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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가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거리낌 없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편안하게 식사를 할 정도가 되었지만 그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주인이었고 주인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자 이제는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잠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세 사람을 한 명 한 명 쳐다봤다.
메리, 윌리엄, 그리고 리안.
메리와 윌리엄은 애초부터 성인이었기 때문에 2년 전과 달라진 점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눈빛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게 다를까.
그런 반면 리안은 아이에서 소년이 되면서 꽤 많이 성장했다.
나는 내 앞에서 빵을 뜯어먹고 있는 리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리안도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리안을 처음 봤을 때 아무래도 내가 아이의 나이를 잘못 추정한 것 같았다.
아니면 잘 먹지 못해서 또래보다 덜 컸을지도 모르고.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리안은 겉으로 보기에 한 열여섯 정도로 보였다.
“네 나이가 아무래도 잘못된 거 같아.”
“네?”
리안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파악을 못한 얼굴로 내게 반문했다.
“안 그래?”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
메리가 내 말에 동의하며 말했고 그런 메리의 곁에서 윌리엄이 먹는 것을 이것저것 챙겨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수도로 돌아가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 널 봤을 때 네 나이가 열두 살 정도인 줄 알았거든. 그럼 네가 지금 열넷이라는 건데 아무리 봐도 열네 살 정도로는 보이지가 않아.”
“리안의 학습 능력도 열네 살이라고 하기엔 매우 우수합니다.”
윌리엄도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럼 저는 몇 살일까요?”
리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소리 또한 2년 전 어린아이의 것과는 다르게 많이 낮아져 있었다.
“아직도 뭔가 기억나는 게 없어?”
“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억지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리안의 나이에 대해 말을 꺼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제 이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원작이 그러니까…….’
이제는 내용이 완벽하게 기억나진 않았지만 이 원작이 언제 끝나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약 1년 전이었다.
원작에서 벨리타는 케인과 아델라의 사이를 눈치채고 반년에 걸쳐서 그녀를 괴롭혔다.
그 괴롭힘에 아델라는 정말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지만 그녀는 여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아델라가 위기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멀리 떠나 있던 아델라의 동생인 에이든도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걸 알게 된 후 에이든이 벨리타를 자기 손으로 죽였고 그 일로 인해 세 가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약 3개월간 지속됐다.
발테우스 제국은 특이하게 황권보다 신권이 더 강한 제국이었다.
황제는 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건 세 가문의 공작들이었다.
그래서 세 공작 가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초토화되었다.
결국 긴 내전 끝에 헤이츠 가문은 망하고 맥시어스와 바이언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랬듯 두 사람의 결혼으로 끝이 났다.
원작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든이라는 남자를 만났을 때쯤, 아마 그때쯤 원작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시간이 다신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이 끝나고도 1년은 더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때가 왔다.
어머니 아버지께 가끔 편지를 쓰긴 했지만 나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으실지 눈에 선했다.
2년 전 내 나이가 스물이었는데 이제 나는 스물두 살이 됐다.
그리고 돌아가면 리안의 거취에 대해 확실히 해야 했다.
리안은 윌리엄의 가르침 덕분인지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정식 기사, 그것도 뛰어난 기사에게서 검술을 배웠기에 이제 기사단에 입단해도 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다른 가문은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은 열다섯 이상의 사람만 기사로 입단할 수 있었다.
만약 리안의 나이를 열넷으로 둔다면 지금은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리안은 아무리 봐도 열넷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성숙해 보이는 열네 살도 존재하겠지만 리안은 평균으로 따진다면 적어도 한두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윌리엄 경, 우리 가문의 기사단 입단 자격이 열다섯 이상이 맞지?”
“네. 맞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알고 있던 정보를 윌리엄에게 확인했다.
“경이 보기엔 어때? 리안이 입단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한 것 같아?”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나이 또한 열다섯이나 열여섯으로 올린다 해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의 말을 들으니 더 확실해졌다.
“그럼 열여섯으로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리안 네 생각은 어때?”
나는 리안 쪽을 쳐다보며 그의 의중을 물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를 겁니다.”
2년 전 리안이 나를 따라와 함께하기로 한 때부터 그는 한결같이 내게 충성을 보였다.
나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고 내 말이면 죽는시늉도 할 정도로 잘 따랐다.
“흐음…….”
어차피 이런 그에게 생각이 어떠냐고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걸 깨닫고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열여섯으로 하자.”
“네. 그러겠습니다.”
리안의 나이에 대한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식사를 끝마친 후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이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선언했다.
그에 마차는 지금까지의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며 말을 타고 따라오는 리안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리안이 말의 속도를 늦추어 마차에 가깝게 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각오는 되어 있어?”
“무슨 각오 말입니까?”
“수도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바빠질 거야. 훈련도 더 힘들어질 거고 이것저것 할 일도 많을 거야.”
메리나 윌리엄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리안은 이제 새로운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야 했다.
그와 더불어 앞으로 내가 그를 이렇게 옆에서 보살펴 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귀족이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처럼 네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 줄 수는 없어. 아마 자주 보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해. 알았지?”
“…….”
“왜 대답이 없어?”
“……알겠습니다.”
리안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이제 자주 볼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인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지금까지 아주 잘했어.”
나는 지금까지 나를 잘 따라온 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이리 와 봐.”
리안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하며 손을 까딱거렸다.
리안이 좀 더 다가왔지만 여전히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 좀 숙여 봐.”
내 말에 리안이 바로 머리를 숙여 창가에 갖다 댔다.
그리고 2년 전보다 훨씬 결이 좋아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돌아가면 함께 지냈던 동생들을 보러 가자. 알았지?”
리안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후 창문을 닫고 내가 마차 안으로 고개를 돌리자 메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아가씨께서 리안에게 꽤 각별하신 것 같아요.”
“저 애는 내가 거뒀으니까. 그러니 책임지고 끝까지 돌봐 줘야지. 만약 형제가 있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 같아.”
“하긴, 저도 나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는데요, 그 애를 보면 어쩐지 가만히 못 있겠어요. 아마 이번에 돌아가서 보게 되면 꽤 많이 컸을 것 같아요.”
“동생이 있었어?!”
몰랐다.
하긴 귀족 아가씨가 하녀나 하인의 가족 관계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만…….
“네,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무지무지 귀여워요.”
“보고 싶었겠다. 나 때문에 2년이나 못 봤네.”
왜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지?
나는 스스로의 무심함을 탓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휴, 아니에요, 아가씨. 이번 여행은 제가 가고 싶었기 때문에 따라간 거예요. 평생 가지 못할 곳들을 아가씨 덕분에 갔다 왔잖아요.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이번에 돌아가면 휴가를 길게 줄 테니까 가족들에게 다녀와.”
“정말요?”
“응,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넉넉히 챙겨 줄 테니까 가지고 갔다 와.”
“감사합니다, 아가씨!”
돌아가면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메리와 윌리엄에게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 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지급하고 휴가를 보내는 게 가장 급선무였고, 두 사람의 결혼식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리안의 거처도 알아봐야 하고.
‘바쁘겠다.’
하지만 2년 동안이나 내 맘대로 했으니 돌아가면 이제 나는 헤이츠가의 공녀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앞으로 또 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씩 기억해 놓았다.
* * *
약 일주일이나 걸려서 집에 도착했다.
공작저는 떠날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2년이나 떠나 있었더니 어쩐지 이곳이 어색해져서 마차 안에서 가만히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벨리타?!”
“우리 딸이 돌아왔다고?!”
부모님을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고 편지로 내가 돌아갈 거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셨는지 부모님이 부리나케 마차를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문을 열어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2년 전보다 조금 나이가 드신 두 분에게 달려가 안겼다.
“어머니!! 아버지!!”
“벨리타!!”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사실이 믿기지 않은지 나를 품에 안았다가 다시 얼굴을 봤다가 다시 안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부모님이 하시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슬그머니 품에서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잘 계셨어요?”
“우린 잘 있었단다. 그래, 여행은 재밌었니?”
“네, 즐거웠어요.”
“여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매사에 침착한 그녀답지 않게 어머니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꽉 껴안고 놓아주질 않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가자며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원래 어머니는 항상 내 맞은편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았는데 오늘만큼은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으신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앉았다.
그리고 나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고 또 살피고 있었다.
“어머니, 저 건강해요.”
나는 어머니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보고 싶었단다, 벨리타.”
“저도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아니다, 돌아왔으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가 나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그래서 이제 마음의 정리는 다 된 거냐.”
아버지가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이제 그분을 제 마음속에서 떠나보냈어요. 공작님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요.”
처음부터 케인을 봐도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다시 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있었다.
“다행이구나. 그래, 어디어디 갔다 온 게냐. 얘기 좀 해 보거라.”
여행 얘기를 해 보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내가 갔다 온 곳들을 하나하나씩 부모님께 생생하게 말씀드렸다.
그곳에서 뭘 봤는지, 뭘 먹었는지 등등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되도록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리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부모님께서는 선뜻 리안을 기사단에 입단시켜 준다고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첫날은 온통 부모님과 함께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다음 날부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해 나갔다.
생각보다 바빠서 리안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지만 리안과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며칠 뒤 나는 오랜만에 휴가를 간 메리 대신 내 시중을 들게 된 사용인을 통해서 리안을 불러들였다.
똑똑.
“아가씨, 기사님을 모셔 왔습니다.”
리안이 왔다는 소리였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며칠 만에 마주한 리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잠시 리안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어엿하고 늠름한 기사가 돼 기사복을 입고 있는 리안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2년 동안 매일같이 붙어 지냈더니 고작 며칠을 보지 못했다고 몇 년간 못 본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리안.”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어서 와. 이리로 와서 앉아.”
나는 직접 리안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리안을 소파로 이끌었다.
리안이 순간적으로 움찔한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냈어? 불편한 건 없고? 누가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 필요한 거는 없니?”
리안을 소파에 앉힌 뒤 나는 바로 맞은편으로 갔다.
하지만 앉기도 전에 리안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쏟아 냈다.
그런 내 모습에 처음엔 굳어져 있던 리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작가의 사람들 또한 제게 잘해 줍니다.”
“다행이다. 먹는 건, 먹는 건 입에 잘 맞고?”
“네, 아가씨께서는.”
“응?”
“아가씨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내 집인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슬슬 본론을 꺼냈다.
“내가 고아원에 가자고 했던 말 기억나지?”
“네, 기억합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도 끝났으니 내일쯤 가 볼까 하는데.”
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런데 저는 동생들이 잘 있는지만 멀리서 보고 오고 싶습니다.”
“왜? 그래도 인사는 하고 오는 게 좋지 않겠어? 동생들도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할 거야.”
“아마 지금쯤이면 다들 저를 잊고 잘 지낼 겁니다.”
리안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만나도 함께 있을 수는 없으니 괜히 아이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는 동생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보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혹시나 생각이 바뀌면 말해 줘.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우리는 고아원으로 가기 위해 저택에서 출발했다.
부모님께는 잠시 외출을 다녀온다고 말했고 호위를 명목으로 리안과 동행했다.
헤모아라는 마을은 이든이라는 남자가 말했던 대로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출발한 지 약 세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는데 꽃과 나무가 곳곳에 피어 있는 예쁘면서 소담한 곳이었다.
그리고 고아원은 마을에서도 해가 가장 잘 비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고아원 주변으로 더 다양하고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 고아원에 대한 이든이라는 남자의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리안과 나란히 고아원 입구 밖에서 안을 주시했다.
몇몇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어?!”
그리고 그중에서 낯익은 아이들을 발견했다.
“맞지?”
나는 리안을 올려다보곤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다운 해맑은 얼굴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네.”
동생들 얘기만 나오면 걱정 가득했던 리안의 얼굴에서 드디어 근심이 걷히는 게 보였다.
“정말 안 보고 갈 거야?”
“네, 잘 지내는 걸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리안은 완고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말을 않고 아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곤 뛰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쌌다.
리안은 아이들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 쯤 아이들이 자신을 못 보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어? 그때 그 언니 맞죠?”
그때 본 아이들 중 유일한 여자아이가 나를 알아봤다.
“안녕.”
“맞구나!”
“잘 지냈니?”
“네. 여기 진짜 좋아요! 맛있는 것도 매일 주고 개인 침대도 있어요. 그리고 선생님들도 친절하고 좋아요!”
“누나! 누나!”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밝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 무척 신기하면서도 아찔했다.
혹시나 그때 아이들을 구출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눈부신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그때였다.
“어?”
“어어?”
파란 머리의 아이가 내 옆에 있던 리안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형?”
“5번 형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5번 오빠가 어떻게…… 어?”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며 리안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리안이 피할 새도 없이 정면에서 리안의 얼굴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의구심에서 확신으로 변했다.
“5번 형 맞지?”
“5번 오빠 맞네?”
결국 기민한 아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리안에게 고갯짓을 했다.
인사를 하라는 뜻이었다.
“나…… 맞아.”
“진짜 5번 형이야?”
“오빠!”
“형이라고?”
“흑흑. 형!”
자신들이 내내 기다리던 형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아이들이 단체로 리안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어떤 아이는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이 아이들이 리안과 얼마나 잘 지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빠, 어디 갔었어. 흑.”
“형, 보고 싶었단 말이야!”
“형은 우리 안 보고 싶었어?”
“형…….”
나는 뒤로 물러나 행복한 재회의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미안. 미안해.”
리안이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근데 형 왜 이렇게 많이 컸어?”
“그니까, 형 몰라볼 뻔했잖아.”
“오빠, 오빠. 이제 우리랑 같이 사는 거야?”
“형…… 우리랑 살 거지?”
리안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아이들도 각자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리안은 그런 아이들의 눈을 한 명 한 명씩 마주치며 대답을 해 주었다.
‘역시 많이 보고 싶었겠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를 따라갈 것을 택한 리안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흐뭇한 마음과 함께 리안에게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나는 여기서 너희들과 함께 살 수 없어.”
“왜?”
“형, 우리가 싫어?”
“이제 우리랑 같이 못 놀아?”
아, 결국은 예상했던 반응이 아이들에게서 튀어나왔다.
이래서 리안이 아이들을 멀리서만 보고 가려고 했었을 텐데…….
“미안. 그 대신 시간이 나면 앞으로 자주 오도록 할게.”
“싫어. 우리랑 같이 지내자.”
“나도 오빠랑 같이 살고 싶은데…….”
“너네 그만해. 이러면 형이 힘들어지잖아.”
처음 리안을 알아봤던 아이가 세 아이들에게 그만하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오빠…….”
리안이 곤란해한다는 걸 알아챈 아이들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아이들에 대한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들어 왔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있는 대신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자, 얘들아. 5번 형, 오빠는 기사가 됐거든? 너희들 기사가 뭔지는 알지?”
“네. 알아요.”
“알아요.”
“그런데 기사가 되면 훈련이 진짜 많아. 아침에 일어나서 훈련하고, 점심에도 훈련하고, 또 자기 전까지 훈련해야 해.”
나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다.
“기사가 되면 그렇게 힘들어요?”
“응. 그래야 멋있고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어.”
“와, 5번 형 진짜 힘들겠다.”
“오빠 대단하다.”
“그리고 기사가 되려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해. 그렇기 때문에 5번 형, 오빠는 이곳에서 함께 지낼 수가 없는 거야.”
살아온 환경 때문인지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아듣곤 자기들끼리 눈빛 교환까지 하고 있었다.
“진짜 자주 올 거야……?”
“오빠, 우리 보러 자주 올 거라고 약속해.”
그러곤 태세를 전환하더니 리안에게 약속까지 받아 내려 하고 있었다.
“자주 올게. 꼭.”
리안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씩은 작은 아이들에게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약속한 거야!”
아까부터 유난히 눈물을 글썽거렸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더 이상 울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응. 알겠어.”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좋게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잠시 후 아이들이 리안을 가운데에 놓고 둘러앉더니 리안에게 질문 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아까의 상황은 벌써 잊었는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그리고 나는 그저 옆에서 아이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맞다. 오빠, 우리 이름 생겼어!”
“이름?”
“응. 나는 이제 3번 아니고 루시야, 루시!”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긴 아이와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도! 나도 이름 생겼어!”
“나도!”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리안에게 자랑했다.
번호가 아닌 이름을 갖게 된 아이들의 들뜬 마음이 너무나 잘 느껴져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까 보자. 루시, 노아, 아드리안 그리고 도미닉이라는 거지?”
나는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슬슬 아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맞아요!”
“여기 5번 오빠, 형도 이름이 생겼어.”
“정말요? 뭐예요?”
“리안, 리안이야.”
“와, 이름 예쁘다.”
“그치? 그럼 우리 다시 인사할까?”
만난 지 한참 됐는데 인사를 다시 하자는 내 말에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안녕? 나는 벨리타야. 만나서 반가워.”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마주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아이들에게 나는 리안의 손을 맞잡으며 아이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고 악수를 하면 되는 거야. 자, 누가 먼저 해 볼까?”
“제가, 제가 먼저 할래요!”
“저도 할래요!”
“저는 루시예요.”
루시가 먼저 나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아드리안이라고 해요.”
아까 가장 먼저 리안을 알아봤던 눈썰미가 좋은 파란 곱슬머리의 남자아이가 다음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저는 노아! 노아예요.”
그리고 내내 울먹이며 말을 했던 여린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와 악수를 했다.
“저는…… 도미닉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말없이 조용하던 금발의 남자 아이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이는 숫기가 없는지 내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아이의 작은 손을 덥석 잡았다.
“만나서 반가워, 도미닉. 자, 이제 리안하고 해 볼까.”
내 말에 리안과 아이들이 서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흐뭇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오직 번호로만 부여받았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아이들에게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조금 감격스러웠다.
“누나! 누나, 그러면 형이 누나를 지켜 주는 기사예요?”
아드리안이 내게 물었다.
“응, 맞아. 나를 지켜 주는 기사야.”
“와, 멋있다! 나도 나도 기사 할래요! 나도 누나 지켜 줄래요!”
말하는 것이 너무 귀여워 나는 아드리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형만큼 크면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어.”
“정말요?”
“그럼!”
“그럼 나 오늘부터 밥 이만큼 먹고 잠도 엄청 오래 잘 거예요.”
아드리안이 과장되게 팔을 둥글게 그리며 대답했다.
“그래. 오늘부터 약속하는 거야?”
“네! 약속!”
“누나, 저도 기사 하고 싶어요.”
아드리안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데 노아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노아도 약속해.”
“언니, 저도요!”
“……저도요.”
결국 얼떨결에 나는 루시, 도미닉과도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어느새 노을이 지려는지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린 가 봐야 해. 다음에 올 때는 멋진 선물을 사 가지고 올게. 그때까지 잘 지내는 거야. 알겠지?”
“선물이요?!”
“와, 선물이래!”
우리가 간다는 말이 선물이라는 소리에 묻혔다.
또 느끼는 거지만 역시 애들은 애들이었다.
“언니, 다음에 꼭 와야 해요.”
“응. 너희들도 잘 지내고 밥도 잘 먹고,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알았지?”
“네!”
그렇게 아이들과의 한바탕 만남이 끝나고 난 뒤에야 나와 리안은 고아원을 떠날 수 있었다.
마을을 완전히 떠나기 전 나는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잠시 마을 전경을 살펴봤다.
아이들을 보고 와서 그런지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마을이 정겹게 느껴졌다.
“아가씨?”
리안이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리안의 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리안, 오늘 어땠어?”
“……좋았습니다.”
“역시 동생들을 만나길 잘 한 거 같지?”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처음부터 아이들과 대면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무척 좋았다.
“앞으로는 동생들이 보고 싶으면 내게 말해. 알았지?”
“네.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서둘러서 돌아가자. 너무 늦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 후 헤모아를 떠났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집에 온 지 이 주가 지났을 무렵, 메리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더 있다 오지 않고.”
휴가를 한 달을 줬는데 메리는 고작 보름 만에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쉬다 왔어요.”
“가족들 보고 싶었잖아.”
“이제 자주 볼 건데요, 뭘. 아가씨께선 저 없이 잘 지내셨어요?”
사실 메리가 없어서 꽤 불편했다.
내 수족같이 모든 걸 꿰고 있던 이가 곁에 없으니 몸은 둘째 치고 맘이 불편해서 혼났다.
“역시 난 너 없으면 안 돼.”
나는 메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메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나를 덩달아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는 다시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녀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였다.
“네 결혼 문제 말인데…….”
“제 결혼이요?”
“응, 너도 이제 결혼을 해야지.”
“저는 아직…….”
메리가 뭔가를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곤 바로 말을 꺼냈다.
“너는 아직이라도 윌리엄 경은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네?”
메리가 토끼처럼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 메리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윌리엄 경은 반쪽이긴 하지만 귀족의 피가 흐르고 저는 일개 평민이라…….”
윌리엄이 서자였구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대해 반성하며 윌리엄의 집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마. 그것보다 두 사람 아직도 서로 좋아하는 거지?”
“아가씨…….”
메리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가 저번에 리안이 동생 같다고 했잖아.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내 언니 같은 존재야. 그러니 더 이상 걱정 말고 결혼할 준비 시작하자.”
메리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아 올해 스물네 살이었다.
메리는 벨리타를 십 년 넘게 모셨지만 나는 고작 2년 좀 넘게 메리와 함께 지냈다.
만약 우리가 여행을 함께 가지 않았고 그저 저택에서 아가씨와 하녀로 지냈다면 이만큼 가까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함께 여행을 다녔고 그건 긴 시간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아가씨께서 결혼하시기 전에는 절대 먼저 하지 않을 거예요.”
“뭐?”
그런데 좋아하며 방방 뛸 줄 알았던 메리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아가씨께서 좋은 분을 만나셔서 결혼을 하시고 난 후에 저도 결혼을 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세요.”
메리의 표정이 단호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도 못할 수도 있어!”
나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귀족 영애로서 결혼으로 가문을 번성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아무나와 할 생각은 없었다.
“괜찮아요. 저는 아가씨와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거든요.”
“메리!”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겼다.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 알았지?”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메리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 * *
내가 수도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작가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초대장이 도착했다.
아직은 어디도 가고 싶지 않아서 다 거절을 했지만 단 하나 거절하지 못할 초대장이 오고야 말았다.
부모님과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세 공작 가문의 사람들을 황궁에 초대하셨다.”
“황제 폐하께서요?”
“그래. 가문 간 화합을 핑계로 또 모이자는 거겠지.”
황제와의 식사 자리는 예전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세 가문의 힘의 균형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하지 않게 함과 동시에 군사력이 막강한 가문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허수아비 황제의 존재 이유를 피력하기 위한.
황제가 주최자가 되어 식사 자리를 마련하면 그곳에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 사람 좋은 가면을 쓴 채 화합을 빙자한, 서로를 탐색하고 견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너도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났으니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진즉에 성인이 되었지만 여행을 하느라고 한 번도 간 적 없는 자리였다.
갈 자격이 생겼지만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런데 아버지가 절대 빠지면 안 된다는 단호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꼭 가야겠죠?”
“맥시어스 공작을 보는 것이 여전히 힘들 것 같으냐?”
케인을 보는 건 별로 상관없었다.
그저 그런 무거운 자리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나는 내게 주어진 것들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이제는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
“아니에요. 괜찮을 것 같아요.”
“아직 힘든 거라면 네게 강요하지 않으마.”
“그래, 벨리타. 억지로 가지 않아도 된단다.”
눈빛은 단호했지만 아버지는 내 의사와 감정을 충분히 존중해 주고 있었다.
거기다 어머니까지 거들어서 내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그런 부모님을 생각하니 절대 내 의무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갈게요. 저도 이제 어른이고 제 책임은 다 해야죠.”
그렇게 대답하며 웃으니 부모님께서는 나를 대견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리고…….”
“여보!”
“크흠…… 아니다. 마저 식사하거라.”
‘뭐지? 또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부모님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들은 내 시선을 외면한 채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거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그저 식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까 식사를 하면서 부모님께서 내게 숨기는 게 뭐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딱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뭘까.’
여행을 가기 전에 잠깐 언급된 바이언가의 얘기도 그렇고 아버지의 급한 성격으로 인해 말부터 나오면 항상 어머니가 제동을 걸었다.
나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케인과 파혼을 한 후 원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다고 판단해 여행 내내 아예 잊고 살았더니 세세한 것들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뭐, 별일 아니겠지.’
그리고 만약 내게 해가 되는 일이었다면 부모님은 진즉에 내게 말을 해 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맘이 편해져서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않기로 했다.
* * *
며칠 뒤 황궁에서의 저녁 식사가 있는 날이었다.
입궁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부터 씻고 꾸미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고 해가 막 질 때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거울 앞에 섰다.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메리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내 외모를 칭찬했다.
오늘은 특별히 내 금색 머리카락과 잘 어울릴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었다.
거기다 드레스의 색보다 훨씬 진한 머리 장식을 꽂으니 내가 봐도 참 예쁘고 싱그러웠다.
‘예쁘다.’
맥시어스가에 들락날락거릴 때는 케인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어서 억지로 꾸미고 다니긴 했지만 여행을 하면서는 최소한으로만 치장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오랜만에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며진 모습을 보니 낯설고 어색한 반면 꽤 뿌듯했다.
“어때? 나 거기서 가장 튈 거 같아?”
“그럼요. 우리 아가씨가 가장 예쁠 거예요.”
오늘 가게 된다면 케인과 아델라를 만나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과거 벨리타의 기억 속을 뒤져 보았음에도, 벨리타와 아델라 두 사람은 한 번도 접점이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빙의했기 때문에 아델라를 본 적이 전혀 없었다.
아델라는 몸이 워낙 안 좋아서 외출을 극도로 삼갔었다.
그러다 그녀가 처음으로 간 파티, 그러니까 케인과 아델라가 처음 만난 그날도 나는 일부러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연회를 빠져나왔다.
‘근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들은 것 같아.’
했어도 진작 했어야 하는데 부모님께 물어보기엔 혹시나 내가 아직도 케인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거로 보일 것 같아서 입이 안 떨어졌다.
‘오늘 가 보면 알겠지.’
어쨌든 오랜만에 케인을 만나는 거라서 나는 그에게 네가 없어도 아주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히 공을 들여서 꾸민 거였다.
이건 내가 정말로 그에게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아니라 2년 전 연기의 일부였다.
아무래도 실연을 당한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과 오랜만에 재회를 했을 때는 가장 최상의 모습을 보여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할 테니까 말이다.
“가자, 메리.”
“네, 아가씨.”
홀을 지나 저택 밖으로 나가니 부모님께서는 아직 오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
리안이었다.
리안이 마차 근처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리안!”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리안은 그날 고아원에 갔다 온 뒤로 처음 본 것이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예, 아가씨. 아가씨도 잘 지내셨습니까?”
“응, 나야 잘 지냈지. 훈련은 여전히 할 만하고?”
“네, 괜찮습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부모님이 나오셨다.
그래서 결국 끝까지 말을 나누지 못한 채 대화가 끊겼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리안이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를 한번 더 쳐다본 뒤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가는 도중,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아니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르며 분위기를 살피는데 어쩐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표정이 이상했다.
“혹시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며칠 전에 식사를 하면서 말을 다 하지 못한 게 문득 생각났다.
그때 두 분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그러곤 드디어 결심했는지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벨리타, 네게 할 말이 있단다.”
“무슨 말씀이요?”
내가 들어야 할 말 중에 이렇게 심각한 이야긴 없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나 또한 덩달아 긴장했다.
“맥시어스 공작이 말이다…….”
맥시어스 공작이라면 케인을 말하는 거였다.
“공작님이요?”
“그래, 그게…… 맥시어스 공작과 바이언 공녀가 파혼을 했단다.”
“네?”
파혼?
파혼은 내가 했는데?
또 누가 파혼을 했다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오자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부모님을 쳐다봤다.
“파혼이요?”
“그래, 벌써 1년 가까이 됐단다.”
파혼을 최근에 한 것도 아니고 거의 1년 전에 했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없던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두, 두 사람 결혼은 했었나요?”
“아니, 결혼까지도 가지 못했단다. 결혼하기 직전에 파혼을 했다고 그러더구나.”
“왜요?”
부모님께 이유를 물어봤자 그들도 모를 텐데도 순간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저절로 말이 헛나왔다.
갑자기 뭔가가 내 숨통을 쥔 것 같이 숨이 막히고 초조해졌다.
“이유는 우리도 모르겠구나. 그 일로 바이언 공녀가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고 맥시어스가와 바이언가의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는 것만 들었단다.”
왜지?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원작이 달라져 버린 거지?
설마 내가 그와 파혼하고 여주를 괴롭히지 않아서인가?
“벨리타, 괜찮은 거니?”
내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자 어머니께서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정신 차려.’
두 사람이 헤어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원작은 이미 끝났어.
난 이제 그들과 아무 상관없어.
막말로 둘이 사랑타령을 하든 이별타령을 하든, 이제는 나랑 관련 없는 일이야.
“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잠시 놀라서 그랬어요.”
나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벨리타, 너 혹시 아직도…….”
아버지가 말끝을 흐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아버지. 저는 이제 공작님과 끝난 인연인 걸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에 두 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어쨌든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제가 없는 사이 수도에 많은 일들이 있었나 봐요.”
“물론 많은 일들이 있었단다. 그 얘기는 오늘 황궁에서 돌아오면 네게 천천히 해 줄게.”
일부러 말을 돌린 걸 어머니께서 눈치채곤 내 말을 받아 주셨다.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케인이나 아델라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다른 대화를 나누며 황궁으로 향했다.
* * *
벨리타는 황궁에 와 본 적이 있지만 나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휘황찬란한 궁의 외양에 눈이 자꾸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할 정도였다.
‘엄청 화려하네. 황권이 약하다고 해서 궁도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온갖 비싼 것들로 장식한 황궁의 외관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헤이츠 공작가의 듀크 헤이츠 공작님, 레이노아 헤이츠 공작 부인, 벨리타 헤이츠 공녀님께서 드십니다.”
잠시 뒤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가 우리의 도착을 알리며 문을 열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가장 먼저 왔는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시종이 우리가 앉을 자리를 안내했다.
“황제 폐하와 다른 분들은 아직 도착 전이십니다.”
“알겠다.”
우리가 빨리 온 거지 다른 이들이 늦은 건 아니었다.
부모님과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문밖에서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맥시어스 공작가의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케인은 몇 년 전에 전 공작 부부를 사고로 보내고 그때부터 홀로 가문을 이끌었다.
그래서 맥시어스 공작가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홀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케인 맥시어스였다.
부모님과 나는 귀족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려 2년 만이었다.
당연히 그가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2년 만에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보기 위해 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마치 어제 본 사람인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연장자여서 그런지 케인이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오랜만이오.”
“오랜만입니다, 맥시어스 공작님.”
케인은 아버지, 어머니와 차례대로 인사를 나눈 후 내 앞으로 왔다.
어떤 말로 인사를 할까 하다 나는 어머니와 똑같은 말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맥시어스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헤이츠 공녀.”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제는 널 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나는 가장 밝은 미소를 그에게 보여 줬다.
그러자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 살짝 균열이 이는 게 보였다.
‘뭐야, 잘못 봤겠지?’
케인이 내게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설마 자신이 버린 게 떡하니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 심사가 뒤틀린 건가?
정말 그렇다면 이 인간은 완전 악질이다.
나는 그가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헤이츠 공녀께서는 긴 여행을 갔다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전 내게 관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여행을 갔다 온 얘기를 먼저 꺼냈다.
“네, 공작님께서 제게 위자료로 주신 그렌스에도 잠깐 들렀습니다.”
나는 일부러 다이아몬드 광산을 입에 올렸다.
우리가 파혼했다는 걸 그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십니까. 그곳에서 뭘 보셨습니까?”
뭘 보긴, 발에 차이도록 쌓여 있는 ‘내 다이아몬드’를 질리게 보고 왔지.
“오래 있지는 않아서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마을을 잠시 구경하고 왔답니다. 무척 조용한 마을이더군요.”
“그렌스가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휴양을 가기론 제격이죠. 저도 몇 번 다녀왔습니다.”
“네, 나중에 다정다감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1년에 한두 달 정도는 그곳에서 지내려고 생각 중입니다.”
나는 일부러 다정다감을 강조했다.
너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만날 거라는 의미였다.
“……그렇습니까.”
그 순간, 나는 케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 걸 놓치지 않았다.
뭐야, 저 인간…….
케인이 왜 자꾸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의아한 한편, 마음이 어쩐지 불안해지려 했다.
‘그렌스가 아까워서 그런가?’
하지만 이내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며 감정을 다스렸다.
아, 그렇구나.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네.
하긴 그렌스를 통째로 넘겨줬으니 배가 아플 만도 하지.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그래도 이제 거긴 내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케인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면서 자랑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속으로만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일던 때, 문지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바이언 공작가의 제임스 바이언 공작님, 아델라 바이언 공녀님, 에이든 바이언 공자님께서 드십니다.”
‘아, 아델라는 어머니가 없었지.’
지금은 내용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아델라의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얼마 안 돼서 죽었다고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또다시 바이언 공작가의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안으로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 뒤로 같은 머리색을 가진, 내 또래의 여자와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살짝 아델라를 쳐다봤다.
‘와, 진짜 예뻐.’
솔직히 케인이 아델라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을 때부터 그녀의 미모가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예쁘면 첫눈에 반할 정도인지 말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정도 미모라면 첫눈에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내가 이 세계에서 본 사람 중에 어머니가 제일 아름다웠는데 아델라도 그에 견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아델라의 뒤로 키가 큰 남자가 들어왔는데 남자를 보자마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해 온몸이 굳어 버렸다.
에이든 바이언이라는 남자는…….
남자는…….
페오라트에서도 봤고, 율리타에서도 봤던,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든이라는 남자가 에이든 바이언이라고?
원작에서 벨리타를 죽인 그 남자?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당혹감에 나도 모르게 서둘러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어이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그가 제발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도 나를 이미 알아본 듯했다.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가장 늦게 도착했군요. 죄송합니다.”
바이언 공작이 누가 봐도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오시기 전이니 늦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바이언 공작에 지지 않을 한껏 꾸민 미소를 보내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자, 어서들 앉거라.”
이후 두 공작의 대화는 겉으로는 그저 기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 싸움이 느껴졌다.
그걸 보면서 우리 가문과 바이언 가문의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순간 속으로 탄식했다.
이든이자 에이든 바이언이라는 남자가 하필 내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를 보고 충격에 빠진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벨리타 헤이츠 공녀 맞죠?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라 바이언입니다.”
그때 갑자기 아델라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화를 하기 원하는 상대를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든인 줄 알았던 에이든 바이언의 옆에 아델라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더불어 에이든 또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돼 있었다.
나와는 달리 별로 충격을 받지 않은 건지 에이든이라는 남자의 표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표정은 마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뭐야.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는데 뭐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가지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했었지?’
그의 표정이 어떻든 간에 무시하며 나는 2년 전 에이든을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재빠르게 거슬러 올라갔다.
여태까지의 내 노력이 물거품될 만한 것들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별말을 한 기억은 없어서 일단 안도했다.
그러다 아델라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는 것을 깨닫곤 정신없는 머릿속을 가까스로 수습한 뒤 아델라를 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라 바이언 공녀.”
아델라에게 인사하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공녀께서는 긴 여행을 갔다 오셨다고 들었어요. 여행은 어떠셨어요? 즐거우셨나요?”
내가 여행을 갔다 왔다는 사실은 수도에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수도로 돌아와 받은 수많은 초대장에는 항상 ‘여행을 갔다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라는 말이 빠짐없이 쓰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 내가 케인에게 차인 충격으로 잠시 수도를 떠난 거라 알고 있었다.
그 잠시가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러니 아델라도 분명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얼굴이 매우 좋아 보여 부러워요. 저도…… 여건이 된다면 갔다 오고 싶어요.”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과연 무슨 저의로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어떤 이유로 여행을 다녀온 건지 뻔히 알고 있을 거면서 말이다.
자신도 파혼을 했으니 나와 똑같은 처지라는 걸 내게 알리고 싶은 걸까?
그래서 그저 나처럼 여행을 갔다 오고 싶다는 뜻일까?
무슨 이유로 두 사람이 파혼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케인 때문일 거라고 나는 강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반년 동안 지켜본 그는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아델라에게 파혼을 하자고 했을 때도 내게 한 것처럼 똑같이 했겠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나야 그에게 한 톨의 마음도 없었을 뿐더러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내게 준 멸시와 천대를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케인을 사랑했더라면, 그래서 그런 상황이 내게 닥쳤다면 그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벨리타가 아니었던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나는 벨리타 헤이츠였다.
그렇기에 아델라가 케인과 무슨 이유로 어떻게 헤어졌든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케인과의 일은 지나간 과거였기에 거기에 미련 따위는 없다는 모습도 보여 줄 겸 나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다녀오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좋은 시간들이었답니다.”
“……그래요? 그 말을 들으니 꼭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델라의 표정은 여전히 이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의 것과 같았다.
‘아직 못 잊었나 봐.’
케인 맥시어스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나는 곁눈질로 살짝 케인을 쳐다봤다.
당연히 내말을 듣고도 태연하리라 생각하고 그를 본 것이다.
그런데 아까 나에게 보여 줬던 미묘한 표정 변화가 지금 또 그에게서 보이고 있었다.
‘뭐지?’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남자인데…….
이곳은 지금 굉장히 묘한 관계의 사람들이 얼기설기하게 엮여 있었다.
우선 케인과 나로 말하자면 10년 넘게 약혼 관계를 유지하다 2년 전에 파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케인과 아델라는 2년 전에 약혼했다 약 1년 전에 파혼한 사이였다.
마지막으로 에이든과 나는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우연히 만났던 사이였고.
“누님은 몸이 아직 안 좋아서 여행은 무립니다.”
그때 나와 아델라의 대화에 에이든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자신의 피붙이에게 말을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나를 대하던 것과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럼 네가 같이 가 주면 되잖니.”
“누님이 원하면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그래, 그랬었다.
왜 하필이면 에이든이 벨리타를 자기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죽였을까.
그것은 그가 제 누이인 아델라를 매우 끔찍이 여겼기 때문이다.
벨리타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델라를 괴롭힐 때마다 케인은 번번이 위기에 빠진 아델라를 구해 주는, 딱 그 정도로만 남주의 역할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다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벨리타가 아델라를 죽일 심산으로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에 폭탄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델라가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누나를 그렇게 만든 벨리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벨리타를 죽인 것이다.
원작의 인물들과 더 이상 엮이기 싫어 떠난 여행인데 도리어 더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죽일 남자와 엮였었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원작은 이미 끝났고 내가 죽을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을 보아 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왜 둘이 헤어진 거야?’
왜?
어떻게 주인공들이 헤어질 수 있지?
어떻게 남주와 여주가 헤어지냐고.
천년만년 사랑하라고 파혼까지 깔끔하게 해 줬더니…….
물론 나를 위해 한 행동이 99%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내가 아는 이야기는 끝나 버렸다.
나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 그래서 이제는 저들과 똑같이 미래를 모르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버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에이든과 또 눈이 마주쳤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저 눈빛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더 이상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먼저 말을 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에이든이 내게 질문했다.
“헤이츠 공녀께서는 다니셨던 곳 중에 어디가 가장 인상 깊으셨습니까?”
꽤나 형식적인 질문이었지만 질문자가 그였기 때문에 당황한 얼굴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인상 깊은 곳이요?”
“예.”
잠시 그의 질문에 대해 짧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대답을 원하고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 걸까.
‘아니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 남자가 뭘 원하든지, 뭘 생각하고 질문을 하든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도 어쩌면 별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의미 없는 대화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든 나만 똑바로 정신을 잡고 있으면 되는 거였고,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그에 나는 일부러 더 화사한 미소를 띠우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렌스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그곳이 이제는 제 소유지라서요.”
“……그렌스 말입니까?”
“예, 그렌스는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휴양지로 제격이에요.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1년에 한두 달 정도는 그곳에서 지낼 생각까지 하고 있을 정도랍니다.”
나는 아까 전에 케인에게 한 말 그대로 에이든에게도 해 주었다.
“그러시군요.”
“예.”
원래 귀족 간에는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와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아 일부러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건지 쉬지 않고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저도 일 때문에 자주 나가 있는데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수도 근처에 있는 페오라트라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대한 표정을 숨긴 채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줄지 고민했다.
페오라트라면 우리가 2년 전에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일부러 그곳의 이름을 댄 것이 분명했다.
“아, 네.”
나는 또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완고하게 전한 것이었다.
나는 그와, 아니, 부모님을 제외하고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들과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앞으로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케인도, 아델라도, 그리고 에이든도 이제는 엮여서 좋을 것 없는, 그래서 관심 밖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계속 대화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 텐데 에이든은 꺾이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공녀께서는 페오라트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또 다시 어떤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아니요, 가 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간결하게 답했다.
당신과는 원래부터 모르는 사이로, 앞으로도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시군요.”
그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 의도가 담긴 대답이 그에게 먹혔는지 그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다만 불편한 마음을 느끼라는 건지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마침내 황제가 왔다는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일어나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나 발테우스의 황제를 맞이했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다 같이 동시에 황제에게 예를 취했다.
인사를 받은 황제가 가장 상석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모두들 앉으시오.”
황제의 말에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슬쩍 곁눈질로 황제를 살폈다.
나이는 아버지와 엇비슷해 보였고 한 나라의 황제치고는 의외로 인상이 좋았다.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자연스럽게 폭군에 대한 것을 떠올렸나 봐.’
하긴 이 세계에서 폭군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오랜만에 세 공작가가 이렇게 함께 모여 있으니 마음이 참 든든하오.”
황제는 맘에도 없는 소리도 잘하는 듯했다.
역대 황제들은 공작 가문의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만의 고유하고 막강한 힘이 없는 설움을 느끼며 자리만 간신히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이번 대의 경우, 세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아 웬만하면 서로를 보려 하지 않아 황제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자리를 주기적으로 만들어 화합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비록 황제가 상석에 앉아 있으나 그는 여기서 가장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자리가 달갑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도 이렇게 두 공작을 오랜만에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역시나 노련한 중년의 두 공작이 황제의 말에 차례대로 대답했다.
처음 대답한 이는 바이언 공작이었고 그다음에 맞장구치듯 대답한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끝으로 케인까지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것으로 황제의 역할은 끝이었다.
이후로는 세 공작을 중심으로 대화가 전개됐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식사에 집중할 뿐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디저트까지 싹싹 비운 뒤 황제와 세 공작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황궁에 왔으니 어려서부터 친우인 황비 전하를 잠시 만나 뵈러 간다고 하고 가셨다.
나는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마차 안에서 부모님을 기다릴까 하다가 마침 황궁에도 왔으니 구경이나 해 볼까 하며 황궁의 정원을 산책했다.
‘꽤 피곤하다.’
달갑지 않은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몇 시간을 함께 있는 건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었다.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먹은 음식이 무슨 맛인지 기억도 안 났다.
앞에 앉은 남자는 식사를 하는 내내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고 또 대각선으로 앉은 남자는 대놓고 보지는 않지만 틈만 나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척하며 맛도 모른 채 그저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다신 오고 싶지 않아.’
특히나 저 두 남자들이 있다면 다시는 이런 식사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또 와야겠지.
그게 내 의무고 책임이니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에이든은 그렇다 치고 케인까지 왜 그러는 거지?
‘뭔가 잘못됐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뭐가 잘못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가 터지도록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서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응시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며 마침내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든 바이언이었다.
‘아니 왜 또…….’
마주칠 사람이 없어서 또 이 남자와 마주치다니.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고개만 까딱한 뒤 그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막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레이디께서 헤이츠가의 공녀셨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그래요.”
“율리타에서 보고 약 1년 만이군요. 그 후로도 계속 여행을 하신 겁니까?”
“네, 뭐 그렇죠.”
얼른 대답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은데 에이든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아까처럼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고아원에 다녀가셨다 들었습니다.”
내가 다녀갔다는 걸 알고 있는 걸 보니 아이들이 나를 봤다는 이야기를 에이든에게 말한 듯했다.
“네, 리안과 함께 갔다 왔어요. 리안에게 아이들이 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역시나 친절하고 다정하신 분이시군요.”
“그 아이는 제가 거뒀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해 주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일부러 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아이는, 리안이라는 아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네,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대답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런데 에이든이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왜요?”
“제가 불편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불편하지.
“저기, 제가 누군지는 아시는 거죠?”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에이든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예, 압니다.”
“그럼 제가 왜 바이언 공자를 불편하게 생각하는지도 아시겠네요.”
“…….”
“제가 여행을 떠난 이유를 공자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맥시어스 공작님과 파혼을 했고, 그분을 잊기 위해서 부랴부랴 수도를 떠난 거예요.”
“…….”
그런데 마치 처음 듣는 얘기인 양 에이든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설마…….
“설마 모르셨어요?”
“……네, 몰랐습니다.”
아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분명 사교계엔 내가 파혼을 당하자마자 여과되지 않은 온갖 소문들이 삽시간에 퍼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몰랐다고?
“저는 일 때문에 1년 중 수도에 있는 날이 손에 꼽습니다. 이번에도 꽤 오래 밖에 있다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공녀와 누님, 그리고 맥시어스 공작님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든이 내게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아, 그래서 아까 표정이 그랬구나.’
나는 그가 나를 처음 보자마자 너무 반갑게 쳐다봐서 어리둥절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분께 제가 너무 날카롭게 대응했네요. 저도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공자의 누님께 가서 들으시면 될 것 같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의 약혼녀였습니다. 지금은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과 공자의 누님인 아델라 바이언 공녀께서 파혼을 하셨다고 들었지만 저는 두 사람으로 인해 파혼을 당한 사람입니다.”
여행을 끝내고 수도에 돌아온 뒤, 나는 이제 케인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롭게 살아가려고 했다.
파혼을 했던 일이라든가, 케인을 사랑했던 일 등 그런 것들을 이제는 없던 일처럼 여기고 더 이상 입에 담을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케인에게 맘이 없었기에 아델라에게도 에이든에게도 별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기꺼워하는 이 남자와 더 이상 엮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공작에게 파혼당한 비련한 전 약혼녀의 가면을 썼다.
“물론 두 분이 헤어진 이유가 저 때문은 아니라는 걸 공자도 아실 테죠. 저는 그 시간 동안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두 사람이 파혼한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제가 파혼당했을 때 제가 알던 세상은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해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아델라 바이언 공녀의 동생인 당신과 이렇게 속없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제가 공자와 편하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내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면 그건 이 남자의 문제였다.
나는 아직 녹슬지 않은 내 연기력에 살짝 감탄하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죠?”
“네?”
알아듣게 설명을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든이 갑자기 반문했다.
그가 왜라고 묻자 황당함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어 그에게 말하려는 순간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리안?”
“벨리타 아가씨,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리안은 용무를 끝낸 부모님이 돌아오시자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를 찾으러 온 듯했다.
“부모님께서 오셨어? 알았어, 가자.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나는 에이든에게 인사를 한 뒤 그를 혼자 놔둔 채 리안과 정원을 벗어나기 위해 발을 뗐다.
그런데 리안의 시선이 내 등 뒤 너머에 꽂혀 있었다.
“리안?”
“예, 아가씨. 가시죠.”
내가 부르자 리안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그 찰나의 순간, 리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린 걸 본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금방 사라져서 내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정원을 나섰다.
“저분, 그때 그분 맞습니까?”
마차까지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리안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응?”
“동생들을 구출해 주신 분 말입니다.”
“아, 맞아. 그 사람이야. 에이든 바이언 공자였어. 여기서 마주칠 줄 몰라 깜짝 놀랐다니까? 아, 너도 가서 인사할래?”
어쨌든 에이든이 서커스단에 있던 아이들을 구해 줬으니 리안이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게 마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그를 보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리안에게 잠시 되돌아가자고 말했다.
“아닙니다. 그리고 저를 구해 준 건 아가씨이지, 저분이 아닙니다.”
항상 내 말에 긍정적인 대답만 하던 리안이 드물게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의아한 느낌과 함께 리안을 잠시 올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너를 구했어.”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내 말을 따라하는 그가 귀여워 나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어?”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리안에게 단단히 일러 주는 시늉을 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장난으로 한 말에 리안의 얼굴이 너무나 비장해 보여서 나는 머쓱함을 느끼며 말을 돌렸다.
리안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나도 모르게 편하게 던지는 농담이 계속 나왔다.
그건 아마도 리안이 원래의 벨리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리안이 그녀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저 나 자체로 행동해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게 내 마음을 무척이나 편하게 했다.
그래서 이렇게 둘이서만 얘기하는 시간이 꽤 괜찮았다.
물론 지금처럼 리안이 한없이 진지해서 좀 재미가 없긴 하지만 뭐, 나쁘지는 않았다.
“아까 훈련 얘기를 하긴 했지만 기사단 생활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어려운 점은 없고?”
“없습니다.”
하긴 윌리엄이 어련히 잘 돌봐 줄까.
우리는 무려 2년 동안이나 함께했다.
함께 여행 다니며 같이 밥을 먹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 유대감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그렇기에 내가 윌리엄에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분명 리안을 제대로 챙겨 주고 있을 것이다.
“윌리엄 말은 잘 듣고 있지? 훈련은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메리를 통해서 들어 보니 리안은 확실히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리안은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그 습득 능력은 체계적인 훈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래야 내가 가주가 됐을 때 너도 한 자리 하지 않겠어?”
내 말에 리안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뭐야, 그 눈빛은. 너 설마 내 곁을 떠나려고 했어?”
내가 또 장난기가 발동해 살짝 의심의 눈초리로 보자 리안이 다급하게 말을 했다.
“절대 안 떠납니다.”
“정말?”
“예, 저는 아가씨께서 계속 있으라 하시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 평생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가씨를 지켜드릴 겁니다.”
이 진지남을 진짜 어떻게 하지?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함부로 목숨 걸지 마. 언젠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래, 그때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 줘.”
“저는 아가씨를 위해서만 목숨을 바칠 겁니다.”
“아니야,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니요, 저는 아가씨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목숨 또한 아가씨 겁니다.”
여기서 더 반박했다가는 심장이고 쓸개고 간이고 다 내 거라고 할 것 같아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나를 향한 맹목적인 단심이 싫지는 않았다.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리안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손 모양을 했다.
워낙 자주하는 행동이라 리안이 찰떡같이 알아듣곤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처럼 쓰다듬지 않고 회색빛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흩트려 놓았다.
“하하하!”
반응이 없는 리안을 놀리는 게 왜 이렇게 재밌는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리안은 무반응이었다.
리안은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불만 있어?”
“아닙니다.”
“정리해 줄게.”
나는 다시 그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손짓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리안의 손이 머리카락 근처로 가려고 하자 나는 재빠르게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안 돼, 내가 해 줄게. 얼른 숙여.”
리안의 표정이 뭔가 떨떠름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억지스럽게 명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정리를 해 주는 대신 한 번 더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푸하하!”
너무 재밌어서 손뼉까지 치며 크게 웃었다.
내 행동에 리안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지? 재밌지?”
그렇게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리안에게 계속 장난을 걸었고 리안은 몇 번이고 내게 속아 주며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 * *
벨리타가 정원을 떠나자 에이든은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식사 자리에서 본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이렇게 보게 돼서 반가웠다.
벨리타 헤이츠.
자신을 벨이라고 소개했던 그녀가 무려 헤이츠 공작가의 공녀였다니.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겉모습이나 태도를 보며 귀족 영애인 줄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귀족 영애답지 않은 행동 또한 많이 보여서 시선이 한 번 더 간다거나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가 에이든 바이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 못지않게 그녀도 많이 놀란 듯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왠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는 거지?’
의문이 이는 것과 동시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율리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저렇지 않았다.
서커스단을 찾아와 아이들의 안부를 물어보고, 그가 목걸이에 의해 고통에 허덕였을 때 도와준 그녀는 저렇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녀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절대 눈길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일 정도로 티가 나게 거리를 두었다.
계속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와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며 했던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순간 확신했다.
벨이라고 했던, 아니 이제는 벨리타 헤이츠인 그녀는 그와의 일들을 아예 없던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과 불쾌함이 치솟았다.
비록 두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공유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 일들이 이제는 지우고 싶은 일이 됐다는 것이 그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화가 날 이유는 없었다.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벨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보다 좀 더 짙은 눈동자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종종, 아니, 자주 생각났었다.
어떻게 지낼지, 지금은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을지, 여전히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있을지…….
좀처럼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에게 그녀는 거의 유일하게 오랫동안 신경을 썼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한 시간 동안 그토록 궁금해했는데 그녀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러는지 그녀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식사가 끝나고 아델라를 마차에 쉬게 한 다음 곧장 벨리타를 찾아갔다.
그녀가 마침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벨리타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듣는 순간 누군가 단단한 쇳덩이로 그의 머리를 한 대 친 것 같이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델라 바이언과 케인 맥시어스, 그리고 벨리타 헤이츠.’
그는 수도에는 거의 머무르지 않았다.
가문의 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또 개인적인 일로 바빠서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바이언 공작이 그가 수도에 있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사교계의 가십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몰랐다.
케인이 전 약혼녀와 파혼한 뒤 아델라와 약혼을 하고, 또 파혼을 한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정확한 내막은 몰랐었다.
벨리타는 그에게 아델라를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으라고 했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델라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만큼 마음도 약했다.
거기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사람에 대한 갈구도 심한 편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저택 내에서 아버지와 사용인들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지를 알아서 그런지 호의에도 인색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녀가 에이든, 그에게 지금까지 했던 것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바이언 공작에게 혼나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위로해 줬다.
- 에이든, 많이 아프니? 아버지는 네게 왜 그러실까.
- 네 몸을 아껴야 해. 알았지?
- 이제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바이언이라는 이름을 짊어졌으니까.
물론 이제는 그녀가 왜 그의 몸이나 건강상태를 걱정했는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델라가 그를 아꼈던 마음은 거짓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쓸모 있는 도구로만 봤던 공작과 달리 진짜 가족처럼 대해 준 아델라에 대한 믿음이었다.
에이든은 과거의 회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케인 맥시어스.’
벨리타에 이어서 아델라와도 파혼을 한 남자.
공작과는 접점이 없어서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식사 내내 벨리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군.’
그의 졸렬하고 비겁한 행동이 어이가 없는 동시에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걸까.
아델라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조차도 그가 벨리타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벨리타와의 아쉬웠던 짧은 대화 후 단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정원에서 마주한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 가득 찼던 외로움과 공허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에이든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공허함과 외로움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녀에게 듣고 싶어졌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텅 빈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잡고 싶어졌다.
* * *
그날 이후로는 평범한 날들이었다.
내가 할 일들을 하나씩 배우며 해 나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 평화로운 일상을 단번에 깨부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 아가씨……!”
메리가 방 밖에서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며 읽고 있던 책을 손에서 내려놨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온 메리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무언가 못 볼 것을 본 거 같기도 하고 걱정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왜? 무슨 일인데?”
메리가 이 정도로 뜸을 들이는 일은 거의 없어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오셨어요…….”
“뭐?”
순간 나는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케인이 여길 왜 와.
“무슨 소리야. 누가 왔다고?”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이요…….”
두 번이나 같은 이름을 말하는 걸 보니 그 남자가 진짜 오긴 온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건가?”
다시 생각해 보니 이곳이 그가 못 올 곳은 아니었다.
비록 벨리타의 기억 속과 내 기억 속에서 그가 이곳에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문끼리 사이가 별로 안 좋긴 해도 일 때문에 아버지와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면 뭐?”
“아가씨를 뵈러 오셨대요. 지금 공작님께서 응접실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세요……!”
“뭐라고?”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전개지?
나는 케인이 나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메리를 쳐다봤다.
“아가씨?”
메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아까 들어오면서부터 그녀의 표정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진짜 나를 만나러 왔다고?”
“네…….”
저번에 황궁에서의 식사 자리에서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게 영 찝찝하더니만 결국 뭔 일이 일어나려고 그랬나 보다.
그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맘대로 보고 싶지 않다며 문전박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튼 여러모로 사람 참 피곤하게 하는 인간이야.’
나는 한숨을 가득 내쉰 후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뗐다.
그리고 그가 왜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진짜 있네.’
설마 했는데 진짜 응접실에 그가 있었다.
무슨 얘기가 나오든 내 대응은 오직 하나였다.
그 생각을 하며 단단히 마음을 먹은 뒤 응접실 문을 열자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츠 공녀.”
2년 전의 차갑디차가웠던 목소리가 아닌,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불렀다.
“어서 오세요, 맥시어스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헤이츠 공녀.”
나는 우선 귀족적인 태도로 그를 맞이하는 척을 했다.
“앉으세요, 공작님.”
그리고 그에게 앉으라고 한 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곧장 그가 온 용건에 대해 물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할 얘기가 아직 남았나요?”
내 말에 그의 무표정이 약간 흐트러졌다.
나는 그가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설마……’
2년 전에 줬던 다이아몬드 광산을 다시 달라고 하려고 온 건가?
그건 절대 안 된다.
내가 어떻게 받은 건데……!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모진 핍박과 모욕을 견디며, 신들린 연기를 펼쳐서 받은 대가였다.
나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저번에 황궁에서 너무 짧게 대화를 나눈 듯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까 하여 이렇게 공작가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단지 그것 때문에 오셨다고요?”
“예.”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제가 지금 좀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그런데요. 우리가, 그러니까 2년 전에 좋지 않은 일로 파혼을 한 사람들끼리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와, 이 뻔뻔함 봐.
2년 전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파혼해 달라고 하더니…….
그는 지금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케인은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비록 2년 전에 파혼을 하긴 했지만-.”
그때였다.
케인이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씨불이고 있던 그때 아버지께서 응접실로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요!”
그러곤 무척 노기를 띤 얼굴로 다짜고짜 케인에게 큰 소리를 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우리 딸을 찾아온 거냔 말이오!”
“아버지, 진정하세요……!”
나는 아버지를 말리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더 하라며 아버지를 응원했다.
‘역시 든든한 아버지가 있는 건 좋은 거구나.’
비록 성정이 불같고 다혈질이라 쉽게 화를 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굉장히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였다.
“얼른 나가시오. 안 그러면 공작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끌어내겠소!”
아버지는 정말로 그렇게 할 태세로 그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아버지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연신 씩씩거리며 케인을 노려보자 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날이 좋지 않군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고 뻔뻔하지?
나는 오늘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음은 무슨!”
그런데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버지가 케인에게 역정을 내며 그를 쫓아내서, 나는 그저 그가 돌아 나가는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케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온 이유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저놈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저도 모르겠어요. 얘기를 막 시작하려는 참인데 아버지께서 오셨어요.”
“……그래?”
“네.”
“크흠……! 앞으로도 저 인간은 절대로 만나지 말거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아버지는 케인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저도 만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걸요.”
신분 사회라는 것이 그랬다.
그나마 아버지는 같은 직위니 이렇게 대처라도 하지, 나는 케인보다는 아래여서 맘대로 그를 안 보고 싶다고 내칠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아버지가 다 조치를 취하마.”
다행히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모종의 조치를 취한다는 말에 나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사해요, 아버지.”
케인이 공작가에 찾아왔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그는 찾아오는 대신 내게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도대체 뭐 때문에 내게 선물을 보내는 걸까?
그 남자가 나를 다시 마음에 담았다?
아니,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사람의 눈빛을 읽고 마음을 읽는 그런 독심술은 못해서 장담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벨리타의 집착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인데 혹시나 곁에 없으니까 그제야 벨리타의 빈자리를 느꼈다면…….
‘그 정도면 변태 아닌가?’
케인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소설 속에서 알던 그와 여기 와서 겪은 그로 판단하건데 그 남자는 그렇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곰곰이 추측하건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내가 보기에 케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다이아몬드 광산.’
줄 때는 아델라에 대한 마음이 태산보다 컸으니 나라는 사랑의 방해물만 처치할 수 있다면 세상을 다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경위가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건 오로지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니까.
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도 책 속이긴 하지만 정확히는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라서일까?
‘여러모로 좀 씁쓸하네…….’
연일 이어지는 케인의 선물 공세에도 내 방에 케인이 보낸 선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발신인이 누군지 안 순간 아버지가 노하며 저택 안으로 선물을 일절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모두 다 태웠다고 했는데 역시 아버지다웠다.
“좋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사실 나에게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생긴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오기 전의 삶에서 내게는 부모님이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져 그곳에서 자랐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그곳을 나왔다.
그 후 쭉 혼자서 살았기에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보호해 준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내 삶은 그럴 줄 알았다.
이곳에 와서 돌아갈 생각을 절실하게 하지 않은 이유의 반은 어쩌면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가 생겼다는 것, 가족이 생겼다는 것은 가슴 한쪽의 텅 빈 무언가를 채워 줄 만큼 강력했다.
그래서 벨리타의 부모님이었지만 이제 내 부모님이 된 두 분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메리가 문 밖에서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아가씨, 저예요. 메리예요.”
“들어와”
나는 방 안으로 들어온 메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게 뭐야?”
“초대장이에요. 아가씨께 초대장이 왔어요.”
“또 어떤 가문에서 온 건데?”
나는 귀찮은 목소리로 메리에게 물었다.
매일같이 무슨 무슨 파티에 오라는 초대장을 거절하느라고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귀족 가문이 아니라 황실에서 온 거예요.”
“황실?”
왠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음을 느끼며 메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리가 내게 초대장이 든 봉투를 건네줬다.
“황실에서 왜 온 거지?”
당연히 황실에서도 연회를 열 수도 있긴 하지만 의아함을 느끼며 봉투를 살펴보았다.
일단 인장을 보아하니 황실의 인장이 맞았다.
그것도 무려 황태자의 인장이었다.
나는 서둘러서 봉투를 열어 초대장을 꺼냈다.
그리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뭐라고 쓰여 있어요?”
“이 주일 뒤에 황실에서 연회를 한다고 하네.”
“황실에서요?”
“응. 젊은 영애 영식들을 위한 자리라며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쓰여 있어.”
“황실에서 온 거니 거절은 힘들겠죠?”
“그렇긴 하지…….”
“이 주일 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요. 얼른 준비를 시작해야겠어요.”
메리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갔다.
메리가 나간 뒤에도 나는 내내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갑자기 왜 황실에서 연회를?
황족의 생일 연회도 아니고 딱히 목적도 없어 보이는 연회를 왜 꼭 참석하라고 당부까지 하는 거지?
시간이 안 되거나 이유가 생기면 가지 못갈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그간 받았던 초대장에는 그런 문구가 쓰여 있던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참석을 요구하는 이 연회가 뭔가 석연찮았다.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분명히 아버지께 말하면 아버지께서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 주실 것이다.
황제의 힘은 약했고 그의 아들인 황태자의 힘은 그보다 더 약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케인의 일이야 아주 개인적인 일이니 그렇다 쳐도 이런 일까지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엔 이제는 나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하기 싫은 일이 생겨도 부딪치고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안 그러면 이 거대한 가문을 절대 이끌어 나갈 수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을 하니 일단 가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가면 또 다 만나겠네.’
요새 나를 괴상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케인도, 사실 나로서는 별 감정은 없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감정의 골이 깊을 아델라도, 묘한 감정과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에이든도 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2년 만에 등장한 나를 두고 그곳에 온 모든 이들이 뒤에서 쑥덕거리겠지.
아무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듯했다.
황실에서 열릴 연회에 대해 알게 된 아버지가 지난 이 주 내내 내게 연회에는 절대 갈 생각도 말라며 말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왜 가야 하는지, 가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차근차근 말하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결국 나의 고집에 아버지께서는 내가 연회에 가는 것을 허락했고 오늘이 그 연회 당일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연회에 갈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는 젊은 귀족들만 모이는 것이기도 했고 어차피 내게 시선이 집중될 거 그냥 더 집중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붉은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어때?”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아가씨.”
메리에게 1차로 확인을 받고 거울로 2차로 확인을 한 뒤 방을 나섰다.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로 가니 몇몇 기사들 사이에 서 있는 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해 리안에게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리안, 네가 내 호위를 맡았어?”
“예, 아가씨.”
나는 그에게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그와 내게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귓가에 농담조로 속삭였다.
“재미없을 텐데 왜 따라와. 그냥 여기 있지.”
실제로 호위가 하는 일은 연회 내내 마차를 지키는 것뿐이고 가끔 무슨 일이 생길 때나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대기 시간 내내 지루하고 따분했다.
“아가씨 가는 곳에는 제가 무조건 갑니다. 아가씨는 제가 지킬 겁니다.”
그래, 내가 농담으로 얘기하면 너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게 리안이지.
리안은 또 나의 장난 같은 말에 엄청나게 진지하고 비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나 꼭 지켜 줘야 한다?”
“예, 그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는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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