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2)

5

* * *

요즘 하루하루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델라의 몸은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델라의 몸은 훨씬 약한 듯했다.

그래서 약속했던 대로 그녀가 헤이츠가로 놀러 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종종 서신을 주고받았다.

편지에서 그녀가 그랬다.

태어나서 처음 사귄 친구라 내가 너무 소중하다고.

그래서 그 인연의 끈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바이언가의 사람과 연락을 하며 지내는 걸 탐탁잖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바이언 공작가에서 돌아온 날 아버지께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씀만 하시곤 그 이후로는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 네가 잘 처신할 거라 믿지만 바이언가의 사람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거라.

당부이자 경고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내내 상기하면서도 아델라의 살가운 편지를 받을 때면 또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가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조금씩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델라의 편지에는 에이든의 얘기도 있었는데 그가 아직 수도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오지 않았구나.’

에이든의 말대로 아델라는 그가 한번 수도를 떠나면 금방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에도 얼마나 걸릴지 물어봤는데 정확하게는 말해 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 에이든이 곧 올 것 같아 너무 기쁘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나는 아버지가 하는 일들을 도와드리면서 조금씩 공작가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 일환으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외출했다.

목적지는 황궁이었다.

이번에 우리 가문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업 중에 황실의 허가가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요즘 황제가 꽤 많은 일들을 황태자에게 일임하고 있기에 오늘 나는 황태자를 만나러 가야 했다.

저번에 연회 때도 느낀 거지만 황태자는 황제와 결이 좀 달랐다.

이건 그저 내 감인데 그는 지금의 권력 구조, 그러니까 세 공작 가문이 황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것에 순응하는 황제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해서 말을 나눠 본 건 아니지만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느낌으로 생각을 알 수 있을 때가 있었다.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는 날카로운 눈빛과 강한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황태자가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생각을 어쩐지 지우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아직은 무슨 낌새가 보이는 건 아니라서 오로지 내 추측에 불과했다.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구조와 맞선다는 것은 우리 가문과도 맞선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에 황태자를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성이 있었다.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섰고 곧 황태자가 머무는 황태자궁에 도착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황태자의 집무실 앞에 섰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시종이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시종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번에 그가 주최한 연회도 그렇고 입고 있던 복장도 그렇고 꽤 화려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가 지내는 곳은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시종이 길을 내주자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황태자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그가 집무를 보는 커다란 책상이었다.

그 책상에 앉은 황태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다 나도 모르게 책상 위를 쳐다봤다.

책상에는 여러 서류들이 층을 이루며 높게 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헤이츠 공녀.”

“발테우스의 빛나는 작은 태양이자 고귀하신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나는 고개 숙여 황태자에게 예를 갖췄다.

“일어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집무실 오른쪽에 있던 책상보다 더 커다란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그와 마주 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아닙니다. 헤이츠 공작가의 일이라면 없는 시간이라도 기꺼이 내드려야지요.”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아무래도 그에 대해 나 스스로 판단을 해 버려서 그런지 그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기가 힘들었다.

“전하의 소중한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겠습니다. 일전에 아버지께서 말씀드린 사업 계획서입니다.”

나는 그에게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헤이츠 공작께서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고아원이라니, 꽤 의외군요.”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제국을 위해서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사업은 제가 아버지께 제안한 것이고요.”

“흐음, 공녀께서요?”

“예, 여행을 다니면서 집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이 더욱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사업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사실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리안을 포함하여 서커스단에서 구한 아이들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는 갈 곳 잃은 아이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마물들이 종종 습격을 하는 세상이었다.

그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쳐들어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돌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돌봐 줄 사람도 없고, 집조차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을 하며 길거리에서 굶주림에 동냥을 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공작가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그런 아이들을 위해 제국 곳곳에 고아원을 짓거나 후원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내 생각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는 선뜻 내 의견에 동참해 주셨다.

정말 내 부모님이지만 따뜻하고 고마운 분들이셨다.

“하지만 제국엔 고아원이 충분히 있습니다. 여기서 더 짓는 건 낭비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황태자는 그저 자신에게 올라오는 서류로만 실태를 파악한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 돌아다녀 보면 정말로 많은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이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은 헤이츠 공작가에서 감당할 것입니다.”

“공녀께서는 일전에 맥시어스 가문에게서 그렌스를 넘겨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내 땅에 대해선 왜 묻는 거지?

충분한 자금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건가?

황태자의 호기심 어린 눈이 꽤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그리고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시점에서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파혼에 대한 위자료로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렌스엔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업의 재정에 관해서는 걱정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아원 관련 사업은 헤이츠 가문의 재산으로도 충분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황태자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언급하며 한 번 더 사업이 문제없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렴 그렇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네?”

“다이아몬드가 정말로 발에 차일 정도로 가득합니까?”

“아, 네. 저도 그렌스는 여행 중에 처음 가 봤는데 실제로 어마어마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러니 전하께서 이 사업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국의 최정점에 서 있는 공작가라고 하더라도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건이나 파는 작은 개인 사업이 아닌 공공시설에 관련된 건 아무리 허수아비 황실일지라도 그들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가에서 하는 일에 황실이 대놓고 훼방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그저 명목뿐인 절차라고 말씀하셨기에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도 받았고 허가가 나길 기다릴 일만 남았다.

할 얘기가 끝났으니 여기에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대답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공녀.”

그런데 내게 잘 가라며 인사를 하는 황태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미소를 애써 못 본 척하며 집무실을 나왔다.

집무실을 나와 마차 근처로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아, 뭐야.’

도대체 저 남자가 저긴 왜 있는 거지?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마차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걸 보자 근처에 가고 싶지도 않아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그가 발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이츠 공녀.”

나를 보자마자 그가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맥시어스 공작님.”

‘그래서 날 보고 웃었구나.’

저번부터 케인과 황태자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을 거란 의심이 들었는데…….

오늘 여기서 그를 보게 되자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공녀께서 황태자 전하의 궁엔 어쩐 일입니까.”

뭐야, 연기가 너무 서툰 거 아니야?

표정이 어색했다, 표정이.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게 분명한데 모르는 척하는 그가 무척이나 가증스러웠다.

“잠시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뒤로하고 이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날 생각을 하며 대충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우리 꽤 오랜만입니다.”

“네, 그런데 제가 좀 바빠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공녀, 잠시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케인이 나를 쫓아왔다.

“잠시만 대화를 하죠.”

이 인간은 맨날 뭔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

“저는 공작님과 할 말이 없는데요.”

나는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가며 대답했다.

“저는 공녀께 할 말이 있습니다.”

그놈의 할 말, 할 말.

뻔했다.

그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리 얘기는 그때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완전히 벽창호랑 얘기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공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저는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 이렇게 나오실 건가요? 이런 식의 행동이 사람을 얼마나 질리게 만드는지 잘 아실 텐데요.”

“……그러니 공녀도 저를 좀 봐줘야 하지 않습니까?”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너를 봐줘.

“공녀께서 제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기억 안 나신다고는 못 하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 시절 많은 것들을 인내했습니다. 그러니 공녀께서도 제게 기회를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 진짜 가관이네.

설마 벨리타가 케인을 좋아하던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자신이 감내했다는 뜻인 건가?

그러니 똑같이 나보고 견뎌 달라고?

“지금 굉장히 억지를 부린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기회라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케인 맥시어스는 다분히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식의 범위 내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 것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시면 제가 정말로 공작님께 돌아갈 거라고 믿으시는 거예요?”

속이 너무나 답답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거듭 말을 하는데 상대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어떻게든 나와 만나기 위해 수작을 부리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케인이 왜 이러는지 이유 따위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이제는 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저를 제대로 봐 주시는군요.”

“하.”

순간 어이가 없어서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참 뭐든 자기 식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네.

“공녀께서 제게 남긴 편지를 우연히 봤습니다.”

편지?

무슨 편지를 말하는 거지?

“편지요?”

“네, 서재에 있던 책 사이에 꽂혀 있었습니다.”

편지를 썼던 사실이 전혀 생각나지가 않았다.

나는 빠르게 벨리타의 기억을 더듬었다.

편지…….

편지라…….

제발 기억나라.

하지만 꽤 예전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편지를 쓴 기억은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다 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뒤지자 순간 열두 살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는 반짝거리는 금발을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열두 살의 어린 소녀가 한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때 마침 지금의 케인과 무척이나 닮은 소년이 정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소년은 차갑고 메마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원래도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눈빛을 하지 않았다.

공작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소년은 변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의 곁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켰다.

소년은 소녀를 봤음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기뻤다.

자신을 무시하는 소년이지만 매일매일 그를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다 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소녀다운 감성이었다.

소녀는 그대로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더니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책이 빽빽이 채워져 있는 책장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유일하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저택의 주인은 지금 막 저택을 나갔으니까 말이다.

소녀는 종이를 찾아서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쓰기 시작했다.

그건 벨리타가 케인에게 처음으로 남긴 편지였다.

[케인 공자, 아니 공작님께.

공작님, 저 벨리타예요.

요즘 공작님의 눈이 너무 슬퍼 보여서 저도 너무 속상해요.

공작님은 제가 지켜 줄 테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나쁜 꿈을 꾸면 제가 꿈속에 들어가서 공작님 괴롭히는 나쁜 놈들을 다 물리쳐 줄게요.

벨리타는 공작님을 영원히 지킬 거니까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저는 공작님의 약혼녀라서 어른이 되면 공작 부인이 된다고요.

그러니 저는 공자님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공작님과 함께 있을게요.

공작님, 사랑해요.]

소녀는 그렇게 진실된 마음을 펜으로 꾹꾹 눌러 담아 짧은 편지를 썼다.

그리고 서재에서 책 한 권을 뽑아 펼친 뒤 그 사이에 숨겼다.

나중에 소년이 발견하길 바라며 했던 작은 놀이였다.

그때 소녀는 계속 그의 곁에 머물면 언젠가 소년이 자신을 봐줄 거라고 믿었다.

죽을 때까지 소년을 사랑할 거라고 믿었다.

‘진짜 편지를 썼었구나.’

너무 오래전의 기억이라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십니까?”

내가 뭔가를 떠올렸다는 걸 눈치챘는지 케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네, 기억납니다.”

“1년 전에 그 편지를 읽고서 알게 됐습니다. 공녀께서 제게 얼마나 커다란 마음을 가지고 계셨는지 말입니다.”

1년 전이면 얼추 케인과 아델라가 헤어졌던 시기와 맞물렸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헤어진 게 결국은 나, 아니 벨리타 때문이라는 거야?

고작 그 편지 때문에?

기가 막혔다.

원작에는 전혀 나오지 않은 설정 때문에 원작이 비틀린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열두 살이었어요.”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케인이 보고 감동을 받았던 편지는 벨리타가 케인에게 쓴 것이다.

“열두 살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쓴 편지였다고요.”

“맞습니다. 그 편지는 열두 살의 어린 소녀가 쓴 편지죠.”

“그럼 그 편지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아시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습니다.”

“아뇨. 아무 의미도 없는 편지예요. 공작님께서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더더욱 쓸모없는 편지죠.”

“그렇게 말씀하시 마십시오. 공녀께서 제게 남긴 소중한 편지입니다.”

‘하, 참.’

쓸모없다는 내 말에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보는 그를 보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이후입니다. 공녀는 편지에 쓴 그대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제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공작님 곁에 없습니다. 그걸 끝낸 건 공작님이시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변함없이 지킨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는 걸 저는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로 인해 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이가 누구였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할 얘기는 다 하신 거죠? 그럼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케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저번에 했던 얘기에, 오늘 편지 얘기까지 덧붙여서 똑같은 얘기만 반복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매몰차게 끊고 뒤돌아 가려고 하자 케인이 연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손목을 잡았다.

“공녀!”

“손대지 마시라고요!”

나는 더러운 오물이 닿은 것처럼 손목을 세차게 빼냈다.

“제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경고했지 않습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시라고 말입니다!”

저번에도 나는 그가 나를 만지는 것에 대해 일부러 과잉 반응을 했다.

파혼당했던 날, 주저앉아 있던 나를 보던 지독히도 냉정하고 시리도록 차가웠던 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그런 태도가 마음이 아팠다거나 서러웠던 건 결코 아니었다.

모든 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고 그의 태도가 그랬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파혼당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당시 그는 나를 말 그대로 쓰레기 취급했다.

아니, 쓰레기보다 더 더러운 것을 보듯 했다.

그가 날 당장 치워 버릴 뭔가가 아니라 적어도 사람으로라도 생각했다면, 내가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을 동안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음이 변했다며 내게 닿으려 하다니, 그가 너무 괘씸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똑같이 해 주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한 번의 경험으로 이미 익숙해졌는지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과하는 얼굴에도 전혀 미안한 표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뻔뻔해. 너무 뻔뻔해.’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저는 공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공녀께서 예전에 제게 그랬듯이 저 또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기필코 공녀가 내 곁에 돌아오도록 할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대사였다.

바로 벨리타가 항상 케인에게 하던 말이었다.

- 공작님, 사랑해요.

- 저만 보세요!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 말고 저만 보시라고요!

- 공작님께서 저를 봐 주실 때까지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10년이든 20년이든 50년이든 말이에요.

- 공작님, 신의 말씀을 들었어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할 거라고 했어요.

- 저는 공작님을 포기 못 해요. 우리는 함께해야 할 운명이에요.

- 공작님, 제 어디가 맘에 안 드세요? 고칠게요. 어떻게 해서든 공작님에게 어울리는 레이디가 될게요. 그러니 절 한 번만 봐 주세요.

- 공작님께서 저를 한 번만이라도 봐 주신다면 오늘 죽어도 좋아요.

- 차라리 죽을까요? 죽어야만 저를 봐 주실래요?

-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공작님과 영원히 함께할 거예요, 설령 그것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것일지라도.

- 공작님, 공작님, 공작님.

벨리타가 했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받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건가.’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에 적절한 말도 아닌데 또 매우 알맞은 말이기도 했다.

두통이 오려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많은 기억을 떠올리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벨리타?”

나를 벨리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잊을 만하면 떠오르고, 또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대상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나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세주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 사람을 보기 위해 뒤돌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떠나기 전 했던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에이든.”

에이든이 케인과 내가 있는 곳까지 성큼 걸어서 단숨에 다가왔다.

“돌아온 거예요?”

“네, 맞습니다.”

“일은 잘 끝냈어요?”

“네, 잘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구나. 근데 황궁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가문의 일로 잠시 황태자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저도 황태자 전하를 잠시 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렇군요.”

우리는 옆에 케인이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대화를 했다.

“바이언 공자, 오랜만입니다.”

그때 케인이 살짝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더니 에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맥시어스 공작님.”

하지만 그걸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었다.

케인에게 인사한 후 에이든이 다시 나만 쳐다보며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께 금방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네? 왜요?”

에이든이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내게 말했다.

“공작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막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케인이 끼어들었다.

“공녀는 제가 모셔다드릴 테니 공자는 얼른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얼른 갔다 와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리고 나는 케인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며 에이든을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공녀!”

에이든과 함께 돌아갈 거라는 내 말에 케인이 마땅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이든이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자 나는 그에게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에이든이 빠른 걸음으로 금세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공녀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에이든이 절 데려다줄 겁니다.”

“아까부터 서로 이름을 부르는데 두 사람,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겁니까?”

케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에이든과 내가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자 케인이 언짢아 보이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설마 바이언 공자를…….”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지 그가 스스로 말을 끊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크기를 늘려 가 막기 힘들 것이다.

벌써부터 그의 머릿속이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는 듯이 케인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고 있었다.

‘케인과 아델라도 그렇고 역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에는 다른 사람이 제격인가?’

에이든을 이런 일에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케인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기다 그가 정말 나를 포기하도록 오해를 조금만 더 증폭시킬 정도의 행동만 취하면 괜찮을 듯했다.

“그걸 제가 공작님께 굳이 말씀드려야 하나요?”

그래서 딱 한마디만 했다.

긴가민가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자꾸 선을 넘지 마세요. 저는 공작님께 어떠한 여지를 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 주지 않을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저를 괴롭히시면 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제가 얼마나 집요하고 지독한지는 아시잖아요?”

덧붙여 그의 그런 말과 태도에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토해 냈다.

“하지만 바이언가를, 헤이츠 공작님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케인은 이미 나와 에이든이 어떤 특별한 사이가 됐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런데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말 웃기게 하네.

“그럼 아버지께서 맥시어스 공작님은 허락하실 것 같으세요?”

자신의 사랑하는 딸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파혼을 요구한 이를, 어느 아버지가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거기다 나의 아버지는 불같은 성정에 뒤끝까지 긴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케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분노를 터트린다고 했다.

“그건 제가 헤이츠 공작님을 직접 봬서 용서를 빌 것입니다. 그러니 공녀께서 제게 마음을 보여 주시면 제가 모두 다 해결하겠습니다.”

뻔뻔함이 정말 도가 지나친다.

어쩜 이렇게 사람이 본인만 생각할 수 있을까.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고,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이기적인 인간이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집착 남주인가.’

이 소설이 아닌 다른 소설에서 집착 남주라는 설정을 봤을 때, 나는 나름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설레며 소설을 보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직접 당하니 소름이 끼치고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역시나 대화가 전혀 안 통하시는 분이네요. 그럼 저는 이제 공작님과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대화는 무의미했다.

우리는 서로의 주장과 의견만 내세우고 있었고 둘 중 누구도 꺾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공녀.”

케인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절대 대답하지 않았다.

“공녀, 제발.”

애원조로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케인의 목소리가 끔찍이도 듣기 싫어졌다.

그래서 에이든을 기다리는 건 그만두고 먼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차로 걸어가려 했다.

그런데 마침 에이든이 황태자궁의 입구에서 막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벨리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얼른 가요.”

“네. 맥시어스 공작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는 케인과 말도 섞기 싫어서 대충 고개를 숙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다.

“두 분 다 살펴…… 가십시오.”

케인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목소리만으로 그가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알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나도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에이든은 우리 가문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걸어왔다.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보란 듯이 에이든을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에이든은 마차 타고 오지 않았어요?”

내가 너무 활짝 웃는 게 신기했는지 그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는 빠르게 오느라고 말을 타고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아가씨.”

마차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몇 마디 나누며 걷자 금세 마차 앞에 도착했고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안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리안, 돌아가자.”

“네, 알겠습니다.”

리안이 에이든을 알아보곤 나를 슬쩍 한번 쳐다본 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는 항상 벨리타를 따라 다니는 것 같습니다.”

“제 호위 기사니까요. 그리고 리안은 저를 끝까지 따른다고 맹세했어요. 그렇지?”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리안에게 물었다.

“네, 맞습니다. 저는 평생 아가씨의 기사입니다.”

원래도 아이답지 않게 진지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리안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렸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가자.”

“네, 저를 잡고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리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항상 마차를 탈 때면 리안이 해 오던 일이라 나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으려고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네?”

그런데 갑자기 에이든이 에스코트를 하겠다고 나섰다.

“괜찮은데.”

“아닙니다. 물러나라, 내가 하겠다.”

리안이 나를 한번 슥 쳐다본 다음 굳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에이든이 차지하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눈앞에 그의 몸집만큼이나 큰 손이 잡으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살짝 올렸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올라가세요.”

“……네.”

순간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 느껴지자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나왔다.

빠르게 그의 표정을 살피니 그런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안심하며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에이든이 곧바로 내 뒤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오늘은 황궁에 잠시 다녀오는 거라서 메리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내 맞은편에 에이든이 자리를 잡자 마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그리고 아까 끊겼던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저번에도 말을 타고 돌아가셨던 것 같은데, 말 타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합니다.”

“저도 말 타는 거 좋아해요. 말을 타고 달리면 가슴이 뻥 뚫리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이 느껴지거든요.”

“저도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조만간 함께 말을 타러 가지 않겠습니까?”

“함께요?”

“네, 곧 승마 대회가 열리니 연습도 할 겸 말입니다. 승마 대회에 참가해야 해서 이번에는 수도에 좀 오래 머무를 것 같습니다.”

‘아, 곧 승마 대회구나.’

승마 대회는 매년 가을, 수확제와 함께 열리는 제국의 가장 큰 축제였다.

수확제와 승마 대회가 열리면 제국의 많은 귀족들이 수도로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승마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제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가 되어 어마어마한 상금을 독식했다.

특히 그 해가 풍년일 경우 상금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대회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고 많은 이들이 참가하는 만큼 며칠 동안 진행됐다.

그리고 그때와 맞물려 일주일 내내 수도의 거리는 수확제와 함께 자그마한 여러 축제로 떠들썩했다.

‘벌써 가을이라니.’

여름이 될 때쯤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시간이 어느새 성큼성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음, 생각해 볼게요.”

“생각…… 말입니까.”

생각해 본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돌려서 거절한 거였다.

에이든도 눈치챘는지 그의 낯빛에 약간의 실망감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제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있어서 바쁠 것 같아서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바쁜 건 아니었다.

나도 승마 대회에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연습을 하긴 해야 했다.

그래서 함께 연습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계속 그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따랐다.

“알겠습니다.”

에이든은 확실히 케인과는 달랐다.

케인같이 억지를 부려서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내 대답에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썩 맘에 들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를 떨치기 위해 곧바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델라의 몸은 좀 어떤가요?”

“……좀 쉬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차도가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병세가 짙다는 말에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의 병 때문에 쉽게 낫질 않는 걸까?

그때 케인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으니 아직도 그 상처가 회복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에는 케인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었다.

병문안을 가서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인지 아델라는 그 이후 내게 케인에 관한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누님과 서신을 주고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아델라가 그래요?”

“네.”

오, 내가 아델라와 계속 친하게 지내는 걸 에이든이 아는구나.

정말 잘된 일이었다.

“병문안을 한번 더 가 볼까 봐요. 아무래도 저택에만 있으니 답답해할 것 같아서요.”

바깥세상을 이미 맛봤는데 안에만 갇혀 있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델라와 친분이 쌓일수록 처음에 그녀에게 가졌던 좋지 않았던 감정들은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 그 빈자리에는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쌓여 갔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고 각오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감정이 변할 줄은 몰라서 나조차도 요즘 당황스럽긴 했다.

병문안을 갈 거라는 말을 하면서 에이든과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순간 그가 뜻 모를 표정을 짓더니 금방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벨리타는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하군요.”

이 남매는 진짜 왜 내가 뭐 하나만 하면 나를 이렇게 극찬하는 거지?

저번에 그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다정하다거나 친절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아델라나 에이든의 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높은 것뿐이다.

뭐,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특히 에이든이 내가 아델라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다면 나는 무사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고아원의 아이들은 잘 지내나요? 요즘 보러 가질 못했어요.”

“저도 아이들을 보러 가지 못한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시군요. 찾고 있다는 사람은 찾으셨나요?”

1년 전에 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다.

서커스단을 뒤지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아뇨. 이번에는 서커스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을 찾고 있나 보네.

하긴 그러니까 온갖 서커스단을 뒤지고 다니는 걸 테지.

“아…… 꼭 찾으실 거예요. 그러니 기운 내세요.”

“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네, 반드시 찾을 거예요. 그때도 물었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 뭔가요?”

저번에 도와준다고 했을 때 됐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의상 물어본 거였는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나와 살짝 난감해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혹시 제가 누군가를 찾는다는 걸 다름 사람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뇨, 없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걸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누님에게도 말입니까?”

“네, 말하지 않았어요.”

아델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할 이유도 없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뜻은…… 비밀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비밀 지킬게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나는 웃으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에이든이 나를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말해 주실 건가요?”

“……아뇨.”

“그럴 줄 알고 묻지 않은 거예요.”

“감사합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후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번과 같이 마차가 정문 앞에 서자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렸고 나 또한 그를 배웅하기 위해 뒤따라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네, 그럼.”

뒤따라온 자신의 말에 올라탄 그가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본 뒤 곧바로 내게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 다시 마차에 타려던 때였다.

“아가씨.”

“응?”

갑자기 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아닙니다.”

보아하니 얼굴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인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들어가자.”

“네?”

“마차는 따로 오라고 하고 너는 나와 함께 걸어서 들어가자.”

“하지만…….”

“좀 걷고 싶어서 그래. 가자.”

그렇게 해서 나는 리안을 데리고 정문을 통과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앞서 걷고 리안이 그 뒤를 따랐다.

“와, 날씨 좋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선선한 걸 보니 확실히 가을이 오고 있었다.

“이리 와.”

“네?”

“옆으로 오라고.”

리안과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고 싶어 뒤돌아 손을 까딱거렸다.

리안이 단걸음에 내 옆에 섰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지?”

“……아닙니다.”

“있는 것 같은데.”

“…….”

분명 뭔가가 있는데 자꾸 없다고 하니 더 궁금했다.

“나와 네가 이렇게 뭐 숨기고 그럴 사이야? 이제 좀 컸다고 그러는 가 본데 서운하네.”

“생각해 보니 아가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그건 듣고 난 뒤 내가 판단할 거야. 그러니 말해 봐.”

이 정도로 말했음에도 리안은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말 안 할 거야? 알았어, 알았어. 하지 마.”

일부러 토라진 듯이 기분 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러니 기분 푸세요.”

나는 시작하라며 턱을 살짝 올렸다.

“……오늘같이 다른 분이 에스코트를 해 주신다고 하면 제가 물러나야 합니까?”

“어?”

생각해 보면 별로 어렵지 않은 질문인데 너무 의외의 질문이 튀어나와 순간 어리둥절했다.

“어, 그러니까 오늘 에이든이 네게 물러나라고 한 일에 대해서 묻는 거지?”

“그렇습니다.”

“음, 그건 당연한 거야. 그분은 귀족이니까.”

“……네.”

리안의 대답이 어쩐지 떨떠름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 네 일을 뺏기는 것 같았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아닙니다.”

“뭔데. 편하게 얘기해.”

가만 보니까 이번에도 조금 예상을 빗나간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빠르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을 준비를 마쳤다.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그분의 손을 잡았을 때 저만 놔두고 떠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니, 그리고 그런 상황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아직 어려서 그런가 상상력이 참 풍부하네.’

들은 순간에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곧 리안의 엉뚱한 생각이 재밌었다.

그래서 바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

시원하게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는데 나만 재밌나 보다.

“아, 웃어서 미안.”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웃음을 꾹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내 진정되자 그제야 리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리안은 나와 달리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줄지 고민했다.

그리고 짧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나 어디 안 가.”

“…….”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여기, 이곳에 있을 거야.”

“…….”

“네가 내 곁에 머무르길 원한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내 말에 리안의 굳었던 표정이 살짝 느슨해진 것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된 거 분위기를 아예 풀기 위해 나는 리안에게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매사에 너무 진지해.”

“저 별로 진지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진짜 진짜 진지해.”

나는 진짜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그건 아가씨에 관한 일이라서 그럽니다. 아가씨께선 제게 가장 중요하신 분이니까요.”

하여튼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뭐 있다니까.

“알았어,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리안의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자, 얼른.”

악수하자는 뜻이었는데 내 손만 빤히 쳐다보고 있길래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리안이 고개를 들었고 녹음이 울창한 숲을 연상시키는 시원한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리안이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아까 한 말대로 내가 그를 절대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리안은 한동안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황태자에게서 고아원 사업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괜한 생각을 했나 봐.’

황태자의 태도로 보아 일이 잘 안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제 엄청 바빠질 듯했다.

헤이츠 공작가의 공녀로서 하는 첫 사업이기에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잘 준비하고 싶었다.

거기다 곧 있을 승마 대회를 위해 승마 연습도 해야 했다.

그래서 앞으로 시간이 잘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바이언 공작가에 서신을 보냈다.

저번에 에이든에게 말한 대로 아델라의 병문안을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라에게서 답장이 왔다.

나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고, 언제든 와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나는 바로 바이언 공작가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아델라가 꽃을 좋아한다는 게 생각났다.

정원으로 가서 그곳에 핀 꽃들 중 가장 예쁘고 생기 가득한 꽃을 직접 골라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꽃다발과 함께 바이언 공작가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니 오늘은 에이든이 없었다.

‘일 때문에 또 어디 간 건가?’

이번에는 수도에 길게 머무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왠지 그가 꼭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순간 나도 모르게 아쉬움이 몰려왔다.

아니야, 바쁜 사람이잖아.

생각을 털어 내고 그 대신 마중을 나온 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헤이츠 공녀님, 아델라 아가씨를 뵙기 전에 공작님께서 먼저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바이언 공작이?

오늘은 저택에 있었나 보네.

“알겠네, 안내해 다오.”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계단을 오른 뒤 몇 걸음 안 가 검은 문 앞에 섰다.

아델라의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방문과는 완전히 다른 어두컴컴한 문이었다.

“공작님, 벨리타 헤이츠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라.”

“예, 알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무게감이 느껴지는 두꺼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책상 앞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본 적이 있기에 얼굴은 익숙했다.

내가 들어오자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에 먼저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이언 공작님.”

“어서 오시오, 헤이츠 공녀.”

인사 후 고개를 들자 공작이 나를 매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왠지 여기서 눈을 피하면 우리 가문이 지는 것 같이 느껴져 나는 당당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공녀는 공작보다 공작 부인을 더 닮았군. 이리로 앉으시오.”

그러자 공작의 입에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말이 나왔다.

나는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지웠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상석에 그가 앉고 나는 공작의 오른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헤이츠 공작과 공작 부인께서는 무탈하신가?”

“네, 두 분 다 무탈하십니다.”

“그렇군. 우리 아델라의 병문안은 두 번째라고 들었소.”

“네, 처음 방문했을 때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때는 일이 있어서 멀리 나갔었소. 그래, 우리 딸과 서신을 주고받는다고 들었는데.”

으레 하는 질문이었다.

자식이 누구와 어울리는지, 어떻게 어울리는지 궁금한 부모들이 할 법한 질문.

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내가 바이언 가의 이들과 어울리는 걸 탐탁찮게 생각하듯 나를 보는 바이언 공작의 눈도 별로 곱지는 않았다.

나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난번 연회에서 바이언 공녀께서 쓰러지는 걸 목격해서 걱정되는 마음에 병문안을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병문안을 와서 공녀와 대화를 나눠 보니 말이 잘 통해서 친구가 되었는데 밖에서 자주 만날 수 없다 보니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 근데 그때 말이오.”

“네?”

“우리 아델라가 쓰러졌던 날.”

공작이 그날을 언급하자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아, 네.”

“그날 아델라가 왜 쓰러졌는지는 혹시 아시오? 물어봐도 갑자기 어지러워서 쓰러졌다고 하는데, 혹시나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렇소.”

공작은 그날의 일을 모르고 있구나.

나는 잠시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물론 나도 사실대로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내가 입을 가벼이 놀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저도 그 근처에 있긴 했는데 공녀의 말씀대로 갑자기 쓰러지셨던 게 맞습니다.”

“……그렇군.”

공작의 눈빛을 보니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믿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건 아델라가 풀어야 할 문제였기에 내가 신경을 써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알겠소. 이만 나가 봐도 좋소.”

“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휴.’

공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그럼 헤이츠 공녀님, 아가씨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사를 따라 걷다 보니 저번에 봤던 아델라의 방이 보였다.

내가 왔다는 말에 기쁨 가득한 아델라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도 들렸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델라가 예쁜 얼굴에 예쁜 미소를 가득 채운 채 침대 등받이에 기대 앉아 있었다.

“벨리타!”

“아델라.”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또 나를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오는 게 맞죠.”

“그렇게 말해 주니 너무 감동이에요.”

하녀가 아델라가 있는 침대 근처에 의자를 놔주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아델라에게 선물로 가져온 꽃을 건넸다.

“여기요.”

“어머! 제게 주시는 거예요?”

아델라가 꽃다발을 보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감격스러워했다.

“네, 맞아요.”

“너무 예뻐요. 항상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고마워요. 꽃이 절대 시들지 않도록 잘 간직할게요.”

절대 지킬 수 없는 말이었지만 선물을 받은 아델라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아서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말로는 좋아졌다고 했지만 에이든의 말대로 내가 보기에도 아델라의 혈색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번보다 더 병이 깊어 보였다.

그런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델라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이제 곧 수확제와 승마 대회가 있죠?”

“네, 맞아요.”

“벨리타도 승마 대회에 출전하나요?”

“네, 저도 헤이츠가의 대표로 나갈 것 같아요.”

“벨리타는 말도 잘 타나 봐요.”

그녀의 눈빛에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저도 조금만 더 건강했다면 가능했을 텐데, 이럴 땐 몸이 약한 게 너무 슬퍼요.”

“얼른 건강해져서 우리 함께 말 타러 가요. 알았죠?”

어깨가 축 처진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델라를 보자 그녀를 격려하고 싶었다.

그래서 에이든에게는 돌려서 거절했던 말을 타러 가자는 말이, 아델라 앞에서는 물 흐르듯이 저절로 나왔다.

“고마워요, 벨리타.”

그 후로도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아델라가 대뜸 내게 물었다.

“아버지를 뵈었다면서요?”

“네, 이곳에 오기 전 바이언 공작님을 뵈었어요. 그런데…….”

이 말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됐다.

괜히 아직도 아픈 사람에게 그날의 일을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반면 바이언 공작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기에 의심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해 주는 것이 아델라가 앞으로 대응을 하는 데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하는 게 날지 잠시 고민하던 사이 아델라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그래도 우선은 건강 회복이 먼저인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혹시 아버지께서 연회에서 있던 일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아델라의 급작스런 물음에 순간 표정 관리를 못하고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대답은 충분했다.

“……네, 맞아요.”

“공녀께선 아버지께 뭐라고 하셨어요?”

“음, 별말 안했어요.”

“사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께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알게 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까의 대화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 못지않게 바이언 공작 또한 자신의 딸을 끔찍이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연회에서 마음을 다쳐 그로 인해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의 말대로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아마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러셨겠지.’

특히 케인이 원인이라면,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럼 아델라는 케인을 보호하고 싶어서 숨기는 걸까?’

“이해해요. 아델라가 말씀을 안 드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저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바이언 공작님께서는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았지만요.”

“그러시던가요?”

“네.”

“하아…….”

아델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너무 바보 같죠?”

“…….”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알아요. 제가 바보 같은 거요. 그런데 왜 이 마음을 놓지 못하겠는지 모르겠어요.”

아델라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 미안해요. 이런 얘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저번에 내가 한 얘기를 기억하곤 그녀가 내게 거듭 사과했다.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 낫질 않는 건가.’

아무래도 그래 보였다.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마음, 스스로에게 느끼는 답답함,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병이 쉬이 낫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오늘만 들어 줄게요.”

눈앞에서 아픈 사람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걸 보니 도저히 냉정해지기가 힘들었다.

“네?”

내 말에 아델라의 눈이 커졌다.

“오늘만 아델라의 얘기를 들어 줄 테니 하고 싶은 얘기 맘껏 해 봐요.”

“벨리타…….”

그래서 오늘 하루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로 했다.

내가 읽었던 ‘세 가문의 사랑과 전쟁’이라는 소설이 아닌 진짜 그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처음부터 시작해 볼까요? 음, 맥시어스 공작님을 어디서 만났어요? 제가 알기론…….”

내가 먼저 물꼬를 틀었음에도 아델라는 처음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녀가 입을 열기를 격려하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팍 터지듯 순식간에 그녀의 입에서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가 알던 것과 비슷했다.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고, 케인이 내게 파혼을 요구하고, 파혼 후 내가 여행을 떠난 뒤 두 사람은 약혼을 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비슷했다.

이야기가 달라진 것은 그 후였다.

처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좋은 나날을 보냈던 일들을 이야기할 때 아델라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나쁜 게 아니라 그때를 회상하며 다시 사랑에 빠진 사람같이 황홀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케인의 태도와 행동이 변한 것을 언급할 즈음부터 그녀의 표정은 우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서 변하실 줄 몰랐어요. 사랑한다고, 저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런데 케인이 변한 시기는 저번에 그에게 들었던 시기보다 조금 더 앞섰다.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아니다. 그 인간의 표정과 태도를 보건대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을 토대로 추측해 보면 케인은 아마 내 편지를 읽기 전에 이미 마음이 슬슬 식는 중이었던 거였다.

그러던 중 내 편지를 읽게 됐고 본인 말대로 뭔가를 깨달았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얼추 앞뒤가 맞았다.

‘하긴, 한 사람만을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

나도 벨리타가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었다.

그게 비록 광적인 집착을 담은 사랑일지라도 오래도록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아, 미안해요, 벨리타.”

“아니에요, 괜찮아요. 계속해요.”

아델라는 말하는 중간에 사과를 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파혼을 하자는 케인의 말을 끝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니, 애초에 저를 사랑한 게 아니라고 했어요. 착각했다고, 사랑이라는 감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이런 건 절대 사랑일 리가 없다고, 그러니 그만하자고 했어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잠시 뭔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공작님께 시간을 주자고 생각했는데…… 그때 연회에서 한순간의 바람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흑.”

아델라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가지가지 한다, 진짜.’

나보고는 뭐? 처음 느낀 사랑이라고 그러지 않았나?

좀 시간이 지나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나한테 아델라가 인생의 전부라고 아주 사랑꾼 행세는 다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델라의 눈에서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눈물 닦아요.”

“고마워요, 벨리타. 흑.”

“그런 사람 때문에 울 필요 없어요. 저번에 아델라가 제게 물었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왔냐고 말이에요. 제 대답은 그때와 똑같아요. 시간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줬어요. 아델라도 할 수 있어요.”

“정말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네, 저는 무려 10년을 좋아했어요. 그런데도 그분을 잊는 데 1년도 안 걸렸어요.”

1년이 뭐야, 일 초도 안 걸렸지.

물론 애초에 안 좋아했으니까 가능한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델라가 맥시어스 공작님을 계속 좋아하겠다면 말리진 않을 거예요. 그건 아델라만의 마음이니까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죠. 하지만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것이 괴롭고 힘들고 못 견디게 아프다면 떠나보내는 것도 방법이에요.”

누군가 우리 둘을 보고 있다면 진짜 재밌는 구경거리라고 생각하겠지?

먼저 차인 사람이, 그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 차이자 조언을 해 주는 모습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 모양새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아델라나 에이든과 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연회에서 만난 아델라가 한 말에는 좀 짜증이 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크게 감정이 상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진심을 다해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벨리타. 덕분에 마음이 많이 후련해졌어요.”

아델라가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확실히 아까보다는 표정이 좋아 보였다.

“벨리타는 정말 강하네요.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에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시기를 극복하고 나면 저도 벨리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뇨.”

“아…… 역시 좀…….”

내가 칼같이 대답하자 아델라가 금세 풀이 죽었다.

“아델라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이것 또한 진심이었다.

“아…… 벨리타.”

아델라가 감동했는지 또다시 울먹거리려 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러면서 내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 * *

또 며칠이 지났다.

오늘은 리안을 데리고 서커스단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있는 고아원에 갈 계획이었다.

헤모아까지 가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리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저번에 갔을 때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어제 직접 번화가에 나가 아이들에게 줄 선물들을 샀는데 그 선물들이 지금 마차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이들이 많이 좋아할 것 같아요!”

메리가 선물 상자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가씨께서는 아이들을 유독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예쁘잖아, 귀엽고.”

“그렇긴 하죠. 이번에 가는 고아원이 리안이 있었던 서커스단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고요?”

“응, 맞아.”

고아원으로 출발하기 전 메리에게 왜 가는지와, 그곳엔 어떤 아이들이 있는지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분명 바이언 공자님께서…… 맞죠?”

“맞아, 에이든이 후원하는 고아원이야.”

리안, 메리, 윌리엄은 에이든이 서커스단의 아이들을 구출시켜 고아원으로 보내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는 이중에서 나만 알고 있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아가씨께서 바이언가의 분들과 꽤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아요. 사실 아가씨께 말은 안 했지만 저는 그분들을 볼 때마다 조금 속도 상하고 분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전혀 아무렇지도 않으셔서 좀 혼란스러웠어요.”

메리는 벨리타의 가장 최측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잖아.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으로 미소까지 띠며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파혼한 이유도 바이언 공녀님 때문-.”

“메리.”

나는 거의 처음으로 얼굴을 굳히며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파혼을 당한 이유는 아델라가 아니라 맥시어스 공작님의 변심 때문이야. 그분이 변하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파혼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마.”

굳이 아델라가 잘못한 걸 꼽자면 약혼자가 있는 남자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 이유로 아델라 또한 케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케인의 저 광기 어린 집착과 행동을 당하고 나니까 그가 아델라에게 어떻게 했을지 눈에 선했다.

사실 소설에서도 케인이 아델라에게 구애를 하는 부분이 상세하게 나오긴 했었다.

하지만 여느 독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남주가 여주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서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낭만은 개뿔.’

결과가 좋아서 그렇지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낭만적’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이었을 줄이야.’

그런 인간이 돌아 버리면 더 지독해진다는 걸 지금에야 몸소 알게 됐다.

“……네, 알겠어요, 아가씨.”

메리의 목소리가 살짝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이제는 다 털어 버렸어. 그러니까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하자.”

“네, 죄송해요, 아가씨.”

“네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지금도 다 내 걱정하느라고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 마음 쓰지 마.”

“아가씨…….”

“그나저나 오늘 이렇게 넷이서 움직이니까 다시 여행 가는 것 같다. 그치?”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빠르게 말을 돌렸다.

오늘 호위로 리안과 윌리엄이 함께하기 때문에 여행을 갔었던 그 멤버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저는 가끔 그때의 꿈을 꿔요.”

메리도 눈치가 있는 편이라 금세 내 말에 동조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래. 하루하루가 재밌고 즐거운 날들이었어.”

“맞아요. 아가씨 덕분에 많은 곳들을 다니고 많은 걸 봤어요. 제게 그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네가 기꺼이 나를 따라나서 줬잖아.”

“당연하죠. 저는 아가씨의 전속 하녀인 걸요. 아가씨가 가는 곳은 저도 무조건 가요. 어디를 가든 절대 저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

“윌리엄 경도 마찬가지예요. 그분도 아가씨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실 거예요. 리안도 그렇고요.”

“…….”

“아가씨께서 헤이츠 가문의 어엿한 가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고 되시고 나서도 저희는 아가씨 곁을 지킬 거예요.”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메리의 낯선 모습에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내 곁에는 이렇게 충성스런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살살 긁는 것 같이 심장 부근이 간질거렸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내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내 준다는 것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 말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고마워.”

그것뿐이었다.

* * *

세 시간을 달려 헤모아에 있는 고아원에 도착했다.

마차는 고아원 입구 앞에 섰다.

내리자마자 그때와 마찬가지로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아이들 속에서 키가 커서 유독 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누구죠?”

메리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에이든 바이언.”

“네? 바이언 공자님이시라고요?”

그가 분명했다.

그때, 아이들과 한창 뛰놀던 에이든이 뭔가를 느꼈는지 멈춰 서서 우리 쪽을 쳐다봤다.

멀리서도 그와 눈이 마주친 게 느껴졌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긴 다리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내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이든이 뛰는 것을 보고 웅성거리던 아이들도 곧 뒤따라왔다.

“벨리타?”

“에이든.”

그는 숨 하나 차지 않은 평온한 상태로 내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아니, 너무나 뜻밖이라서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델라는 잘 지내나요? 건강은 어때요?”

“신기하게도 벨리타가 다녀간 후 많이 좋아졌습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아델라와 주고받는 서신에서도 요즘 들어 왠지 힘이 생기고 몸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쓰여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델라는 저번에 갔을 때도 괜찮다고 했었기 때문에 그저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근데 진짜로 좋아지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언니!”

에이든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이어 아이들이 도착했다.

루시가 나를 부르며 내게 달려왔다.

“언니, 보고 싶었어요!”

친근하게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루시, 잘 지냈니?”

“네! 잘 지냈어요! 오빠는 어디- 어, 저기 있다!”

루시가 리안을 보자마자 그에게 다가갔다.

다른 아이들도 내게 인사를 한 후 바로 리안에게 뛰어갔다.

아이들을 둘러보던 나는 새로 들어왔는지 저번에는 본 적 없었던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자, 그럼 인사도 다 했으니 선물을 줘야겠네.”

“선물이요?”

“우리 주려고 진짜 선물 갖고 왔어요?”

“당연하지.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잖아.”

“와아!”

“선물이다, 선물!”

선물이 마차에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이들이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마차 주위를 방방 뛰어다녔다.

“자, 한 줄로 서자!”

아이들이 다 같이 “네!”라고 대답하며 내 앞에 일렬로 섰다.

나는 마차에서 선물 상자를 하나씩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물이야!”

내게 감사 인사를 하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선물 처음 받아 봐!”

“나도! 나도!”

그때 아이들 중 몇몇이 선물을 처음 받는다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이거 진짜 제 거예요? 누가 안 뺏어 가요?”

그리고 한 아이는 내게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다.

순간 울컥해서 고개를 숙여 입술을 꽉 깨문 다음,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아이에게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네 거야. 아무도 못 뺏어 가니까 걱정 마.”

“와아! 감사합니다!”

마지막 아이에게까지 선물을 나눠 주고 난 후 이제야 허리를 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선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에이든이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약속한 걸 지킨 것뿐이에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아이들이 참 밝아요. 이곳에서 얼마나 잘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요.”

“벨리타도 고아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으셨어요?”

하긴, 아무래도 꽤 크게 하는 사업이라서 알 사람은 알게 될 일이었다.

“제가 짓는 고아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저렇게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하루하루 즐겁게, 잘 지내면서요.”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럴까요?”

“네.”

그가 그럴 거라고 말하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헤벌쭉 웃자 그도 나를 보며 웃어 주었다.

그러자 아까 마차에서 메리와 대화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간질거림이 심장 근처에서 느껴졌다.

그를 보며 느끼는 감각이 낯설어 나도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이들이 선물을 다 확인했는지 이제는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형! 우리랑 놀자!”

아드리안이 리안의 팔을 붙잡으며 끌어당겼다.

“오빠, 우리랑 놀 거지? 금방 안 갈 거지?”

루시도 아드리안이 잡은 쪽의 반대쪽 팔을 붙잡으면서 리안을 붙잡았다.

리안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갔다 와.”

“와아아!”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럼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충분히 시간 보내고 와. 나는 말을 타고 마을을 좀 둘러보고 올게.”

이 마을에 이제 딱 두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꽤 맘에 들었다.

마침 여행 온 기분으로 왔으니 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거기다 승마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보다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편이 연습도 될 것이다.

“그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마을을 구경한다고 말하자마자 에이든이 나와 함께 가겠다며 말했다.

“저 혼자 둘러봐도 돼요. 안 바쁘세요?”

그는 거의 매일이 바빠 보였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시간을 뺏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굳이 그와 함께 둘러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괜찮습니다.”

그가 괜찮다고 말하자 더 이상 사양하는 것도 좀 그래서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리안에게 어서 가 보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어쩐지 리안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또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뭔가를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리안,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닙니다.”

“그래, 그럼-.”

“형, 빨리 가자. 가서 같이 놀자!”

아이들이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리안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얼른 가. 가서 즐겁게 놀아 줘.”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아가씨.”

“응.”

리안과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떠난 뒤 나와 에이든도 말에 올라탔다.

“두 사람도 잠시 쉬고 있어.”

두 사람만 있게 되자 행복한지, 연신 웃고 있는 메리와 윌리엄을 내려다보니 에이든과 함께 가는 것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 조심하셔요.”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응, 갔다 올게.”

그렇게 에이든과 나는 말을 타고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어떤 곳을 갈 때마다 첫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헤모아는 어쩐지 처음부터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었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이곳을 아이들의 터전으로 삼은 것도 마을에서 따뜻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따뜻한 느낌. 이런 느낌은 정말 흔치 않죠.”

“벨리타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니 기분이 좋군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는데 한번 가 보겠습니까?”

“한눈에요?”

“네, 길바닥도 평평해서 말을 타기에 딱 알맞은 곳입니다.”

“그래요? 가 봐요.”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네.”

에이든이 먼저 앞서 달리자 나도 그를 따라 속도를 냈다.

언덕까지 가는 길은 에이든이 말한 것보다 훨씬 환상적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풍경과 누군가 일부러 돌을 다 치웠는지 길이 무척이나 깔끔했다.

“정말 좋은데요?”

나는 에이든을 바짝 따라붙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에이든이 시원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말을 타고 달리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유로움이 느껴지며 가슴이 뻥 뚫렸다.

그래서 그 기분에 취해 나도 모르게 그에게 엉뚱한 말을 했다.

“우리 시합할래요?”

“시합 말입니까?”

“네, 언덕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요.”

“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기면……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내 말에 에이든이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소원…….”

“질 것 같아서 그래요?”

“어떤 소원이든 말입니까?”

“네, 들어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지요.”

말을 하면서도 지금의 나는 정말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대책 없이 말을 내뱉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제약도 없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출발!”

그가 하겠다고 대답하자 나는 곧바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는 체격과 운동신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도 괜찮은 반칙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말을 타고 내달렸다.

그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정말 갈 수만 있다면 이대로 어디든 끝까지 내달려서 가고픈 마음이었다.

누구도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얽매이지 않고 질주하고 싶은 본능이 계속해서 나를 깨우고 있었다.

“벨리타!”

그런데 뒤에서 쫓아오는 에이든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현재 속도보다 더 빨리 내달렸다.

그러자 에이든이 탄 말발굽 소리의 간격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그사이 그가 계속 나를 불렀지만 나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눈앞에 언덕이 보였다.

더 달리고 싶었지만 끝이 보였다.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그래도 에이든보다 내가 앞서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나의 승리였다.

나는 승리의 기쁨에 취해 바로 내 뒤를 쫓고 있던 그를 쳐다보며 외쳤다.

“제가 이겼어요! 제가 이겼- 어? 꺄악!”

“벨리타!”

순간 말이 무언가에 걸렸는지 앞으로 고꾸라지며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이제 길바닥에 떨어져 나뒹굴 일만 남아 있었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언덕을 사정없이 데굴데굴 굴렀고 잠시 뒤 움직임이 멈췄다.

그런데 이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몸의 충격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때서야 나는 누군가 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움츠렸던 고개를 들자 내 시선 속에 에이든이 보였다.

“에이…… 든?”

“괜찮습니까?”

그는 제일 먼저 내 안위를 살폈다.

“괜찮…… 아요. 에이든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와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 숨결이 섞였다.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일어서서 몸을 살피는데 그가 내가 받을 충격을 다 대신 받았는지 낙마를 했음에도 멀쩡했다.

그도 나를 따라서 나뒹굴었던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도 다친 곳이 없는지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그런데 흙먼지가 그의 몸에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 나도 그와 같은 꼴일 게 분명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푸흡! 아, 죄송해요. 그게 우리 꼴이 너무 웃겨서…….”

“그렇겠군요.”

그러면서 그가 자신의 옷을 터는 게 아니라 내게 다가오더니 내 머리카락에 묻은 풀과 먼지를 털어 주었다.

“제, 제가 할게요……!”

민망한 마음에 말을 더듬으며 저절로 몸이 뒤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낮아진 것 같았다.

내가 거부해서 기분이 안 좋아졌나?

하지만 이런 친근한 스킨십은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저기, 고마워요. 제가 괜히 조심성 없이 굴다가 둘 다 크게 다칠 뻔했네요.”

“아닙니다.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미안하고 고마워요. 어? 그런데 우리 그러면 누가 이긴 거죠?”

언덕에 도착하기 전에 일이 터져서 둘 다 결승전에 도착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바로 말을 이었다.

“시합은 제가 이긴 거로 해요. 어쨌든 제가 더 빨랐으니까요. 맞죠?”

“알겠습니다.”

그가 별말 없이 수긍했다.

“그 대신 저를 구해 주셨으니 저도 에이든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요.”

“소원을요?”

“네, 저는 시합을 이겼으니 에이든에게 소원을 하나 말하고, 에이든은 저를 구해 줬으니 제게 소원을 하나 말하는 거예요. 괜찮죠?”

내가 생각했지만 괜찮은 판단이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런데 소원은 언제까지 유효합니까?”

“음, 사실 저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거든요. 일단 한동안은 유효하다고 할까요?”

“그렇게 하죠.”

“네,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소원 하나씩을 남겨 두었다.

우리는 언덕에서 마을을 구경한 뒤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메리가 내게 다가오더니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가씨, 옷이 왜 이래요?”

“아, 이거 별일 아니야.”

말에서 떨어져 굴렀다고 하면 많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대답을 피했다.

“공자님께서도…… 어…….”

“잠깐, 메리!”

순간 메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메리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나쁜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아가씨…… 두 분 다 옷이…….”

“아니야, 그런 거!”

나는 당당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메리에게 한창 변명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과 다 놀았는지 리안이 다가왔다.

“아가씨.”

“리안, 아이들과 잘 놀았어? 아이들하고 인사는 했니?”

“네. 그런데 아가씨 옷이…….”

“별거 아니야. 아무튼 얼른 가자.”

여기에 더 있다가는 이상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빠르게 이곳을 떠나는 걸 택했다.

“이제 가 봐야겠어요.”

나는 에이든을 돌아보며 그에게 인사한 뒤 마차에 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벨리타.”

“네?”

그가 부르자 나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에이든을 쳐다봤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올라가세요.”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커다란 손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와 맞닿은 손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다음에는 전야제 때 뵙겠군요.”

“네, 그러겠죠.”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에이든도요.”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뒤이어 메리가 들어왔고 그대로 마차 문이 닫혔다.

모두 다 올라타자 지체 없이 마차가 출발했고 그렇게 우리는 헤모아를 떠나 수도로 돌아왔다.

* * *

승마 대회와 수확제가 내일로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은 그 둘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한 전야제가 열렸다.

아침 일찍부터 전야제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쉽게도 어제 아델라에게서 받은 서신에 그녀는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몸이 좋아지긴 했지만 전야제에 참가할 정도로 회복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럼 에이든만 오는 건가?’

그를 본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 전 헤모아에서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연회장에서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연미복이 무척 잘 어울렸어.’

그 얼굴에 안 어울리는 건 없겠지만 말이다.

‘가면 또 봐야겠네.’

가서 보게 될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남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요새 케인이 이상하리만큼 잠잠하다는 걸 깨달았다.

‘드디어 포기한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 남자의 말과 행동을 봤을 때 그리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아가씨, 아가씨!”

메리가 나를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한 채 메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오늘 할 머리 장식을 분명 드레스와 함께 놔뒀는데 보이질 않아요. 어떡하죠?”

아, 난 또 뭐라고.

“다른 걸 하면 되지.”

“그게 오늘 입을 드레스와 가장 잘 어울린단 말이에요.”

메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아요. 죄송해요. 관리를 잘 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이에요.”

“괜찮아, 나는 뭘 해도 예쁘니깐.”

“맞아요! 우리 아가씨는 뭐든 다 잘 어울려요!”

메리를 안심시켜 주려고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너무 잘 받아 줘서 민망한 기분이 올라왔다.

“일단은 제가 한 번 더 찾아보고 그래도 없으면 그것보다 더 예쁜 걸 가지고 올게요.”

“그래, 알았어.”

메리가 다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전야제에서 입을 옷은 어깨와 가슴이 살짝 드러나는 옅은 파란빛의 드레스였다.

목선이 드러나게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렸다.

원래 머리 장식으로는 작은 블루 사파이어가 줄을 따라 촘촘히 엮여 있는 예쁜 것으로 미리 준비해 놨었다.

머리 장식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메리가 깜빡하고 딴 데다 놔두고 못 찾는 거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쉽긴 하지만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장식을 꽂으면 그만이었다.

“아가씨!”

머리 장식만 빼고 모든 준비를 마쳤을 즈음, 막 메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찾았어요!”

“그래? 다행이네.”

“네! 옷장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메리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사파이어 머리 장식을 머리에 촘촘하게 꽂아 주었다.

“와아, 진짜 너무 아름다우세요.”

메리의 칭찬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공작님과 마님께서도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치셨어요.”

“그럼 내려가자.”

“네.”

2층 계단을 내려가, 홀을 지나쳐 저택 밖으로 나가니 오늘도 역시나 마차 앞에 리안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리안을 본 것과 동시에 리안도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나를 본 리안의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리안.”

“아가씨.”

“리안, 오늘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시지 않니?”

메리가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언제나 아름다우십니다.”

얘네들이 오늘 왜 이래?

특히 리안은 그간 내게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어서, 낯간지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그건 그래. 하지만 오늘은 훨씬 더 아름다우시지 않니?”

“메리.”

그만하라는 뜻으로 그녀를 불렀다.

“특히 머리를 틀어 올리면 보이는 곧고 긴 목선이-.”

하지만 유독 오늘 그녀는 내 찬양을 멈추지 못했다.

“그만.”

“아, 죄송해요. 하지만 아가씨도 거울을 보셔서 아실 거예요. 저는 오늘 좀 걱정돼요.”

“뭐가?”

“전야제에 오는 귀족분들이 다 아가씨께 반할까 봐요.”

과장이 심했다.

물론 아까 거울로 본 내 모습은 다른 날보다 꽤 흡족하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메리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부모님께서 나오셨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도 나를 보자마자 놀라신 듯한 기색이었다.

‘뭐지?’

평소와 다른 거라고는 머리를 올린 것뿐인데.

아니면 내가 파란색이 잘 받나?

아무튼 다들 예쁘다고 하니 처음엔 민망했지만 차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기분 그대로 우리는 황궁으로 출발했다.

* * *

전야제를 위한 연회장은 황궁의 가장 넓은 정원에 준비되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곳에는 이미 전야제를 위해 많은 귀족들이 모였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몇몇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옆 테이블로 가려던 에이든과 바이언 공작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헤이츠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바이언 공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확실히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서로 한껏 예를 갖추긴 했지만 눈빛과 말투, 태도에서 완벽하게 티가 났다.

바이언 공작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후 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뒤에 있던 에이든과 인사를 나눌 차례였다.

“바이언 공자.”

부모님들은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는 걸 아직 모른다.

그걸 일일이 알릴 필요는 없을뿐더러 이런 공식 자리에서 이름을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격식을 차려 그를 불렀다.

“헤이츠 공녀.”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바이언 공녀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쉽네요.”

“누님께서도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특히 공녀와 만나지 못함을 더욱 슬퍼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바이언 공작가에 언제 한번 또 방문하겠다고 말씀 전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흠!”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였다. 지금 상황이 별로 맘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내 짐작대로 아버지가 바이언 사람들에게 빨리 자리로 돌아가라고 돌려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했습니다. 가자.”

바이언 공작이 에이든을 데리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벨리타.”

그리고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아버지가 점잖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아버지.”

“바이언가에 자꾸 그렇게 들락날락거릴 거냐.”

“바이언 공녀의 몸이 좋지 않아서요. 아픈 사람을 부를 수는 없잖아요.”

“여보, 벨리타가 알아서 잘 할 거예요.”

어머니가 자꾸 참견하지 말라며 아버지를 타일렀다.

“알겠소. 벨리타,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자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단번에 입을 닫았다.

‘역시 어머니.’

자애롭고 현명한 나의 어머니.

나도 그런 어머니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일전에 바이언 공작이 내게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하자 그날 내내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보냈다.

전야제가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나는 보지 않는 척하면서 에이든이 있는 쪽을 자꾸 힐끔힐끔 쳐다봤다.

신기하게도 에이든도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계속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눈가를 휘며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에이든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검은색의 연미복이 시야를 장악했다.

‘아, 뭐야.’

속으로 살짝 짜증이 일어 고개를 올리니 볼 때마다 짜증을 넘어 화가 솟구치게 하는 인간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내가 누구를 보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시야를 완벽하게 막고 있었다.

언짢은 표정과 함께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뻔뻔한 인간답게 그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내게 시선을 한번 짧게 주더니 바로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헤이츠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흠. 오랜만이오, 맥시어스 공작.”

아버지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케인의 인사를 받았다.

케인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내 앞으로 왔다.

“헤이츠 공녀, 오랜만입니다.”

“네, 그러네요. 오랜만입니다, 맥시어스 공작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이곳은 공식적인 자리였다.

부모님도 계시고, 그 외에 많은 귀족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의 상황에 집중할 게 분명해서 절대 꼬투리 잡힐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케인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의아함과 함께 불쾌함이 느껴지려던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정말 아름답군요.”

너한테 그런 소리 들어도 하나도 안 기뻐.

“감사합니다, 공작님.”

전혀 달갑지 않은 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고맙다고 대답했다.

“크흠, 공작은 이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곧 전야제가 시작할 것 같소만.”

역시 아버지!

아버지께서 케인에게 썩 꺼지라는 말을 돌려 얘기하고 있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전에 공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마 또 이상한 소리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살짝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따 공녀와 첫 춤을 추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허락 못 하지.

내가 왜 당신과 첫 춤을 춰.

“저는-.”

“당연히 안 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여보!”

어머니가 흥분해서 케인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아버지를 말렸다.

“저는 공녀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내 대답은 뭔가 다를 거라고 착각하나 본데 내 대답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다를 뿐이었다.

“저는 이미 첫 춤을 약속한 분이 있습니다.”

내 말에 여태까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서 있던 케인의 얼굴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누구…… 입니까.”

“저쪽에 앉아 계신 바이언 공자입니다.”

저번에도 생각하긴 했지만 케인과 나의 일에 에이든을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치 ‘너는 언제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듯한 케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

저번에 얼떨결에 에이든을 이용 아닌 이용했을 때 케인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그래서 조금 울컥해 있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에이든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번에도 바이언…… 공자군요.”

“벨리타, 무슨 소리냐. 바이언 공자라니!”

아버지가 바이언 공자라는 소리에 또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큰 편이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에이든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금방 내 앞으로 다가왔다.

“벨리타, 무슨 일입니까?”

“저기, 그게…….”

여기서 얘기를 마무리 짓고 나중에 따로 에이든에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나는 살짝 망설이다 에이든이 제발 나를 도와주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제게 춤을 신청하시길래 제 첫 춤 상대는 바이언 공자님이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사실입니까?”

케인이 에이든에게 물었다.

나는 케인을 살짝 등지며 에이든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제발 그가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길 바랐다.

“네, 헤이츠 공녀와 첫 춤을 추기로 선약해 놨습니다.”

에이든의 대답을 듣자, 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휴…….

하지만 그의 표정이 어쨌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기양양하게 케인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는 다른 영애께 춤을 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쐐기를 박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자리도 자리인지라 그만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케인은 케인이었다.

“그럼 두 번째라도-.”

또, 또 질척거리네.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한 표정으로 두 번째라는 말까지 입에 담고 있었다.

“아뇨, 저는 오늘 바이언 공자와만 춤을 출 겁니다. 그러니 다른 분을 구하세요.”

그리고 나는 완벽한 거절의 말을 그에게 돌려줬다.

케인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이 정도면 포기하겠지.’

그러나 내가 그를 너무 얕봤다.

곧바로 그에게서 기함을 할 만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공녀께서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내가 너무하다고?

지금 케인의 말은 마치 내가 그에게 어떤 해코지를 한 것 같은 투였다.

자기가 뭔데 피해자처럼 나와?

어이가 없었다.

도를 넘는 뻔뻔함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인간에게 감정적인 대응은 좋지 않았다.

그가 감정적으로 나온다고 나도 덩달아 감정적으로 나가면 그에게 착각을 심어 줄 수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느끼는 증오의 마음조차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그야말로 애증이라고 포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그에게 일말의 감정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입꼬리를 끝까지 올려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러니 이제 자리로 돌아가세요.”

케인은 내가 저번처럼 신경질적으로 행동할 줄 알았는지, 내 차분한 대응에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를 외면한 채 옆에 있는 에이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따가 봬요.”

그리고 보란 듯이 아까의 억지웃음이 아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에이든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에이든은 대답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케인이 갈 때까지 내 곁을 지킬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케인이 여전히 꿈쩍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자, 한 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열려던 때였다.

뿌우-.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일어나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그리고 시종의 커다란 목소리에 따라 모든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뒤를 따라 황후, 황태자, 그리고 여러 황족들이 줄지어서 나타났다.

케인은 그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뒤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이든도 나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이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두 남자가 사라지자 옆에서 아버지가 매서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바로 황제의 축사가 시작됐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하는 말 중에 딱히 중요하게 들을 말은 없었다.

올해 풍년으로 인해 큰 수확을 거두었다는 내용과 축제를 즐기라는 말이 다였다.

그리고 승마 대회에서 우승한 이에게 올해는 특별한 상을 마련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축사가 끝난 후 황제는 가장 높은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어두워진 밤하늘에 오색 빛깔 불꽃들이 터지면서 전야제의 시작을 알렸다.

황실의 악사들이 자리를 잡자 듣기 좋은 악기의 소리와 웅장한 노래가 연회장에 크게 퍼졌다.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과 술이 놓여졌다.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기를 띤 음성으로 내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벨리타, 바이언 공자와 첫 춤을 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 게냐. 그게 사실이냐?”

“맞아요, 아버지.”

“언제 그런 약속을 한 것이냐.”

“저번에 바이언 공녀의 병문안을 갔을 때 제가 그분께 청했어요.”

에이든이 내 거짓말에 동참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서 그런지, 아버지 앞에서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바이언 공자가 먼저 청한 것도 아니고 네가 먼저 청했다고?!”

“네, 맞아요.”

“이게 무슨! 나와 약속한 걸 잊은 게냐!”

“아버지, 진정하시고 제게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내 간절한 눈빛을 읽으시곤 아버지께 다가갔다.

“여보, 진정하세요. 귀족의 위엄을 보이셔야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집에 가서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아버지, 저를 믿어 주세요.”

나는 아버지께 내가 왜 그랬는지 다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일들을 말하기엔 이곳은 썩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조용한 곳에서 진지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여보, 우리가 벨리타를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요.”

“크흠.”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아버지가 조용해졌다.

“전야제가 끝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다 말해야 할 게다.”

“네, 반드시 그럴게요.”

“그럼 오늘은 바이언 공자와 춤을 추겠다고?”

“네, 공자와 약속했으니까요.”

“도대체 왜-. 됐다, 알았다. 네가 알아서 하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오늘 일에 대한 아버지의 허락이 간신히 떨어졌다.

확실히 마음이 홀가분해지니 테이블 위에 펼쳐진 음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달큼한 향과 함께 포도의 떫은맛과 신맛이 적당히 느껴지는 최고급 와인이었다.

그렇게 와인을 홀짝이며 전야제를 즐기고 있는데 잔잔하게 들려오던 음악이 멈추고 곧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바로 전야제의 하이라이트인 댄스 타임이었다.

사실 전야제에 오기 전에는 이 댄스 타임에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 내게 춤을 청해도 다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케인 때문에 에이든과 춤을 추게 되었다.

나는 에이든이 앉아 있는 자리를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에이든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얽혔다.

보라색의 올곧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꽉 잡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순식간에 내 앞에 도착했다.

“헤이츠 공녀,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벌써 몇 번째 보는 길고 커다란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좋아요.”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의 손을 또다시 잡고야 말았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는 무리들 속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나타나자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우리를 왜 쳐다보는지 이유는 잘 알았다.

재밌겠지.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라고 수군거릴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그의 한 손이 내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춤이라는 걸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만 벨리타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벨리타의 기억 속에 에이든과 같이 춤을 춘 적은 결코 없음에도 우리의 합은 완벽했다.

멀뚱히 서서 태연하게 춤을 추는 우리를 보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둘씩 움직였다.

시간이 꽤 흐르자 더 이상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아까 에이든과 손을 마주잡은 채 그를 지나치자, 케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와 에이든은 그에게 신경 쓰는 대신 춤에 집중했다.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제 거짓말에 동참해 줘서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네?”

엄연히 내가 거짓말을 한 걸 아니라고 하니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사실 벨리타에게 춤을 신청하고 싶었습니다. 때를 놓쳐 말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지금 내 몸 어딘가에서 쿵쿵 뭔가가 뛰는 듯이 울리는 이 느낌은 음악 때문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역시 그가 잘생겨서 그 아름다움에 순간 매료된 것일 뿐이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그에게 말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아무 의심 없이 내 장난을 받아 주었다.

우리는 대화가 끊기지 않기 위해 계속 대답을 이어 갔다.

“승마 연습은 많이 하셨습니까?”

“음, 어느 정도는요.”

“꼭 우승하시길 바랍니다.”

“에이든도 꼭 우승해요.”

“그러겠습니다.”

그 후 이곳에 오지 못한 아델라의 이야기도 했다.

“아델라가 에이든이 결승전에 올라가면 경기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고요? 몸은 괜찮을까요?”

“제가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음에도 누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역시 에이든은 자신의 누나에게 약했다.

“그런데 결승전에 올라갈 수 있는지를 먼저 걱정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장난기 다분한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럼 제가 결승전에 올라간다면 벨리타도 제 경기를 보러 와 주시겠습니까?”

“네?”

대화가 왜 그렇게 튀지?

농담 한번 했다가 졸지에 결승전에 가게 될 상황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자 에이든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와 주신다면 제게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순간 고민에 빠졌다가 오늘 그가 나를 도와줬다는 생각이 번뜩 들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에이든이 오늘 저를 도와주셨으니까 저도 보러 갈게요. 단, 결승전이에요.”

“알겠습니다. 반드시 결승전에 오르겠습니다.”

저번에 헤모아에서 봤던 에이든의 말 타는 모습으로 보아 그의 실력은 이미 충분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여러 대화를 나누며 둘만의 세계에서 계속 춤을 추었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파트너를 여러 번 바꾼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케인에게 한 말이 사실인 것처럼 파트너를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그리고 짧다면 짧았던 댄스 타임이 끝나고 음악이 멈췄다.

그에 따라 춤을 추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발이 멈추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도요.”

그 순간 밤하늘에 처음 터졌던 불꽃보다 더 화려한 불꽃들이 펑펑 터졌다.

“와아!”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예뻐요. 그렇죠?”

불꽃놀이를 구경하며 흥이 난 나머지 얼떨결에 에이든의 팔을 잡고 방방 뛰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그러다 내가 뭘 잡고 있는지 알아채곤 얼른 그의 팔에서 손을 떼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위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나를 향한 오롯한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이미 불꽃놀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옆에 있는 그가 저절로 의식되며 긴장감이 몰려왔다.

“아직도 페오라트에는 간 적이 없습니까?”

“…….”

어떤 의미로 그가 묻는 건지 알고 있어서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나는 불꽃놀이에서 눈을 떼고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그때 내가 그를 만났던 걸 부인했을 때 그는 서운했던 걸까.

“……저는.”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를 만난다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되었다.

“저는 벨이에요. 당신은 누구죠?”

“……저는 이든입니다.”

“그럼 우리 페오라트와 율리타에서 보고 아주 오랜만에 만났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든?”

“잘 못 지냈습니다.”

“잘 못 지냈다니, 왜죠?”

“누군가가, 누군가가 아주 오랫동안 보고 싶었습니다.”

“…….”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났습니다. 그러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다행입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안도가 들어차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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