 갔는데도 이미 그는 마차에 실려 간 뒤였다.
나는 그저 마차의 뒷모습만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 * *
“아가씨!”
저택으로 돌아온 뒤 나는 메리에게 바이언가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했다.
초조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메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알아봤어? 바이언 공자는 어떻대? 괜찮대?”
“공녀님…….”
메리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자 답답해진 나는 그녀를 빠르게 닦달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바이언 공자님께서는 괜찮으시대요.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계시다고 해요.”
에이든이 괜찮다니 다행이었다.
경기장에서 그를 놓치자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가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어 다리에 힘이 풀리듯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메리를 올려다보는데 표정이 심상찮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공자님께서는’이라고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나는 소파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심상찮은 반응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게 있잖아요.”
진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왜? 무슨 일인데?”
“아까 결승전이 열리기 직전, 경기장으로 오는 길목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해요.”
“사고?”
“네, 근데 그 사고를 당한 분이 바이언 공녀셨대요.”
“뭐?”
아델라가 사고를 당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어떻게 무슨 사고를 당한 건데?”
“그게…….”
맘은 급한데 메리가 자꾸 말을 끌며 답답하게 굴었다.
“얼른!”
나는 얼른 말하라며 그녀를 다시 닦달했다.
“놀라지 마세요. 마차에서 불 폭탄이 터졌다고 해요.”
“불 폭탄?”
불 폭탄이라니…….
그러니까 한낮에 길에서 아델라가 테러라도 당했다는 건가?
잠깐.
불 폭탄?
순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분 나쁜 기시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는 불 폭탄과 관련된 소설의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게 뭐지?
너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순간 뇌가 정지한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씨, 아가씨?”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귓가에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그러니까 아델라가 타고 가던 마차에서 불 폭탄이 터졌다고? 그래서 아델라는? 아델라는 어떻게 됐어?”
“불행 중 다행히도 폭탄이 작아 마차의 뒷바퀴만 날릴 정도여서 목숨은 구하셨다고 해요.”
누군가 멱살을 단단히 붙잡은 듯 숨이 콱 막혔던 것이, 아델라가 무사하다는 말에 간신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차가 주저앉으면서 그 반동으로 공녀님이 마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가뜩이나 몸도 약하신 분이 많이 놀라셨는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셨다고…….”
“기절? 지금은? 깨어난 거야?”
“아뇨,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시대요.”
맙소사.
그럼 혼수상태에 빠진 건가?
가만 보니까 원작과 묘하게 다르지만 비슷하게 가고 있었다.
아니, 근데 도대체 누가 왜 아델라의 마차에 불 폭탄을 설치한 거지?
‘돌아 버리겠네.’
아델라를 위험에 빠트린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불 폭탄이었다.
원작의 벨리타가 아델라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 도구.
악역 벨리타가 사라졌는데도 원작과 비슷한 일이 터지다니, 설마 어떻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설마 그 범인으로 내가 지목되는 건 아니겠지?
어쩐지 이 일이 범인을 나로 몰아가기 위한 누군가의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은 헤이츠 가문의 상징이니까.
막연한 심증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괜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설마…….’
나와 아델라.
헤이츠 가문과 바이언 가문.
나와 에이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 엄청난 짓거리를 저지를 만한 자가 누굴지 짐작이 갔다.
그저 추측이었다.
그렇기에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만약 정말 그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말로 내가 생각한 그가 범인이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적인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그를 조금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아델라가 어떤지 보고 오는 게 급선무였다.
“바이언가에 갈 테니 준비해.”
“네? 지금요?”
“그래, 공녀가 어떤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와야겠어.”
얼마나 다쳤는지, 아직도 못 깨어나고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난 뒤 마차를 타고 가히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바이언가에 도착했다.
마차의 움직임이 멈추자 누군가 잡아 주기도 전에 황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헤이츠 공녀님 오셨습니까?”
나를 맞이한 바이언가 집사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바이언 공녀를 만나고 싶네.”
“아가씨께서는 지금 누구도 뵙지 못하십니다.”
“공녀의 사고는 이미 들었네. 상태가 어떤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하나…… 저택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공작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시라도 아델라를 보기 위해 공작에게 직접 청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바이언 공작님을 잠시 뵙고 싶다고 말씀드려 주게.”
“죄송하지만 공작님께서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지 쉽지 않았다.
“꼭 만나 뵙고 싶으니 한 번만 일러 주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집사가 안으로 사라졌다.
이 문제는 어떻게든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아니면…….
원작을 생각하면 결말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나는 죽고, 헤이츠 가문은…….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벨리타가 했다고 해도 억울한데 하물며 내가 한 짓이 아닌 일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초조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으로 저택 입구를 서성이는데 집사가 밖으로 나왔다.
“공작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다행이었다.
나는 집사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저번에 한번 왔었던 곳 앞에서 멈춰 섰다.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공작님, 헤이츠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예, 들어가시지요.”
“고맙네.”
나는 집사에게 고맙다고 전한 뒤 어두운 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소?”
공작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번과 다르게 앉으라는 소리도 안 하는 걸 보니 나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지?”
바이언 공작은 내 아버지와는 확실히 달랐다.
만약 내가 이런 식으로 다쳤다면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불같이 화를 내셨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언 공작은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싸늘하고 살벌하게 나를 쳐다보면서도 전혀 흥분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공녀에게 내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소. 용건만 간단히 하시오.”
“바이언 공녀의 상태가 많이 안 좋나요?”
무엇보다도 먼저 아델라의 상태가 궁금했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네?”
“공녀가 무슨 자격으로 아델라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하는 거지?”
여기서 말려들면 안 된다.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이런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지금 바이언 공녀의 마차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 저라고 의심하고 있으신 건가요?”
“…….”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았다?”
“네.”
“어떻게 믿지?”
“그렇다면 제가 했다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무엇이죠? 불 폭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
“불은 헤이츠 가문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그렇기에 불 폭탄을 썼다는 것만으로 저를 범인으로 모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아델라가…….”
계속 입을 다문 채 내가 어디까지 지껄이나 지켜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델라가 오늘 밖에 나간다는 사실은 공녀만 알고 있다고 했소.”
“저만 알고 있었다고요?”
“그렇소. 우리 가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오직 공녀만이 오늘 아델라가 외출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소.”
이건 아니었다.
이건 완벽하게 나를 몰아넣으려는 누군가의 음모였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라…….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공녀를 믿을 수 있겠소?”
“하지만-.”
“이만 가 보시오. 공녀와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갑작스런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내 결백을 주장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오. 계속 그렇게 얘기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고 했소. 누가 한 짓인지는 곧 밝혀지겠지. 범인은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이만 나가시오.”
내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있는 공작이 매서운 눈길로 노려봤다.
‘미치겠네.’
아무래도 지금을 여기서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좀 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난 후에 행동을 취해야 할 듯했다.
나는 공작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여기서 좀 더 안으로 가면 아델라의 방이 있었다.
다양한 꽃들로 꾸며져 있는 매우 예쁜 문이 있는.
나는 아델라의 방을 멀리서 응시했다.
‘아델라.’
꼭 밝혀내겠다.
아델라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밝혀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다짐했다.
* * *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잠시 멈추어라.”
“아가씨, 왜 그러세요?”
“맥시어스가로 가자.”
“맥시어스가요?”
“그래.”
여행 전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락날락했지만 돌아와서는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은 곳이었다.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물었다.
“정말로 맥시어스가로 가실 거예요?”
“응, 얼른 가자.”
“네, 알겠습니다.”
마차가 방향을 돌려 맥시어스가로 향했다.
만약 케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오늘 섣불리 한 이 결정을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내 감은 계속해서 그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떠보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가씨.”
“왜?”
“아가씨께서 갑자기 맥시어스가에 가시겠다고 해서 걱정이 돼서요.”
“별일 아니야.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그런 거죠?”
“응.”
메리를 안심시킨 뒤 다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맥시어스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오랜만에 본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벨리타 아가씨.”
맥시어스가의 집사였다.
“아가씨,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냈나?”
“네, 저야 별 탈 없이 잘 지냈습니다.”
“공작님을 뵈러 왔네.”
“공작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2년이 훌쩍 넘어서 온 이곳은 그때와 여전했다.
케인을 닮아 서늘하고 무미건조한 기색이 확 느껴졌다.
잠시 후 집사가 케인의 집무실 앞에 멈췄다.
“공작님, 벨리타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집사가 안에 있는 케인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음에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공작님-.”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문이 확 열리며 케인이 나타났다.
“공녀께서?”
내가 온 게 믿을 수 없는지 케인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공녀?”
“맥시어스 공작님, 이렇게 미리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공녀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케인이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그를 스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케인이 나를 불렀다.
“공녀.”
나는 뒤돌아 그를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아니에요. 오래 있지 않을 거라 이대로 있는 편이 좋겠어요.”
“그래도…… 알겠습니다.”
살갑지 않은 내 태도에 케인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바로 꺼냈다.
“공작님께서는 오늘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있었던 바이언 공녀의 마차 사고 소식을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
“불 폭탄에 의해 마차가 폭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일부러 불 폭탄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불 폭탄이라니, 누가 그런 짓을-. 설마 바이언가에서 공녀를 의심하는 겁니까?”
와, 이젠 아델라가 괜찮은지 묻지도 않는구나.
아무리 지금은 파혼했다지만 한때는 절절이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의 무심함과 차가움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 나한테도 그렇게 대했겠지.’
2년 전, 그의 파혼 요구를 들은 내가 바닥에 주저앉았는데도 거들떠도 안 보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이제는 내 걱정을 한다.
아니, 내 걱정만 한다.
난 그게 전혀 반갑지 않았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어떻게 공녀를 의심할 수가.”
“……그러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누가 봐도 저를 노리고 꾸민 일임이 틀림없어요.”
말을 느리게 하며 그의 모습을 살피는데 이상하게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갸우뚱했다.
그는 마치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것에 대해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아 보였다.
‘뭐지?’
케인이 그런 것이 아닌가?
아니다.
아직 그런 판단을 하기엔 일렀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자극할 만한 말을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일이 저와 바이언 공녀, 혹은 헤이츠 가문과 바이언 가문을 이간질하려는 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것 같습니다. 한데 오랜만에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그럼…….”
뭔가가 떠올랐는지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역시 이 남자는 눈치가 매우 빨랐다.
“설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공녀께 마음이 있다 하여 그런 엄청난 짓거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람은…….”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사람은 누구나 간절한 것이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법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을 거라 판단한 겁니까?”
그의 얼굴이 견디기 힘든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공녀께 저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까?”
“…….”
“그런 무도한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인간으로 보였다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아니시면 됐습니다.”
엄청나게 억울하고 상처받은 얼굴로 말하는 케인에게 나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제가 공작님을 오해한 것이라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정 없는 사과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케인을 오해했다고 해도 나는 그에게 죄책감 따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차라리 나의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냉정함에 그가 떨어져 나간다면 고마울 뿐이었다.
그만큼 나는 이 남자에게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나를 도와준다고 한다.
벨리타에게 있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냉정했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지금 이 모습 또한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제가 범인으로 몰려도 공작님의 도움은 별로 받고 싶지가 않을 것 같지만, 말씀은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뒤로 돌아 집무실을 나왔다.
* * *
‘정말 케인이 아닌가?’
저택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아무리 봐도 내 촉은 케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의 태도와 행동은 그가 아닌 듯했다.
‘아니면 연기를 잘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또 그게 연기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서 더 문제였다.
‘그렇다면 누구지?’
누가 나에게 억하심정을 갖고서 그런 일을 벌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나는 이곳 사람들 중 아는 이가 손에 꼽았다.
그렇기에 더 오리무중이었다.
‘원작에서는…….’
이제 원작은 기억도 잘 안 난다고.
미치겠네.
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쥐어짜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벨리타가 불 폭탄을 마차에 설치해서 폭파시켰을 때 그녀가 범인인 게 어떻게 밝혀졌더라.
‘아, 맞다.’
생각났다.
벨리타가 마차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건 폭발한 마차 근처에서 벨리타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불의 가문의 사람들이 불을 이용할 때는 직접 현장에서 마법을 쓸 수도 있지만 물건을 매개로도 가능했다.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상 주변의 어떤 물건에 힘을 불어 넣으면 그 물건을 통해서 불을 붙이거나 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물건이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힘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힘을 이용하려는 사람의 몸에 일정 시간 붙어서 힘을 공유해야만 했다.
벨리타는 이 점을 이용하면 완전 범죄가 가능할 거라 믿었다.
왜냐면 헤이츠 가문의 불은 대상은 물론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리기 때문에 마법의 매개체 또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폭탄에 붙여 둔 벨리타의 물건이 다 타지 않아 그 일부가 남겨졌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물건이 아마…… 목걸이였었지?’
가지고 싶은 건 거의 다 가질 수 있었던 부유한 벨리타에게 그 목걸이는 특별할 것도 없는 목걸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목걸이는 장인이 정성을 기울여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걸이였다.
그래서 타다 만 목걸이를 근거로 범인을 추적한 결과 벨리타의 범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던 거였다.
“아가씨,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메리의 목소리가 긴 상념을 깨웠다.
“알았어. 나갈게.”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소식을 들으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뭐라고 말할지 생각하면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벨리타, 앉으렴.”
“네.”
나는 평소 식사하는 자리에 앉은 뒤 맞은편에 앉은 부모님을 쳐다봤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들으셨죠?”
“그래, 바이언 공녀가 마차 사고를 당했다고?”
“네, 불 폭탄에 의한 사고라고 했어요.”
“크흠.”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낮에 바이언가와 맥시어스가에 갔다 왔다고 들었다.”
“벨리타, 바이언 공녀의 상태가 어떤지 봤니?”
어머니가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뇨, 바이언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공녀는 만나지 못했어요.”
“그렇구나. 괜찮아야 할 텐데…….”
“오늘 승마 대회 결승전도 갔다 왔다고 들었는데 경기장에서 갑자기 바이언 공자가 쓰러졌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네, 맞아요. 결승선을 몇 발짝 앞두고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런데 바이언 공자는 금방 괜찮아졌다고 해요. 그리고…… 아니에요, 식사 하세요.”
나는 율리타에서 에이든이 쓰러졌던 이야기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왠지 에이든의 비밀을 말하는 느낌이 들어 내키지 않았다.
“그래, 바이언 공작이 뭐라고 하더냐. 우리 가문을 의심한다고 하더냐?”
급한 성정답게 아버지께서 슬슬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문보다는 저를 의심한다고 하셨어요.”
“뭐라! 내 바이언 공작을!”
“이유가 뭐라고 하니?”
“아무래도 불 폭탄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몰랐는데 바이언 공녀가 오늘 외출할 거라는 건 외부인 중에서는 저만 알았던 사실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만 알았다고?”
“네, 그리고 맥시어스 공작님 일도 그렇고 바이언 공작님께서 저를 의심하기엔 충분하죠.”
“크흠, 네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정말 너무하는구나.”
“저를,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너는 우리 딸이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벨리타, 부모가 자식을 안 믿어 주면 누굴 믿겠니.”
두 분의 말에 순간 속에서 울컥하고 치솟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곧 목이 메었다.
부모님은 지금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자신들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맞아요. 저는 절대 하지 않았어요. 저는 부모님께 피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아요.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도 하지 않을 거예요.”
마음이…….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내 편이, 나를 지지해 주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도 행복한 것이구나.
“그래, 맥시어스가는 왜 간 것이냐?”
“사실 저는 이 사건의 배후로 맥시어스 공작님을 생각했었어요.”
“맥시어스 공작을?”
“네, 바이언 공작님께서는 제게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저는 하지 않았으니, 맥시어스 공작님께 더 동기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케인에 대해서는 이미 부모님께 말씀드린 터라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내 말에 동조했다.
“그래서 맥시어스 공작은 뭐라고 하던?”
“당연히 하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벨리타, 그럼 너는 여전히 맥시어스 공작이 그런 짓을 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사실…… 잘 모르겠어요. 공작님을 뵙기 전에는 확신이 있었는데 그분의 태도를 보니 그 확신이 점점 옅어져요.”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만약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제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제가 직접 찾고 싶어요.”
“어차피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감히 누가 헤이츠가의 공녀를 범인으로 몰 수 있겠느냐! 그렇게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건 그렇게 간단한 사건이 아니에요. 무려 제게 누명을 씌우려 한 사건이라고요. 저는 그자를 반드시 찾아내서 벌을 받게 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네가 어떻게 범인을 찾을 수 있겠느냐.”
“바이언 공녀를 만날 수 있으면 좋은데 아직 의식을 못 찾은 것 같아서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사건이 난 마차와 주변 탐색부터 시작하려고요.”
“크흠. 알았다. 우선 나는 내일 의회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마. 바이언 공작이 분명 내일 말을 꺼낼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벨리타, 절대 위험한 일은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어머니의 눈빛에 나를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네, 항상 조심할게요, 어머니.”
그렇게 말을 끝내고 부모님과 나는 식사를 계속했다.
* * *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 뒤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오늘 밤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설마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지.’
나중에 방어를 하기에도 좋고.
달이 가장 높게 뜨고 온 세상이 고요할 때, 아무도 모르게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나는 일찍 잠이 드는 척을 했다.
“나 일찍 잘 거니까 절대 아침까지 깨우지 마.”
“벌써 주무시게요?”
“응, 너무 피곤하네.”
“그러실 만해요. 그럼 나가 볼게요. 주무세요, 아가씨.”
다행히 오늘 많은 곳들을 다녀왔기 때문에 메리의 의심은 피할 수 있었다.
“응.”
메리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바로 잠옷을 벗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방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계속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더 이상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창문을 조심히 열었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2층임에도 생각보다 높이가 있었다.
그래서 아까 식사를 마치고 몰래 준비한 밧줄을 침대 기둥에 묶은 뒤 창문 너머로 밧줄을 늘어뜨렸다.
밧줄이 땅에 닿는 소리가 살짝 들리는 걸 보니 내려가기엔 충분해 보였다.
밧줄이 단단하게 고정됐는지 한 번 더 세게 당겨 본 뒤 줄을 잡고 창밖으로 나섰다.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몸을 숙이고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뒤 조심히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개구멍을 통해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어.’
오늘 내가 확인할 것은 단 하나였다. 그것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무모한 행동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 갔다 오자.’
밤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얼른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차 사고가 난 곳은 경기장으로 오는 길목 중 번화가에서 벗어난 숲길이었는데 헤이츠가의 저택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부지런히 걸어서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혹시나 마차를 벌써 가져갔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현장 보존을 위해서 인지 마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마차 주변을 지키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횃불을 들고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조심히 들키지 않게 마차 가까이에 접근했다.
병사가 마차 앞쪽에서 졸고 있어서 뒤로 몰래 접근하기는 수월했다.
마차는 메리의 말대로 뒷바퀴만 새까맣게 타서 반쯤 부서진 채 기울어져 있을 뿐 다른 곳은 멀쩡했다.
‘진짜 작은 폭탄이었나 보네.’
마차의 상태를 보고 나니 범인이 누구든 간에 아델라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니었나 보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손에 아주 조그맣게 불을 지핀 후 그 불에 의지하며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혹시나 내가 아는 물건이라든가, 나를 범인으로 몰 만한 무언가가 있는지 재빠르게 찾아봤다.
하지만…….
원작처럼 목걸이나 다른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원작과 다른 상황인데 원작과 같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지.
다행이었다.
그래도 확인을 하니 어쨌든 마음이 가벼워지고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 가야겠다.’
할 일을 끝냈으니 아예 이곳에 오지 않았던 사람처럼 떠나면 된다.
손의 불을 끈 뒤 다시 한번 앞의 남자를 확인하는데 갑자기 근처에서 다른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어이!”
졸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나도 튀어나온 남자로 인해 덩달아 놀라며 마차 뒤로 몸을 숨겼다.
“졸고 있으면 어떡해!”
“아, 너무 졸리네.”
“정신 차리라고. 가서 세수 좀 하고 오는 게 어때?”
“그래야겠어. 잠시 갔다 올게.”
“그래,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게.”
두 남자가 자리를 교대하자 졸고 있던 남자가 금방 자리를 떠났다.
“누가 온다고 여길 지키고 있으라는 거야.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남자가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말을 듣자 하니 나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얼른 가자.’
나는 아까보다 더 조심히 몸을 움직이며 마차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남자가 나를 보지 못하게 마차 뒤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꽤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재빠르게 몸을 근처 숲으로 숨기려던 순간.
“아- 읍!”
“쉿…….”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지르려 하자 그가 나를 품에 안으며 간신히 내 입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내게 조용히 하라며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무슨 소리지?”
마차를 지키던 남자가 내가 놀라서 풀숲을 건드린 소리를 듣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남자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숲 쪽으로 움직이며 동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야?”
그때 내내 졸다가 잠깐 세수하러 갔다 온다던 남자가 나타났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길래. 네 소리였나 봐.”
“여기에 누가 온다고 그래.”
‘휴.’
저들이 예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우리는 숲속으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이제 저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뒤에서 나를 껴안고 있던 몸이 내게서 떨어졌고 이후 내 입을 가리던 커다란 손도 떨어졌다.
하지만 놀란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그저 황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에게 눈으로 물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내 눈빛을 이해한 그가 내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몸을 숨기긴 했지만 그도 나도 여기서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조심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숲을 통과해 작은 공터가 나오자 나는 곧바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에이든이 왜…… 왜 여기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현듯 그도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나조차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 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잠시 마차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아, 그래요? 저도 잠시 살펴볼 게 있어서…….”
구름이 달을 잡아먹고 있어서 유독 빛 한 점 없는 밤이었다.
그래서 그가 날 어떻게 보고 있을지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날 의심할까?’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의심을 살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어쩌면 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차를 잠시 보러 왔는데 벨리타가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나보다 더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고 어둠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걸린 거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다.
“오늘 바이언가에 갔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몸은 어때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낮에 경기장에서 쓰러져서 계속 걱정했어요.”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당연하죠. 그렇게 쓰러지고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목 주변을 만지는 거 같았는데 또 목이 아팠던 거예요?”
“…….”
“율리타에서도 쓰러질 정도로 아팠잖아요. 왜 아픈 거예요? 계속 아픈 거예요?”
나는 이제까지 참았던 걱정을 한꺼번에 터트리느라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괜찮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쩐지 잠겨 있었다.
“다행이네요. 아델라는요? 아델라는 어떤가요? 아델라의 사고 소식을 듣고 바로 바이언가에 갔지만 바이언 공작님께서 만남을 불허하셨어요. 그래서 두 분 다 보지도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저택에 오셨었습니까?”
“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제가 한 짓으로 알고 계세요. 불 폭탄을 썼다는 이유와 그리고…….”
“그리고 뭡니까.”
“오늘 아델라가 밖에 나가는 건 저만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말 아니에요. 제가 왜요? 저는 그럴 이유가 없어요.”
억울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억울함을 한가득 토로했다.
“그래서 혹시나 마차에 범인을 찾을 만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해서 온 거예요.”
물론 나를 범인으로 몰아갈 물건이 있을까 봐 온 것이었지만 그게 그거였다.
어쨌든 내가 범인이 아님을 밝히고 진짜 범인을 찾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저 또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마차를 살피러 온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차 사고의 범인인 벨리타를 죽인 게 그였다는 것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못한 게 없음에도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내가 한 게 아니니까 침착해.’
제발 침착하자.
“누님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요……?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다친 거예요? 외상은 크지 않다고 들었는데…….”
“상처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놀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네. 진짜 어떻게 아델라에게……! 꼭 범인을 잡아야 해요.”
“……맞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데 왠지 그의 목소리가 좀 떨떠름했다.
설마 그도 나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거야? 정말로?
그러고 보니 계속 나는 범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내 말에 그가 긍정하는 대답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에이든은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까진 모르겠습니다.”
“저를, ……아니에요.”
도저히 나를 범인으로 생각하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의 입에서 내가 범인 같다는 말이 나오면 너무나 절망스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제가 벨리타를 범인으로 생각하는지 궁금하신 겁니까?”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이 에이든이 되물었다.
“그게, 네, 바이언 공작님처럼 에이든도 저를 이 사건의 유력한 범인으로 생각해요?”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십 년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닙니다.”
“네?”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이었지만 의외의 대답이 나와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저는 절대 벨리타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요?”
정말 내가 하지 않은 건데도 그 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네, 지금까지 제가 겪은 벨리타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네, 맞아요!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 활짝 웃었다.
그러자 그에게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이번에 꼭 힘을 합쳐서 범인을 찾아요. 저도 아델라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좋습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이었다니.
하긴 죽음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느낌이었으니 당연했다.
“오늘은 많이 늦었습니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네? 아, 네. 감사해요.”
“가시죠.”
“네.”
에이든과 저택까지 함께 걸었다.
그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정말로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몇 발짝 더 가다가 의아함에 뒤돌아 그를 쳐다봤다.
“왜 그래요?”
그때 내내 어두웠던 하늘이 서서히 밝아졌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아…….’
언젠가 이런 순간이 또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감탄을 나는 지금 또 저절로 되새기고 있었다.
“불현듯 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래서 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왜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의 말에 싱겁게 웃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나를 곧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그의 눈을 피하진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오롯이 바라봤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순진하게도 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그렇게…….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헤이츠 공작은 황궁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안건은 누가 봐도 불 보듯 뻔했다.
바이언 공작이 자신의 딸인 아델라 바이언이 당한 마차 사고의 범인을 밝혀 달라고 나올 것이 분명했다.
‘어느 놈이 감히 헤이츠가를!’
헤이츠 공작은 누군가 자신의 가문을, 그것도 가장 소중한 딸인 벨리타를 건드렸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져 어제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사건은 바이언가뿐만 아니라 헤이츠가의 명예를 위해서도 반드시 범인을 색출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다신 헤이츠 가문을 넘보지 못하도록 제대로 밟아 줄 생각이었다.
‘감히 내 딸을!’
그리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감히 벨리타를 범인으로 의심한 바이언 공작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일어나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황제가 회의장에 도착했다는 시종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 사이로 황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황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회의장의 상석에 착석하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오. 오늘 회의의 안건은 무엇이오. 자, 하나하나 차례차례 시작해 봅시다.”
“폐하, 최근 수도의 제국민들 사이에서 허무맹랑한 소문이 돈다고 합니다.”
“허무맹랑한 소문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그것이-.”
첫 안건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안건이 회의에 상정되었다.
그렇게 약 두 시간이 흘렀고 이제 한 가지 안건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마지막 안건입니다.”
시종의 말에 바이언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발언했다.
“황제 폐하, 어제 번화가 근처에서 제 여식인 아델라 바이언이 마차 사고로 크게 다쳤습니다.”
“바이언 공녀가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많이 다쳤소? 지금은 괜찮은 것이오?”
황제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아델라의 상태를 물어봤다.
“충격이 커서 그런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런,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의사가 필요하다면 궁의를 보내 주겠소.”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폐하. 하나 제가 드릴 말씀은 치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바이언 공작이 황제를 비롯하여 주변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특히 그의 시선이 헤이츠 공작에게 꽤 오래 머물렀다.
“폐하, 이번 사고는 그저 단순 사고가 아닙니다.”
바이언 공작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단순 사고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제 여식이 탔던 마차 사고는 불 폭탄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바이언 공작이 불 폭탄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회의장에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이 헤이츠 공작을 아닌 척 힐끔거렸다.
“크흠!”
헤이츠 공작이 언짢고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헛기침을 했다.
황제가 그런 헤이츠 공작을 한번 쳐다보곤 바이언 공작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불 폭탄이라니, 자세히 좀 말해 보시오.”
“제 여식이 타고 있던 마차에 설치된 불 폭탄이 터졌고 그로 인해 마차 안에 있던 제 여식이 마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분명 누군가 제 여식을 노리고 불 폭탄을 설치한 것입니다.”
바이언 공작은 애써 속을 가라앉히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해 나갔다.
“도대체 누가 바이언 공녀를 노린단 말이오.”
“황제 폐하.”
갑자기 바이언 공작이 앞으로 나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절절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이번 사건의 범인은 반드시 제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바이언가에서 이 사건을 맡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수도의 사건은 수도 치안대에서 담당하는 것이 법이오.”
“제 여식이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로서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는단 말입니까. 폐하, 제발 바이언가에게 사건을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범인을 잡아 낼 것입니다.”
황제가 난감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바라봤다.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허심탄회하게 말씀들 해 보시오.”
황제는 눈치 보지 말라고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귀족들 중 누가 감히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제국에서 황제보다 더 추앙받는 이들이 세 공작 가문이었기에 다들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헤이츠 공작, 말씀해 보시오.”
“이번 마차 사건은 바이언 공녀가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불 폭탄을 이용해서 헤이츠 가문에 누명을 씌우려는 의도가 확실합니다. 그렇기에 저 또한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에 헤이츠가 또한 범인을 추적하는 데 함께하고 싶습니다.”
“헤이츠 공작,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번 사건은 우리 바이언가에서 맡을 겁니다.”
평소라면 잘 흥분하지 않는 바이언 공작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두 가문이 힘을 합하면 더 빨리 범인을 색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저 또한 바이언가에서 전담으로 조사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헤이츠 공작과 바이언 공작이 으르렁거리듯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노려봤다.
“저도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그때 케인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서로를 매섭게 응시하던 두 공작이 동시에 온갖 욕을 담은 시선으로 케인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케인은 자신들의 딸들을 마음 아프게 한 공공의 적이었다.
“맥시어스 공작, 말씀해 보시오.”
“이번 사건에 세 공작 가문이 합동으로 수사를 관할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맥시어스 공작가도 말이오?”
“예, 저 또한 범인을 누구보다 잡고 싶기 때문입니다.”
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세 가문이라…….”
“폐하, 그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명백한 것은 제 여식이 다쳤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오직 추측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과 관련 없는 맥시어스 공작가는 왜 끼어든단 말입니까.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바이언 공작은 이미 범인을 벨리타로 확신했다.
그러니 헤이츠가가 사건 조사에 끼어든다면 용의선상에서 벨리타를 없애기 위해 무슨 수든 쓸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작태를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폐하, 헤이츠 가문은 결백합니다. 하지만 바이언 공작은 제대로 된 근거나 정황조차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헤이츠 가문을 범인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헤이츠 공작.”
“공작께서 제 여식에게 한 말씀은 이미 다 전해 들었습니다.”
“하 참! 의심할 만하니까 하는 겁니다. 제가 증거도 없이 그러는 줄 아십니까!”
“증거는 무슨! 불 폭탄을 사용했다는 것이 증거입니까!”
“그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그래 봤자 전혀 쓸모없는 증거겠지. 크흠!”
“그만들 하시오.”
웬만해선 잘 끼어들지 않는 황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회의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황제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세 공작을 차례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다시 귀족들이 세 공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맥시어스와 헤이츠가 비슷한 의견이고 바이언만 다른 의견이어서 2대1이라는 걸 자각했다.
아무리 바이언 공작가가 날고 긴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적 열세는 피하기 힘들었다.
“제국을 넘어 대륙 최고라 일컬어지는 세 가문에서 나선다면 범인을 하루 빨리 잡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그래서 세 공작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이 케인의 의견에 앞다투어 찬성의 목소리를 냈다.
“폐하!”
바이언 공작이 절대 인정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황제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황제가 손을 올려 바이언 공작이 더 말하려는 것을 제지했다.
“마지막 안건은 세 공작가가 함께 마차 폭탄 사건 조사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황제가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자 바이언 공작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조사단의 단장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를 추천하면 좋겠소?”
“폐하, 세 공작 가문에서 각자 한 명씩 각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 공작가 다음으로 위세를 가진 에스티라 후작이 의견을 냈다.
“오, 에스티라 후작, 좋은 의견이오. 공들은 후작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괜찮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 공작이 입을 다문 사이 다른 귀족들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황제가 세 공작을 쳐다보며 그들에게 물었다.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폐하, 저 또한 괜찮은 의견이라 생각합니다. 세 가문 중 한 가문이 조사단의 단장을 맡게 된다면 그 또한 불공평한 처사일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조사단에 합류하게 된 것만으로도 헤이츠 공작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서 그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맥시어스 공작은 어떠시오.”
“저 또한 헤이츠 공작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알겠소. 그럼 바이언 공작은 어떠시오.”
“……결정대로 따르겠습니다.”
바이언 공작이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헤이츠 공작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몰래 비소를 흘렸다.
“좋소. 그렇다면 조사단의 단장은 공작가에서 각자 한 명씩 차출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소.”
회의를 마친다는 말에 귀족들이 모두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귀족들을 슥 훑은 뒤 상석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회의장을 나섰다.
회의장의 문이 닫히자 분위기가 일순 차갑게 얼어붙었다.
헤이츠 공작과 바이언 공작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벌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헤이츠 공작,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후회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그저 모두와 함께 범인을 찾고 싶을 뿐입니다.”
“범인이 범인을 찾는다니 웃기지도 않지.”
헤이츠 공작의 말에 콧방귀를 뀐 뒤 바이언 공작이 회의장을 빠르게 떠났다.
“저, 저, 저자가!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헤이츠 공작이 바이언 공작이 나간 문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분노를 내뱉었다.
“헤이츠 공작님.”
그런 그의 뒤에 대고 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헤이츠 공작을 불렀다.
헤이츠 공작이 뒤돌아 못마땅한 시선으로 케인을 쳐다봤다.
“맥시어스 공작은 뭐 하러 끼어든 것이오?”
“저 또한 이번 일의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던 헤이츠 공작의 눈이 살짝 풀렸다.
“바이언 공작님께서 헤이츠 공녀를 범인으로 몰고 갈 거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 그렇기에 헤이츠 공녀께서 그런 취급을 받는 걸 저 또한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맥시어스 공작도 벨리타가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라 믿소.”
“맞습니다. 헤이츠 공녀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럼 이번에 함께 잘해 봅시다.”
헤이츠 공작이 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케인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미소까지 보이며 헤이츠 공작의 손을 맞잡았다.
* * *
아버지께서 회의에 갔다 오신 후 뜻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마차 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한 조사단이 발족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내가 헤이츠가의 대표로서 조사단의 단장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사건에 대해 따로 시간을 내서 조사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공식적인 조직에 몸담게 된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았다.
꽤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반드시 범인을 찾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틀 후 조사단의 첫 회의 일정이 잡혔다.
조사단의 구성 인원은 각 공작가의 단장 세 사람을 포함한 열다섯 명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며 첫 회의가 열리는 장소에 막 도착했다.
회의 장소는 황궁 근처에 있는 황실 소유의 작은 저택이었다.
조사단의 단원들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정한 중립지대였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내릴 준비를 하며 리안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리안일 거라고 생각하곤 방긋 웃으며 상대를 쳐다보는데 리안이 아닌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에이든?”
그가 눈을 곱게 접으며 내게 정중한 자세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언제나 느꼈듯 그의 손은 무척이나 크고 단단했다.
“바이언가의 대표로는 에이든이 뽑힌 거예요?”
“그렇습니다.”
“아하.”
그를 보자마자 에이든이 이곳에 온 것이 단번에 납득이 갔다.
며칠 전에도 그는 밤늦게 홀로 마차를 살펴보러 왔었다.
아끼는 누나를 다치게 한 범인을 제 손으로 잡고 싶어 하는 그의 강력한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그와 접촉한 손을 떼기도 전에 뒤에 다른 마차가 도착했다.
나는 마차에 달린 가문의 표시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푸른 빛깔의 드래곤.’
맥시어스가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그리고 그 마차에서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남자가 내렸다.
“……헤이츠 공녀.”
나를 부르고 있지만 케인의 시선은 내 얼굴에 있지 않고 좀 더 밑에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조금 숙이니 에이든과 아직도 손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어스 공작님.”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에이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케인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모르겠지만 에이든 또한 케인에게 인사하면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맥시어스 공작님, 승마 대회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승마 대회는 결국 케인의 우승으로 돌아갔다.
너무 아쉬웠다.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에이든이 조금 더 앞서 있었다.
결승전을 코앞에 두고 에이든이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우승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바이언 공자. 하지만 너무나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몸은 이제 괜찮은 겁니까?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케인의 말이 마치 너는 이곳에서 좀 빠지는 게 어떻겠냐는 의미로 들렸다.
“괜찮습니다.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되진 않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의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괜찮은 거 맞아요? 좀 쉬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의 상태를 캐물었다.
“괜찮아요, 벨리타.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괜한 걱정이라뇨.”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으려고 했는데 에이든의 손이 딸려 올라왔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케인이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두 분이서 꽤 많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케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회의를 보셨다면 과연 두 분이 그렇게 사이좋게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나도 안다.
아버지와 바이언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말이다.
분명 어제 회의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으르렁거렸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그걸 케인이 나를 옭아맬 무기로 휘두르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이제 보니 꽤 고리타분한 분이시네요.”
“무슨 뜻입니까?”
케인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무리 공작님이셔도 저희와 나이도 비슷하셔서 생각이 좀 트이신 분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
케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나는 그의 시선에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계속 말했다.
“비록 부모님들께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을지언정 그건 부모님들 세대에서 끝이 나야 해요. 우리 세대에서도 그 악감정을 이어 간다면 어찌 이 제국을 함께 이끌어 가며 번성시킬 수 있겠어요?”
내 말이 끝나자 에이든이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 행동이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제가 헤이츠 가문의 가주가 되면 이때까지 저를 옭아맸던 케케묵은 감정들을 모두 다 놓아줄 거예요. 그리고 두 가문의 가주들과 함께 새 시대를 열 거예요. 그런데 맥시어스 공작님께서는 이런 저와 뜻이 다르신 것 같아 무척 안타까울 뿐이네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두 남자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들어가죠. 회의 시간에 늦겠어요.”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케인을 뒤로하고 에이든의 손을 잡아끌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회의장 앞에서 마주 잡았던 손을 이제야 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에이든은 다 알면서 항상 저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네요. 공작님과의 일에 매번 이런 식으로 에이든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벨리타에게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다면 언제든 기꺼운 마음으로 도울 것입니다.”
“그럼 제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 같잖아요.”
“전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좋아서요?”
“네, 그렇습니다.”
나를 좋아한다는 말도 아닌데 그 말이 가슴 속에 콕 박혔다.
“그래도-.”
그에게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케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말을 끊고 에이든에게 들어가자는 눈짓을 한 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수도 치안대에서 근무하는 기사들 열둘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고개를 들고 자리에 앉으시게.”
내 말에 기사들이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나와 에이든, 케인은 회의장의 상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작인 케인이 가운데에 앉았고 나와 에이든이 양옆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떤 조사를 하고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 것인지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회의에서 합의한 대로 우선 사고가 난 마차를 조사하기로 했다.
그다음에는 마차를 끌었던 마부를 심문했다.
피해자인 아델라에게도 그 당시의 상황을 물어야 했지만 아델라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말로는 큰 외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원체 몸이 약했던지라 회복이 더딘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마차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나와 에이든, 케인을 포함한 조사단은 마차 사고가 일어난 장소에 와 있었다.
“마차의 뒷바퀴가 반 정도만 날아간 것으로 보아 불 폭탄의 위력이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겠군요.”
에이든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커 봐야 주먹 크기 정도의 폭탄일 거예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두 사람에게 얘기하며 마차를 자세히 살폈다.
그날 밤에 왔을 때는 혹시나 나를 범인으로 몰 흔적이 있지 않을까 걱정돼 그것만 주의 깊게 봤었다.
무엇보다 달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작은 불빛에만 의지했기에 오늘 거의 처음으로 마차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확실히, 바이언 공녀의 목숨에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군요.”
케인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 후 우리는 꽤 긴 시간 동안 마차와 사고가 일어난 주변을 꼼꼼히 탐색했다.
하지만 별로 성과는 없었다.
소설에서 보던 것과 같이 범행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좀만 더 살펴보고 돌아가요.”
“그렇게 하죠.”
“네, 알겠습니다.”
두 남자가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결국 우리는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채 조사단이 쓰고 있는 작은 저택의 회의실로 돌아왔다.
“마부는 어디 있지?”
돌아오자마자 케인이 마부를 데리고 오기로 했던 기사에게 곧장 물었다.
“바이언가의 마부는 심문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알았다.”
“어떻게 할까요? 심문실에는 누가 가죠?”
“다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셋 중 하나만 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증언을 조작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케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금 나에게 있어 에이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케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에이든이 간다면 기꺼이 혼자 가라고 했겠지만 케인이 간다면 절대 혼자 심문을 하게 둘 수 없었다.
“좋아요. 다 같이 가요.”
그렇게 우리는 마차를 살펴보러 갔던 것처럼 심문실에도 함께 내려갔다.
심문실에 내려가니 마부가 온몸을 덜덜 떨면서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마부를 이쪽으로 데려와라.”
“예, 알겠습니다.”
마부를 감시하고 있던 기사 둘이 그를 바닥에 꿇어 앉혔다.
얼핏 마부의 얼굴을 보니 그의 표정에 두려움과 공포감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라.”
케인이 마부에게 명했다.
마부는 변함없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들리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마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걸 보니 지금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네가 사건이 난 날 마차를 끈 바이언가의 마부가 맞느냐.”
“……네, 네. 마, 맞습니다…….”
마부의 시선이 에이든을 향했다.
“도, 도련님. 저,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저, 저는 그저 지, 집사님의 명을 받고 마차를 몰았을 뿌, 뿐입니다.”
마부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저택에서 바이언 공녀를 태우고 출발하기 전에 마차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느냐.”
마부의 말을 무시하고 케인이 물었다.
“어, 없었습니다. 여, 여느 날과 또, 똑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마차에 폭탄이 설치된 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냐.”
“저, 저희 마부들은 마, 마차를 끌기 전에 바, 반드시 마차를 저, 점검합니다. 마, 마차가 깨끗한지, 어디 고, 고장 난 곳은 없는지 반드시 화, 확인합니다.”
“흐음.”
“지, 지체 높으신 분들을 모, 모시는 일인데 아무렴 그, 그래야지요. 도, 도련님. 저, 저는 정말 아무 짓도 하,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마차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억울한 얼굴로 마부가 계속해서 에이든에게 호소했다.
마부의 말을 듣고 나니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나는 두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공녀.”
“분명 폭탄은 저택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설치됐어야 해요. 이 마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차를 확인했을 때 폭탄이 설치된 것을 알았어야 하죠. 그런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케인이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폭탄은 저택에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설치됐다는 건데…….”
그러기에는 바로 옆에서 따라오던 기사들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에이든, 보통 아델라가 저택을 나서면 기사들이 몇 명이나 따라붙죠?”
“최소 네 명은 함께 이동합니다.”
“그날도 분명히 기사들과 같이 이동을 했을 텐데, 폭탄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이 마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마부를 의심하는 내 말에 그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기 시작했다.
“저, 저는 절대 거짓말을 하, 하지 않았습니다. 미, 믿어 주십시오. 제발, 저는 지, 진짜로 폭탄은 보지 못했습니다!”
마부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행동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로 폭탄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때 마부가 뭔가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아- 그, 그날 갑자기 가던 중에 아델라 아가씨께서 창문으로 뭐, 뭔가를 보셨다며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그래서 기사님들 중에 세 분이 자,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갑자기 새로운 정보가 튀어나오자 나는 마부의 말에 집중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폭탄이 터졌던 장소에서 조, 조금 떨어진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마차를 끌고 가고 있는데 아델라 아가씨께서 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마차를 세우라고 하시더니 창문 너머로 웬 끔찍하게 생긴 뭔가가 아가씨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뭔지 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그런지 마부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더듬지 않았다.
자신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린 듯했다.
그러면서 퍽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듯 얘기를 지속했다.
“그래서 기사님들 중 한 분만 남으시고 나머지 분들이 아가씨께서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사님들이 돌아오셨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아가씨께 보고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마부를 쳐다보면 물었다.
“네, 네. 부,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부가 긴장했는지 다시 말을 더듬었다.
마부는 딱 보기에도 압박에 전혀 견디지 못하는 무척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범행을 저지른다?’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모습이 고도의 연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보였다.
그래도 폭탄을 설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기에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래서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다음은 어떻게 됐지? 찾지 못했다고 하니 바이언 공녀는 뭐라고 했나?”
“아, 아델라 아가씨께서는 정말 찾지 못했냐며, 너무 흉측해서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하, 하지만 늦었으니 이만 가자고 하셔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폭탄이 터졌고?”
“네, 네네. 맞습니다.”
마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부에게서 들을 얘기는 다 들었다.
기사에게 마부를 데려가라고 명한 후 우리는 마부에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대화를 시작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남자의 의견이 궁금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바이언 공녀의 곁을 지켰던 그 기사를 찾아야겠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나는 케인의 말에 동의하며 옆에 있던 에이든을 쳐다봤다.
“에이든, 그 기사는 에이든에게 맡겨도 될까요?”
“네, 제가 찾겠습니다.”
“아델라는 아직도인가요?”
“……네.”
“하아, 얼른 깨어나야 할 텐데.”
아델라가 깨어나서 그녀의 말도 들어봐야 하는데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자 나는 안타까움과 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끝내고 내일 다시 모이기로 해요.”
“그럽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사단에서의 첫날을 무사히 마쳤다.
셋이 모이면 불협화음에 어긋날 일만 생길 것 같았는데 앞으로 나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첫날이니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밖으로 나가니 마차가 서 있었다.
두 남자에게 인사를 한 후 마차에 타려는데 에이든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어, 음…… 네, 좋아요.”
아니라고 하려다가 케인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이자 나는 방긋 웃으며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표정을 보니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지겨워.’
언제까지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속이 답답했다.
케인이 내게 좋아한다든가 다시 시작하자는 헛소리만 지껄이지 않았어도 그를 이 정도로 차갑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남에게 억지로 상처를 주는 행동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좀 이성적으로 살면 얼마나 좋아.’
오늘 있었던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케인이 하는 말에 동의한 적도 있었고 꽤 괜찮았다.
답답하다, 답답해.
하지만 절대로 그에게 어떠한 여지를 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먼저 포기하기 전에 내가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벨리타.”
“아, 네.”
에이든이 내게 손을 내밀며 나를 불렀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손을 자연스레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내 뒤로 에이든이 올라타자 마차가 출발했다.
오늘도 메리는 함께 오지 않았다.
일이 금방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따라오지 말고 쉬라고 했다.
그래서 마차 안에는 나와 에이든 둘뿐이었다.
“에이든이 마차를 타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마차보다 말이 편합니다.”
“그럼 수도 밖을 왔다 갔다 할 때도 말을 타고 다니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런데 지방에는 무슨 일로 나가는 거예요? 바이언가는 수도 밖의 사업을 많이 하나 봐요.”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가문의 영지도 관리하고 또…….”
“서커스단도 찾고요?”
우리 사이의 비밀 이야기를 꺼내며 의식적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네, 그렇습니다.”
“아직 찾는다는 사람은…… 못 찾았나요?”
나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네,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누구를 찾는지 궁금하다고 한다면 가르쳐 주실 건가요?”
“……죄송합니다.”
“여전히 비밀이네요?”
“…….”
섭섭한 건 아니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를 도와주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비밀을 고수했다.
“괜찮아요. 사람은 누구나 비밀이 있잖아요. 그래도 나중에 그 사람을 찾게 되면 찾았다고 말해 줄 수 있나요?”
“……그러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돼요.”
“하지만…….”
“네?”
에이든의 표정이 어쩐지 비장했다.
마치 뭔가를 크게 결심한 사람처럼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언젠가 제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벨리타에게 가장 먼저 말하겠습니다.”
“제게 첫 번째로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첫 번째라니 어쩐지 기분이 좋네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러겠다는 사람한테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 대로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면서 미소가 저절로 그러졌다.
대화를 하는 사이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에이든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 * *
다음 날 조사단이 사용하는 저택의 심문실로 에이든이 기사들을 데려왔다.
근데 넷이 아니라 셋뿐이었다.
“그날 바이언 공녀를 호위한 기사는 넷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에이든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날 누님을 곁에서 지켰던 기사가 휴가를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사를 데려오라고 말해 놓고 다른 기사들부터 데려왔습니다.”
“아, 그럼 이들을 먼저 심문할까요?
“네, 그렇게 하죠.”
“그렇게 합시다.”
우리는 바이언가의 기사들을 한 명 씩 불러 사건이 있었던 날에 대해 자세하게 캐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거의 똑같았다.
어제 마부가 한 말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라가 봤다던 흉측한 뭔가를 쫓아갔지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 또한 같았다.
결국 원하던 정보를 건지지 못한 채 우리 셋은 회의실로 돌아왔다.
“휴가를 갔다던 기사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아델라의 곁에 홀로 남아 있던 기사.
마침 휴가까지 간 그 기사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감이 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죠.”
어차피 휴가 갔다던 기사가 돌아와야 사건 해결의 진전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마차를 타려는데 에이든이 또 내게 데려다주겠다며 나섰다.
하지만 나는 오늘은 잠시 들를 데가 있다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시무룩한 것 같아 보였지만 알겠다며 바로 물러났다.
에이든과 헤어지고 곧장 황실 별장을 벗어난 나는 아델라가 뭔가를 봤다던 다리로 향했다.
돌로 만들어진 다리는 마차 폭탄 사건이 발생했던 숲길의 초입에 있었다.
크지 않은 개울을 건널 수 있게 세워진 다리의 폭은 딱 마차 한 대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나는 반경을 넓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델라가 봤다는 건 마물일까?’
하지만 만약 수도까지 마물이 침투했다면 수도 전체가 난리가 나도 벌써 났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뭘 본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세웠던 수많은 추측 중에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아니야, 의심하지 말자.’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까지 쌓아올린 그녀와의 유대를 무너뜨리고 싶진 않았다.
‘우선 그 기사가 먼저야.’
그 기사를 심문하고 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애써 떠오르는 의심을 마음속 깊숙이 꾹꾹 누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 * *
“벨리타, 조사단 일은 어떠냐. 두 사람과 함께하기 껄끄럽지는 않은 것이냐.”
“음, 아직은 괜찮아요, 아버지. 두 분 다 일하는 데 있어선 확실하셔서 오히려 불편한 건 없어요.”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조사단의 일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범인을 잡을 단서는 찾았느냐.”
“아직 못 찾았어요.”
“도대체 어떤 놈이!”
불 폭탄을 이용해서 헤이츠 가문에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이 생각나는지 갑작스레 이야기를 하다 말고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 내 그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여보, 좀 진정하고 식사하세요. 벨리타, 조사단 일을 하면서 힘든 건 없니?”
“네, 어머니. 힘들지 않아요. 헤이츠가문의 대표로 갔으니 제 몫은 해야죠. 그리고 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꼭 범인을 잡고 싶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래. 힘든 점이 있으면 저번처럼 혼자 앓지 말고 우리에게 말하렴. 알았지?”
“네, 그럴게요.”
“그런데 범인을 잡는 것을 서둘러야 할게다. 요즘 북쪽 경계가 심상치 않다.”
“심상치 않다고요?”
아버지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자 나도 덩달아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북쪽 경계에 접해 있는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마 곧 토벌대를 편성할 것이다.”
마물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날뛰기 때문에 제국은 항상 세 공작 가문을 주축으로 토벌대를 출격시켰다.
그들과 거의 대등하게 힘을 겨룰 이들은 마법을 쓸 수 있는 세 가문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을 쓸 수 없는 일반 기사들도 마물들을 상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몇 명이 덤벼야 간신히 하나를 죽일 수 있을 정도였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죽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세 공작 가문은 제국민의 존경과 두터운 신임을 받는 만큼 자신들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했다.
“이번에도 아버지께서 출정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까지는 내가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성인이었다.
토벌대에 합류할 수 있는 자격이 된 것이다.
“흐음.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께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마물이라.’
마물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듣기론 엄청 거대하고 무섭게 생겼다고 한다. 힘도 세고.
‘내가 마물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여태까지 살생이라고는 몰랐던 내게 엄청나게 큰 과제가 닥친 셈이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나중에 가주로서 가문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나의 능력을, 힘을 보여 줘야만 했다.
“제가 갈게요.”
“네가 말이냐?”
“네, 제가 가겠습니다.”
“벨리타, 아직은 아버지 대신 네가 모든 짐을 짊어질 필요는 없단다.”
항상 따스하고 포근한 눈으로 나를 봐 주는 어머니가 이번에도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를 말렸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아버지 대신 억지로 가는 게 아니에요.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헤이츠 가문의 공녀로서, 차기 가주로서 제 의지로 결정한 거예요.”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가겠다.”
“네?”
갑작스레 진지해진 아버지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너는 이번 마차 사건의 조사도 맡았지 않느냐. 그러니 수도에서 사건을 마무리 하거라. 이번 마물 토벌에는 내가 갈 것이다.”
“아버지…….”
“이번 마차 사건은 헤이츠 가문의 명예가 달린 문제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 알겠느냐, 벨리타.”
“……알겠습니다, 아버지. 헤이츠 가문을 위해서 반드시 범인을 밝혀낼게요.”
“우리는 언제나 너를 믿는다. 그것을 기억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 * *
다음 날 아침, 일부러 일찍 조사단 회의실로 출발했다.
전날 아버지의 말 때문이다.
얼른 마차 사건의 진범을 밝혀서 아버지께서 맘 편히 출정을 나가시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빨리 마차 사건의 범인을 잡아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물론 아델라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회의실에서 두 남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불편하게도 케인이 먼저 도착했다.
나는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케인에게 인사했다.
“맥시어스 공작님, 오셨어요?”
“헤이츠 공녀, 일찍 오셨군요.”
“네.”
케인이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히 일찍 왔네.’
케인과 단둘이서 마주할 줄 알았으면 일찍 안 왔을 텐데 깊게 생각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둘이서만 있는 건 오랜만입니다.”
역시나 케인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가요.”
“네, 그날 공녀께서 맥시어스가에 아주 오랜만에 오셨던 날 이후로 처음입니다.”
아델라가 마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의심해서 찾아간 날을 말하는 거였다.
“사실 그날 공녀께서 저를 의심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셔서 많이 서운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이번의 사과는 진심이 담겨 있는 사과였다.
그날은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물론 케인에 대한 내 마음이 그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사과를 받고자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과를 해 주시니 달갑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에 반드시 범인을 잡고 싶습니다. 공녀와 저를 곤경에 빠트린 그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여튼 틈을 주면 안 됐다.
내가 사과 좀 했다고 이제는 자신과 나를 무슨 운명 공동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네, 저도 바이언 공녀를 다치게 하고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 범인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딱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에 케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저는-.”
케인이 내 말에 반박을 하려는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마침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에이든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 다 일찍 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금방 왔어요.”
에이든이 오자 드디어 지옥에서 해방됐다는 생각에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런 나를 보며 부드러운 웃음을 띤 에이든이 내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벨리타, 어제는 잘 들어갔습니까? 데려다드리지 못해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잘 들어갔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에이든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 대신 그의 얼굴에 심각한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입니까?”
케인과 내가 동시에 에이든에게 물었다.
“누님을 호위했던, 휴가를 갔다던 기사 말입니다. 그 기사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네?”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기사를 심문하는 것이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기사는 범인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런데 사라졌다니.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그 기사가 어떻게 사라졌다는 거죠?”
나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선 그 기사의 이름은 오웬 에스트입니다. 오웬 에스트 경은 원래 서쪽 변경 마을인 스펠라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나와 케인은 에이든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가족이 마물에게 모두 죽고 수도로 올라와서 기사가 됐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물었을 뿐인데 에이든은 오웬 에스트라는 기사의 신상을 줄줄 읊고 있었다.
“그게 이번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죠?”
그래서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 기사가 바이언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 있던 곳이 헤이츠 공작가라고 합니다.”
“네?”
이건 아니었다.
에이든의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내 머리통을 돌로 찍어 누른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지?
어떻게 여러 정황들이 다 헤이츠 가문과 나를 향할 수가 있는 거지?
불 폭탄에, 그날 아델라가 외출할 거라는 걸 나만 알았다는 것, 그리고 기사의 출신까지…….
“그게, 그게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나는 에이든을 쳐다봤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무척이나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한 톨의 의심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를 믿는 건가?’
나를 가리키고 있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알고서도 의심하지 않는 건가?
“헤이츠 공녀.”
그리고 또 한 사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케인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에이든을 바라보다 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의 눈도 에이든과 마찬가지였다.
나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궁금했다.
나를 왜 그렇게 보고 있는지,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여러 정황들이 범인은 저와 제 가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정황은 정황일 뿐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에이든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우선 그 기사를 찾는 데 모든 인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오웬이라는 기사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케인도 아직은 아니라며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어떻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 또한 지금 여기서 두 분께 맹세합니다. 저는 절대로 범인이 아니에요. 저를 믿어 주신 두 분을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어요.”
나의 비장하고도 엄숙한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은 모든 성문에 기사들을 보내서 오웬 에스트라는 기사를 찾아보도록 해요.”
나는 즉시 기사를 잡기 위한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사단의 인력들을 수도 곳곳에 보내 오웬 에스트 수색에 집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목표가 더 절실해졌다.
더욱이 범인의 목표는 아델라가 아니라 나, 헤이츠 가문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더 활발하게 여러 의견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지금부터는 함께 움직일 것이 아니라 조를 분리해서 움직이도록 해요. 저는 수도 동쪽으로 갈 테니 에이든은 북쪽, 공작님께서는 서쪽으로 가는 게 어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네, 그럼 서둘러서 움직여요.”
어떻게 할지 정해지자 우리는 곧바로 조사단을 데리고 사방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데려온 이들과 함께 수도 동쪽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헤이츠 공작가로 가서 공작님께 이 서신을 전하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오기 전 나는 아버지에게 가문의 기사단을 요청하는 서신을 황급히 썼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유리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이 거지 같은 모함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수도를 뒤진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외곽까지 쥐 잡듯이 찾아봐도 오웬 에스트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성문으로 보낸 수색대도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생각을 달리해서 다시 안으로 파고들며 추적했다.
그러다 결국 그 기사가 머물고 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오웬 에스트라는 그 기사는 수도의 가장 중심에 있는 번화가의 한 여관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가 멀리 도망갔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 완벽한 오산이었던 것이다.
수색 방향을 달리하자고 의견을 낸 에이든 덕분에 오웬 에스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웬 에스트를 잡음과 동시에 아델라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 *
“에이든.”
나는 말에서 내리는 에이든에게 인사했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벨리타, 오늘도 일찍 왔군요.”
“용의자를 잡았으니 서둘러야죠.”
“맞습니다. 얼른 들어가죠.”
“네.”
우리는 오웬 에스트를 심문하기 위해 심문실로 걸어갔다.
오늘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케인은 오늘 황궁에 일이 있어서 늦는다고 미리 연락이 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판단했다.
당연했다.
오히려 나는 그 시기가 꽤 늦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나라의 공작은 할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케인은 한동안 조사단에 꽤 많은 시간을 쏟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한계였고 결국 원래 그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아델라는 어때요?”
에이든에게 아델라의 안부를 물었다.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혹시 병문안을 가도 될까요? 저번에 바이언 공작님께서 아델라를 아예 보지도 못하게 하셔서 갈 수 있을지…….”
일전에 사고를 당한 아델라를 보러 갔다가 바이언 공작에게 온갖 말만 듣고 쫓겨난 게 생각났다.
그래서 이번에도 병문안을 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누님이 허락한다면 괜찮을 겁니다.”
“아, 그래요? 그럼 아델라에게 제가 곧 병문안을 가고 싶다고 전해 줄래요?”
“그러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델라를 곧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사도 잡고, 아델라도 깨어나고 앞으로 일이 쭉쭉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심문실로 막 들어가려는 때였다.
“바이언 공자님!”
한 기사가 에이든을 부르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바이언 공작님께서 공자님을 급히 찾으십니다.”
“나를?”
“네, 서둘러 오시랍니다.”
에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하지만…….”
“심문 정도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다녀와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에이든이 왔다가 금방 떠났다.
나는 에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사라지자 시선을 거둔 뒤 심문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온몸이 결박된 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오웬 에스트를 볼 수 있었다.
“오웬 에스트를 데리고 와라.”
내 말에 조사단의 기사 하나가 오웬 에스트를 내 앞에 무릎 꿇게 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오웬 에스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마주쳤던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또한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오웬 에스트가 맞느냐.”
“……네, 네. 맞…… 습니다.”
“지난 마차 사고가 있던 날 아델라 바이언 공녀를 호위했던 사실을 기억하고는 있겠지?”
“네, 네…… 기억합니다.”
“그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얘기해 보거라.”
“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 어떻게든 기억을 떠, 떠올려 보겠습니다.”
오웬 에스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때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진술은 마부나 다른 기사들과 일치했다.
“그러니까 공녀께서 소리를 지르셨을 때 너는 공녀의 곁에 있었다는 것이 맞느냐?”
“네, 네. 맞습니다.”
“좋다. 이제 다시 질문하겠다. 왜 도망간 거지? 왜 휴가를 간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았느냐.”
“네? 그, 그건…….”
내 질문에 그의 눈에 당혹감과 불안함이 서리는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바른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더욱더 압박하기 위해 바로 말을 이었다.
“만약 거짓을 말했다가는 절대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사실대로만 말한다면 너는 죽지 않는다.”
“저, 저는…….”
최대한 얼렀음에도 오웬 에스트의 얼굴이 곧 죽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거기다 몸까지 떨어 대는 걸 보니 제대로 무릎을 꿇고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쿵-!
결국 그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넘어지면서 그의 셔츠 깃 사이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설마…….’
눈을 의심하면서도 확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오웬 에스트에게 다가갔다.
“왜, 왜 그러십니까?”
나는 근처에 서 있던 기사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자를 일으켜 세워라.”
“네, 알겠습니다.”
기사가 오웬 에스트의 몸을 일으켜 세우자 내 눈높이가 그의 목 근처에 딱 맞춰졌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는지 오웬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한번 스윽 쳐다보곤 다시 시선을 내려 목 주변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셔츠 깃을 살짝 치웠다.
‘이게 왜…….’
오웬 에스트의 목에는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재질이 익숙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 목걸이는 뭐지?”
뭔지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확인을 위해 그에게 물었다.
“그, 그냥 하고 다니는 목걸이입니다.”
“그래?”
“네, 네.”
그런데 그는 내가 뭘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게 거짓말을 했다.
“그냥 목걸이라…….”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목걸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와 비슷한 목걸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웬 에스트가 차고 있는 것이 그저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너는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은가 보구나.”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저는…… 아, 윽!”
오웬 에스트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기 시작했다.
“으윽! 윽!”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심문실 안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 또한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재빨리 오웬 에스트에게 다가갔다.
저번에 에이든에게 했던 행동이 그에게도 똑같이 통하기를 바라면서 그의 목에 손을 살짝 댔다.
물론 근처에 있는 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를 다그치는 척을 잊지 않았다.
“뭐야, 왜 이러는 것이냐.”
“으윽! 사, 살려- 윽!”
잠시 후.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던 오웬 에스트의 동작이 일순간 멈추었다.
에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게 무슨…….’
보고 있으면서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텅 비어 있던 퍼즐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점점 채워지면서도 그 퍼즐이 잘못된 거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오웬 에스트를 지하 감옥에 가두거라.”
“네, 알겠습니다.”
이 저택을 이번 조사단의 아지트로 쓴 이유가 있었다.
이 작은 저택의 지하에는 죄인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이 있었다.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오웬 에스트는 에이든이 그랬듯이 곧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감옥에 가둔 뒤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누가 그런 것일까?’
바이언 공작일까?
하지만 사건이 있던 날 그의 반응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한 제국의 공작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을 한번 본 것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가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이유는 없었다.
그는 아델라가 연회에서 쓰러진 이유조차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이언 공작에게는 나보다 케인이 더 눈엣가시일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두 가문 중 하나를 공격한다면 맥시어스가가 유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이언 공작은 자신의 딸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고, 그 힘을 조금만 이용하면 되는데 굳이 이런 짓까지 한다는 건 공작의 지위에 전혀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이언 공작은 범인이 아닐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이는 두 명이었다.
에이든과 아델라.
설마 에이든일까.
아니다.
그도 아니었다.
그는…… 아니어야 했다.
만약 그가 그랬다면 왜?
아델라를 위해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왜 이렇게까지 그를 믿고 싶은지 모르지만 그저 믿고 싶었다.
그가 내게 보내는 따뜻한 눈빛이, 다정한 손길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바이언 공작과 마찬가지로 아델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도 충분히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아델라 바이언.
그녀 또한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범인이라고 믿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델라를 떠올리자마자 마차 사건을 조사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속에 걸렸던 뭔가가 그제야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게 친근하게 굴었던 것은 다 거짓이었던 걸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를 만나야겠다.
그래야 이 일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바로 아델라의 병문안을 가기로 결심했다.
* * *
“벨리타!”
아델라의 방에 들어가니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바이언 공작이 부재중인 덕분이었다.
아까 공작이 에이든을 찾는다고 하더니만 두 사람이 함께 어디를 간 듯했다.
“아델라.”
나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미소를 띤 채 그녀와 인사했다.
“몸은 어때요? 이제 좀 괜찮은 거예요?”
그동안 그녀의 걱정을 했던 건 사실이기에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네, 많이 괜찮아졌어요.”
“마차 사고가 났다는 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거기다 불 폭탄이라니, 세 가문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소식을 들었죠? 기필코 범인을 잡을 테니 아델라는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요.”
“고마워요, 벨리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네요.”
“에이든은 어디 갔나 봐요?”
“네, 아버지와 함께 일 때문에 좀 멀리 갔어요. 아마 내일쯤 돌아올 거예요.”
“아, 그래요? 에이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제가 전해 줄까요?”
“그게,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거든요. 그래서 얼른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결…… 정적인 증거요?”
순간 나는 아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네, 아델라를 호위했던 오웬 에스트를 잡았다는 소식도 들으셨죠?”
“네, 들었어요.”
“그자의 몸을 수색했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어요.”
나는 일부러 몸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몸에서요?”
“네, 그리고 그자도 이번 사건에 죄책감을 꽤 느꼈는지 자신이 죽을지언정 모든 걸 다 실토하겠다고 했어요.”
나는 또 일부러 죽는다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죽어도 되니 실토하겠다고 했다고요?”
“네, 정말 다행이죠?”
“그러…… 네요.”
“그런데 증거에 대한 것은 에이든이 확인을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내일 온다니 할 수 없죠. 기다릴 수밖에요. 아델라에게는 확실해지면 말할게요. 괜히 아픈데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이해하죠?”
“네…… 이해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델라.”
“그런데 그 기사는 지금 어디 있어요?”
“네? 오웬 에스트요?”
“네…….”
“당연히 조사단이 쓰고 있는 저택에 있죠. 그 저택에 지하 감옥이 있어서 그곳에 가둬 놨어요.”
“그렇군요.”
“네, 내일쯤이면 모든 것이 밝혀질 거예요. 다행이에요. 아델라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잡을 수 있게 돼서요.”
“이렇게 애써 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말을요. 아델라는 친구잖아요.”
나는 아델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꽤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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