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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황궁은 이로써 두 번째 오는 것이었다.
저번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참 화려하고 호화로운 곳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크기는 둘째 치더라도 마차 창문을 통해 본 건물 하나하나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과시인가.’
황권의 약함을 감추고 겉으로라도 힘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오늘 연회가 열릴 연회장은 황궁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넓은 연못이 있는 정원의 북쪽에 있는, 굵은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건물이 오늘의 연회 장소였다.
마차에서 내려 긴 통로를 지나자 문이 보였다.
문지기가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인 뒤 문을 열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역시나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됐다.
“어머!”
“헤이츠 공녀가 왔네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긴 했지만 날 보고서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말을 할 거면 들리지 않게 좀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 내 연기력이 녹슬지 않았는지 시험해 볼까?
나는 입가에 띤 미소를 유지한 채 연회장을 느긋하게 가로질렀다.
누구보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천천히 나아갔다.
내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는 상석에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한순간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은 남자가 함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신분 사회이고 아무리 황제가 허수아비라지만 황실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 했다.
나는 황태자의 옆에 서 있는 케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허리를 숙이며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발테우스의 빛나는 작은 태양이자 고귀하신 에디얼 윈스턴 발테우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헤이츠 공녀, 오랜만입니다.”
황태자가 내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천천히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자 황태자와 시선이 얽혔다.
얼마 전 황제를 봤기 때문에 예상을 하긴 했지만 황태자의 외모도 무척 수려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황제의 경우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인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약해 보이는 얼굴이라면 황태자는 그와는 반대였다.
허수아비 황제와는 다른 강인함과 위풍당당함이 푸른빛이 도는 머리칼과 황실의 상징인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에게서 슬쩍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황태자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소설 내용을 기억 못하는 게 아니라 원작에서 황태자는 엑스트라로 잠깐씩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긴장하고 말았다.
하긴 어차피 원작이 끝나 버렸으니 그 누구의 행동도 예측할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공녀가 여행을 갔다가 막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황태자가 평범한 안부 인사로 대화를 시작했다.
내심 안도하며 나 또한 지극히 평범한 대답을 하려던 때였다.
“맞습니다, 전하. 공녀는 무려 2년 동안이나 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갑자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케인이 옆에서 황태자의 말을 거들었다.
아니, 지가 뭔데 내 일에 쓸데없이 말을 거들어.
나는 순간 그런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어울리지 않게 나를 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뭐야.’
케인이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못 본 걸 본 것처럼 표정을 찡그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말려들지 말자.’
“맥시어스 공작님께서도 계셨군요. 공작님과는 2주 전에 식사 자리에서 뵀었죠.”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왔었던 일을 아예 없던 사실로 만들 요량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케인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황제 폐하와의 식사 자리에서 벌써 재회를 했군요.”
재회라니.
물론 재회의 뜻이 단순히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는 뜻이었지만 왠지 케인과 나 사이에서 쓸 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래, 어떻습니까. 두 사람 다 서로를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 말입니다.”
이건 무슨…….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느낀 기분은 딱 이랬다.
마치 황태자가 나서서 케인과 나 사이를 중재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저는 반가웠는데 공녀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케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더러운 예감은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다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급하게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나는 일부러 방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맥시어스 공작님과 저의 관계가 썩 좋게 끝나진 않아서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줄 몰랐는지 두 남자가 살짝 놀란 기색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저는 맥시어스 공작님과 다르게 이 자리가 그다지 편하지 않습니다.”
나는 더없이 불쾌하지만 그럼에도 꾹 참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왜 황태자가 갑자기 연회 따위를 열어서 젊은 귀족들을 초대한 건지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케인 맥시어스.
저 인간이 황태자를 앞세워 뭔가 작당을 한 게 틀림없었다.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는 걸 두 사람의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 이만 물러가도 될까요? 이런 연회는 오랜만이라 인사를 나눌 이들이 너무 많아서요.”
물론 주위를 살펴봐도 아는 얼굴은 전혀 없었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연회장에 있는 아무나 붙잡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뒤로 돌아 그들을 벗어나자 뒤에서 나를 쳐다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 아까부터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온 사방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구경났네, 구경났어.’
하긴 나라도 이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을 것이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세 공작 가문 사이의 파혼, 약혼, 그리고 또 파혼.
‘재밌는 얘깃거리긴 하지.’
어차피 이럴 거라는 걸 알고도 온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나는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고개를 더욱 더 빳빳이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눌 이를 찾으며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아는 얼굴들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왔구나.’
아델라 바이언과 에이든 바이언이었다.
아델라의 눈은 내가 방금까지 있던 곳에, 에이든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에이든의 시선을 고의로 외면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쳐다봤다.
아델라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옅은 크림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 옆의 에이든 역시 멋들어지고 단정한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그의 외모에 순식간에 홀릴 수준이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황급히 고개를 돌린 뒤 시야에 들어온 한 영애들의 무리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벨리타의 기억을 빠르게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벨리타의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볼 때 이들도 내가 자신들을 모를 거란 걸 당연하게 여긴 듯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들이 곧장 자신들이 누군지 소개를 해 주어서 손쉽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연회장에 있는 이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느껴진 급격한 피로감에 나는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대충 훑어보니 몇 개 없는 테라스 중 대부분은 이미 누군가의 차지가 되었는지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아 빈 곳으로 예상되는 곳을 향해 걸어간 뒤 테라스를 살폈다.
다행히 테라스는 비워져 있었다.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커튼을 친 뒤 문을 꽉 닫았다.
사람이 있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였다.
이제 이곳은 남들의 눈을 피해 편히 쉴 수 있는 완벽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아, 힘들다.”
몸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너무나 피곤했다.
그럴 줄 알고 왔음에도 곳곳에 널린 지뢰들을 피하며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 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시간 내내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누군지 확인을 하지 않았지만 짐작은 갔다.
그러고 보니 아델라와 에이든이 내가 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해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어째 점점 꼬이는 것 같아.”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나는 잠시 테라스 밖을 구경했다.
밤하늘에 별이 한가득이었다.
“와, 예쁘다.”
마음은 심란했지만 눈 안에 들어오는 별천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밤하늘을 봤다.
그중에서도 단연 해안 도시 율리타의 바닷가에서 봤던 밤하늘이 최고였다.
‘또 볼 수 있을까.’
나중에 또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그때는 다시는 오지 못할 것만 같아서 눈에 꾹꾹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생각해 보니 못 갈 이유도 없었다.
내 의지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의지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때였다.
한동안 반짝이는 밤하늘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누군가 테라스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려다가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면 바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며 그저 계속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갔구나.’
문을 닫고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조금씩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기에 곧바로 안에 누군가 있음을 알 터였다. 나를 못 봤을 리가 없다.
‘뭐야.’
사람이 있음에도 마음대로 들어온 무례한 행동에 대해 따끔하게 한마디 한 뒤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뒤돌아보았다.
그곳엔 단 일 초도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공녀.”
케인이었다.
케인을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서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공녀와 할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이라니.
우리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았다고 자꾸 이러는 거지?
“저는 공작님과 할 말이 없습니다.”
“공녀.”
케인이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감정의 고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나를 재차 불렀다.
“저는 그저 공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집으로 찾아왔을 때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더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아니, 무슨 말이든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이 남자의 말을 들어 줄 이유 따위는 없었다.
“공작님.”
그를 부르며 나는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케인의 앞에서 단 한 톨의 감정이라도 남아 있는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오셨을 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왜 공작님과 사적으로 말을 섞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의 관계는 2년 전에 끝났습니다. 물론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공작님께 있고요.”
나는 단호한 의지를 담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닙니다. 아, 물론 처음부터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요.”
벨리타와 케인.
케인과 벨리타.
애초부터 한쪽이 극명하게 수그리고 들어갔던 관계였다.
벨리타는 케인의 마음을 원했지만 케인은 벨리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케인의 배신으로 끝이 났다.
“저는 공작님이 매우 불편합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원치 않습니다.”
케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말은, 제게 더 이상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까?”
설마 내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던 거야?
진짜로?
하,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지만 이런 모습도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무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네, 전혀요.”
애초부터 없는 마음이 지금이라고 있을까.
내 대답을 끝으로 정적이 일었다.
우리 둘 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뒤에 케인이 입을 열었다.
“네?”
예상치 못한, 너무나도 어이없는 말이었다.
“10년을 넘게 저를 마음에 담으셨다는 분이 고작 그 짧은 사이에 맘이 변하셨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을 뿐입니다.”
케인은 쉬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토해 냈다.
뻔뻔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이 정도까지 바닥인 줄 몰랐다.
계속되는 그의 망발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시작하죠.”
나 참, 이건 무슨…….
“지금 뭐라고 하셨죠?”
혹시나 내가 잘못 들었을까 봐 되물었다.
“다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뭘요?”
“앞으로는 공녀에게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계를-.”
“공작님.”
나는 그의 말을 빠르게 끊었다.
더 이상 가만히 들어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제게 왜 이러세요?”
진짜 궁금했다.
갑자기 내게 왜 이러는지, 왜 이제 와서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건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을까?
전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이 남자를 여기서 확실하게 끊어 내면 될 뿐이었다.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시는 분이셨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지금 이 남자의 말과 태도로 볼 때 그는 마치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내가 그저 좋다고, 없던 꼬리도 흔들면서 반길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벨리타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연기, 연기가 필요해.’
나는 지금 막 실연의 아픔을 달래고 돌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 다시 시작하자며 헛소리를 하는 남자가 서 있다.
나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 마음이 없다.
그러니 이 남자를 쫓아 버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남자에게 퍼부어 줄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공작님께서 파혼해 달라고 하셔서 눈물을 머금고 파혼해 드렸어요. 그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아시나요? 모르시겠죠. 모르시니 제게 지금 이런 행태를 보이시는 거겠죠.”
“…….”
“그리고 2년 만에 돌아왔어요. 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라, 제 마음을 정리하기엔 엄청나게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고요.”
“그러니 이제는-.”
“아니요, ‘이제는’이라는 것은 없어요. 공작님과 저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공작님께 더 실망하지 않도록 여기서 그만해 주세요.”
당신은 더 이상 내게 어떠한 의미도 없어.
잠시간 테라스에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그도 알아들을 만큼 알아들었다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때까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공녀.”
그리고 막 걸음을 떼려던 그때 케인이 다시 나를 불렀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공녀께서 제게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습니다.”
하, 참.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진짜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해야겠다.
“혹시 다이아몬드 광산 때문에 그러세요?”
“무슨 뜻입니까?”
“위자료로 제게 준 다이아몬드 광산 때문에 그러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대답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케인이 이러는 이유는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 만약 내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라는 말이 저 입에서 나온다면 나는 정말 그를 경멸할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공녀와 파혼하고 나서야 공녀가 제게 준 마음의 크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참 쉬우시네요. 그리고 너무나 이기적이세요.”
“…….”
“저를 내치실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공작님께서는 제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계시네요.”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제가 공작님께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시면 얼씨구나 좋다고 할 줄 아셨어요? 차라리 다이아몬드 광산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하세요. 그게 훨씬 더 인간적일 테니까요.”
나를 얼마나 쉽게 생각하면 이럴까.
아까의 화가 점차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공녀께서 화를 내는 이유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앞으로는 공녀만 보고 다른 이는 쳐다보지도 않을 겁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저에 대한 공녀의 마음이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와, 저 인간 진짜 뻔뻔한 거 봐.
“어쩌죠? 그 마음 2년 전에 끝났는데요. 공작님에 대한 제 마음은 그때 이미 다 사라졌어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시잖아요.”
“그때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제발요, 공작님.”
우리에게 미래가 어디 있고 앞으로가 무슨 소용일까.
나는 애초에 그에게 마음이 없었고 그는 처음부터 아델라의 남자였는데 말이다.
소설의 뒷이야기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꿈꿨던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던 걸까.
사실은 행복한 동화나 이야기의 끝은 다 이런 걸까.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뭘 한 것이 없는데 이 남자는 이제 와 왜 이러는 것일까.
나는 여느 소설처럼 케인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벨리타가 했던 행동 그대로 그가 질릴 만하게 행동했고 성공적으로 파혼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틀어진 거지?
케인의 마음이 언제, 어디서부터 바뀌게 된 것일까.
‘하아.’
절대 겪고 싶지 않았기에 조심했던 일을 겪게 된 지금,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정말 죽었어야 했던 걸까.’
급기야 내가 죽고 싶지 않아 바꾼, 사소하다고 생각한 행동들이 결국엔 원작을 바꾸게 된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이 죽는 미래를 아는데 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정당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도 내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이 싹 가셨다.
‘아니야, 정신 차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대로 행동해야 해.
이미 원작은 진즉에 끝났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이자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작은 끝났지만 등장인물은 남아 있었다.
케인이 있었고 아델라가 있었고 그리고…….
에이든이 있었다.
그는 아델라를 위해 기꺼이 벨리타를 죽인 인물이었다.
작금의 상황을 비추어 봤을 때, 아델라는 케인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진짜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케인의 마음은 나를 향해 있었다.
결국 아델라가 상처를 받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을 에이든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까?
자신의 사랑하는 누나가 실연에 빠져 커다란 아픔에 허덕이고 있는데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공작님과 일분일초도 더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잔뜩 상처 받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테라스에서 빠져 나왔다.
간신히 테라스에서 빠져나온 뒤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연회장 가운데에는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없다가 다시 나타나서 그런지 내게로 흘끔 시선을 주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연회장 밖으로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정원이 보였다.
식사 때 봤던 정원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때 에이든과 대화를 나눴던 정원은 온갖 나무들로 가득 차서 마치 숲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었다.
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정원은 향기롭고 다양한 꽃들로 가득 차서 무척이나 화려하고 예뻤다.
정원 안을 들여다보니 몇몇의 남녀가 짝을 지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걸어갔다.
꽤 안쪽까지 들어오자 새소리만 가득할 뿐 사람들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벤치가 보이자 그곳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비워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렸던 내 미래가 완전히 불투명해졌다.
아까 테라스에서 나오기 전 케인의 표정으로 봐서는 오늘이 끝이 아닐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무엇이 저 남자를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 2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이렇게 계속 무시와 외면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더욱더 한숨만 나왔다.
‘방법이 필요해.’
케인이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문제였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내가 있는 곳 근처로 누군가 다가오는지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설마 또?
아까 케인이 테라스에 들어온 것처럼 이번에도 내 뒤를 밟아 여기까지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나는 우선 벤치에서 일어났다.
누가 오든 언제든지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쪽으로 오는 이가 누군지 보기 위해 길의 모퉁이를 계속 쳐다봤다.
그리고 마침내 모퉁이의 끝에서 예상 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아델라였다.
아델라를 보자마자 놀라서 크게 뜨여진 눈을 가까스로 수습하며 그녀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델라의 표정을 살펴보니 나와 달리 전혀 놀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아델라와도 별로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그래서 그녀에게 내가 있던 공간을 내주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시만요. 공녀와 대화를 하고 싶어요.”
그러자 내가 발을 떼기도 전에 아델라가 나를 붙잡았다.
오늘 뭐 이렇게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거야.
나는 움직이려던 발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아델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와 대화를요?”
“네, 그러니 제게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시간을 내 달라는 말에 이유도 없이 거절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헤이츠 공녀.”
아델라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여서 마음이 이상했다.
그런데 먼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어쩐지 말이 없었다.
내게 할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아 그녀를 기다려 줬다.
잠시 뒤, 아델라가 입을 열었다.
“참 좋네요.”
그녀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네?”
“공녀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몸이 좋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런 연회에 오는 것이 제 평생의 꿈이었었거든요.”
“아, 네.”
“아버지께서 조금만 더 건강해지면, 지금보다 조금 더 건강해지면 보내 줄 거라고 해서 저는 어떻게 해서든 건강해지고 싶었어요.”
“…….”
왜 이런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차마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그녀의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건강은 항상 제 편이 아니었어요. 남들 다 하는 데뷔탕트 무도회도 하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성인식도 하지 못했어요.”
아델라는 벨리타에게 있어서 동정을 느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픈 사람이라는 인식이 들자 그녀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마음을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듣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그리고 처음 간 연회에서 그분을 만났어요. 그때까지 제게 세상은 오직 아버지와 에이든뿐이었는데, 처음으로 다른 세상을 만난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는 그 순간을 떠올리는지 황홀하면서도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했으면서도 케인을 생각하며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아무리 그녀가 딱하게 느껴진다 해도 이런 얘기까지 들어 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는 않았다.
“공녀의 건강함이 너무 부러워요. 공녀께서는 어떠한 제약도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겠죠.”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하지만 여행도 다녀오셨고……. 아, 죄송해요. 제가 염치도 없이 또 여행 얘기를…….”
저번에도 여행 얘기를 꺼내더니, 어지간히 내가 여행 간 게 부러운 모양이었다.
“저도, 저도 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행을 가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슬픔이 다 씻겨 내려가나요?”
“얼마만큼의 슬픔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럼 공녀께서는 모든 걸 다 정리하고 오신 건가요?”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아델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테라스에서 두 분이 함께 계시는 걸 봤어요. 커튼이 쳐져 있어서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만 봤을 뿐이지만요.”
그걸 본 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지 아델라의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는, 에이든보다 좀 더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가 눈물을 살짝 머금고 있었다.
“공녀께서는 맥시어스 공작님께 여전히 마음이 있으신 건가요?”
테라스에서 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아델라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지금 제게 굉장히 무례하신 거 알고 계시죠?”
“알아요. 하지만 제겐 너무 중요한 일이라……. 부디 대답해 주세요. 공녀, 부탁드려요.”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케인도 그렇고 아델라도 그렇고 왜 이렇게 뻔뻔할까.
아델라에 대해 사실 지금까지 별로 안 좋은 마음은 없었는데 오늘부로 생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마음을 있다고 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 스스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없습니다.”
“정말, 정말요?”
“네, 그러니 공작님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으면 제게 이러지 마시고 공작님과 대화를 하세요. 공녀께서 제게 하신 행동이 너무 불쾌하고 기분이 좋지 않네요.”
“정말 죄송해요. 흑. 제가 바보 같아서…….”
갑자기 아델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니, 내가 뭔 말을 했다고?
“죄송, 죄송해요. 흑흑”
말 한마디에 눈물을 보이는 그녀와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였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른 닦아요. 마치 제가 울린 것 같잖아요.”
그녀의 행동이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고마워요, 공녀. 흑.”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몰라도 아델라의 눈물은 쉽게 그치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픈 그녀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고 갔다가는 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그녀가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에 아델라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뒤돌아 발걸음을 뗐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내 발을 붙잡는 말이 그녀에게서 황급히 흘러나왔다.
“헤이츠 공녀, 조금만 더 저와 있어 주시면 안 되나요? 부탁드려요.”
“우리, 더 할 말이 남았나요?”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
“공녀께서는 마음이 다정하고 따뜻하신 분이신 것 같아서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다정하고 따뜻…….
이든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에이든인 그 남자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에이든에게 말했듯이 아델라에게도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아니요. 이런 저에게도 다정하게 대해 주시니, 공녀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에요. 그러니 모두들 공녀를 좋아하는 거겠지요?”
모두 나를 좋아한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 말을 들어도 전혀 기껍지 않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와 에이든만 보고 살아서 저에겐 친구도 없었어요. 우리 비록 첫 단추는 잘못 꿴 채 만났지만 공녀께서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공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요.”
“…….”
친구가 되고 싶다는 아델라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힘들까요…….”
“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맥시어스 공작님께 마음이 없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두 분의 사이가 어떻게 되든지 이제 그건 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저는 두 분과 사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제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런 식의 대화는 삼가 주세요.”
“…….”
“그럼 대화가 끝난 듯하니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델라도 이번에는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정원의 길을 따라 앞만 보고 쭉 걸어갔다.
그렇게 정원을 막 벗어나려는 즈음이었다.
‘아…….’
오늘 정말 지뢰란 지뢰는 다 밟는구나.
정원으로 막 들어오는 에이든과 마주치고 말았다.
케인에 아델라까지 상대하고 나니 에이든도 상대하다가는 내면의 뭔가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 고개만 까딱이고 스쳐 지나가려는데 내 속도 모르고 에이든이 나를 불렀다.
“헤이츠 공녀.”
나는 속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인내를 갖고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내가 들어도 말투가 꽤나 까칠했다.
하지만 지금 나름대로 참을 만큼 참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에이든이 그런 내 태도에 살짝 놀란 듯 보였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왜-.”
“저쪽으로 쭉 가시면 공자의 누님께서 계세요. 저보다 바이언 공녀가 몸이 더 안 좋을 것 같은데 얼른 가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와 조금이라도 빨리 헤어지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리고 누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에겐 효과 만점이었다.
에이든이 나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오늘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산 넘어 산이라고, 정원을 벗어나 막 연회장 문 앞에서 또 다른 커다란 산을 만나고야 말았다.
‘아버지 말을 들을걸.’
가지 말라고 할 때 못 이긴 척 오지 말걸.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며 나는 이곳에 온 것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공녀, 어딜 갔다 왔습니까.”
내가 그걸 당신한테 왜 말해야 할까.
“제가 그걸 공작님께 말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내 생각 그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정원을 돌고 온 겁니까?”
그는 그런 내 태도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네, 잠시 산책을 했어요.”
대답이나 빨리하고 벗어나자.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그를 스쳐지나가려던 때였다.
내 손목을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케인의 손을 곧장 내쳤다.
“만지지 마세요!”
케인이 나를 만지자 신분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언성을 높이며 그를 향해 윽박질렀다.
나의 거부에 방금 전까지 단단하게만 보이던 케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공녀.”
“제 허락 없이 저를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저와 살짝 닿는 것조차 혐오하셨던 분이시잖아요.”
“공녀, 그게 아닙니다.”
“공작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그러니 한 톨의 양심이라도 있으시다면 아니라는 말씀은 마세요. 그리고 이제 이런 식의 접촉은 제가 더 불쾌하니 허락 없이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다 이 남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다 이 남자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그런 거다.
사랑을 알게 됐으면 그 사랑을 지켰어야지.
그게 남자 주인공이고 그게 이 사람의 역할이니까 말이다.
케인만 변하지 않았어도, 그가 자신의 마음만 잘 지켰어도 내가 이렇게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남자는 제 사랑을 지키지 못했고 심지어 내게 사랑을 구걸하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 그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아니, 됐어요.”
왜 변했냐고, 도대체 왜 그랬냐고 따져 물으려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 연회에 갈 거라 마음먹었을 때, 연기를 아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었다.
나는 잘 지냈노라고, 여행을 갔다 와 모든 걸 다 잊고 잘 살고 있다고 많은 이들에게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래, 처음엔 잘했다.
황태자를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 마음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하지만 케인을 만나고, 아델라를 만나고, 에이든을 만나고, 다시 케인을 만나면서 내 안에 숨겨져 있던 격한 감정이 솟아났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벨리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벨리타가 아니었지만 또한 벨리타였다.
그래서 벨리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인간들에게 깊은 분노가 일어났다.
‘벨리타는 이런 취급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그들이 뭐기에!
벨리타를 이런 식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앞으로 벨리타가 되기로 한 나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동요는 적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모든 것들을 처리해 나가야 했다.
‘그러니 진정하자.’
진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하자.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공녀, 그러지 말고 저와 대화를-.”
하지만 이 남자는 내가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질 않았다.
내가 경고했음에도 케인이 내 팔을 다시 붙잡으려고 하자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를 질린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쳐다봤다.
“제가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까 먼저 그렇게 가셨잖습니까. 제 말도 끝까지 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공녀가 그렇게 떠난 후 저의 진짜 사랑은 공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이언 공녀는 그저 한순간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게 기회를 한 번만 주었으면 합니다. 잘하겠습니다. 공녀가 저로 인해 받은 상처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잊을 수 있도록 더 잘하겠습니다. 그러니 공녀, 우리를 위해서라도 다시-.”
“……공작님?”
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알고 케인도 아는 목소리였다.
아델라의 목소리였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아…….
어떻게 하면 상황이 계속 최악으로 치닫는 걸까.
케인과 나는 거대한 기둥 옆에서 이야기를 했던 터라 근처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원래라면 기척을 기민하게 느꼈을 텐데 연이은 상황에 많이 흥분했던 상태라 깨닫지 못했다.
반면 이쪽으로 다가오던 두 사람은 우리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미치겠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델라가 기둥 가까이로 다가와 우리 앞에 섰다.
곁에는 에이든도 함께였다.
“공작님,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요?”
아델라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가…… 공작님께는 제가 한순간의 바람이었나요?”
눈앞에 서 있는 그녀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걸 에이든도 느꼈는지 그가 아델라의 어깨를 감싼 채 부축하고 있었다.
“누님, 그만 가죠.”
“에이든 잠시만, 잠시만이면 돼.”
에이든의 가자는 말에도 아델라가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케인이 대답을 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기다리고 있었다.
“맞습니다.”
아, 이런.
“죄송하지만 바이언 공녀와의 일은 제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델라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에 나도 모르게 케인을 흘겼다.
그는 정말 뻔뻔하고 무례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케인을 보니 없던 정도 떨어질 것 같았다.
“믿고 있었는데…… 다시 제게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아델라의 안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얗게 질려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가 공작님께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에이든에게 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에이든도 아델라의 상태가 안 좋은 걸 눈치챘는지 그녀를 끌어당기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그녀의 상태를 너무 늦게 파악했는지 부축하기도 전에 아델라가 에이든의 품으로 쓰러져 버렸다.
“공녀!”
“……누님!”
아델라가 정신을 잃고 기절한 것이다.
서둘러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에이든이 아델라를 옆으로 들어 안더니 곧바로 나를 스쳐 밖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걱정이 돼서 나도 따라 가려는데 뒤에서 급하게 케인이 나를 불렀다.
“공녀, 우리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인정머리가 없을까.
이 남자와 같은 공간에 더 있다가는 손이 먼저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봤다.
“그럼 공작님은 여기 계세요. 저는 가 봐야겠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그가 또 나를 잡을까 봐 에이든이 간 곳으로 재빠르게 뛰어갔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에이든이 아델라를 안고 간 곳은 귀족들의 마차가 서 있는 곳이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중에서 바이언가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 근처로 가자 어수선했다.
마차의 열린 창문 사이를 살짝 들여다보자 에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아델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그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마차의 문이 열렸다.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려 내 앞으로 다가왔다.
“헤이츠 공녀.”
“바이언 공녀께서는 많이 안 좋으신가요?”
“그게…… 서둘러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에이든은 항상 나와 이야기할 때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마주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왠지 내 눈을 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얼른 가세요. 황태자 전하께는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워낙 정신이 없는 상태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도 나와 같이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마차에 올라탔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하게 출발했다.
나는 마차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든에게 한 약속도 있기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겨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연회장 문 앞에는 여전히 케인이 서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인 양 그를 지나쳐 연회장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이번에는 그도 나를 잡지 않았고 말없이 내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처음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처럼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무시하며 상석에 있는 황태자에게로 걸어갔다.
“황태자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편히 하세요.”
“아델라 바이언 공녀께서 급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져서 에이든 바이언 공자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저도 이만 돌아갈까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공녀께서도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저 오랜만에 연회에 와서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러십니까. 아, 그러면 잠시 만요. 맥시어스 공작.”
뭐야, 갑자기 케인은 왜 불러.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케인이 곧바로 내 곁에 와서 섰다.
“예, 황태자 전하.”
“헤이츠 공녀께서 돌아가고 싶다고 하니 공작께서 모셔다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괜찮습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황태자 앞이니 좋게 거절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레이디를 혼자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둘이서 무슨 작당을 벌이는 건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었더니 케인이 나를 데려다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 진짜.’
처음부터 이상했어.
갑자기 뜬금없이 황태자가 연회를 열지를 않나.
그것도 꼭 참석하라고 요구를 하질 않나.
이제 보니 둘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공녀”
막무가내인 두 남자를 상대하느니 일단 한 명이라도 먼저 떨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은 연회장에서 빠져나오는 게 급선무였다.
황태자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케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뒤로 돌아 그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따라오지 마세요. 혼자 가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공녀를 모셔다 드리라고 했으니 저는 그 명을 따라야 합니다.”
“나중에 물어보시거든 그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헤어지죠.”
“안 됩니다.”
“공작님!”
이 인간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
진짜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케인은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고 나는 나대로 싫다고 하며 눈싸움을 하듯이 서로를 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케인과 한참을 정적 속에서 대치 중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먼저 물러났다.
“그러니 부디 저를 미워하지만 말아 주십시오.”
아까까지의 고집스럽고 완고했던 그는 어디 가고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서러운 표정으로 케인이 내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공녀께서 제게 이리 생각지도 못하게 적대적으로 나오시니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뭐지?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케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봄바람이 나부끼듯이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적인 을을 자처하며 누군가에게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아까처럼 막무가내로 들이댔다면 이런 당황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서둘러서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나 따라올까 했는데 자신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뒤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마차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아가씨?”
“아가씨,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내가 뭐에 쫓기는 듯한 모습으로 마차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리안과 메리가 얼굴에 물음표를 달며 내게 물었다.
“가자.”
하지만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엔 나는 지금 모든 것이 너무 벅찼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복잡한 머릿속부터 정리해야 했다.
“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타세요.”
다행히 리안도 메리도 굳어 있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의 초대를 받아 참석한 연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마차가 황궁을 벗어나자 아델라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눕혀져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앉았다.
마차 안에는 아델라와 에이든 둘뿐이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그랬습니까?”
“……모르겠어.”
아델라는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진짜 쓰러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몸에 이상이 없어서 연기라는 걸 알았습니다.”
“다행이네. 진짜 같았다니…….”
“누님.”
“내가 왜 그랬을까. 에이든,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아델라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녀가 너무 부러워.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
“공작님께서는 전혀 나를 보고 있질 않아. 예전의 나를 따스하게 쳐다보던 눈빛이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이 미칠 것 같아. 에이든,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공작님의 마음을 다시 예전처럼 돌릴 수 있을까.”
에이든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모습은 그의 누이답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가 아는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였는데,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였는데 그게 바뀌어 버린 것 같아. 이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갖질 않아. 너무 서러워. 불행해. 죽고 싶어.”
그리고 너도…….
아델라는 뒷말을 속으로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에이든은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동생이었다.
물론 그녀가 지금까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에이든을 꾸짖으면 무조건 그를 감쌌다.
구석에서 울고 있으면 방으로 데려와 달래 줬다.
이 모든 행동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버지와 달랐다.
가족이라고 했기에 홀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니 에이든은 자신을 잘 따랐다.
특히 툭하면 아픈 이 몹쓸 몸뚱이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사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에이든 또한 그런 그녀의 말을 더 잘 들어줬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불순한 마음을 잘 숨긴다면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움직일, 이보다 훌륭한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야.’
다시 모든 것을 되돌려 놓기까지는 에이든을 놓칠 수 없었다.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제가 누구에게 말을 합니까.”
“혹시 헤이츠 공녀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말할 건 아니지?”
아델라는 일부러 벨리타를 언급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행히 에이든의 입에서 그녀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고마워, 내 동생. 역시 내 동생이 최고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공녀처럼 된다면 공작님께서 나를 다시 좋아해 줄 것 같아서 공녀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거절당했어. 역시 헤이츠 공녀는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나 봐.”
당연했다.
에이든은 벨리타를 만나고 난 뒤 곧바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냈다.
벨리타가 케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두 사람이 왜 파혼을 했는지까지 모조리 알게 되었다.
아마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든은 벨리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델라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해질 기회가 생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목표가 있기에 어떻게 해서든 벨리타와 친해져야 한다.
시간은 많았다.
그렇기에 절망은 아직 일렀다.
“나 도와줄 거지? 그럴 거지?”
“……알겠습니다.”
에이든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아델라는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이후 마차가 바이언 공작저에 도착했다.
에이든이 아델라를 품에 안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아델라의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이든에 품에서 여전히 기절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 * *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모두를 물렸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떠올리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뇌했다.
‘케인 맥시어스.’
도대체 그의 변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그가 변해 버린 모습을 보니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하기가 더욱더 힘들었다.
“하아.”
가슴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리고 아델라 바이언.’
아델라에 대한 내 마음은 꽤 복잡했다.
케인의 경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가 나를 막 대했기 때문에 그 남자에 대한 나의 정의는 변한 적이 없었다.
얼음보다 차갑고, 사막보다 더 황량한 마음을 가진 남자.
약혼자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마음에 담은 나쁜 놈.
하지만 아델라는 조금 달랐다.
그녀 또한 케인에게 벨리타라는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델라도 처음에는 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줬다.
그렇기에 원래의 벨리타라면 케인뿐만 아니라 아델라 또한 상종을 하면 안 됐다.
그게 옳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르겠다.
케인을 워낙 좋지 않게 봐서 그런지 그런 남자에게 코가 꿰였다 결국은 내쳐진 아델라가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면 안 되는데 오늘같이 충격을 받아 쓰러진 아델라를 보고 있자니 연민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케인 같은 똥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델라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이 헤어져 그 똥차가 다시 길가로 나왔지만.
만약에 아델라가 없었다면 다이아몬드 광산은커녕 얼마 안 가 맥시어스 공작 부인이 될 수도 있었다.
‘아, 끔찍해.’
그런 생각이 드니 순간 오한이 들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내가 아델라를 너무 좋게만 보는 건가?’
아까는 솔직히 좀 짜증도 났다.
케인에게 너무 시달려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케인에게 마음이 있냐는 둥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에이든 바이언.’
사실 내가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존재는 이 남자였다.
내가 아델라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게 된다면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는 남자.
그 사람이 바로 에이든 바이언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또 짜증이 확 나네.
내가 왜 여행을 갔다 왔는데.
그것도 무려 2년씩이나 말이야.
원작이 깔끔하게 끝난 뒤 돌아오면 이제는 그들과 절대 엮이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령 엮이더라도 그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문 대 가문의 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런 걸 따져 봤자 뭐 해.’
어차피 일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고 내가 짰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엉망이 되었다.
그러니 아쉬움에 한탄만 하느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그들과 다시 엮이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방법은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깜깜한 밤하늘이 어느새 날이 밝아 환해지는 것도 모르고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지도 못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연회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치고는 제법 평화롭고 고요한 날들이었다.
케인도 내가 자신의 행동에 질린 얼굴을 한 것이 충격이었는지 연회 이후로는 잠잠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바이언 공작가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회에서 아델라가 기절한 후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그녀의 건강 악화가 내 잘못은 아니었기에 내가 아델라의 병문안을 가는 것은 죄책감이나 마음의 불편함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내내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아델라가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방향을 완전히 틀어서 생각해 보니 아델라와 친해지는 게 전혀 나쁜 게 아니었다.
케인이 뭘 하든 내가 아델라와 친하게 지내면 내 목숨이 안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누나와 친한 나를 에이든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생각한 거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나 괜찮고 번뜩이는 방법이었다.
공작가끼리의 식사 자리와 연회에서 잠깐 만난 것뿐이지만 아델라는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뻔뻔하고 눈치가 없는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뭐, 그 정도쯤은 상관없었다.
그렇게 친해진 뒤 겸사겸사 아델라에게 케인이 얼마나 별로인지 주입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아델라를 보러 가기 위해 막 2층으로 내려가 홀을 지나치려는데 그만 엄청나게 커다란 벽을 만나고 말았다.
“벨리타.”
바로 아버지였다.
“외출하는 거냐.”
“네, 잠시 나갔다 오려고요.”
“어디를 갔다 오려고?”
“그게…….”
저번 식사 자리에서 보니 바이언 공작과 아버지의 사이는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기에 바이언 공작가에 간다는 말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바이언 공작가에 다녀오려고요.”
“뭐? 바이언 공작가?!”
역시 내가 바이언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네, 아델라 바이언 공녀가 몸이 좋지 않다고 들어서 병문안을 다녀오려고 해요.”
“지금 바이언 공작가라고 했느냐?”
“네.”
“네가 거길 왜 가. 절대 안 된다.”
이럴 줄 알고 나중에 들키더라도 몰래 갔다 오려고 한 거였는데…….
“아버지, 그저 병문안이에요. 그리고 연회에서 바이언 공녀가 제 눈앞에서 쓰러져서 조금 걱정이 돼서 그래요.”
“그러니까 네가 왜 바이언 공녀를 걱정하는 것이냐.”
그렇긴 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벨리타가 아델라를 걱정하고 병문안을 간다는 게 알려진다면 어쩌면 다들 나를 천하의 바보에 밸도 없는 호구 취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헤이츠 공작가의 벨리타 헤이츠였다.
뒤로는 자기들끼리 숙덕댈지언정 내 앞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남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남들이 뭐라 하는 건 나를 깔아 내리려는 것뿐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바이언 공작가에 갈 거라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된 이상 아버지를 설득해야만 했다.
“아버지, 제가 파혼을 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어요. 그때는 깊은 상처를 받아 힘들었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에요. 저는 모든 것을 극복했어요. 그렇기에 지난 일을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제 행동을 제약하고 싶지 않아요.”
“크흠!”
무언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나오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나의 호소가 부족해 아버지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저는 벨리타 헤이츠예요. 지금은 아직 헤이츠가의 공녀일 뿐이지만 앞으로 가주로서 가문을 이끌어 나갈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일이 사람들을 가린다면 과연 제가 차기 가주의 자격이 있을까요? 아버지께서는 진정 제가 맥시어스 공작가와 바이언 공작가, 두 가문과 완전히 척을 지길 원하세요?”
“그렇다고 가깝게 지낼 필요도 없다.”
“그건 아버지의 말씀이 옳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바이언 공녀의 병문안을 가는 건 그녀와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아델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이유는 그녀가 인간적으로 맘에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목숨 지키려고 가는 거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가 내 속마음을 읽을 것 같이 예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떳떳함을 보여 주기 위해 눈을 더욱더 강하게 부릅떴다.
“너는, 벨리타 너는 아직 내가 지키고 싶은, 지킬 수 있는 나의 딸이다.”
다행히 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그러니 네가 벌써부터 그런 걱정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는 건 내 착각이었나.
바로 가지 말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러나 네가 가고 싶다고 한다면 더 이상 말리지 않겠다.”
“아버지!”
그런데 뜻밖에도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네가 단단해져서 보기 좋구나.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아버지……. 감사해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너른 품에 안겼다.
스물두 살 성인이 된 딸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를 이해해 주고 독려해 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이 순간 너무 행복했다.
“녀석, 잘 하지도 않는 행동을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내심 기분이 좋은지 허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이츠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될게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될게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서 다짐했다.
* * *
원래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있는 곳에서 대부분 생활하지만 세 공작 가문은 좀 특이했다.
허수아비 황제를 대신해서 해야 할 일도 많아서라고 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수도에 없는 사이 다른 가문에 의해서 수도 내 입지가 좁아질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1년 중 열 달 정도를 수도에서 지냈다.
바이언 공작저는 우리 가문의 저택에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헤이츠 공작저는 그렇게 큰 특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른 저택과 다르지 않은 일반적인 저택의 모습이었다.
다만 밤이 되면 저택 곳곳에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배치해서 어두컴컴한 밤에 누가 봐도 불의 가문임을 알 수 있게 해 놓은 게 다였다.
그런데 바이언 공자가의 저택은 꽤나 특이했다.
철의 가문이라서 그런지 저택 곳곳에 철제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저렇게 대량의 철을 생산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
철을 이용해서 집도 짓는데 무기나 방어구를 생산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왜 바이언 공작가가 제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바이언가에 미리 내가 올 것이라고 서신을 보냈기에 문을 지키던 이들이 내가 타고 있는 마차의 표식을 보자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아델라가 내게 했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병문안을 가고 싶다는 서신을 보내자마자 돌아온 그녀의 편지에는 기쁨이 잔뜩 묻어나와 있었다.
철문을 지나 정원을 통과하니 거대한 저택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우리 가문의 기사인 줄 알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마차 문을 열고 서서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건 에이든이었다.
“어서 오세요, 헤이츠 공녀.”
“어?”
에이든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늘도 그는 너무나 잘생겨서 순간 미모에 정신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얼떨결에 그에게 덥석 손이 잡혔다.
그리고 나를 살짝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누님은 공녀의 마중을 직접 나오고 싶어 했지만 아시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 제가 대신 나왔음을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개의치 마세요.”
“들어가시죠. 누님이 공녀께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곧바로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공녀께서 누님의 병문안을 오신다 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그가 옆에서 걷던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게 하신 말씀도 그렇고 저와 마주칠 때마다 피하려고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이 남자는 자신의 누나와 다르게 제법 눈치가 있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티가 나게 행동했나?’
“연회 이후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자의 말씀대로 제가 피할 이유는 없겠다 싶어서요.”
“맞습니다. 공녀께서 그러실 이유는 없습니다.”
어쩐지 나를 감싸 주는 말에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여전히 나를 다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말입니다.”
뭐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의외의 말이 연타로 나오자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에이든을 쳐다봤다.
그의 말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표정은 뭘 숨기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담백했다.
‘우리 셋의 관계에 대해서 뭘 들은 모양이네.’
“혹시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꽤 심각해졌다.
그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긴장이 됐다.
“네?”
“공녀께서는 맥시어스 공작님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날 떠보는 걸까?
내가 케인에게 마음이 있어서 나로 인해 아델라가 마음을 다칠까 봐 걱정돼서?
뭐가 됐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요. 저는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날 죽일 생각일랑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에게 이 말까지 하고 싶은 걸 간신히 꾹 참았다.
“그렇군요.”
방금까지 굳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리고 에이든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델라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 안심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거기다 아델라와 친하게 지내며 케인을 지금처럼 계속 멀리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골치를 썩을 필요가 없을 듯해서 마음이 산뜻해졌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던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솔직히 별로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귀족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옆에서 걷던 에이든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바이언 공작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공작님께서는 지금 저택에 안 계십니다.”
“아, 그런가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지 않게 돼서 다행이었다.
“예, 누님의 방은 2층에 있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그런데…….
에이든이 자신의 아버지를 공작님이라고 했지?
남 앞에서 일부러 예의 차린 건가?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저 계단을 올라갔다.
“여깁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와 여러 문들 중에서도 예쁘게 핀 가지각색의 꽃과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 앞에 섰다.
은은한 꽃향기가 퍼지는 걸 보니 생화인 듯했다.
“생화네요. 매일 이렇게 문을 꾸미는 건가요?”
순수한 궁금증에 에이든에게 물었다.
“예, 누님은 꽃을 좋아합니다. 화려하고 생생하면서도 살아 있는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죠.”
“아, 그래요? 그러면 꽃 선물을 준비할 걸 그랬네요.”
병문안 선물로 나는 아델라에게 잘 어울릴 듯한 백합 모양의 머리 장식을 준비했다.
연회장에서 그녀를 봤을 때 아델라는 과하게 머리 장식을 꽂고 있었다.
그래서 아델라가 머리 장식을 좋아하는 줄 알고 선물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래도 생화는 아니지만 꽃모양의 머리 장식을 준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녀께서 어떤 선물을 준비하셨든 누님께선 좋아하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들어갈까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이든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용인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서 맡았던 꽃내음보다 훨씬 짙은 향기가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에이든을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에 꽃병이 가득했다.
‘꽃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헤이츠 공녀!”
침대에 누워 있던 아델라가 나를 보더니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누님, 가만히 계십시오. 저와 공녀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나와 에이든은 빠른 걸음으로 아델라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아델라는 곁에 있던 하녀의 도움으로 등받이에 등을 대고 앉았다.
“헤이츠 공녀, 정말 와 주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보시다시피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버지나 에이든이 괜히 과잉보호하는 거예요.”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얼굴에 병색이 짙었다.
“누님, 헤이츠 공녀께서 누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아, 네. 여기요.”
나는 아델라에게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와! 선물이라니! 감사해요, 공녀!”
“빈손으로 오는 게 예의가 아니라 준비한 건데 그렇게 엄청난 건 아니에요.”
“공녀께서 제게 주시는 첫 선물이잖아요! 뭐가 됐든 제겐 소중해요.”
그렇게 말하며 아델라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더니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와!”
그리고 안의 내용물을 보더니 아델라가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하얀 백합 모양을 한, 손가락 두 개를 겹친 정도 크기의 머리 장식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너무 예뻐요. 진짜 너무 예뻐서 하고 다니기 아까울 것 같아요.”
가볍게 준비한 선물치곤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순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바이언 공녀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장인을 통해 직접 제작한 거예요.”
“그럼 세상에 단 하나뿐인 머리 장식인가요?”
“뭐, 그런 셈이죠.”
“저 진짜 눈물 날 것 같아요. 이런 선물은 난생처음 받아 봐요.”
그렇게 말하는 아델라의 눈가에 정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엄청 감성적이구나.’
그럴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했다.
“해 주실래요?”
“네?”
아델라가 갑자기 대뜸 내게 머리 장식을 내밀었다.
“공녀께서 해 주시면 좋겠는데, 무리일까요?”
“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머리 장식을 건네받았다.
나를 올려다본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간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 근처로 바짝 다가갔다.
“실례할게요.”
그리고 아델라의 머리에 내가 선물한 머리 장식을 꽂아 주었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청초한 외모와 아주 잘 어울렸다.
“어때요? 저 예뻐요?”
“네, 예뻐요.”
“에이든은? 나 어때?”
“아름답습니다.”
“에이든, 나 저쪽에 거울 좀 가져다줄래?”
에이든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작은 거울을 들고 와 아델라에게 주었다.
아델라는 거울을 이곳저곳 옮기며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고마워요, 공녀! 저 진짜 이 선물 평생 간직할 거예요.”
아파서 약간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라는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그녀를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 것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그녀는 나와 케인의 파혼 사유의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원작을 생각한다면 아델라는 벨리타에게 있어 지나가면서라도 좋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을 떠나 내가 직접 마주한 그녀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꽤 괜찮았다.
‘어쩌면…….’
정말로 괜찮은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니 오늘 내가 병문안을 온 목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에이든을 잠시 올려다본 뒤 아델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바이언 공녀와 잠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저도 공녀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아델라가 에이든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데 에이든이 살짝 머뭇거리는 행동을 했다.
“에이든.”
아델라가 에이든을 다시 한번 부르자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기 전, 순간 그와 시선이 얽혔다.
그는 예전에 봤을 때도 그랬지만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문이 닫히며 그가 사라졌다.
“공녀?”
아델라가 나를 부르자 나는 고개를 바로 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공자께서 공녀를 살뜰히 잘 챙기시네요.”
“아무래도 제가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렇지만 아버지도 에이든도 너무 과해요.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음, 바이언 공작님의 경우는 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바이언 공자의 경우는 별로 과해 보이지 않아요. 저는 형제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제게도 아픈 형제가 있다면 공자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역시 공녀는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시네요. 그런 공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아델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또 눈치 없이 말을 꺼냈네요.”
그러다 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아델라가 황급히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다.
“음, 생각해 봤는데요.”
아델라가 먼저 말을 꺼낸 지금이 기회였다.
“네?”
“저번에 친구가 되지 못할 거라는 말…….”
“아, 네. 저는 괜찮아요. 저는…… 저는 그러니까, 제가 너무 무신경했어요. 공녀께서 저로 인한 상처가 크시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제 기분과 상황만 생각하고 공녀께 큰 실례를 범했어요. 죄송해요.”
아델라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이제야 그녀가 제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내 생각대로 그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때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어요. 저도 사과드릴게요.”
“아니에요! 공녀께서 제게 사과라뇨. 그러시면 안 돼요!”
“아뇨, 저 또한 말로 상처를 드린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았어요.”
“아…….”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바이언 공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친구…… 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아직까지는 확신을 하진 못하지만 공녀께서 먼저 다가와 주신 만큼 저도 노력해 볼게요.”
“……정말이에요?”
아델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 진짜 어떡하죠?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 것만 같아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 기절은 안 돼요.”
나는 진짜로 아델라가 정신을 잃을까 봐 순간 노심초사했다.
“너무 행복해요. 고마워요, 공녀. 저 정말로 공녀에게 잘할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으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마 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반드시 해야 했기에 나는 할 말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부드릴 게 있어요.”
“뭔가요? 저는 무엇이든 지킬 준비가 돼 있어요. 공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에 관한 거예요.”
케인의 이름이 나오자 아델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싹 가셨다.
“아, 네. 말씀하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맥시어스 공작님께 마음이 전혀 없어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분이 제 마음속에 들어올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작님은…….”
“공작님이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공작님의 마음은 그때 들어서 아실 거예요. 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그분의 것이기에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제 마음 또한 저만의 것이에요. 저는 이 자리에서 공녀께 맹세할 수 있어요. 저는 절대로 공작님을 마음에 담지 않을 것이에요.”
“저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저는…….”
“아뇨, 바이언 공녀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파혼을 당하고 여행을 떠난 뒤 저는 맥시어스 공작님에 대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했어요. 저는 그분께 한 톨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러니 공녀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
“제가 불편할 걸 알면서도 이 말씀을 드린 것은 앞으로 우리 사이에 맥시어스 공작님이 끼어들지 않길 바라서예요.”
나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공작님이 제게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시든 제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라고 여겨 주셨으면 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공녀와 공작님이 잘되게 하려고 뭔가를 할 거라는 뜻은 아니에요. 공녀님께서는 아직 공작님께 마음이 있으시고 그분의 마음을 잡길 원하신다면 하세요. 저는 두 분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다행이네요. 우리 둘의 사이가 원만하길 원한다면 공녀도 저도 다른 외부의 것들은 신경 끄고 서로에게만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친구…… 요?”
“네, 친구요.”
말을 마치자 후련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저, 그럼 저도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내게서 친구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아델라의 표정이 살짝 미묘하게 달라졌다.
“말씀해 보세요.”
“우리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때요? 헤이츠 공녀, 바이언 공녀가 아니라 벨리타, 아델라로 불렀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네?”
“좋아요, 아델라.”
이름을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아델라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벨리타.”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 * *
우리는 그 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저번에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델라는 내 여행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했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가서 뭘 봤는지 어디를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는 제가 헤이츠 공작가로 갈게요.”
“그렇게 해요.”
“그럼 잘 가요, 벨리타. 여기서 배웅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몸조리 잘 해요, 아델라.”
아델라와 인사를 나눈 뒤 방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에이든이 서 있었다.
“왜 여기에 계세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가시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에이든이 앞장을 섰다.
생각해 보니 아델라와의 일을 에이든에게도 언질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내가 조용히 뒤에서 따라가자 에이든이 발걸음을 늦추더니 내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었다.
“누님과는 좋은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네, 좋았어요.”
“그러시군요.”
“아델라는, 우리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아델라를 많이 오해하고 있었어요. 물론 아시겠지만 그럴 만은 했어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아델라에게 저희 관계에 대해서는 들으셨죠?”
“네, 들었습니다.”
역시 오늘 태도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델라가 에이든에게 말을 했구나.
“그럼 제가 왜 그랬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실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저는 아델라도, 그리고 아델라의 동생이신 바이언 공자도 별로 달갑지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아델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생각을 듣다 보니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누님을 다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누님과는 이름을 부르기로 하셨다는데 제게는 계속 바이언 공자라고 부르시는군요.”
“그건…… 바이언 공자가 맞으니까요.”
이 남매는 부르는 호칭에 대해 엄청 신경 쓰네.
아까 아델라도 그렇고 지금 에이든의 말로 추측하건대 그도 나와 서로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저도 공녀와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그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내게 바로 말을 꺼냈다.
“그건 좀 그런데요.”
“왜죠?”
에이든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름을 부르기엔 좀…….
“서로 이름을 부르기엔 우리가 그렇게 친분이 두텁다고 생각하진 않아서요.”
나는 그냥 생각하는 그대로 그에게 대답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녀는 누님보다 저와 먼저 만났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아는 이상 너무 불필요하게 친해지는 건 경계하고 싶었다.
“그래도 아직은 좀 그래요.”
내가 거절하자 에이든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 싫다는 분을 상대로 계속 강요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 그만하겠습니다.”
목소리도 어쩐지 차가워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우리는 최소한의 대화만 나눴다.
별로 의미도 없는 말들이었다.
가는 내내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는 제법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괜히 그와 잡음을 냈나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라고, 잘한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마차가 저택의 대문 앞에 도착하자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의 말이 마차를 뒤따라 왔기 때문에 그는 말을 타고 바이언 공작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일이 생겨서 당분간 수도를 떠나 있을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가 말했던 것 같다.
원래 수도에 오래 붙어 있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야 일이 생겼나 보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그럼.”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 그를 보았을 때 괜히 쳐다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든이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음에도 그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고작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축 처진 모습이라니.
그를 잘 모르지만 그답지 않아 보였다.
‘이름 정도는 상관없으려나.’
어쨌든 아델라고 에이든이고 적당히 친해지면 나쁠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 마차가 대문을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나는 마차를 멈춘 뒤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와 그의 말이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잠깐만요!”
나는 그가 혹시라도 출발할까 봐 큰 목소리로 에이든을 불렀다.
에이든이 말에 탄 채 나를 돌아봤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나는 말 근처로 다가갔다.
에이든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내가 그를 저지했다.
“아니에요. 내리실 필요 없어요. 그대로 들으시면 돼요.”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우리 서로 이름으로 불러요.”
내 말에 놀랐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 몸 조심히 다녀와요.”
“알겠습니다. 얼른 일을 끝내고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아까의 애처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들뜬 얼굴로 웃는 그를 보니 나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런데 둘 중에 어느 것으로 불러야 합니까?”
“네?”
“제가 알고 있는 이름은 두 개니까요.”
“아, 제 원래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저도 그렇게 할게요.”
“네, 그럴게요, 벨리타.”
그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예상치 못하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이 신기해서 그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벨리타.”
그가 말을 타고 빠르게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잘 가요, 에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