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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늦은 새벽에야 여관에 돌아오자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아가씨.”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문밖에서 메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들어와.”
메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몇 시야?”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배고프시죠? 아침에 아가씨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식사를 건너뛰었지만 점심은 드셔야죠.”
“윌리엄은?”
“기사님께서는 벌써 일어나셔서 오전 개인 훈련까지 마치셨어요.”
와, 부지런하네.
역시 일등 기사다웠다.
“점심은 어떻게 할까요? 여관에서 드시겠어요?”
축제인데 그럴 순 없지.
어차피 내일 떠날 생각이었기에 낮 동안의 축제 모습은 어떤지 궁금했다.
“나가서 먹자.”
“네?”
“축제잖아. 그러니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럼 기사님께 준비하시라 말씀 올리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응. 알았어.”
잠시 뒤 우리는 여관을 나섰다.
어제 갔다 온 결과 마차를 타고 움직일 거리는 아니었기에 걸어서 상점들이 있는 거리로 가기로 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힘들지 않으시고요?”
“괜찮아.”
“그래도 마차를 타고 가시죠.”
“이 정도는 끄떡없어. 그리고 마차를 타고 다니면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잖아.”
메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연신 쳐다봤다.
나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걱정을 덜어 내 주었다.
“뭘 먹지?”
“아까 여관 주인에게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한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때 윌리엄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거기 가자.”
“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관 주인이 추천해 준 곳에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이 지역의 오래된 술집 중 하나라며 윌리엄이 여관 주인에게 들은 내용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술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유명한 술집답게 낮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맛있는 음식 냄새와 달큼한 포도주 냄새가 연신 코를 찔렀다.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세 명이서는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꽤 많은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아가씨, 이걸 다 드시게요?”
“응.”
“하지만…….”
“메리, 축제잖아. 걱정 그만하고 즐기자, 응? 그리고 나 혼자 먹을 거 아니야. 우리 함께 먹을 거야.”
“하지만 저희는 아가씨와 함께 먹을 순 없어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메리가 신분 차이를 언급했다.
“괜찮아.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텐데 계속 나 혼자만 먹으라고?”
“하지만 아가씨, 저희는 나중에 따로-.”
“그 ‘하지만’ 한 번만 더 하면 나 화낸다? 경, 경도 얼른 먹어. 앞으로는 별일 없으면 함께 밥 먹는 거야. 알았지?”
“하지-!”
메리가 또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말하려 하자 나는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다행히 두 사람 다 내 말을 알아들은 듯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활짝 웃음을 지었고 잠시 뒤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아무래도 고기 스튜 같은데요?”
“무슨 고기일까?”
“혹시 모르니 제가 맛을 볼게요.”
술집에서 파는 음식이라 많은 사람들이 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메리가 먼저 음식을 맛봤다.
“양고기네요.”
“양고기?
양고기라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숟가락 가득 고기 스튜를 퍼서 입 안에 넣었다.
“맛있다!”
양고기 특유의 향과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졌다.
“얼른 먹자.”
스튜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공작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다양한 음식들이 나왔다.
귀족들이 주로 먹는 요리와 일반 평민들이 먹는 요리는 재료나 가공법이 제법 달랐다.
우리는 포도주와 함께 배를 조금씩 채워 나갔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거리를 구경했다.
낮에 보는 마을은 밤과는 조금 색달랐다.
아무래도 축제이다 보니 확실히 밤에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낮에도 밤 못지않게 많은 인파가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낮의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저녁 식사까지 다른 술집에서 먹은 뒤 배를 두둑이 채운 채로 알찬 하루를 마감하며 여관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깜깜한 하늘에 번쩍하고 오색의 빛이 사방으로 터졌다.
불꽃놀이였다.
‘이곳에도 불꽃놀이가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불꽃이 너무 예쁘게 터져서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건 채 메리에게 말을 걸었다.
“메리, 봐 봐! 불꽃놀이야……!”
“아가씨! 너무 예뻐요!”
메리도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메리의 손을 이끌며 불꽃놀이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을 찾아 뛰어다녔다.
그리고 사방이 확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아 불꽃이 터지는 광경을 고개를 쭉 빼고 바라봤다.
“진짜 예쁘다.”
“네. 너무 예뻐요.”
그렇게 온 세상 가득히 펑펑 터지는 불꽃을 감상하고 있는데 어쩐지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근처에서 어제 만났던 이든이라는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뭔가에 이끌렸는지 우리는 서로를 향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가씨?”
나는 메리가 나를 부르며 몸을 살짝 흔들고 나서야 이든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저분은…….”
윌리엄이 먼저 이든을 알아보곤 입을 열었다.
곧 그가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키가 커서 그런지 그는 순식간에 우리 앞에 도착했다.
“또 뵙는군요.”
“예.”
“불꽃놀이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꽤 오랜만에 봐서요.”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방방 뛰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져 나는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가 내 말에 답을 할 생각도 안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짧았던 불꽃놀이가 끝나 버렸다.
“아쉽게도 끝나 버렸군요.”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에 또 볼 때 반갑죠.”
“그렇습니까.”
“네. 볼 수 있을 때마다 본다면,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진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줄 모르죠. 저는 이 정도가 딱 좋아요.”
“그렇…… 군요.”
순간 이든의 눈에 이채가 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말에 감동했나?’
감동에 빠질 말도 아니었는데 눈빛이 짙어진 걸 봐서는 내 말이 그의 어딘가를 움직인 모양이었다.
“가던 길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 이만 가자.”
“예.”
“네, 아가씨.”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고 남자를 지나쳐 가려는데 갑자기 아이가 생각이 났다.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래서 떼던 발을 다시 바닥에 붙이며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아침에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잘됐네요. 제가 데려왔던 아이도 잘 갔죠?”
어제 아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아 나는 그 아이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 잘 갔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쯤 아이들이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올 겁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아이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잘 도착했겠죠.”
이미 안전한 보금자리도 찾았겠다, 더 이상 아이에게 신경을 쓰는 건 과했다.
그리고 이 남자와도 더 얽히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저와 약속하신 대로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시면 돼요. 그럼 이만.”
나는 남자에게 다시 인사를 한 후 여관으로 향했다.
뒤에서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그렇게 남자와 헤어지고 여관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바로 고아원으로 갔다던 그 남자아이였다.
“너?!”
나는 답지 않게 큰 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아이가 무릎에 푹 파묻혀 있던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너 왜 여기 있어!”
아무래도 이 아이는 나를 놀라게 하는 데 뭔가 있는 듯했다.
기껏 구해 줬더니 동생들 때문에 다시 서커스단으로 간다는 것도 그렇고 오늘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랬다.
“벨…….”
“여기에 왜 있는 거야. 고아원은? 고아원에 안 갔어?”
“……벨 주려고 만들었어요.”
“뭐?”
아이가 우물쭈물하더니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의 손바닥에는 작은 꽃반지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고마운데, 고마워서 선물을 주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내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꽃반지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순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고마워. 너무 예쁘네. 여기 껴 줄래?”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네 번째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워 주었다.
“……예뻐요.”
“응?”
내게 반지를 껴 주면서 아이가 뭐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예쁘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잘 들리지가 않았다.
“……다음엔 진짜 반지를 껴 주고 싶어요.”
“아…… 그래, 고마워.”
아이가 반지를 선물하는 의미에 대해 뭘 알까 싶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거 주려고 온 거야?”
“…….”
아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묻자 방금까지 잘 대답하던 입이 딱 다물렸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우선 아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밤이 늦어 아이를 어디로 보낼 수도 없어서 아이가 밤사이 지낼 방을 빌렸다.
“올라가자.”
그런데 방으로 가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아이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놀라서 아이를 쳐다보니 부끄러운지 얼굴부터 목까지 온통 빨개졌다.
“너 혹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어?”
“…….”
아이는 또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메리, 나는 아이와 먼저 방으로 올라갈 테니 아이가 먹을 음식을 좀 가져다줄래?”
“네. 알겠어요, 아가씨.”
메리에게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 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아이가 묵을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와.”
내가 먼저 들어가 방을 살피고 있는데 아이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들어와, 얼른.”
두 번이나 말하자 아이가 느린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선 오늘은 여기서 자자.”
“네…….”
“여기 앉아 봐.”
나는 테이블이 있는 의자에 아이를 앉혔다.
그리고 아이를 잠시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진짜 나 이거 주려고 온 거야?”
꽃반지를 낀 손을 들어 보이며 아이에게 물었다.
“저는-.”
“아가씨.”
막 아이가 말을 하려 할 때 문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말에 방 안으로 들어온 메리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 위에는 식사로 먹을 만한 빵과 수프가 올려져 있었다.
메리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놓아주자 나는 그릇을 아이의 앞으로 갖다 댔다.
“먹어.”
먹으라는 소리에 아이는 처음엔 눈치를 살짝 보더니 눈앞에서 음식 냄새가 풍기자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얼른 먹어. 자, 먹고 얘기하자.”
숟가락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며 빨리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아이가 다급하게 수프를 숟가락 가득 퍼먹기 시작했다.
아이의 먹는 모습을 보니 정말 배고팠던 듯싶었다.
나는 메리에게 나가 보라고 말하고 아이가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는 식사를 하면서도 간간이 내 눈치를 봤지만 식성이 좋은지 단숨에 그릇을 깨끗하게 다 비웠다.
“맛있어?”
“……네.”
“음식을 더 갖다 달라고 할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눈치 보지 말고 먹고 싶은 만큼 먹어.”
“괜찮아요. 이제 배불러요.”
배부르다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입을 깨끗이 닦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아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저를 구해 주셨을 때…….”
눈치 빠르게 내 눈빛을 읽었는지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절 샀는지 물었을 때 벨이 제게 그랬죠. 제가 구해 달라는 눈빛을 했다고요.”
그런 말을 한 건 맞았기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벨이 저를 구해 줬던 순간, 저는 제 스스로에게 맹세했어요. 벨을 평생 제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말이에요.”
“나는 너를 그런 뜻으로 구한 게 아니야.”
분명 아이에게 알아듣게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이상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너에게 계속 말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안전한 곳에 맡길 생각이었어. 나는 너를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제발요. 절 사셨잖아요. 절 구해 주셨잖아요. 저는 벨을 따라가고 싶어요.”
“그럼 같이 지냈던 동생들은?”
“…….”
“그 아이들을 다시 보지 않아도 좋아? 함께 지냈다며, 나와 함께 가면 그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어. 그래도 좋아?”
“……괜찮아요. 그 애들은 앞으로 잘 지낼 테니까. 저는 그 애들보다 벨과 헤어지는 게 더 싫어요.”
아이는 아예 내게 쐐기를 박았다.
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아이를 응시하고 있는데 밖에서 윌리엄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윌리엄입니다.”
“들어와.”
윌리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이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이내 내게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 남자는?”
“어제 그 여관으로 갔더니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
아이를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오면서 윌리엄에게 이든을 찾아 데려오라고 명을 내렸었다.
그에게 아이를 다시 맡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없다니, 계획에 차질이 생겨 버렸다.
“혹시나 해서 그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못 찾았습니다.”
“아까 분명히 마주쳤잖아. 금세 마을을 떠난 건가?”
“그 길로 떠난 듯합니다.”
“아…… 알겠어. 피곤하겠다. 이만 가서 쉬어.”
“알겠습니다.”
윌리엄이 나간 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이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고아원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아이를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곳의 고아원에 맡겨야 할까.’
그런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는지 아이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그리고 갑자기 아이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힘을 줬다.
그런데 아이답지 않은 억센 힘으로 바닥에서 버티고 있었다.
“일어나. 얼른!”
“벨,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네? 흑.”
“무슨-.”
“절대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을게요. 그러니 저를 버리지 마세요…….”
생각을 들킨 것도 모자라 그걸로 인해 아이가 우니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어떡하지.’
순간, 다시금 아이의 얼굴에 언젠가의 내가 겹쳐졌다.
이미 버림을 받았지만 또다시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그래서 너무나 절박했던 과거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일단 일어나. 일어나서 차분하게 얘기하자.”
하지만 아이는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얼굴엔 눈물이 가득했다.
‘마음 약해지면 안 돼.’
“미안. 정말로 널 데려갈 수는 없어. 내 상황이 그래. 그러니 나를 좀 이해해 줘.”
내 말에 아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절망의 빛이 들어찼다.
“미안해.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이곳에 있는 고아원을 알아봐 줄게.”
“…….”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완고하게 나오니 이제 체념을 한 듯 보였다.
나는 아이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그리고 바로 아이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어도 어쩐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나를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아이의 기분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절망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손을 잡았다 생각했는데 내쳐지는 기분은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었음에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컥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나열해 봤다.
하지만 결국 그럴 듯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여행이라는 핑계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행 중이라도 아이를 거두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공작가에는 수많은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있었다.
저택 내 수많은 일거리 중 하나를 맡긴다면 아이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야. 자니?”
그때 말을 하기가 무섭게 안에서 문이 열리고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들어가도 되지?”
아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고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속으로 말을 고른 후 아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너를 데려가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아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도 나는 네가 고아원에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데려갈게. 정말 나랑 같이 갈 거야?”
방금과 달리 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같이 가고 싶어요!”
아이의 목소리에는 변하지 않을 결심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뭐든지 할게요.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아니, 잘 할게요.”
“네 의지는 알겠어. 그럼 너 기사가 되지 않을래?”
사용인으로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까 잠깐 느꼈던 힘을 봤을 때 아이는 기사가 될 자질이 있어 보였다.
“……기사요?”
“그래. 나를 따라가면 기사가 되게 해 줄게. 마침 네 스승도 있어.”
나는 윌리엄을 떠올리며 내 맘대로 그를 스승이라 칭했다.
“네! 기사가 될게요. 벨을 지키는 기사가 될게요!”
나를 지키는 기사라니. 귀여운 발상에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에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를 따르기로 했다면 내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면 안 돼. 앞으로는 아가씨라고 부르렴.”
“네. 그럴게요, 벨 아가씨.”
이제 이 아이는 내 소속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 아이의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에게 남에게 책잡힐 만한 것은 초반부터 단단히 일러 주어야 했다.
“앞으로 배울 것투성이야. 말 타는 법도 배워야 하고 기사가 되기 위한 훈련도 해야 해. 잘 할 수 있어?”
“열심히 배울게요, 아가씨.”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이제는 꼬박꼬박 말 뒤에 아가씨를 붙였다.
“그리고…….”
어쩐지 아이를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으니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아직도 뭔가 기억이 나는 게 없어?”
“네…….”
“그러면 이름이 필요한데.”
계속 아이를 ‘너, 야’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이름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까. 맘에 드는 이름이 있니?”
“아가씨께서 지어 주세요.”
“내가?”
“네. 아가씨께서 저를 거둬 주셨으니 이름도 지어 주시는 게 마땅해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을 하다 괜찮은 이름이 번뜩 생각났다.
“리안, 리안이라고 하자.”
“리안…….”
아이가 이제 막 생긴 자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제는 리안이라고 불릴 아이가 아주 해사하게 웃음 지었다.
* * *
그 후 우리는 나, 메리, 윌리엄, 그리고 리안까지 넷이서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렌스에 가서 내 눈으로 정말로 실존하는 다이아 광산도 보았다.
‘저 다이아가 다 내 거라니…….’
처음 다이아 광산을 본 순간 느꼈던 그 설렘을 잊지 못한다.
발에 채는 이 돌덩이 같은 걸 조금만 가져가 팔아도 집 한 채는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급격하게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렌스에 온 목적은 다이아 광산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게 다였다.
그래서 나는 바로 다음 목적지로 움직였고 그렇게 제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다.
그 시간 속에서 리안은 내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는 건지 매일같이 윌리엄과 고된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와 함께 지내면서 잘 먹어서 그런 건지 갑자기 쑥쑥 크기 시작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커져 있고 또 그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더 커져 있었을 정도였다.
리안은 우리가 여행을 다닌 그 1년 사이에 열두 살 아이의 모습이 아닌, 열너덧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성장이라는 것은 누구는 느리지만 누구는 무척 빠를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나는 별 의심 없이 리안이 커 가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막 제국의 남쪽 부근에 있는 율리타라는 해안 도시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봤는데 도시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왜 그런지 여관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축제 기간이라고 했다.
축제라는 말을 들으니 1년 전에 페오라트에서 본 남자가 문득 떠올랐다.
잘생기긴 엄청 잘생겼었는데…….
손대면 그대로 검은 물감이 묻어나올 것 같았던 머리칼에 자수정을 콕 박아 넣은 것 같은 눈동자는 남자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서커스단에 있었던 다른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잠이 든 다음 날 우리는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1년 동안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축제 기간에 맞춰서 지나간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행 첫날 페오라트에서 축제를 즐긴 것이 운이 좋았을 정도였다.
어쨌든 축제라는 단어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해안 도시가 주는 독특한 분위기의 축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는 충분했다.
“아가씨.”
“응. 나가.”
메리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마차가 아니라 걸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지내는 여관이 번화가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아가씨, 저기 좀 봐 보세요!”
메리가 오랜만에 알록달록한 것들로 가득한 활기 찬 거리를 봐서 그런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뭔가를 가리켰다.
“바다예요! 끝이 보이지가 않아요!”
길을 따라가다 조금 벗어나서 걸어가다 보니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바다였다.
어쩐지 내가 알던 바다와 다르지 않아서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아가씨, 저는 바다라는 걸 처음 봤어요!”
메리의 벅찬 기분이 내게도 느껴졌다.
메리뿐 아니라 벨리타나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바다를 처음 봤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는지 메리뿐만 아니라 윌리엄과 리안도 다른 때와는 눈빛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메리는 여행을 하는 내내, 그리고 이곳 율리타에 다가올수록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바다에 대해 계속 얘기를 했을 정도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가까이 가 봐도 될까요?”
“그래. 가자.”
우리는 바다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모래사장으로 다가갔다.
바닷가에 들어서자 메리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이곳저곳을 활보했다.
메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옆에 있던 윌리엄을 쳐다보니 그가 메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니 내 마음이 뿌듯하고 뭉클해질 정도였다.
나는 두 사람만의 세계에 그들을 조용히 놔두고 아까부터 나만 계속 쳐다보고 있던 리안에게 다가갔다.
1년 전보다 무려 15㎝는 훌쩍 커 버린 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너도 바다는 처음 보지?”
“예. 낯설고 신기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처음 보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리안의 성장은 확실히 대단했다.
키뿐만 아니라 목소리, 말투까지 1년 전 어린아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구나. 감상이 어때?”
“파랗고, 넓고, 거대합니다.”
“그게 다야? 지금 네 기분은 어때?”
나는 겨우 그게 다냐며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안에게 되물었다.
“……좋습니다.”
“뭐?”
“무척 좋습니다.”
나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좋다고 말하는 리안은 아이답지 않게 무척이나 사람을 설레게 만들 정도로 예쁘게 웃고 있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올 걸 그랬다.”
“…….”
얘는 왜, 갑자기 또 대답이 없어?
왜 또 말이 없냐고 물으려는 찰나였다.
“아가씨!”
메리가 한바탕 바다에서 잘 놀았는지 나를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저 혼자만 바다에 너무 빠져 있었나 봐요. 죄송해요.”
메리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눈초리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야. 괜찮아. 더 구경해도 돼.”
“아니에요. 저 다 봤어요. 이제 다른 곳에 가요. 얼른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상점이 즐비한 거리로 움직였다.
“서커스단이네요.”
바닷가에서 멀어지며 걷다가 배가 고파 배를 채운 뒤 축제를 구경하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서커스단을 마주했다.
서커스단이라는 말에 황급히 뒤에서 나를 따라오던 리안을 뒤돌아봤다.
혹시나 서커스단이라는 소리에 리안의 마음이 불편하거나 두려운 기색이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리안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아가씨?”
내가 자신을 쳐다보자 리안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조심히 불렀다.
“아니, 아니야.”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커스단의 주변은 역시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미 공연이 한창 무르익었는지 곳곳에서 환호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
그런데 공연하고 있는 이들 중에 또 아이들이 있었다.
리안이 했었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곳에서의 위험한 줄타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꽤 불안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두 아이들이 각자 하나의 바퀴 위에 나무 막대를 세우고 올라타 곤봉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리안을 뒤돌아봤다.
이들을 보고 리안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리안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갈까?”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리안의 불안정한 마음을 헤아려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막 인파를 헤치고 나가는데 순간이었다.
문득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인영이 언뜻 보인 것 같았다.
“어?”
“왜 그러세요, 아가씨?”
‘설마?’
방금 스치듯 본 사람이 내 기억 속 그 사람과 닮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나 몸집이 평범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이든 아니든 뭘 하려고 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메리와 윌리엄, 리안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 후 날이 어두워지자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맞는 것 같은데…….’
아까 언뜻 본 남자에 대한 생각이었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서커스단이 공연하는 곳에서 본 거라 나는 내가 본 남자가 그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궁금증이 일었다.
내가 본 사람이 그 남자가 맞는다면 이번에도 아이들을 구하려고 잠입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까 리안의 불안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커스단의 아이들을 보자마자 나를 따라오긴 했지만 함께 지냈던, 헤어진 아이들이 생각나는 것 같았다.
‘한번 확인해 볼까.’
서커스단이 지내고 있는 막사 근처에 가서 동태를 살펴보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남자가 나타난다면 리안을 위해서라도 그를 다시 한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서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남장을 한 뒤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서커스단이 머무르는 막사는 찾기 쉬웠다.
아까 공연한 곳에서 조금 더 으슥한 곳으로 가다 보니 커다란 막사 여러 개가 모여 있었다.
막사 주변에는 그들이 쓰는 공연용 물품들이 널브러져 있었기에 단번에 이곳이 서커스단이 지내고 있는 막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도록 막사 근처에 숨어서 동태를 살폈다.
사방이 어두웠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곳곳에 벌레들이 우는 소리와 저 멀리 바다의 파도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사람의 발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허탕 친 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온 거였기 때문에 실망감은 들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여관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막 생각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근처에서 작지만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심히 들키지 않도록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작은 기척에도 반응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내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나는 은밀하게, 그러나 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낯익은 두 인영이 막사 쪽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왔구나.’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무작정 그들의 뒤를 밟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지나갔던 길 근처에서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흘렀을까.
아까보다 발소리가 늘어났다.
아까의 묵직한 느낌에 가벼운 느낌의 것들이 더해져 있었다.
나는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막사 근처에서 드디어 남자, 이든과 마주했다.
그는 부하와 아이들 셋과 함께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이든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나름 남장을 했는데도 나를 알아본 듯했다.
그는 내게 뭐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급히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아이들과 부하에게 조용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 자신의 갈 길을 갔다.
나는 그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뒤 막사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진 바닷가 근처에 도착했다.
이든이 움직임을 멈추고 부하에게 눈짓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보였다.
그러자 부하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제 우리 둘만 남게 되자 이든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이든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네. 오랜만입니다.”
나 또한 감정의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사이에 다시 침묵이 일었고 아까보다는 선명한 파도소리만이 귓가에 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한동안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든의 눈빛이 어쩐지 좀 슬퍼 보였다.
허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실망감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왜?’
어두워서 잘못 본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1년 만인가요?”
“그렇죠. 1년이 지났죠.”
“여기서 다시 만난 걸 보니 아직 여행 중이신가 봅니다.”
“네. 여행 중이에요.”
“레이디와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예.”
그의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심장이 살짝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든의 목소리는 말과는 다르게 담백했지만 외모가 주는 분위기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왜 저를?”
나는 괜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때 레이디와 함께 있던 남자아이가 고아원에 오지 않고 중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황을 전달해야 했기에 여관을 찾았지만 이미 떠나셨더군요.”
‘아…….’
리안에 대한 얘기였다.
그가 나를 본다면 분명 리안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잠시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혹시 아이를 보지 못했습니까?”
이든이 내게 리안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고 난데없는 생각을 했던 머릿속을 깨끗이 지워 내고 남자의 물음에 답했다.
“그 아이라면 제가 데리고 있어요.”
“네?”
이든은 예상치 못했던 내 답에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이를…… 데리고 계신다고요?”
“네. 이야기를 하자면 긴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데리고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아이가 저를 찾아왔어요. 저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해서 결국 함께하게 되었어요.”
나는 1년 전 리안과 나 사이의 이야기를 빠르게 그에게 읊었다.
“그렇…… 군요.”
남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납득을 못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걸 남자가 알았으니 이젠 내가 그를 찾은 이유를 말할 타이밍이었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건 1년 전에 구출했던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예요. 그때 어느 고아원인지 듣지도 못했거든요.”
남자의 침묵에 나는 계속해서 내가 할 말을 이어서 했다.
“오늘 이 도시에 도착했는데 마침 축제더라고요. 그런데 구경을 하는 중에 서커스단을 발견했는데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어요. 아마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떠올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되면 근심이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나 싶어 근처를 서성거리긴 했는데 정말로 만날 줄을 몰랐네요.”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군요.”
이든이 뜬금없이 나를 칭찬했다.
“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이의 걱정을 알아채고 먼저 이렇게 나서서 저를 만나러 오셨으니 다정한 분이십니다.”
이든의 칭찬에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이든도 나를 따라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남자의 미소는 역시나 흡족했다.
“아이들은 잘 지냅니다. 그리고 고아원은 수도의 동북쪽에 있는 헤모아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고아원입니다. 나중에 수도에 오시게 된다면 그 아이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동북쪽의 헤모아…….”
나는 잊지 않기 위해 고아원의 위치를 다시 되뇌었다.
“가시죠. 지내시는 여관으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닙니다. 제 마음이 편하려고 하는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발을 뗐고 이든이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걸으니 철썩이는 파도 소리, 그리고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짠 내 가득한 바다 냄새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기분을 무척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그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갔을 텐데 순간의 기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저를 한 번에 알아보셨네요?”
남장을 하고 갔기 때문에 나는 이든이 나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든은 나를 단번에 알아봤다.
내 말에 그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설핏 웃음을 지었다.
“왜 웃으세요?”
별로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왜 웃는지 궁금했다.
“레이디 같은 분은 흔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남장을 하셔도 사실 티가 납니다.”
“아, 그런가요?”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변장을 하고 간 것인데 티가 난다는 말을 듣자 민망함이 살짝 밀려왔다.
그래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수도 근처에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꽤 먼 길을 오셨네요. 저는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율리타까지 오게 된 거고요.”
그리고 정신없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든에게 하고 있었다.
“1년 동안 여행을 다녔지만 해안 도시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좀 오래 머물다 갈 생각이에요.”
“바다를 처음 보십니까?”
“네? 아, 네.”
바다를 처음 보느냐는 물음에 나는 순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바다를 많이 봤지만 ‘벨리타’는 지금까지 바다를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여행은 즐거우십니까?”
“뭐, 나름 괜찮아요. 가 보지 못했던 곳을 간다는 건 꽤 설레는 일이잖아요? 이때가 아니면 평생을 한곳에만 갇혀서 지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의외의 답이었는지 이든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물론 그런 삶이 나쁜 건 아니지만 조금……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꽤 자유로워 보이네요.”
“그렇게 보이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든의 웃음이 왠지 씁쓸해 보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제게 말입니까?”
“네. 그런데 대답을 해 주셔도 되고 안 해 주셔도 돼요.”
나는 그에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말라고 미리 말을 해 두었다.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직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시는 건가요?”
“무슨 뜻이죠?”
내 질문이 불쾌했는지 순간 이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 아이들을 구하시는 그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좋은 일을 하시고 있다는 거 알고 있고요. 그런데 페오라트야 수도에서 하루면 가는 곳이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잖아요. 수도에서 꼬박 며칠을 가야 닿는 곳인데 이렇게 먼 곳까지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오는 게 어쩐지 좀…… 대단해서요.”
확실히 그랬다.
고아원이 수도 근처의 마을에 있다는 걸 보면 이든은 그 근방의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곳 율리타는 수도에서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든이 정말로 정의감이 투철해서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정의감만으로 이 먼 곳까지 왔다기에는 대단한 한편 좀 이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은 없었다.
그저 나는 궁금했을 뿐이고 그렇기에 나는 앞서 그에게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았던 것이다.
이든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내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침묵하는 걸 수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얼어붙은 분위기에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속으로 스스로를 질타했다.
그런데 이든에게서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곧 그의 입이 열리고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확실히 보통 분은 아니시군요. 사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아…… 그 사람이 서커스단에 있을 거라 생각하셔서 서커스단만 추적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그의 눈빛이 슬퍼 보였던 것이 맞나 보다.
아마도 그는 찾고 있는 사람을 이번에도 찾지 못했기에 실망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못 찾으셨나요?”
“예. 찾지 못했습니다.”
이든의 표정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꺼냈네요.”
사람의 아픈 곳을 괜히 들쑤신 것 같아서 이든에게 급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의 약한 모습을 본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생각이 번뜩 들자 바로 이든에게 말을 내뱉었다.
“혹시 어떤 사람을 찾는지 알려 주시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었고, 이제 두 번밖에 보지 않은 남자와 엮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랬다.
지금은 이든을 도와주고 싶었다.
“제가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잖아요. 그러니까 서커스단을 또 보게 된다면 저도 찾아볼게요.”
그런데 이든의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 내게 고정됐다.
그 눈빛은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역시…….”
그리고 한참 만에 이든이 입을 열었고 서로를 응시했던 시선이 흩어졌다.
“다정하고 친절하신 분입니다.”
아까 나를 칭찬했던 그 말을 이든이 다시 언급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친절하지도 그렇게 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예외가 있다면 내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아이들에 관한 일에만 예민하달까.
그 외 다른 것에 대해서는 남들과 비슷할 뿐이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아요.”
사실 이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오해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을진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부정하는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슥 올렸다.
오늘 그의 웃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그건 내 마음을 조금은 일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잘생겨서 그래.’
왜 이 남자를 돕고 싶고, 왜 이 남자의 미소가 설레고, 왜 이 남자가 신경 쓰일까.
나는 그 모든 이유를 이든의 아름다운 외모로 돌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이든의 외모는 무척 뛰어났다.
‘특히 저 눈빛.’
보랏빛의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저 눈빛은 사람을 홀릴 것 같이 묘했다.
단단하고 올곧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 그의 눈빛과 얼굴 전체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왠지 모르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모두가 다 이든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데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예쁜…… 목걸이를 하셨네요.”
이곳에 와서 내가 본 남자들 중에 목걸이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낯선 곳에 자리한 저 목걸이가 어쩐지 위화감을 부추겼다.
물론 이든의 눈 색과 비슷하지만 조금 연한 보라색의 가느다란 목걸이는 이든에게 꽤 괜찮게 어울렸지만 말이다.
“목걸이가 참 예뻐요.”
대답 없는 이든을 향해 나는 다시 한번 목걸이를 언급했다.
그러자 이든의 손이 목걸이 근처로 가더니 줄을 따라 목걸이를 매만졌다.
“예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제 목숨을 쥐고 있으니.”
“네?”
이든의 말에 나는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내게 말해 줄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든은 내 도움 따위는 별로 필요치 않은지 내가 그에게 보인 호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를 귀찮게 하면서까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정도의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서 그 이후로 우리는 별말 없이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내가 지내고 있는 여관 앞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이든이 나와 여관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에 구출한 아이들도 그 고아원으로 가게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네. 아무튼 찾으려는 사람을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
“아가씨?”
그런데 그때였다.
이든과 막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안이었다.
그런데 어딜 급하게 돌아다녔는지 리안의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리안?”
“아가씨!”
리안이 다시 나를 부르며 내 앞까지 다가왔다.
리안의 숨이 무척 거칠었다.
“왜 거기서 오는 거야?”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밖에서 나타나자 나는 궁금함이 가득한 눈으로 리안에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사라지셔서…….”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리안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듯했다.
그래서 나를 찾으러 돌아다닌 게 분명했다.
“그럼 메리와 윌리엄 경도 내가 없어진 걸 알고 있어?”
“아뇨.”
리안만 알았다니 다행이었다.
괜히 또 말도 없이 나가서 내 사람들을 걱정 끼쳤을까 봐 민망했는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미안한 표정으로 리안을 쳐다보는데 방금 전까지 나를 보고 있던 리안의 시선이 내 뒤를 향해 있었다.
리안은 이든을 보고 있었다.
나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이든과 리안을 마주하게 했다.
“아, 이분은 그때 기억나지? 페오라트에서 너희를 구해 주셨던 분.”
“……네. 기억합니다.”
“이 아이가 그럼 그때 그 아이입니까?”
두 남자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졌다.
“네. 맞아요.”
나는 우선 이든을 향해 대답했다.
“많이…… 컸군요.”
“그렇죠?”
나는 내가 리안을 이만큼 키운 것 같아 나름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은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급격한 성장으로 이미 내 키를 넘어선 리안이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리안의 행동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 맞다. 리안, 너랑 같이 지냈던 동생들 있잖아. 고아원에 잘 있대. 어디 고아원인지 내가 알아 놨으니까 나중에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 함께 가 보자. 알았지?”
“그 때문에…… 이 밤중에 나갔다 오신 거예요?”
“응. 네가 아까 서커스단을 보고 침울한 얼굴을 하길래 혹시나 하고 갔다 온 거야. 그런데 진짜로 만났지 뭐야.”
내가 리안의 감정을 살피고 움직인 것에 감동했는지 리안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감동한 거야? 내가 이렇게나 너를 생각한다는 거 알겠지?”
장난스럽게 으스댔지만 리안을 거뒀을 때부터 나는 이 아이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쯤은 내가 해야 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들어가자.”
나는 리안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니 달이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밤이 많이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일 또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자야 했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리고 이든에게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마주친 이든의 묘한 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가씨?”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을 리안의 목소리가 깨웠다.
“어? 응. 가자.”
그렇게 나는 이든을 등지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등이 따가워서 나도 모르게 몸이 꼿꼿이 세워졌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뜨거웠던 시선은 자취를 감추었다.
등에서 느껴졌던 묘한 열기가 사라지자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부러 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나 찾고 다닌 거야?”
“얼마 안 됐어요.”
“대답이 없으면 자는구나 하지.”
“느낌이 이상해서…….”
리안이 말을 얼버무렸다.
“감이 좋네.”
대화하면서 걷다 보니 금세 내 방 앞에 도착했다.
나는 미소를 살짝 지으며 리안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혼자서 다니지 마세요, 제발.”
갑자기 리안이 내게 시선을 맞추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조심할게.”
이런 리안의 모습은 의외여서 나는 얼떨결에 그러겠다며 대답했다.
“조심하실 게 아니라 아가씨는 너무, 하아…….”
리안이 더 말을 잇지 못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1년 전 그 꼬마아이가 어떻게 이렇게나 커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지금 상당히 감격스러워졌다.
“알겠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좀 만 더 크면 아주 큰일 나겠어.”
그리 말하며 이만 돌아가자고 리안의 등을 두 손으로 밀면서도 뿌듯함에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볍게 밀리던 리안의 몸이 우뚝 멈춰 서며 더 이상 밀리지가 않았다.
“아가씨는 영원히 제가 지켜 드릴 겁니다.”
그러곤 내게 맹세하듯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응. 넌 평생 내 기사야. 그러니 날 지켜 줘야 해.”
리안이 내게 장난기 섞이지 않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하니 나도 덩달아 진지하게 답했다.
하지만 리안은 아직 아이였다.
그리고 나를 지키기에는 여전히 실력이 부족했다.
“지금처럼만, 아니 더 열심히 훈련받아. 날 지키려면 더 강해져야 해.”
두 손에 닿은 리안의 등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그 말은 리안이 자기 자신에게 한 다짐인 동시에 나와의 약속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메리가 내게 별말이 없는 걸 보니 리안의 말대로 메리와 윌리엄은 내가 밤에 없어졌던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아가씨, 오늘은 어딜 가실 거예요?”
메리가 머리를 만져 주며 내게 물었다.
“글쎄. 어딜 갈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저는 아가씨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좋아요.”
“바다에 가 볼래.”
“바다요?!”
바다를 간다는 소리에 메리의 목소리가 두 배로 커졌다.
“정말 바다에 가실 거예요?”
“응. 또 언제 볼지 모르는데 실컷 보고 가야지. 안 그래?”
“맞아요. 맞는 말씀이세요!”
메리가 격하게 내게 동의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윌리엄 경과 리안에게 준비하라 말하고 올게요.”
“응. 그래.”
내 치장을 마치자마자 메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창문 밖을 쳐다봤다.
아침부터 거리는 활기가 넘쳐 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았다.
희미한 바다 냄새가 코 속에 들어찼다.
“바다…….”
메리에게 말한 대로 나는 아마 평생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질릴 때까지 눈에 가득 담아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메리가 준비를 마쳤다며 돌아와 함께 방을 나섰다.
* * *
며칠 동안 율리타에서 지내면서 첫 날 이후에는 이든을 본 적이 없었다.
율리타는 꽤 큰 도시였고 서커스단 또한 첫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이든이 이미 도시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내일 이곳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오늘이 율리타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곳 축제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성대한 불꽃놀이가 곧 벌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 넷은 저녁을 먹은 뒤 빠르게 바닷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역시 축제의 끝은 불꽃놀이죠.”
메리가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바닷가에서의 불꽃놀이라니,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요, 아가씨.”
“그러니까 말이야.”
확실히 메리의 말대로 꽤 낭만적이고 분위기 있는 순간이었다.
“어머!”
“왜 그래?”
“아니, 아니에요!”
갑자기 높아진 메리의 목소리에 메리를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내리니 메리와 윌리엄이 옆에 서서 몰래 손을 마주잡고 있는 게 보였다.
‘아하.’
둘이 벌써 꽤 많이 가까워졌구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진즉에 눈치를 채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을 몰랐다.
그들의 주인으로서 두 사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해졌다.
불현듯 그들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
나는 내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리안을 뒤돌아보며 불렀다.
“네, 아가씨.”
“여관에 깜박하고 두고 온 물건이 있는데 같이 갔다 오자.”
“알겠습니다.”
“무슨 물건인데요? 아가씨, 저도 같이 가요!”
내가 몸을 움직이자 메리가 급하게 나를 부르며 따라나서려고 했다.
“아니야. 금방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메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얼른 갔다 올게.”
“아가씨!”
나는 나를 부르는 메리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리안의 손목을 잡고 서둘러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웬만큼 거리가 떨어졌을 때에야 잠시 멈춘 뒤 리안의 손을 놔주었다.
“우리 여기에 잠깐 있자.”
“일부러 그러셨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리안도 내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 시작한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화려한 오색 빛깔의 불꽃이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수놓았다.
“와!”
미리 예고한 대로 엄청나게 큰 불꽃들이 연신 밤하늘을 가득 메웠고 그것을 보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리안! 진짜 멋있지 않아?”
아직은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 앞에서 마치 그보다 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나는 방방 뛰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포르타 드비아…….”
리안의 입에서 뜬금없이 ‘포르타 드비아’가 흘러나왔다.
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었기에 나는 활짝 웃으며 리안에게 똑같은 말로 답했다.
“정말 ‘포르타 드비아’다. 그치?”
그렇게 우리는 메리와 윌리엄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행복을 만끽했다.
생각보다 꽤 길었던 불꽃놀이가 끝나고 리안과 나는 다시 메리와 윌리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율리타에서의 마지막 축제를 즐긴 뒤 여관으로 향했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 거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마지막 밤을 불 싸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좀만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우리가 지내는 여관은 바닷가를 끼고 있는 거리가 아니라 다른 거리에 있었다.
여관으로 가기 위해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아뇨. 저는 잘 모르겠어요.”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경은? 경은 어때?”
나는 윌리엄을 향해 물었다.
메리는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못 들을 수도 있었지만 윌리엄이나 나는 아니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감각이 예민했다.
“무언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리안은? 리안도 들려?”
리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훈련의 성과인지 리안도 이제는 감각이 예민해진 듯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리는 우리가 지나쳤던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점점 다가가자 누군가 숨을 헉헉거리는 건지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기엔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사람이 목을 움켜진 채 쓰러져 있었다.
“아가씨, 저분은……!”
메리가 남자를 알아봤는지 큰 소리를 내며 이든을 가리켰다.
나는 메리에게 대꾸할 생각도 못하고 이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든은 괴로운 건지 계속해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이든의 몸부림이 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나는 윌리엄과 리안에게 눈짓했다.
내 눈빛을 읽은 윌리엄이 이든의 앞에 등을 대자 리안이 이든을 윌리엄의 등에 업히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빠르게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여관 주인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부탁한 뒤 이든을 내 방 침대에 눕혔다.
이든은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는지 끙끙 앓고 있었다.
“저기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든이 내 손목을 붙잡더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무슨 뜻이에요?”
하지만 여전히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건지 이든은 고개만 계속 내저을 뿐이었다.
“의사는 언제 오는 거야.”
“제가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내가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자 윌리엄이 의사를 데려오겠다며 방 밖으로 나갔다.
“땀 좀 봐요. 저는 대야에 물을 받아 올게요.”
메리도 그렇게 말한 뒤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리안과 나, 그리고 이든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이든의 몸짓이 이상했다.
마치 내가 예쁘다고 했던 그 목걸이를 움켜쥐고 뜯어내려는 듯했다.
‘목걸이를?’
혹시나 싶어 나는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이든의 목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목걸이에 손을 살짝 대는 순간 이든의 고통에 찬 몸짓이 귀신같이 사그라졌다.
이든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뭐, 뭐지?’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리안 또한 나와 같은 걸 보고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채였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괜히 할 필요도 없는 변명을 리안에게 하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고 윌리엄이 중년의 남자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의사는 침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든을 보더니 곧바로 진찰을 시작했다.
나는 아까의 일이 아직 머릿속에 맴돌아 멍한 표정으로 의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진찰을 마친 의사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거나 기력이 약해져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충격?”
“예. 근데 그게 뭔지는 몸을 살펴봤는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목이 고통스러운 건지 계속 그 부근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목에는 어떠한 상처나 흔적도 없습니다.”
“뭐라고?”
믿기 힘든 의사의 말에 나는 재빨리 누워 있는 이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 주변을 유심히 살펴봤다.
확실히 의사의 말대로 목에는 어떠한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목 안쪽은 살펴봤나?”
“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했다.
분명 우리 다 이든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봤는데 그 고통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니.
“알겠네.”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우선 나는 의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각자 방으로 돌아가 쉬어. 이 사람은 내가 지켜볼게.”
“하지만 아가씨……!”
“의심 가는 점이 있어서 그래.”
“의심 가는 거라뇨? 그럼 저도 아가씨 곁에 있을게요.”
메리가 걱정스러운지 내 곁에 남겠다고 나섰다.
“이 남자가 나를 해칠 것도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니 다들 돌아가.”
생각보다 단호한 내 말에 세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메리가 먼저 나가고 그다음 윌리엄, 마지막으로 리안이 방을 나섰는데 리안은 마지막까지 내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리안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리안이 안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꽤 한참 만에 방문이 닫혔다.
다들 나가고 방 안에 이든과 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침대 근처로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뒤 이든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까 뭐였지?’
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우연인가?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던 것일까?
내가 만지니 이든의 고통이 사라지고 혼절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그런데 이든이 깨어나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나 혼자 머리를 부여잡고 백날 천날 고민을 해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그냥 지금 내가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우선 이든이 흘린 땀이 상당했다.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그의 옷을 벗기고 땀을 닦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얼굴에 맺힌 땀만 닦아 주기로 했다.
아까 메리가 가져온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조용히 일어나 수건을 대야에 푹 담가 물에 적셨다.
그리고 젖은 수건을 들고 침대로 다가가 이든의 얼굴을 이마부터 조심스럽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니까.’
아픈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터무니없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든의 외모는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 정도로 놀라웠다.
머리카락에 살짝 감춰진 넓지도 좁지도 않은, 그의 얼굴에 딱 어울리는 면적을 가진 입체적인 이마부터 시작해서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길고 긴 속눈썹에 가려진 보랏빛의 눈동자와, 미간에서부터 코끝까지 곧게 뻗은 콧날, 지금은 굳게 닫힌 적당히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입술, 그러나 곱상하게 생긴 이목구비와 달리 굵직하게 각진 턱 선은 그의 외모를 더욱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정신 차리자.’
외모에 정신이 팔렸으면서도 손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든의 얼굴과 그 밑의 목덜미 부근까지만 깨끗하게 닦아 준 뒤 다시 의자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 고 생각했는데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의자에 앉아 침대에 고개를 파묻은 채 자서 자세가 영 불편했는데도 꿈 한번 꾸지 않고 깊은 잠에 푹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나면서 의식이 조금씩 들어오자 곧바로 이든이 생각났고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여전히 이든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만 자기 전과 다른 것은 이든이 어쩐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상한 점은 그가 아닌 내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깼습니까?”
우리의 위치가 바뀌어 이든이 아까 내가 자기 전에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도 너무나 다정스러웠다.
“……네?”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든에게 되물었다.
“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자 얕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멍청하게 팔을 크게 움직이느라 벽에 팔꿈치가 크게 부딪치고 말았다.
“윽!”
“괜찮습니까?”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선 이든의 몸짓에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문제의 내 팔을 조심스럽게 부여잡았다.
그 행동이 너무나 낯설어 나는 그가 잡고 있는 내 팔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이든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네. 괜찮아요.”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접촉으로 인해 긴장감과 함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은 도저히 마음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기 팔 좀…….”
우선 이든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팔을 놔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내 팔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멀어졌다.
그 틈을 타 나는 침대 벽에 바싹 붙어 경계 어린 눈으로 이든을 쳐다봤다.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이든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외면한 나는 침착해지기 위해 가벼운 대화부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시구나. 일어나셨으면 저를 깨우시면 될 걸 침대에 옮기는 수고까지 해 주시고…….”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며 나는 일부러 그와 벽을 쳤다.
순간 방 안에 정적이 일었다.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이든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오자 나는 쉬지 않고 입을 열어 떠들어 댔다.
“몸이, 몸이 안 좋으셨나 봐요. 혼절까지 하시고. 지금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이 나시죠?”
“예. 기억이 납니다.”
“그럼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건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겠네요.”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지나쳤던 길이라 소리를 못 들었으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지내시는 곳이 근처에 계신가 봐요.”
“아닙니다. 그저…… 그저 어디를 잠시 가고 있었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렇게 이든과 대화를 하다 보니 다행히 온몸을 울리던 심장 소리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 운을 뗐다.
“그런데…… 목걸이에 의해서 목이 졸렸던 건가요?”
이 말을 꺼내면 이든이 분명 당황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비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리 물어볼 것을 예상한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럼에도 이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고통 속에서 계속 목을 움켜쥐고 있으셨거든요. 그리고 제가 목걸이가 예쁘다고 물었을 때 당신이 그랬던 게 기억이 나서요. 예쁘지만 위험하다고 말이에요.”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예쁘지만 위험한,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목걸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저 목걸이가 고통을 일으킨 거라고 짐작했다.
“맞습니다.”
그는 생각보다 빨리 수긍했다.
“그럼 그 목걸이를 왜 하고 계시는 거예요? 빼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요?”
“그게 가능하다면 그랬을 겁니다.”
내 질문이 굉장히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긴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것을 좋아서 차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는 뺄 수가 없으니 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목걸이에 대해 뭐라 입을 열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기에 그것에 대해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까 내가 느꼈던 일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그렇게 침묵이 앉은 공간에 창문을 통해서 빛이 조금씩 들어오는 걸 보니 슬슬 날이 밝고 있었다.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그를 쳐다보니 가벼운 움직임에 비해 표정은 꽤나 미묘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 네.”
“혹시 고아원에- 아니,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든이 스스로 말을 끊었다.
“다시 한번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든은 서둘러서 문 쪽으로 향했다.
“조심히 가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이든을 문 앞에서 배웅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응시하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다신 볼 일이 없겠지.’
우연치곤 꽤 자주 부딪혔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우연은 없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자 왠지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원래부터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특별한 인연은 아니었다 생각하니 아쉬움도 쉽게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예정대로 율리타를 떠났고 내 예상대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1년이라는 시간이 또 훌쩍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