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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타 아가씨,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알았어. 지금 나갈게.”
하녀인 메리의 말에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 방을 나섰다.
드넓은 복도를 가로지른 뒤 계단을 내려가서 저택 앞에 서 있는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오늘 할 일을 계속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늘은 내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그래서 절대로 실수를 하면 안 되기에 나는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 * *
이곳에 온 지,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벨리타라는 귀족 아가씨의 몸에 빙의한 지도 벌써 6개월이었다.
누가 알았을까.
교통사고 당해서 죽은 뒤 소설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내가 되리라고는.
처음 느꼈던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지?’ 같은 혼돈, 혼란, 불안함, 걱정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이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돌아갈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현생의 내가 정말로 죽은 거라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돌아갈 곳이 정말로 있는 것일까?
결국 방법을 찾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런 무서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자 그냥 이곳에서 계속 사는 것도 썩 나쁘진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 ‘이 세계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소설의 빙의 제1법칙.
물론 그런 건 없다. 내가 맘대로 지은 거다.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소설 속 빙의 제1법칙은 바로 빙의자가 원래의 인물과 다르게 행동하면 주변인들이 ‘어라? 쟤…… 뭐지?’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부터 한 치의 호감도 없던 상대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졌다고 갑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망할 호기심으로 그걸 실험해 보기엔 이 소설 속은 썩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왜냐면 그럴 노력을 할 만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케인 맥시어스는 내게 그렇게 특별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세 가문의 사랑과 전쟁’
내가 빙의한 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각각 고유한 힘을 가진 세 공작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얽히고설킨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빙의 후 소설의 제목을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각 가문이 가진 힘의 설정 때문이었다.
그중 내가 빙의한 벨리타의 가문인 헤이츠 공작가는 불의 능력을 이용해서 대대로 가문을 번성시켰고, 소설 속 남주 케인의 가문인 맥시어스 공작가는 물의 힘을, 여주 아델라의 가문인 바이언 공작가는 철의 힘을 이용해 가문을 키워 나갔다.
겉으로 보기엔 황실이 세 공작 가문 위에 군림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세 공작가는 황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이 가진 고유한 힘 덕분이었다.
대륙과 제국 곳곳을 주기적으로 쳐들어오는 마물들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힘이 꼭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철의 가문인 바이언 공작가는 전쟁이 빈번한 이 시기에 가장 요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무기 생성.
그들은 철의 힘을 이용해서 대량의 무기와 방어구를 만듦으로써 제국민과 황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렇기에 헤이츠 가문과 맥시어스 가문은 서로 동맹을 맺어서 철의 가문인 바이언 공작가를 견제했다.
그리고 그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피와 피를 잇는 방법이 제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두 가문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헤이츠 가문에서는 여자아이가, 맥시어스 가문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약혼을 하게 되었고 결혼은 벨리타와 케인의 성년식 이후에 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원작에서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지나가는 이야기 식으로 벨리타가 케인에게 첫눈에 반해 어려서부터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나와 있다.
그에 반해 케인은 벨리타를 귀찮아하며 그녀에게 관심을 전혀 주지 않았다는 것을 줄기차게 강조해 댔다.
아마도 케인이 아델라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런 듯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한 남자가 우연히 황궁에서 열린 연회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고, 단숨에 사랑에 빠지는 완전무결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벨리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고 약혼녀 자리에서 가만히 물러나기엔 만만치 않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케인과 아델라의 관계를 알게 된 뒤로 그녀는 온갖 방법을 이용해 아델라를 해치려 했다.
그런데 아델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남주 버프인 건지 케인이 번번이 나타나 아델라를 구해 주었고 그때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더 굳건해지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엔 악역인 벨리타를 아델라의 남동생인 에이든 바이언이 처단하고 소설은 끝이 나는데…….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에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살 만했던 인생이 교통사고 한 방에 끝난 것도 억울한데, 황당하게 소설에 빙의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바로 죽을 상황에 놓이다니…….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개과천선한 것처럼 행동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소설의 흐름을 변경해서 이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책 속 스토리는 ‘원작대로 흘러갔을 때’에야 유효하다.
기껏 예지와도 같은 책 속 결말까지 다 알고 있는데 미래가 뒤틀리면 나만 손해이지 않은가.
다행히 벨리타의 기억이 온전히 살아 있어서 그녀가 했던 말들, 행동들, 생각들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왔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해서 원작대로 케인에게 파혼을 당하기 위해 ‘벨리타’의 행동을 유지했다.
얌전히 파혼만 당한다면 그 두 사람의 인생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죽지는 말아야 했기에 아델라를 괴롭히는 짓만은 절대로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벨리타가 남주와 순순히 파혼하고 여주를 괴롭히지 않는 건 원작을 파괴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죽을 걸 뻔히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죽지 않기 위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 * *
마차에 오르자 마부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아가씨, 손에 든 병은 뭐예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메리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나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병을 그녀에게 들어 보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뭘 것 같아?”
“붉은 것이…… 꼭 피 같아요.”
메리는 자신이 그리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아.”
“네?”
“피 맞아.”
내 말에 메리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그걸 왜…… 아니, 누, 누구의 피예요?”
그리고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당연히 내 피지.”
“네? 아, 아가씨…….”
“이렇게 병에 피를 담아서 침대 밑에 몰래 놔두면 그 사람은 이 피의 주인을 사랑하게 된대.”
사실 이건 내 피도 아닐뿐더러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 소설에서 벨리타가 남주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쓴 방법이기는 했다.
뭐, 결국 남주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으니 전혀 효과가 없는 쓸데없는 짓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 하지만…… 공작님께서 아시게 되면…….”
“그러니까 몰래 놔둬야지.”
나는 정말로 이 주술이 이뤄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기분 좋은 척까지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메리는 마차가 목적지인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동자로 힐끔거렸다.
맥시어스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케인을 찾았다.
다행히 손님이 온 관계로 꽤 긴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려야 한다는 집사의 말에 나는 쾌재를 부르며 케인의 침실로 향했다.
“아가씨, 공작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공작님의 침실에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리십니다.”
하지만 집사가 급하게 나를 막았다.
“이번 일은 특별히 공작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거야. 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물어보든가.”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그런 내 태도에 집사가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가서 물어보라니까?”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집사가 케인이 있는 집무실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집사의 등이 보이지 않자 그를 기다리지도 않고 잽싸게 문을 열어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애초부터 기다릴 생각도 없었기에 양심의 가책 따윈 전혀 없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단정하고 재미없는 남자의 방답게 침실도 그와 비슷했다.
집사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기 위해 나는 서둘러서 품에 숨겨 뒀던 작은 병을 꺼냈다.
아까 마차에서 메리가 궁금해하던 그 병이었다.
그리고 병을 침대 밑의 공간에 살짝만 밀어 넣었는데, 누구라도 병이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케인이 가장 먼저 발견하면 제일 좋은 거고 이 저택의 사용인들이 발견해서 케인에게 보고해도 상관없었다.
아무튼 이 행동의 의미는 이 병의 존재를 케인이 알게 하는 것이다.
‘성공했다!’
오늘도 나는 집착적인, 누가 봐도 미친 행동을 적립하는 것에 성공하며 침실에서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 * *
원작은 이미 3개월 전에 시작되었다.
벨리타가 된 후 3개월 동안 케인에게 그가 혐오할 만한 집착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작의 시작을 알리는 연회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연회는 오랜만에 황궁에서 열렸고 나는 벨리타가 항상 그랬듯이 연회 내내 케인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연회 때마다 케인을 감시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귀찮아도 할 수밖에 없었다.
벨리타는 케인이 누구를 쳐다보거나 누가 케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예민하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유독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대놓고 미친 듯이 행패를 부려 그의 곁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벨리타도 참 피곤하게 살았어.’
3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케인을 지켜본 바 그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항상 똑같은 머리 스타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처럼 냉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표정,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복장, 매일 반복되는 일상 등 정말이지 지루함과 따분함을 인간화한다면 바로 케인 맥시어스라는 인간이었다.
그랬던 그가 처음 사랑을 마주했다.
벨리타가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음에도 케인과 아델라는 연회에서 처음 만났다.
아델라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줄곧 집에서 요양을 했었다.
태어나기를 기력이 약하게 태어났기에 치료도 힘들었다.
그랬던 그녀의 몸 상태가 딱 하루, 정말 평소답지 않게 멀쩡해졌는데 그날이 바로 황궁에서 연회가 열린 날이었다.
그래서 몸 상태가 괜찮아지자 살면서 한 번도 연회에 가 보지 못했던 아델라가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알고 있던 소설 속의 내용을 언뜻 떠올리자면 황궁 안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돌보고 있던 아델라의 모습을 보고 케인이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낯선 연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잠시 연회장을 나와 정원을 거닐던 아델라와, 벨리타의 숨 막힐 것 같은 감시를 피해서 정원으로 도망 나왔던 케인이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델라도 남동생 외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그것도 번듯하게 잘생긴 남자를 그날 처음 본 거였다.
더욱이 그녀는 다정다감하게 다가온 케인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고 소설에는 쓰여 있었다.
‘다정다감이라니…….’
어이가 없지.
내가 벨리타가 돼서 겪어 본 바 케인은 다정다감한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물론 그가 벨리타를 귀찮아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원래 성격을 숨긴 거라면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듯이 그는 건조하고 재미없고 감정이 얼굴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냉혈 인간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그날부터 서로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각자 키워 갔다.
왜냐면 맥시어스와 바이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기도 했고 케인에게는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아델라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인은 달랐다.
그는 아델라에 대한 사랑을 각성한 후부터 벨리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겼다.
아델라에게 보는 눈도 상관하지 않고 끝없는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반면에 아델라는 벨리타와 가문끼리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그를 계속 내쳤다.
하지만 3개월 동안 케인이 계속해서 아델라에게 구애한 결과 아델라도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케인의 맘을 받아 주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케인이 벨리타에게 처음으로 파혼을 언급하는 날이자 벨리타가 격렬하게 거부한 후 악에 받쳐 아델라를 본격적으로 괴롭힐 것을 결심한 날.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원작의 벨리타가 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행동을 비슷하게 행했다.
물론 케인이 벨리타에게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원래보다 조금 더 노력했지만.
빙의 전에는 벨리타가 일주일에 두세 번만 공작가에 왔다면 요사이의 나는 매일 공작가에 출근 도장을 찍어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케인에게 얼굴을 비쳤다.
와, 이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을 보기 위해 무려 마차로 한 시간 거리를 왔다 갔다 했었으니까.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나는 꾹 참고 맥시어스 공작가를 들락날락거렸다.
거기다 공작가의 사용인까지 매수해 24시간 중 내가 그곳에서 머무르지 못해 볼 수 없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기도 했다.
물론 이 방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렸는데 당연히 그것도 내가 미리 계획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내 감시인 노릇을 하다 잘린 사용인에겐 충분한 보상도 해 주었다.
케인에게 일부러 들킬 것을 계획하고 한 일들은 그밖에도 많았는데 그중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미약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하기 전에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원작에서도 나오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와 ‘혹시 이 수법이 안 통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
만약 이 방법이 제대로 안 통하게 된다면 빼도 박도 못하고 그와 잠자리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말 내게는 가장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물을 다루는 가문의 가주답게 케인은 내가 권한 술에 미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감정 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통에 한동안 그를 보지 못하기도 했었다.
‘또 뭐가 있더라.’
뭘 했는지 일일이 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숨 쉬듯이 케인에게 도 넘는 집착을 했고 결과는 항상 성공적이었다.
그는 이제 내 얼굴만 봐도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거나 말을 걸어도 거의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내심 그 정도로 괴롭히면 혹시나 그의 입에서 파혼 얘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나올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에게서는 아무런 언질도 없었다.
아무래도 아델라는 제외한 채 케인 쪽만 공략했기에 내가 싫은 것과 별개로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이 약혼 관계는 오늘로서 드디어 끝이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오늘 그의 침대 밑에 피가 든 병을 놓은 것이다.
그렇게 여러 생각에 잠겨 케인을 기다리며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때마침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한 짓을 알게 됐는지 여느 때보다 더 차갑고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님은 이제야 가셨나요? 하루 종일 보고 싶어서 혼났어요, 공작님.”
나는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제야 보게 돼 너무 행복하다는 듯 더없이 황홀함에 빠진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내 말에 대답도 안 한 채 여전히 그가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자 나는 시선을 내려 케인의 손 안에 있는 물건을 힐끔 쳐다봤다.
아까 내가 침대 밑에 놔둔 병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일이 진행됐기 때문에 금방 들킨 것에 대한 동요는 전혀 없었다.
“이게…… 뭡니까.”
드물게 노기 띤 음성이 그에게서 들려왔다.
“아, 어…… 그게…… 들켰네요?”
일부러 말을 질질 끌었지만 나는 들킨 것이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런 내 태도에 더욱더 화가 난 것인지 케인이 손에 힘을 꽉 주더니 병을 으스러트렸다.
“공작님……!”
생각보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잠시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빠르게 마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자 그것조차 싫은지 그가 치가 떨린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뒤로 한두 발짝 물러났다.
“제가,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가 이를 악물고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지금 케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될 만큼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공작님, 손을 얼른 치료하셔야 해요!”
사실 그의 손에 생긴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 따위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나는 눈앞의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였다.
유리에 짓이겨진 그의 손을 안타까움이 담긴 손길로 만지려 손을 뻗었는데 그가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확 뒤로 뺐다.
“헤이츠 공녀.”
그러곤 나를 시린 눈으로 응시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공녀!”
그가 언성을 높여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제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알아요. 안다고요. 하지만…….”
나는 최대한 억울한 척, 불쌍한 척, 그럴 이유가 있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울먹거렸다.
“공작님께서 저를 전혀 봐주시지 않으니 무슨 짓이든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오로지 너 때문이라며 그를 탓하는 듯한 말을 흘렸다.
그러자 내 말에 케인의 입에서 지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는 더 이상 공녀의 이런 만행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장난, 장난이었어요!”
“장난이요?”
“네네! 이런 것들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걸 공작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지금 장난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저는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난이라는 말이 그의 화를 더 건드렸는지 케인이 나를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 순간에는 아무리 나라도 살짝 겁을 먹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추었을 때는 그 잠깐의 순간에 분노를 완전히 지운 채 원래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파혼합시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파혼을 하자는 말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나는 겉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결국 내가 해냈다는 생각에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 마음이 어느 정도였냐면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들썩하려던 걸 의식적으로 막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정말로 중요했기에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내 연기가 절대 들키지 않게, 하지만 어떻게든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모든 대답과 행동, 표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지금 제가 공작님의 침대 밑에 그까짓 병 하나 놨다고 파혼을 하자는 건가요? 고작 이런 일 때문에 파혼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공작님…… 제가 잘못 들은 거죠? 그렇죠?”
케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아니면 꿈이든가.”
나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는 척하며 몸을 살짝 떨어 댔다.
‘와, 나 진짜 연기 물올랐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았다.
“헤이츠 공녀.”
“안 되겠어요.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요. 집에 갈래요.”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귀를 막는 행동까지 하면서 나는 문가로 향했다.
하지만 걷는 속도는 전혀 빠르지 않았고 속으로는 제발 나를 잡으라고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아직 대화가 안 끝났습니다.”
휴, 다행이었다.
케인이 내가 문을 열지 못하게 손을 뻗어 나를 잡으려 들었다. 그러다 손을 황급히 거두며 문 앞을 막고 섰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잠깐 닿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그는 정말로 나를 혐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됐지 뭐.’
어차피 나도 매일 이곳에 오는 것에 지쳤고 하루하루가 시간 낭비였다.
그리고 나 또한 오늘로서 저 면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질 정도였다.
“어떻게,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으세요?!”
그러니 오늘 내로 모든 상황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그를 몰아붙이기로 했다.
“제 마음을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공작님을 마음에 담은 게 벌써 10년도 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애초부터 저는 공녀에게 마음이 없었습니다.”
잘한다, 잘한다. 더 해, 더 하라고.
“알고…… 알고 있었어요. 공작님께서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저만, 저만 공작님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을요.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다 참고 견딜 수 있어요! 공작님께서 지금처럼만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전 상관없어요. 그러니-.”
“공녀, 우린 이제 끝났습니다.”
시작도 안 했으면서 끝나긴 뭐가 끝나.
“아델라 바이언 공녀인가요? 공작님께서 사랑한다는 사람이?”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며 케인에게 따져 물었다.
내가 여주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걸 몰랐는지 그의 눈에 잠깐 충격이 스쳤다 지나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공작님의 모든 것을 알아요. 공작님께서 만나는 이들, 가시는 곳, 하다못해 오늘은 뭘 드셨는지 몇 시에 일어나시고 몇 시에 주무셨는지까지 말이에요.”
케인이 그런 내 말에 질린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라던 바였으므로 나는 그의 표정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공작님, 결혼한 귀족들이 정부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에요. 그저 바람이잖아요. 한순간의 바람. 언젠가 돌아오실 거잖아요. 그러니 공작님께서 다시 제게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공작님의 마지막은 저니까요.”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사쯤은 읊어 줘야지.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을 정부 취급하면 없던 화도 생길걸?
나는 그가 내게 더 학을 떼도록 지금까지 봤던 수많은 소설들을 떠올리면서 준비했던 대사를 하나씩 읊어 줬다.
“그러니 파혼한다는 말만은 거둬 주세요. 네? 공작님. 사랑해요. 너무너무 사랑해요. 죽을 때까지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아니, 공작님께서 혹여나 먼저 가시면 따라갈 거고 공작님 곁에 산 채로 묻힐 거예요.”
‘산 채로 묻힌다는 건 좀 심했나?’
아니야, 이 정도는 해야지. 그래야 더 진절머리가 나지.
역시나 ‘산 채로’라는 표현이 제대로 먹혔는지 케인의 표정이 끔찍한 걸 들은 것처럼 잔뜩 일그러졌다.
나는 집착을 가미한 절절한 거짓 사랑 고백을 하며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싫은 사람이 다가오는 것만큼 싫은 게 없을 테니.
그러자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케인이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공작님……!”
“알고 계셨다니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이언 공녀에 대한 제 마음은 공녀께서 말하는 그런 바람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저는 바이언 공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그녀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날부터 제 세상은 오로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녀가 없는 세상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다른 이가 들어갈 공간 따위는 있지도 않습니다.”
그는 내 사랑 고백에 대항하듯 아델라를 향한 마음을 내게 구구절절 퍼부었다.
아델라에 대해 말하는 그의 눈에 황홀함이 담겨 있는 게 내 눈에도 단번에 보일 정도로 그는 아델라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사랑꾼 납셨네, 사랑꾼 납셨어.’
“이 마음은 앞으로도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은 공녀가 아니라 바이언 공녀입니다. 그러니 공녀께서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너무나 심한 충격을 받았다는 듯 연기하며 다리에 힘이 풀린 척,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러실 순 없어요……. 공작님께 저를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게 이러실 수는 없으세요…….”
그러곤 세상이 무너질 거 같은 표정과 함께 절망이 담긴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을 내뱉었다.
“공녀, 일어나세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바닥에 붙박이듯 쓰러져 있는 내게 케인은 일어나라는 말뿐, 붙잡아 일으켜 세워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세요?! 공작님, 제가 부족한 게 뭔가요. 바이언 공녀보다 부족한 게 뭐냐고요! 으흐흑……!”
나는 억울해서 못 참겠다는 심정으로 바닥까지 쾅쾅 내려치며 더 심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럴 순 없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딱 봐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면서…….
하지만 아까부터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감춰져 있는 내 손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상황 자체가 나에겐 연기였기 때문에 도저히 슬프지가 않아 눈물도 안 나오지만, 운 것 같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오게 케인 몰래 눈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이쯤이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도 어느 정도 나오자 이만 일어나기로 결정했다.
사실 일어나기로 한 진짜 이유는 슬슬 발이 저려서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린 발로 잘못 걸었다가 넘어지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려고 살짝 고꾸라질 뻔한 행동도 잊지 않았는데 역시나 케인은 그런 나를 못 본 척했다.
이 남자가 이렇게나 인정머리 없고 매정한 사람이여서 다행이었다.
혹시나 케인이 벨리타에게 조금이라도 연민이 남은 모습을 보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예상대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이제 이 연기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이제까지 슬픔과 절망, 허망함을 담고 있던 표정을 분노와 격분, 노여움 등의 감정으로 바꾸며 있는 힘껏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봤다.
“하!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리고 무척이나 과장된 몸짓과 함께 헛웃음을 흘렸다.
“공작님께서 냉정하고 차가운 분인지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제가 쓰러져 있는데도 거들떠도 안 보시다니, 공작님께서는 지금까지 저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저와 이제 말도 섞기 싫으신가 보네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방금까지 위축되어 보이기 위해 일부러 구부정하게 있던 몸을 당당하고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그에게 지었던 모든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좀 더 위로 들어 올려 기세를 반듯하게 세웠다.
‘드디어 끝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곳에 온 뒤로 나의 단 하나의 목표였던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대단하세요. 좋아요. 제가 졌어요. 파혼할게요.”
그때였다.
내 말에 살짝 놀란 눈빛과 의아함이 케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아, 너무 빨랐나?’
내가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 생각한 건가?
그런 건 아니겠지?
쉽게 파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진짜 벨리타였다면 이 정도 했겠지 싶을 만큼 적당히 최선을 다해서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가 나에 대해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바로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대신 위자료를 제가 납득할 만큼 주셔야 할 거예요.”
돈이나 내놔, 남주야. 너 돈 많잖아.
물질적인 보상 문제가 나오자 다행히 그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머물렀던 의아함과 의심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조소가 점점 번져 나갔다.
“좋습니다.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주시면 공녀께서 섭섭하시지 않도록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
그는 내가 혹시라도 맘을 바꿀까 봐 그런 건지, 내가 뭘 얼마나 원할지 먼저 들어 보지도 않고 황급히 내 조건을 받아들였다.
됐다. 물었어.
나는 내내 생각했다.
진짜 벨리타였다면, 아마 그녀는 돈을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케인과 파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또한 공작가의 공녀로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니 평생을 펑펑 써도 다 쓰지 못할 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아무래도 이 파혼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모두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누구라도 납득할 만큼 막대한 보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나는 그 핑계로 이번 참에 그에게서 한몫 제대로 뜯어 낼 작정이었다.
그간의 내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말이다.
그리 마음을 먹은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맥시어스 공작가의 재산을 암암리에 뒷조사했다.
아무래도 제국의 가장 큰 가문 중 하나인 맥시어스 공작가를 캐내는 거였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에 지지 않는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맘만 먹으면 할 수 없는 건 없었다.
그 결과 나는 맥시어스 공작가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그걸 토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어느 정도인지 계산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케인을 죽을 듯이,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 내가 파혼을 한 것에 있어서 누구도 한 치의 의심을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아니, 누군가는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 하면서 수긍할 것이다.
왜냐면 그건 정말로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저는 돈이 아니라 영지를 원합니다.”
“……영지요?”
고작해야 돈이나 몇 푼 달라고 할 줄 알았는지 영지라는 말에 그의 벽돌 같은 표정에 살짝 균열이 일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살짝 흥분이 되었다.
‘아니야. 진정해. 아직 안 끝났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님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나는 마음속으로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공작령 중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포함하고 있는 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제게 주세요.”
내가 살던 곳도 그랬지만 이 세계에서도 다이아몬드는 값비싼 최고급 보석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냥 다이아몬드 몇 개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부를 소지한 것을 의미했다.
나의 가문인 헤이츠 가문도 대대로 부를 쌓았지만 아쉽게도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니 내가 파혼을 하고 광산을 위자료로 가져간다면 부모님도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반길 거라 여겼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말입니까……?”
“정확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포함한 그곳의 땅이요.”
한정적인 돈도 아니고 캘 때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돈이 들어오는 땅을 달라고 하니 그로서도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케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숙이고 들어갈 게 없었기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그를 응시했다.
“싫으신가요? 아까우세요? 우리의 파혼에 그만한 값은 치르기 싫으신 건가요?”
네 사랑이 그 정도도 안 되냐는 말을 돌려서 하며 나는 그를 살짝 비웃었다.
“아까우시다면 파혼을 무르시면 돼요. 저는 어느 쪽도 상관없으니. 아니, 저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공작님께서 정신을 차리시고 제게 돌아오신다고 한마디만 하시면 없던 일로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바로 결혼 날짜를 잡을 생각이에요. 이런 일이 또 생길까 봐 불안하니까요.”
나는 일부러 케인이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압박했다.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아델라에 대한 케인의 사랑이 정말 그것밖에 안 될까 봐 나 또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파혼은 물 건너가고 나는 꼼짝없이 바람난 남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끔찍하게 살아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초조함을 절대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꽤 긴 시간 동안 케인이 입을 다물고 있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재차 그를 압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쯤 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다행이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자마자 나는 케인 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그는 내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주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키지 않으면 어쩔 거야.
그래도 내가 너 사랑꾼 인정할게.
사랑을 위해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내놓다니, 정말 대단한 사랑이야. 완전 인정!
“믿어도 되는 거죠?”
하지만 내가 알아본 바, 다이아몬드 광산을 뚝 떼어 주는 것은 아무리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맥시어스 공작가라도 타격이 꽤 클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확신을 요구했다.
“예, 그렇습니다…….”
“나중에 딴소리할 분은 아니시니 믿겠습니다.”
성격은 별로지만 거짓말할 사람은 아닌지라 이 정도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공녀께서도 이 일에 관해서는 번복하는 일이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 또한 내가 나중에 말을 뒤집을까 봐 내게 똑같이 확신을 요구했다.
“저 또한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습니다. 귀족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나는 그에게 절대적인 나의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귀족의 명예를 내세웠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괜히 맹세했나.’
그게 또 별로 맘에 들지 않아 살짝 후회했다.
저 남자가 의심을 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다. 됐다.
어차피 이 사람은 이제 나와는 끝이었다.
앞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잠깐 인사나 하는 게 다겠지.
더 이상 우리의 인연의 끈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가문의 대리인을 통해 문서로 작성해 보내겠습니다. 공작님께서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얻을 걸 얻었으니 이제 여기서 볼일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뒤돌아 문으로 향했다.
어쩐지 내가 나갈 때까지 그가 내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 나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응접실을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너무 좋아서 속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해 냈어. 내가 해냈다고!!
할 수 있다고 내내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은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끝을 내자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유라는 해방감이 내 마음속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는 아직 맥시어스 공작가였다.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엔 적절치 않은 장소였다.
나는 간신히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렇지만 걷는 내내 기분 좋은 발걸음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고 발이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구름 위를 둥둥 걷는 기분이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니……!’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부자야.
이 다이아몬드 광산만 있으면 평생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파혼도 했겠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마차 안에서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리니 집사와 사용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나는 그들 중에서도 나이가 지긋이 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헤이츠 공작가에서 몇십 년째 집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작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시고 공작 부인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그래? 알겠어.”
지금 당장 부모님께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고하고 싶었지만 잠시 어떻게 말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선은 내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이곳에서 6개월을 함께 사니 이제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소리가 서슴없이 나왔다.
다행히 그들은 자신의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만한 애정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불의 가문의 가주답게 성정이 불같은 다혈질이었는데 그에 반해 어머니는 매사에 차분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진짜 벨리타 행세를 잘했는지 그들은 딸이 변한 것도 잘 몰랐다.
6개월 동안 지켜 본 바 다행히 두 사람 다 그렇게 눈치가 빠른 이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좋은 부모님이라 다행이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설을 보면 악독한 부모를 만나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도 하던데…….’
또 없었다면 슬펐을 거야.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이제 두 사람은 내 가족이었다.
나를 딸이라고 알고 잘해 주는 그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이 불쑥불쑥 찾아와 어떤 때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부딪치다 보니 나 또한 마음이 점점 열렸고 이제는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잠시 쉬며 나는 부모님께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지만 예전부터 가문 대 가문으로 맺어진 정략혼을 깬 일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제대로 말씀을 드려야 했다.
그리고 그들을 납득시키고 거기다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앞으로 편하게 살 수 있게 밑바닥을 깔아 놓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알았어.”
나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니 이미 부모님이 테이블에 앉아 계셨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잠시 그들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호감형의 남자였고 어머니는 붉은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를 지닌, 한눈에 딱 봐도 무척이나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리고 벨리타는 아버지의 금색 머리카락과 어머니의 파란색 눈동자를 반반 섞어서 물려받았다.
외모도 내가 보기에는 둘 모두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어머니 쪽을 더 많이 닮아서 그녀만큼은 아니지만 벨리타도 미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곧 음식이 하나둘씩 나왔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과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항상 비슷한 맛의 음식이었지만 날이 날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모님 앞이라 절대 티 내지 않은 채 속으로만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었다.
“오늘도 맥시어스 공작가에는 잘 갔다 왔니?”
빵을 뜯어서 스프에 찍어 먹으려는 때에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내가 매일 그곳에 가는 걸 알기에 저녁 식사 중에 어머니가 내게 잘 갔다 왔냐고 묻는 게 일상이어서 그다지 새삼스러운 질문은 아니었다.
“네. 잘 갔다 왔어요. 그런데…….”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표정을 살짝 어둡게 만들었다.
다시 연기를 시작할 때였다.
“왜, 무슨 일 있니?”
“벨리타, 무슨 일이냐.”
내 얼굴에 그늘이 지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를 채근했다.
“……저녁 식사 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게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의 심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에 두 분은 알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후 나는 일부러 티가 나게 우울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며 밥을 먹었고 그런 내 모습에 부모님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부모님이 계실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저예요. 벨리타예요.”
“들어오렴.”
안에서 어머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마주 보는 자리에 조심히 앉음과 동시에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선 그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벨리타, 이제 말을 해 보거라.”
“……저 케인 맥시어스 공작님과 파혼하기로 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나의 폭탄선언에 두 사람의 얼굴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파혼?”
“네.”
“파혼이라니……! 누구 맘대로!”
역시나 다혈질의 성격답게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버지의 큰소리에 불쌍한 척 일부러 눈에 띄게 주눅 들어 위축된 행동을 취했다.
그런 내 위축된 모습에 어머니께서 다급하게 아버지를 말렸다.
“여보! 진정하세요.”
“어떻게 진정을 하겠소! 두 사람이 부모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몰래 파혼을 했다는데!”
“진정하시고 왜 그랬는지 우선 벨리타의 말을 들어 보자고요. 우리 딸이 아무렴 괜히 그런 일을 했겠어요?”
차분한 성격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나를 믿는다는 뜻의 말을 덧붙였다.
그런 분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죄송스런 마음이 들어 가슴이 살짝 찔렸다.
“벨리타, 제대로 말해 보렴.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너는 맥시어스 공작을 좋아하잖니. 이제 곧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파혼을 했다고?”
벨리타가 케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과장을 보태서 이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님인 두 사람도 그녀가 케인을 얼마만큼이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케인은 둘째 치고 내가 파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는 거였다.
“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하려다 울컥한 감정이 튀어나온 것을 숨기지 않으며 조금씩 울먹거렸다.
슬픔과 실연의 아픔을 미리 예열 중이었다.
“……왜 그랬니?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불쌍하게 울먹거리는 걸 본 아버지가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다.
“공작님께서…… 공작님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신대요…….”
“뭐, 뭐라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러나 앉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펄쩍 뛰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주먹엔 이미 뭔가를 부술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어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치 못한 말에 어머니의 목소리도 한껏 높아졌다.
자신의 소중한 딸이 차였다는 말이었기에 그녀 또한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공작님과 파혼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처연한 사람을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감히 내 딸을! 내 딸을 놔두고 바람을 펴?!”
화가 끓어올라 얼굴이 잔뜩 붉어진 아버지가 이를 으드득거리며 분노를 내뱉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아는 거니?”
“……아델라 바이언 공녀요.”
“바이언? 바이언가를 말하는 것이냐?!”
“네, 맞아요…….”
“바이언가라니! 바이언가는……!”
“여보……!”
바이언가에 대해서 아버지가 뭘 말하려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다급하게 아버지를 부르며 입을 막았다.
그러자 아버지도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뭐지?’
어머니가 너무나 티 나게 아버지를 막은 걸 보니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내뱉으려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캐물을 수 없어서 나는 일단 호기심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벨리타, 너도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알겠지만 귀족들이 뒤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이야. 이런 일로 깨질 만한 그런 사소한 약속이 아니야. 물론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 그러나 네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귀족들 간의 결혼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아.”
그나마 두 분 중에 먼저 흥분을 가라앉힌 어머니가 내게 왜 파혼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저도 알아요. 이 약혼이 무슨 의미인지.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이미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어요. 도저히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공작이 먼저 네게 파혼을 하자고 했니?”
“네.”
“공작 이놈을……!”
“여보!”
아버지의 말이 험악해지자 어머니가 또다시 주의를 주었다.
“크흠…… 그래도 파혼은 안 된다. 내가 공작과 이야기를 나눠서 해결할 터이니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있거라.”
순간 파혼을 없었던 일로 돌려놓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안 되지.’
어떻게 얻은 파혼이고 내 광산인데……!
이 일은 앞으로 절대 번복해서도, 다시 말이 나와서도 안 된다.
“……저도 이젠 싫어요.”
“뭐?”
“뭐라고 했니?”
나의 싫다는 말에 두 분 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이제 그분이 싫어요! 십 년 넘게 저만 좋아하고 저만 안달 내고 저만 그분을 바라봤어요. 그런데 이제는 다른 여자가 좋다는 그 사람을 제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요? 파혼을 해 달라는 말에 안 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공작님께서는 꿈쩍도 안 하셨어요.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요. 파혼해 주겠다고 이제 놓아주겠다고요.”
그러면서 나는 바로 소파에 털썩 엎드려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케인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몰래 손으로 눈을 미친 듯이 찔렀다.
‘나와라, 눈물아……!’
다행히 아까 건드렸던 곳을 바로 찌르니 금방 눈물이 터졌다.
나는 부모님이 들을 수 있게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그분을 사랑하는 데 지쳤어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요. 차라리 심장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비참해요, 어머니 아버지. 제가 지금까지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살았단 사실이 너무 끔찍하고 서러워요.”
나는 아까 열심히 준비한 대사를 치면서 연기에 더욱 몰입했다.
“벨리타…….”
내 폭풍 같은 오열에 어머니가 속상함이 잔뜩 묻어 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울지 말렴, 벨리타…….”
“제 마음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어요. 더 이상 그분을 보고 싶지 않아요.”
“벨리타, 그만 울고 일어나렴……. 네가 울면 우리가 너무 속상하단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흐흑…….”
내가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허망하고 얼마나 절망했고 얼마나 힘든지 보여 주기 위해서 나는 있는 힘껏 울었다.
그때였다.
내가 쉬지 않고 우는 동안 줄곧 침묵하고 있던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잘했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벨리타.”
나는 그의 말에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부모님을 쳐다봤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갑작스런 칭찬이었다.
지금의 아버지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냉정하고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그가 한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여보?”
“나는 예전부터 그 자식에게 우리 딸이 아까워도 한참 아까웠어. 잘했다, 벨리타. 그러니 그만 울거라.”
‘오…….’
벨리타의, 아니 나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꽤 괜찮고 든든한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아버지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으로만 여겼는데, 어쩐지 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는 것 같아 나는 팔을 들어 눈물을 스윽 훔쳤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나약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지만 급작스럽게 얼굴색이 좋아지면 의심할 수도 있었기에 끝까지 파혼당해 슬픔에 잠긴 모습을 유지했다.
“벨리타.”
어머니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오시더니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나는 그녀에게도 사과했다.
내가 지금 이 파혼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고 마음이 편치 않은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게 미안해할 것 없다, 벨리타.”
“그래, 벨리타. 우린 네 부모야. 네가 원치 않는 것들을 네게 절대 강요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말렴.”
지금 상황을 미루어 보아 나는 이들이 벨리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될수록 그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재차 내 자그마한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지만 그런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며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벨리타의 몸에 들어옴으로써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의 벨리타는 아델라를 괴롭히며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고 이 일은 가문 대 가문의 전쟁으로 번져서 헤이츠가는 하루아침에 망하게 된다.
헤이츠 공작가가 그렇게 쉽게 당할 가문은 아니었지만 맥시어스가와 바이언가가 협공을 해서 공격했기 때문에 헤이츠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쁜 인간들.’
자신의 약혼자를 뺏어 간 아델라를 죽이려 한 건 벨리타의 잘못이지만 솔직히 내가 벨리타여도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을 기만하고 약속을 저버린 케인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케인 쪽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아델라만 들쑤셨고 그 탓에 그녀의 남동생에게 죽임을 당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이 집안을 살린 거네?’
내가 빙의하지 않았다면 결국 멸문지화를 당했을 텐데 불행 중 다행히도 내가 그것을 막은 것이다.
“파혼은 맥시어스 쪽에서 먼저 하자고 한 게 맞는 거겠지?”
“네, 맞아요…….”
“알겠다. 그럼 됐어.”
그렇게 대답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딸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제국에서 가장 큰 가문 중 하나를 거느리고 있는 공작가의 가주였으며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의 파혼을 통해서 맥시어스 공작가에게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는지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런데,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지의 의중을 읽어 내곤 내가 파혼으로 얻은 것을 말하기 위해 서둘러서 운을 뗐다.
“무엇이냐.”
“파혼을 대가로 공작님께서 제게 위자료를 주시기로 했어요.”
“위자료야 당연한 거지.”
아버지는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 그냥 돈 몇 푼이 아니라고요.’
아마 내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얻었다고 하면 두 분 다 깜짝 놀라겠지.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맥시어스 가문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영지를 받기로 했어요.”
“뭐라고?”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면, 설마 그렌스를 말하는 것이냐?!”
그렌스는 내가 오늘 쟁취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영지의 이름이었다.
“네, 맞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버지는 좀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이냐?”
내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믿기 힘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재차 물었다.
“네, 정말이에요. 구두 약속이긴 하지만 공작님께서 반드시 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러니 바로 맥시어스가에 서류를 준비해서 보내면 될 거예요.”
구두 약속도 엄연히 효력이 있는 계약이었다.
하지만 두 분 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 참. 공작이 그 광산을 그리 쉽게 내놨다니…….”
확실히 두 분의 반응이 이해는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케인에게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은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긴 했다.
아까 파혼의 대가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달라고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나 또한 그가 광산 전부를 그렇게 쉽게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맨 처음에는 무리한 요구를 던지고 거기서부터 조율을 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게 협상의 기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는 광산의 일부도 아니고 영지 전부를 내게 서슴없이 넘겨줬다.
‘아델라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다는 거겠지.’
나라는 존재로 인해서 아델라를 힘들게 하느니 그깟 광산 하나쯤 줘 버리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둘이 천년만년 사랑하세요.’
뭐, 어차피 이 소설의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내가 쓸데없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두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살 것이 분명했다.
“그렌스라니…… 그렌스라니. 벨리타, 네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나는 감격에 빠진 아버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곤 아버지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그 후 아버지와 나는 맥시어스가에게 청구할 위자료에 대해 좀 더 세세하게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머니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꽤 신경이 쓰여 아버지와 말을 나누다 말고 어머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어머니?”
아무리 봐도 내게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눈치였기에 나는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근심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리타…… 괜찮은 거니?”
“네?”
나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괜찮은 거야?”
괜찮냐고 묻는 말에 나는 어머니께서 아까부터 파혼으로 다쳤을 내 마음을 계속 걱정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괜찮아지겠…… 죠? 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
여기서 바로 괜찮다고 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그녀가 걱정을 덜 수 있는 말을 골라서 했다.
“벨리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어머니를 향해 나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 말을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이 힘든 연기를 한 이유는 다 이것을 위해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데요…… 저 잠시 수도를 떠나 있어도 될까요?”
나는 잠시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원작은 이미 시작됐지만 케인과 파혼을 했기에 이제 더 이상 소설 속의 벨리타처럼 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공작가의 공녀였기 때문에 그들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원작에 다시 끼어들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사절이었다.
어떻게 원작에서 빠져나왔는데. 그곳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떠나서 원작이 끝난 뒤에나 돌아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떠난다고? 수도를?”
“네, 공작님과의 추억이 많은 이곳을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많이 힘든 거니?”
“……잊고 싶어요. 잊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고요. 하지만 지금은 공작님뿐만 아니라 저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릴 이들을 마주치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벨리타, 너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러니 당당하게-.”
“여보.”
아버지의 말을 어머니가 딱 끊었다.
내 뜻대로 해 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강한 의지가 엿보일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알겠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부인!”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그대로 보내 줄 수 없는지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벨리타가 원하는 대로 해 줘요. 우리 딸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그 시간을 주자고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차근차근 조리 있게 설득했고 결국 아버지는 백기를 들었다.
“벨리타, 이곳의 일은 하나도 신경 쓰지 말고 너 하고픈 대로 하렴. 하지만 꼭 돌아와야 한다. 알았지?”
아, 어쩐지 진짜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랑받는 딸이라니, 이렇게나 딸을 믿어 주고 지지해 주는 부모라니.
‘부모란 건 이런 거구나.’
“네, 반드시 돌아올게요. 걱정 마세요. 모든 걸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지금보다 더 단단해져서 돌아올게요.”
그리고 정말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번에야말로 연기 따위가 아닌 그들의 진정한 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 * *
며칠 뒤 우리는 정식으로 파혼 절차를 밟았고 나는 그렌스를 법적으로 양도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얻어 낸 것이니 내 것이라며 영지를 가문이 아닌 내 개인 소유로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며칠 사이에 단번에 수도, 아니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떠날 준비를 마친 나는 마차 앞에서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조심히 다녀와야 한다.”
“네, 그럴게요, 아버지.”
“벨리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는 했지만 걱정은 떨칠 수가 없는지 어머니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아시잖아요.”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
“저 잘 다녀올게요. 두 분 모두 건강히 지내셔야 해요.”
잘 다녀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마차에 올랐고 내 뒤를 따라 메리가 마차에 탔다.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다녀오고 싶다는 나의 고집 때문에 내 시중을 들 메리와 윌리엄이라는 기사만 함께 가기로 했다.
그가 가문의 기사단 중 가장 빼어난 실력을 가진 이라고 들었다.
그뿐 아니라 벨리타는 불의 가문의 일원으로서 불을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재능이 있었다.
진짜 벨리타만큼은 아니지만 빙의 후 종종 훈련을 했기에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것은 내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차가 출발했다.
윌리엄은 말을 타고 따로 옆으로 붙어서 따라왔다.
“아가씨, 어디부터 가실 거예요?”
마차가 저택 정문을 나서자마자 메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흥분이 잔뜩 담겨 있었다.
“모르겠네. 일단은 발길 닿는 대로 가 보고 싶어.”
메리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는 우선은 그렌스에 가 볼 생각이었다.
내 소유가 된 곳에 진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했다.
물욕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이아몬드가 쌓여 있는 곳이라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 너무나 궁금해서 생각만으로도 흥분되었다.
하지만 그렌스는 이곳에서 마차로 몇 날 며칠을 달려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매우 먼 곳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도중에 다른 곳도 들를 것이기 때문에 메리에게 한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있잖아요, 아가씨. 저 너무 설레요.”
두 손을 맞잡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메리의 행동이 순수하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좋아요. 이렇게 멀리 나가는 건 처음이거든요.”
“나도 그래. 나도 너무 설레.”
“아가씨, 그런데 저…….”
메리의 만면에 가득했던 웃음이 돌연 사라지며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분명한데 내뱉지를 못하고 우물쭈물 주저하고 있었다.
“저…… 괜찮으신 거죠?”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내게 파혼을 한 것에 대해서 물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파혼도 했고, 수도도 떠났겠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은 부분이라도 어그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당분간 조심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나는 이제 막 파혼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실연의 상처를 지닌 사람을 연기해야 했기에 나는 담담하지만 슬픔에 잠긴 듯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내가 파혼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굴면 메리가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어디 가서 누구에게 입을 놀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행이에요. 아가씨께서 오랫동안 침울해 계시면 어쩌나 했어요…….”
“그럼 네가 날 좀 웃겨 줘.”
“네, 네?”
“슬퍼하는 아가씨를 위해 그것도 못해 줘?”
나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메리에게 농담을 툭 던졌다.
“알겠어요. 제가 또 아가씨를 위해서는 뭔들 못하겠어요.”
그런데 메리는 정말로 나를 웃겨 볼 참인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더니 뭔가를 하려고 준비했다.
“됐어, 메리. 그러지 말고 우리 바깥 구경이나 하자. 저기 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내 옆에 앉혔다.
그리고 함께 창문 밖을 내다보며 긴 수다를 떨었다.
* * *
마차는 달리고 달려 수도 하른을 통과해 외곽의 마을인 페오라트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발테우스라는 나라는 대륙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제국이었는데 큰 땅덩어리답게 수도 또한 무척이나 넓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차로 하루 종일 달려서야 겨우 수도를 벗어나 페오라트에 도착했다.
날이 저물자 더 이상 달리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우리는 여관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 출발하기로 했다.
잠시 뒤 마차가 한눈에 봐도 꽤 고급스런 외관의 여관 앞에 섰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여관을 가 본 적은 없지만 비싼 곳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북적이지도 않았고 시끌벅적하지도 않았다.
계단을 올라 긴 복도를 지나서 오늘 하루 머물 방으로 들어왔다.
공작저의 내 방보다 한참 작은 방은 침대와 테이블, 의자, 욕실까지 간단하게 필요한 것들만 채워져 있는 구조였다.
메리가 내 뒤를 따라 들어와서 정리를 도와주었다.
“배고프시죠? 금방 식사 챙겨서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가더니 금방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같이 먹자.”
“아니에요! 저는 내려가서 먹을 테니 편히 드세요.”
메리에게 같이 먹자고 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았다.
“아가씨, 이 마을 축제가 오늘부터라네요?”
“그래?”
“네. 그래서 아까 지나왔던 길이 축제로 시끄러웠던 거였어요.”
축제라…….
메리가 내게 괜히 축제를 언급한 건 아닐 것 같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메리를 쳐다봤다.
“축제 구경하고 싶어?”
“네? 아니에요. 갈 길이 먼데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으시잖아요.”
“꼭 그런 건 아니야.”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메리의 얼굴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한 이틀 정도 더 있을까?”
“그래도 돼요?”
“축제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와,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메리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부모님도 내게 기한을 정하고 갔다 오라고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 며칠 축제를 즐긴다고 해서 내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럼 윌리엄 경에겐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래.”
메리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확인하더니 바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에 눈길을 한번 준 뒤 배가 무척 고팠기에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시장이 반찬이라 싹싹 긁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피곤함을 느끼며 바로 잠자리에 들려다가, 어쩐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서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화도 시킬 겸 잠시 바깥 구경을 하기 위해 방을 나왔다.
아까 왔던 그대로의 길을 되짚어 가며 계단을 타고 홀로 내려가니 여관에서 운영하는 식당 겸 술집이 나왔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 둘이 있었다.
메리와 윌리엄이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짝 멀리서 지켜본 것이지만 어쩐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하.’
그래서였구나.
메리에게 아까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는데도 그녀는 귀족과 평민은 절대 같이 겸상을 하면 안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격렬히 거부했었다.
아마도 윌리엄이라는 기사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와 식사를 하고 싶었나 보다.
여기서 며칠 지낼 거라는 말도 겸사겸사 전하는 김에 어쨌든 식사도 같이하게 된 것 같았다.
원래는 메리와 함께 나가자고 할까 했는데 이 상황에서 굳이 그녀를 데리고 나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혼자 나갔다 오는 것이 편했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몰래 조심히 여관을 빠져나왔다.
여관 앞은 엄청 한산했다.
번화가에서 꽤 떨어진 곳인 듯했다.
번화가 쪽으로 가기 위해 골목 사이를 걸어 나가자 발을 내디딜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6개월 동안 목표를 위해서 헤이츠 공작저와 맥시어스 공작저만 왔다 갔다 하느라고 이곳이 어떤 세상인지 전혀 알 틈이 없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늦추며 안쪽의 속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돈이 충분히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손 안에 뭉친 금화들이 두둑이 잡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내가 가진 돈의 양을 파악한 후 나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 * *
상점 거리는 축제로 인해 휘황찬란했다.
늦은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딜 제일 먼저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맛있는 뭔가가 후각을 들썩이게 했다.
나는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곧 눈앞에 대형 화로가 나타났고 그 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꼬치들이 구워지며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와, 맛있겠다.’
저녁을 먹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기가 막힌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나는 우선 화로 근처로 가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눈으로 하나씩 훑어보았다.
‘고기, 감자, 옥수수, 소시지……?’
더 많은 것들이 있긴 했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내게 주인이 물었다.
“어…… 소시지 하나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주인이 얇은 나무 꼬챙이에 꿰어진 소시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소시지를 받아 든 뒤 한 손으로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얼마죠?”
“축제 기간 동안은 공짜로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공짜요?”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공짜라니…….
공짜라는 말에 나는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구도 돈을 내지 않고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가고 있었다.
“포르타 드비아.”
“네?”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말이 귀에 들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인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이 말을 모르시는 걸 보니 외지인이시군요.”
주인이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네, 맞아요.”
“포르타 드비아는 우리 마을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말로 ‘오늘이 바로 인생 최대의 행복한 날이다’라는 뜻입니다.”
“포르…… 타 드비아?”
“네, 맞습니다. 포르타 드비아. 축제 기간 내내 사람들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포르타 드비아.”
“포르타, 드비아.”
내가 똑같이 대꾸하자마자 주인이 다시 한번 따뜻한 미소를 내게 보였다.
그리고 정말 바쁜지 뒤돌아서 다른 이에게 금세 가 버렸다.
나는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가만히 서 있다 이내 자리를 뜨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소시지는 냄새만큼이나 무척 맛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속재료들과 양념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소시지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 나는 다시 거리를 구경했다.
거리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옷이나 식료품 등은 물론이고 꽃과 보석 등도 팔고 있어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가득했다.
쭉 돌아다녀 보니 내가 알던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기하면서도 안도감도 느껴졌다.
그렇게 거리 곳곳을 다니고 있던 와중에 구석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원 모양의 형태로 빙 둘러 있는 거로 보아 그 안에서 무슨 공연 같은 것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공연일까 하는 호기심에 나는 사람들 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시야가 트이자 안에서 시선을 모으던 이들이 서커스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 안에서 몇몇의 사람들은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고 또 몇몇의 사람들은 구경하는 이들에게 공연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가 있었는데 바로 어린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딱 봐도 너무나 불안해 보였다.
무엇보다 밑에는 극적인 긴장감을 주기 위함인지 불구덩이를 만들어 놓아서 발을 조금이라도 헛디뎠다가는 아이가 불구덩이 속으로 빠질 수도 있었다.
‘너무 위험해.’
올려다본 아이의 표정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줄타기를 몇 번 해 보지 않았거나 아예 해 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초조함과 언짢음으로 인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아이의 줄타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순간 아이가 정말로 발을 헛디뎠다.
“오오오오!”
“어머!”
다행히 반사 신경이 나쁘진 않은지 아이가 곧바로 줄에 매달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아이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한번 떨어질 뻔했다는 것이 두려움을 가져다줬는지 아이의 온몸이 떨리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뭐야? 재미없게.”
“얼른 일어나!”
“이 서커스단은 제대로 훈련도 안 시키나?”
“에이! 영 형편없구만.”
처음엔 사람들도 발을 헛디디는 장면이 공연을 재밌게 하려는 연출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몇 분째 제자리를 찾지 못하자 반응이 안 좋아지며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안 일어나?!”
그리고 그때 내 쪽에 있던, 서커스 단의 사람 중 하나인 듯한 남자가 아이에게 욕지거리와 함께 소리를 내질렀다.
남자의 윽박에도 아이는 도저히 몸이 제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건지 그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줄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인데 아직 줄 타는 것이 시원찮습니다.”
“그러게 왜 준비도 되지 않은 놈을……!”
“죄송합니다. 더 재밌는 것들이 많이 남았으니 기분 푸시죠.”
그런데 저마다 불만을 쏟아 내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서커스단의 어느 누구도 아이를 줄에서 내려줄 생각을 않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관심이 아이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에도 나는 아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줄을 꽉 움켜쥔 채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도 한계인 듯했다.
이제 더 이상 매달릴 여력이 없어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서커스단의 사람에게 소리쳤다.
“아이가 떨어지려고 하잖아요!”
“냅두세요. 호되게 당해 봐야 나중에 저런 멍청한 짓거리를 안 하죠.”
“뭐라고요?”
나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일만 계속할 뿐 아이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큰일 났네.’
조금만 더 있으면 아이는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떨어져도 죽을 높이는 아니었지만 불 때문에 큰 화상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드레스 뒤로 감춘 뒤 손을 움직이며 정신을 집중했다.
‘제발, 늦으면 안 돼.’
무엇보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불을 꺼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힘을 발휘했다.
“어어, 떨어진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아이가 원래라면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다행히 때를 제대로 맞췄는지 불 꺼진 구덩이에 아이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아이가 떨어지자 서커스단의 사람이 근처로 다가왔다.
“뭐야, 불이 왜 꺼졌지? 어이! 여기 불이 꺼졌어!”
“뭐? 불이 꺼졌다고?”
참 이상했다.
그들은 아이가 괜찮은지는 전혀 상관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불이 꺼진 것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비상식적인 행태에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구덩이 속에서 아이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아이에게 괜찮으냐고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거구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무지막지한 손으로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구경꾼들 틈에서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막 인파를 빠져나와 숨이 트일 때쯤이었다.
눈앞이 뭔가로 가로막히며 부딪혔고 나는 그게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로 넘어갈 뻔한 나를 붙잡은 손길로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리며 올려다본 남자는 장신에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과하는 목소리 또한 낮은 울림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네, 괜찮아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남자가 나를 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부담스러움에 나는 괜찮다며 거듭 말했다.
그러자 남자도 안심이 됐는지 나를 붙들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럼. 포르타 드비아.”
아까 꼬치를 나눠 주던 주인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이 남자는 이 마을 사람인 듯 보였다.
“포르타 드비아…….”
이제는 나도 알고 있는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자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내 곁에서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아주 잠시 쳐다보다 다시 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축제는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메리와 윌리엄이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하며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시끌벅적했던 곳을 나오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시원한 밤공기와 조용한 거리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 걸음을 살짝 늦추며 걸었다.
그때였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들뜬 기분을 만끽하며 어두운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와 고통에 젖어 신음을 내짖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뭐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히 다가가니 얼마 가지 않아서 구석진 골목에 남자 둘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좀 더 유심히 살펴보니 남자들 사이에서 한 아이가 바닥에 웅크려 우악스런 발길질을 받아 내고 있었다.
‘저 아이는……!’
아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아까 서커스단에서 줄타기를 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남자들 또한 낯이 익었다.
아까 아이를 데려갔던 거구의 남자와, 잠깐 말을 섞었던 키가 작은 남자였다.
내가 그렇게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이에 관해서는 예외였다.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성인도 아닌 아이를 상대로 여럿이서 폭행을 하는 걸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뭐야?”
그들 중에서도 아까 아이를 끌고 갔던 거구의 남자가 재빠르게 나를 훑더니 곧 음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귀족 아가씨 같은데 신경 끄시고 갈 길 가시죠.”
남자가 껄렁껄렁한 말투로 기분 나쁘게 웃었다.
마치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는 의미 같았다.
“얘야, 괜찮니?”
“어허, 갈 길 가시라고요. 뉘신데 남의 집 일에 끼어듭니까.”
“당신들, 아까 저쪽에서 공연하던 서커스단 사람들이지?”
“저희 서커스단을 구경하셨던 손님이셨군요. 맞습니다. 맞아요. 그럼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놈이 줄 타는 게 영 시원찮아서 따로 훈육 중이었습니다.”
“훈육을 빙자한 폭행이 아니고?”
“폭행이라뇨?! 말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키가 작은 남자가 내 말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들보다 바닥에 웅크린 채 고통에 끙끙거리는 아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때 간신히 고개를 살짝 든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잠시 숨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울컥하고 말았다.
저 눈빛은 나도 아는 눈빛이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울을 볼 때마다 봐 왔던 모습이 아이와 겹쳐졌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나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내 입에서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저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
“네?”
“이 아이는 저희 서커스단의 귀한 재산입니다. 절대 내놓을 수 없습니다.”
“재산?”
“예, 그렇습니다.”
사람을 재산이라고 말한 남자는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며 내게 대꾸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재산을 그냥 내준답니까?”
“맞습니다. 돈이라도 주시면 모를까. 흐흐.”
두 남자가 서로의 말에 맞장구치며 돈을 바라는 듯한 의미를 풍기며 말했다.
사람을 돈으로 산다는 건 내 이해 범위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노예 시장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들도 저렇게 거리낌 없이 사람을 돈으로 사고판다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내가 사겠다.”
“이 애를 사신다고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이를 산다는 말에 두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러곤 이 아이의 가치로 얼마를 받아야 할지 자기들끼리 구석에 가서 쑥덕대더니 금세 내 앞으로 돌아왔다.
“크흠. 금화 20닢만 받겠습니다.”
“금화 20닢?”
“예. 크흠, 이 아이는 앞으로 미래가 무척 촉망받던 아이인지라 저희로서도 손해를 보고 파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 아래로는 안 됩니다.”
촉망받기는…….
아까 분명 줄도 제대로 못 타는 걸 봤는데도 남자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 20닢을 꺼내 남자에게 건네줬다.
금화 20닢이 여기서 정확히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아까 거리 구경을 했을 때도 뭘 특별히 산 게 아니라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는 금화 20닢의 몇 배가 되는 양이 들어 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아이의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선뜻 금화를 그냥 줬다.
그들의 눈이 내 돈주머니에 꽂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주머니를 여민 뒤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계산은 다 끝난 거겠지?”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야! 일어나! 네 새로운 주인님이시다. 인사 드려라.”
거구의 남자가 아이를 막 대하며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만.”
“예?”
“이제 이 아이는 내 소속이다. 그러니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
“예? 아, 예…….”
내 말에 남자들이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조심히 일어나 볼래?”
남자들을 대했던 무뚝뚝하고 차가운 태도와 달리 아이를 마주하니 살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에게 손을 내밀자 아이가 내 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와 함께 가자.”
“…….”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일어-!”
아이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함부로 욕지거리를 해 대는 키가 작은 남자를 차갑게 노려보자 남자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가자.”
아이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드디어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더니 내 손을 잡았다.
“고마워.”
내 손을 잡아 준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힘을 주어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가까이서 본 아이는 이제 막 열두 살쯤 돼 보였다.
그렇게 아이를 조금씩 이끌며 뒤를 돌았는데 두 남자가 아직도 가지 않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나?”
“예? 아, 예. 갑니다!”
남자들이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들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그제야 아이를 전체적으로 다시 살펴보았다.
자주 씻기는 했는지 몸에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입고 있던 옷은 낡아서 다 해져 있었다.
그리고 아까 남자들에게 발길질을 당해서 바닥에 구른 티가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설마 말을 못하나?’
그럴 수도 있었기에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정확하게 벌리면서 입을 열었다.
“배고프니?”
손으로 밥 먹는 시늉까지 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
하지만 아이는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혹시 있잖아…… 말을 못하는 거야?”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요.”
그러자 드디어 아이의 입에서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도 예쁜데 왜 대답을 안 하고 있었어.”
“…….”
아이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와, 힘들다.’
아이가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아서 나는 좀 더 참을성 있게 아이를 대하기로 마음먹으며 아이의 손을 조심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다행히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여관으로 가던 길을 돌려서 다시 축제가 한창인 거리로 향했다.
아무래도 아이에게 입을 옷과 배를 채울 먹을 것들을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대로 서 있었다.
“왜 그래?”
“어디…… 가는 거예요?”
그게 이제야 궁금해졌나 보다.
그런데 그걸 묻는 아이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지금 축제잖아. 가서 맛있는 음식들로 배도 채우고 새 옷도 사서 입자.”
“…….”
참 아이답지 않게 과묵한 아이였다.
물론 아이라고 다 수다스러운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이제는 어느 정도 편해진 건지 말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니?”
“왜…….”
“응?”
“왜…… 절 사셨어요?”
“그건…….”
사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해 줄 말이 없었다.
나로서도 매우 충동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타당한 이유를 내놓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나보고 구해 달라고 신호를 보냈잖아.”
그래서 그냥 반쯤 우기면서 대답했다.
“……네?”
“아니었어? 맞는데? 분명 네가 나한테 구해 달라고 눈빛으로 그랬어.”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황당함과 어리둥절함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아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저 싱긋 웃으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이름이 뭐야?”
그리고 바로 말을 돌려 아이의 이름을 물어봤다.
“……이름 없어요.”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꽤 충격적이었다.
이름이 없다니, 사람이 이름이 없을 수가 있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이름이 없어?”
“네…… 이름은 없고 번호는 있어요.”
“번호?”
“네, 서커스단에서는 번호로 불려요. 저는…… 5번이었어요.”
“5번…… 그렇구나. 나이는? 몇 살이야?”
“잘 모르겠어요…….”
묻는 말마다 모른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서커스단에서는 언제부터 있었니?”
어쩌다 아이를 취조하는 분위기가 됐지만 아이를 고아원에 넘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불쾌하지 않아 할 선을 최대한 지키며 질문을 던졌다.
“한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한 달?”
그럼 한 달밖에 안 된 아이에게 줄 타기를 하게 했다는 건가?
정말 악질적인 곳이네.
“그럼 그전에는 어디 있었어? 고아원? 어쩌다 서커스단에 들어오게 된 거야?”
“……사실 기억이 잘 나질 않아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고?”
“네, 기억이 난 이후로는 계속 서커스단에 있었어요. 그 이전의 기억은 없어요…….”
아이의 말을 듣고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채 떠돌다 서커스단에 잡힌 것 같았다.
“그렇구나. 배고프지? 일단 밥을 먹자. 뭐 좋아하는 거 있니?”
“잘 모르겠어요…….”
“그럼, 꼬치 좋아하니? 꼬치 먹을래?”
잘 모르겠다는 말에 순간 아까 먹었던 소시지가 생각났다.
공짜여서가 아니라 정말 맛있어서 아이에게도 맛을 알려 주고 싶었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우리는 함께 큰 솥이 있는 꼬치 상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 또 오셨네요?”
인상이 좋은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왔다 갔다 했을 텐데 참으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또 뵙네요? 아까 먹었던 소시지가 너무 맛있어서 이 아이에게도 먹이고 싶어서요.”
“저희 가게 소시지가 맛이 기가 막히긴 하죠. 자, 어디 보자.”
주인이 큰 화로 주변을 살펴보더니 내가 아까 먹었던 소시지와 똑같은 것을 집어 우리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소시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는데 하나는 아이에게 주고 나머지 하나는 내게 내밀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까 먹었으니 충분해요.”
나는 극구 사양했다.
공짜라는 걸 알고도 다시 온 것도 민망한데 또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럼 소시지 말고 다른 것을 드셔 보실래요?”
“네? 아니에요!”
괜찮다는 내 말에도 주인은 이번에는 두툼한 고기 덩어리가 꽂힌 꼬챙이를 내게 내밀었다.
“자, 사양하지 마시고 드셔 보세요. 저는 손님들께서 맛있게 먹어 주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답니다.”
정말 그것만이 그의 행복인 것처럼 주인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어 보였다.
더 이상 사양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이내 주인의 손에 들린 꼬챙이를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포르타 드비아.”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가 알려 줬던 말을 건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포르타 드비아. 너도 맛있게 먹으렴.”
“감사…… 합니다.”
아이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주인은 예의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다시 다른 손님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우리도 가자.”
“그런데…….”
“응?”
“’포르타 드비아’가 무슨 뜻이에요?”
“‘포르타 드비아’는 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말이라는데 오늘이 바로 인생 최대의 행복한 날이라는 뜻이래.”
어쩐지 우쭐한 기분이 들어 주인에게 들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오늘이 인생 최대의 행복…….”
“좋은 말이지?”
“……네. 포르타 드비아.”
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이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꽤 귀여워 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놀랐는지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봤다.
“아, 미안. 내가 말도 없이 만져서 불쾌했니?”
“아니, 아니요…… 더러워서…….”
“내가 더럽다고?”
“아니요! 제가, 제가 더러워서…….”
“네가 왜 더러워? 너 하나도 안 더러워.”
정말로 더럽지 않다는 걸 보여 줄 요량으로 나는 아이의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그러자 아까 얼떨결에 손을 잡았긴 했지만 역시 이런 스킨십에는 익숙하지 않은지 아이의 몸이 움찔했다.
“가자.”
다시 갈 길을 가기 위해 아이의 손을 조심히 잡아끄는데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며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뭔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이름이…… 뭐예요?”
아이의 물음에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진짜 이름을 내뱉으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 메리와 윌리엄에게 내 진짜 이름 대신 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벨이야.”
“벨…….”
아이가 내 이름을 조용히 곱씹고 곱씹는 게 보이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그럼 이제 진짜 갈까?”
“네.”
우리는 다시 거리로 파고들었다.
각자 한 손에는 꼬치를 하나씩 든 채 서로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어쩐지 있지도 않은 남동생과 놀러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리를 구경하다 보니 눈앞에 옷 상점이 보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낡았기에 나는 아이를 고아원에 데려다 주기 전에 새 옷을 입혀 보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쭈뼛쭈뼛하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 아이의 몸에 맞는 옷을 한 벌 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아이는 무척이나 미인이었다.
분명 좀만 더 자라 얼굴선이 더욱더 뚜렷해지면 엄청난 미남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예쁜 외모를 가진 아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녹색 계열의 새 옷을 입히자 외모가 더욱 살아났다.
나는 뿌듯한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계산을 마쳤다.
옷 상점을 나오니 밤이 깊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북적대던 거리의 인파도 이제 점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일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오늘은 다들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도 이제 할 것들은 다 한 것 같아 아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향했다.
조용히 서로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아까부터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는 시선뿐 아니라 발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가까워졌다고 느껴졌을 때쯤 나는 뒤돌아 재빨리 아이를 등 뒤로 숨겼다.
“너희는…….”
눈앞에 익숙한 인영들이 서 있었다.
둘은 아까 봤던 이들이고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흐흐, 또 뵙습니다.”
아까 봤던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말입니다…….”
남자가 티 나게 말을 질질 끌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놈들을 노려봤다.
“어? 5번 너 뭐냐? 새 옷 사 입었냐?”
그들 중 키가 가장 큰 남자가 내 등 뒤에 있던 아이를 보곤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아이참, 그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5번을 파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5번은 저기 저놈을 이름 대신 부르는 번호입니다.”
“뭐라고?”
거구의 남자의 말에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아이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5번이 나름 쓸모가 있는지라 다시 되돌려 받아야겠습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순간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계산은 다 끝난 거로 아는데?”
“계산이야 다 끝났죠. 하지만 저희가 말하는 건 돈을 돌려 드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라는 말을 덧붙이더니 남자가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나는 저열한 이들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삼키며 입을 뗐다.
“아이를 내게서 뺏어가겠다는 말인 건가?”
“그렇습죠. 아, 이제야 말이 좀 통하시네요.”
네 남자의 다리가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보니까 돈주머니가 있으시던데…….”
역시 아까 내 돈주머니를 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맞았다.
“돈 주머니는 바닥에 내려놓으시고 아이를 순순히 제게 주시면 곱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뭐?”
어이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보내 줘?
“보아 하니 귀족 아가씨 같은데 저희 그렇게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그러니 돈과 아이만 내놓고 가시면 무사히 보내 드리겠습니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내가 기회를 줄게. 지금이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
나는 그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한번 주었다.
솔직히 벨리타의 능력으로는 네 놈 정도야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 앞이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 일을 별로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푸하하하! 아이고 아가씨. 아가씨 혼자서 뭘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바봅니까. 아가씨가 아까부터 호위를 한 명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했단 말입니다.”
거구의 남자가 나를 비웃으며 말하자 나머지 놈들도 그를 따라 웃어 댔다.
“그러게 어디 귀한 분께서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시다뇨. 세상 무서운 줄 모르시는 분이네.”
아무래도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살짝 뒤돌아 아이에게 물러나 있으라며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 움직이질 않았다.
‘괜찮아.’
나는 괜찮다고 입모양으로만 말하며 아이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아이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했고 어느 정도 떨어지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놈들을 응시했다.
“진짜 안 갈 거지?”
질문은 했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우선 놈들과의 거리를 살짝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놈들의 가장 앞쪽에 있던 덩치가 큰 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손을 조심히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내가 뒤로 물러나자 나를 얕보는 표정으로 내가 뭘 하는지 구경을 하던 놈들의 얼굴에서 금방 여유가 사라졌다.
덩치가 큰 놈의 웃옷 밑단에 불이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냄새- 아악!”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킁킁대며 냄새가 나는 곳을 찾더니 자신의 옷에 붙은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놈이 그제야 알아차렸다.
“뭐, 뭐야!”
“뭔 불이야!”
놈들이 불을 끄기 위해서 허둥대며 움직였다.
나는 그 옆에서 동료의 불을 꺼 주려고 몸을 경박하게 놀리던 붉은 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놈의 머리카락에 삽시간에 붙이 붙었다.
“으, 으악!”
못생긴 얼굴 위의 붉은 것이 머리카락인지 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살려 줘!”
한 놈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박박 문지르고 있었고 다른 한 놈은 웃옷을 다 잡아먹은 불길을 끄기 위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다른 두 놈은 그 광경을 황망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는 조소를 머금고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 손가락을 살며시 맞댔다.
그러자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불들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놈들의 모습과 표정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더 해 줄까?”
내 말에 놈들의 표정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렸다.
“으헉!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놈들의 입에서 동시에 잘못을 비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곤 내가 또 입을 열 새도 없이 냅다 줄행랑을 쳤다.
나는 그들을 따라가 끝까지 보복을 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뒀다.
아까 그들의 말로 판단했을 때 돈과 아이를 노렸던 것뿐이지 내게 해코지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놈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저만치에서 내내 꼼짝 않고 있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서웠지?”
딱 봐도 아이의 표정엔 불안함이 엿보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포기할까 봐, 그래서 다시 서커스단으로 되돌아갈까 봐 두려웠을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안심하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너무 늦었다. 얼른 가자!”
깜깜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벌써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몇 걸음 안 가서 순순히 따라오던 아이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왜 그러니?”
이유를 물어보며 아이를 쳐다보는데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더 어두워져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에게 물었다.
“서커스단에…….”
“서커스단에?”
“저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있어요…….”
아, 그렇겠구나.
아이의 번호가 5번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1번부터 4번까지의 또 다른 아이들이 있을 것이 확실했다.
“네 명이 더 있는데 그 아이들은 저보다 먼저 들어왔거든요.”
아이의 말이 느릿느릿했지만 나는 천천히 말을 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상황을 보니 저만 이렇게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아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혼자만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이 아이를 덮친 것이다.
“저렇게 돌아갔으니 제가 가지 않으면 아마 저를 대신해서 엄청 맞을 거예요.”
아이는 내게 서커스단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겠다는 거야?”
“……네, 애들이 저보다 작아서 맞으면 견디기 힘들 거예요.”
“너는 그곳을 나올 기회를 가졌어. 그런데 그 기회를 스스로 버리겠다는 거야?”
내 말에 아이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심이 섰는지 흔들리던 눈빛은 곧 단호함을 보이며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서커스단은 내일 이른 새벽에 이곳을 떠날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함께 떠나려면 지금이라도 가서 합류해야 해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착한 거야.’
아까 대화를 해 보니 아이는 서커스단에 고작 한 달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냈던 아이들이 걱정돼서 지금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답답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라서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감사합니다. 저를 구해 주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아이의 머리가 깊게 숙여졌다 올라왔다.
그 후 바로 뒤돌아 걷더니 나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아이를 이대로 보낼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빠르게 결정을 내린 뒤 곧바로 달려가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아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도와줄게.”
“……네?”
“내가 서커스단에 있는 아이들을 빼내 줄 테니까 우선 여관에 가자. 여관에 내 호위 기사가 있거든. 그러니 우선 여관에 함께 가자.”
이렇게 장황하게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아이는 납득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쉬지 않고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너 아까 내가 하는 거 못 봤어?”
“봤어요…….”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나 그것보다 훨씬 더 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말했듯이 나 혼자 갈 거 아니야. 내 호위 기사인데 당연히 세겠지?”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을 하려고 애썼다.
아무래도 아이에게는 힘이 세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벨이, 아, 죄, 죄송해요.”
“괜찮아. 벨이라고 불러도 돼.”
아까 내가 가르쳐 준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데에 흠칫 놀란 아이가 안쓰러워 나는 아이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보냈다.
“그러니까, 벨이 절 이렇게 도와주는 이유도 모르겠고 이런 호의를 받아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왜 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있는 걸까.
사실 나조차도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살짝 의구심이 들긴 했었다.
어쩌면 그냥 모르는 척,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고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그 정도로 내게 뿌리를 내린, 가슴속에 콱 박힌 아픔이 아이를 돕게 이끌었다.
이곳에 오기 전의 내 지난 삶이 도저히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거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였고, 그건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아픔이자 슬픔이었다.
그리고 생각이란 걸, 기대라는 걸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부터 나는 항상 기도했다.
언젠가 나를 낳아 준 부모가 날 찾아오기를.
나를 데리러 오기를.
아니면 부모가 아니라도 누군가 나를 이 지독한 외로움에서 꺼내 주기를.
그렇게 바라고 또 바랐던 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기에 아까 순간적으로 놈들에게서 아이를 산 것이다.
저 아이도 나랑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 주길 바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나는 이제 누구든 내 손을 잡아 주길 간절히 바라던 아이에서, 구원을 바라는 아이의 손을 잡아 줄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내 마음이 저 아이를 가만히 놔두지 말라고 계속 속삭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내가 또다시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이 모든 일들은 저 아이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했다.
“글쎄, 왜 그럴까.”
나는 따스한 미소를 흘리며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맘에 들어서 그래. 네가 예뻐서.”
“제가 예뻐요?”
“응. 너 진짜 예뻐. 그리고 너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하거든. 그래서 그래.”
“누구요……?”
“있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나는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자, 어서 가자. 친구들을 구하려면 서둘러야지.”
아이를 데리고 여관에 도착했을 때, 메리가 초조한 기색으로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황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메리.”
“아가씨,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말씀도 안 하시고! 계속 아가씨 찾았다고요!”
메리가 흥분을 하며 나를 다그쳤다.
“축제라서 거리에 갔다 왔어. 미안, 나 많이 찾았구나?”
그녀의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메리가 나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느껴져서 나는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됐어요. 진짜 걱정했다고요. 혹시나…….”
말을 채 잇지 못하며 메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나쁜 상상을 한 듯했다.
“그나저나 윌리엄 경은? 설마 나 찾으러 나갔어?”
“당연하죠. 아가씨께서 사라지셨는데 어떤 호위 기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런데 곧 돌아올 거예요. 정각마다 제게 와서 상황을 알려 주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말하기가 무섭게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저기 오시나 봐요.”
그렇게 말하는 메리의 표정이 살짝 붉게 물들어 가는 게 보였다.
“아가씨!”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 윌리엄이 말의 고삐를 꽉 붙잡으며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윌리엄 경.”
나는 그들을 괜히 고생만 시킨 것 같아 일부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도대체 어디를 가셨던 겁니까. 이 일대를 다 수색했는데도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축제라길래 거리까지 갔다 왔지.”
“그럼 저희에게 말씀을 하시고 같이 가셨어야죠. 아가씨께서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저는…….”
윌리엄이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미안. 조용히 혼자 갔다 오고 싶었어.”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그런데…….”
윌리엄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 옆의 아이에게 향했고 덩달아 메리의 시선도 아이에게로 닿았다.
“아, 이 아이는 내가 데려온 아이인데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보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한 뒤, 윌리엄에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서커스단에 이 아이 또래의 애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을 구출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응, 바로 그거야.”
“하지만 아가씨, 무턱대고 아이들을 빼내면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아마 그러진 않을 거야. 내 생각엔 서커스단에서 합법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거든.”
“합법적인 게 아니라면…….”
“납치 아니면 길거리에서 헤매는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온 거 같아.”
“아니 그럼 그런 나쁜 놈들은 치안대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윌리엄과 나의 대화에 끼어든 메리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치안대?”
“맞습니다. 치안대에 신고해서 그런 악질적인 서커스단은 운영을 못하도록 막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이 메리의 말에 동조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왜 치안대 생각을 못했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 왜 처음부터 치안대에 대해 생각을 못했던 건지 살짝 의문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치안대에 신고를 하면 되겠다.”
“예. 그러면 아이들의 거취도 치안대에서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아이와 잠깐 함께 있다 보니 너무 감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나 보다.
그 후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일을 저지를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 유능한 기사와 하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메리는 여관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어. 나와 윌리엄 경이 치안대에 갔다 올게.”
“네, 아가씨.”
“저,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런데 자신을 놔두고 간다는 말에 아이가 대뜸 함께 가고 싶다고 내게 사정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거야. 그쪽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널 데려갈 수는 없어. 일이 해결될 동안 얌전히 있어. 알았지?”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애초에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그게 아이를 여관까지 데려온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지만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네 친구들 다 구해 줄 테니까. 나 믿지?”
“네…….”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윌리엄과 나는 곧바로 치안대로 향했고 치안대에 도착한 후에도 혹시 몰라 내 신분을 노출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수도의 귀족 영애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수도로 올라가 문제를 삼겠다며 반협박을 하기는 했다.
그 말이 제대로 먹혔는지 관원들은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서커스단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윌리엄과 나도 치안대의 뒤를 쫓아갔다.
치안대를 따라가니 다행히 마을의 구석진 공터에 서커스단의 막사가 있었다.
아직 떠나지 않은 듯했다.
수십 명의 치안대가 순식간에 막사를 휘저었다.
그들은 막사에서 자고 있던 이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밖으로 끌고 나왔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의 말로는 분명 아이들 넷이 더 있어야 하는데 밖으로 나온 이들 중에 어린아이로 보이는 형체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아이들이 없잖아.”
“아직 다 나오지 않은 게 아닐까요?”
“아니야. 뭔가 이상해.”
느낌이 왠지 이상했다.
나는 빠르게 치안대와 서커스단의 단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눈에 익은 몇몇이 속옷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아까 마주쳤던 이들 중 대장 격으로 보였던 덩치가 큰 자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네, 네?”
답지 않게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아이들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네, 네.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저, 저기 저 막사에 있습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한 막사를 가리켰다.
나는 윌리엄에게 가 보라며 곁눈질을 했다.
그러자 윌리엄이 재빠르게 막사로 향했다 돌아왔는데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없습니다.”
“없다고?”
“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다 저 막사에서 지냈습니다!”
남자의 눈빛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이 아이들을 빼돌릴 이유가 없었다.
오늘 치안대가 들이닥칠 줄은 당연히 몰랐을 테고 곧 새벽에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누가 데려갔다는 건데…….’
누구지?
누가 아이들을 데려간 거지?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수색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이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 쪽으로 힘을 집중했다.
잠시 뒤 번쩍 눈을 뜨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서 열이 감지됐다.
불의 힘을 이용해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열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넓게 훑었다.
그러자 이곳에 있는 이들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인영들과 성인 몇의 열이 감지됐다.
“경, 여기 마무리를 부탁해.”
나는 눈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윌리엄에게 이곳의 정리를 끝마치라고 말한 뒤 빠르게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가씨!”
뒤에서 윌리엄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
하지만 전속력으로 뛰어왔음에도 내가 감지했던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힘을 쓰려다 흙바닥에 발자국이 여럿 찍힌 것을 발견했다.
역시 내가 감지한 대로 아이들의 작은 발자국뿐만 아니라 성인의 발자국이 섞여 있었다.
아이들을 누가 데려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에 나는 서둘러 발자국을 따라갔다.
그런데 십여 분을 따라갔음에도 아이들은커녕 누구도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서 다시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갑자기 몇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한 남자가 내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누굽니까. 누군데 우리를 추격하는 겁니까.”
사방이 깜깜해서 그런지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형체로 보아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이상하게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아이들을 빼돌린 게 당신이에요?”
“그걸 답해 줄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돌아가십시오.”
그런데 그 순간 구름에 숨었던 달빛이 고개를 내밀자 칠흑 같은 어둠에 잘 보이진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그가 아까 서커스단의 공연이 있던 곳에서 부딪혔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도 내 얼굴을 이제야 자세하게 본 것인지 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당신은…….”
문득 남자를 서커스단이 공연하던 근처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때 일부러 서커스단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던 걸까?
“왜 아이들을 납치하는 거죠?”
“납치가 아닙니다.”
“납치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그건…….”
남자는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저는 서커스단에 소속된 아이들 중 하나의 부탁으로 그 아이의 친구들을 구출하러 온 거예요. 그래서 치안대와 함께 막사를 습격했는데 아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더군요. 그런데 또 다른 이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니, 이건 옳지 않은 일이에요. 그러니 아이들을 제게 보내세요.”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길게 설명을 하며 그를 회유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판단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이 잘생긴 남자가 납치범이었다니…….’
“그건 안 됩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좋게 얘기해서 끝내려고 했더니 남자는 말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기어이 아이들을 납치하겠다는 건가요? 그럼 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네요.”
납치범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여기까지였다.
아무리 그가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모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범죄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다른 이들도 아닌 아이를 상대로 한 범죄는 절대로 가만둘 수가 없었다.
“아가씨!”
그런데 그때 뒤에서 윌리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은 빠르게 내 옆에 섰다.
“마무리는?”
“치안대에게 서커스 단원들을 모두 잡아들여 그들의 죄를 물을 것을 당부해 놨습니다.”
“잘했어.”
“한데, 저자는 누굽니까.”
“납치범.”
나는 간단하게 눈앞의 남자를 윌리엄에게 소개했다.
“납치범이라면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이제부터 그걸 저 남자에게 물어봐야겠지.”
나는 윌리엄에게 눈짓했다.
둘이 호흡을 맞춰서 남자를 붙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 눈빛을 읽은 윌리엄이 막 발을 떼려는 찰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잠시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 대화로 하죠.”
나는 윌리엄에게 손을 들어 잠시 멈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대화는 필요 없어요. 그저 아이들을 내놓고 우리와 함께 치안대에 함께 가면 돼요.”
“저는 납치범이 아닙니다. 저는 피해를 주려고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부터 계속 자신이 납치범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그는 내가 보기엔 완벽한 납치범이었다.
“나오거라.”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길 왼쪽의 커다란 나무와 풀숲 뒤에서 성인 남자 한 명과 아이 넷이 튀어나왔다.
“얘들아!”
애들의 상태를 봤을 때 다행히 아이들은 다친 곳 없이 무사해 보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태도가 이상했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납치범이라면 아이들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해야 맞는데 오히려 나와 윌리엄을 보더니 지금까지 함께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뒤로 몸을 숨기려 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까부터 대치 중이던 남자를 쳐다봤다.
“아이들을 데려가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남자가 대뜸 내게 물었다.
“당연히 치안대에 넘겨야죠. 치안대에서 아이들의 거취를 알아서 해 줄 거예요.”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내가 계속 아이들을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 이후의 것들은 그저 치안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네? 지금 무슨-.”
남자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 나보고 무책임하다고 한 거야?
“레이디께서 무슨 이유로 서커스단의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안대에 넘겨 봤자 이 아이들은 언젠가 다시 서커스단으로 돌아갈 겁니다.”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면 되잖아요. 치안대에서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낼 거예요. 그런데 왜, 어떻게 어떤 의미로 다시 서커스단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지금 남자는 나를 마치 뒷일은 생각도 않고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한심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치안대는 그러라고 있는 곳이잖아요. 지금 치안대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요?”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내 말에 긍정한다는 뜻이었다.
곧이어 남자가 말했다.
“이런 작은 마을의 치안대는 그렇습니다. 돈을 받고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죠. 대륙을 돌아다니는 서커스단도 분명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날이 밝으면 레이디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들은 풀려날 거고 아이들을 도로 데려갈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어디에나 부패한 조직은 존재했다.
내가 살던 세상도, 그리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이들을 데려가 뭘 하려는 거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저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이 보였다.
내게 어디까지 말할지 또다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끝났는지 남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커스단에 소속되어 있는 아이들을 구해 제가 후원하는 고아원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제가 관리하고 있기에 안전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어떻게 믿죠?”
남자의 표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일을 외모와 표정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저는 무작정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먼저 선택할 기회를 줄 뿐입니다.”
“맞아요! 저희가 따라온 거예요!”
그때 빨간 머리를 한 소녀가 우리의 말에 끼어들었다.
“이 아저씨는 우리를 구해 준 거예요! 우리를 살려 준 거예요!”
“맞아요!”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동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아까의 내 자의적인 판단과는 다르게 남자가 정말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제가 계속 끼어드는 건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확인이 필요하니 어느 고아원인지 알려 주세요. 만약 당신이 저를 속였다면 저는 기필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며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잘생긴 남자는 웃는 모습도 참 예쁘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고아원에는 언제쯤 출발하나요?”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겁니다.”
“아, 그러면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이 서커스단에서 있던 아이인데, 그러니까 번호가 5번이라고 했는데-.”
“5번이요?”
“5번 형 말하는 거예요?”
5번이라는 소리에 아이들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5번 오빠 지금 어디 있어요? 안 다쳤어요? 살아 있어요?”
저마다 내게 아이가 무사한지, 괜찮은지, 하물며 죽지 않았는지 묻고 있었다.
“응. 살아 있고, 전혀 다치지도 않았어. 내가 지금 데리고 있단다.”
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데, 그 아이도 함께 데려가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내고 있는 여관에 있어요.”
“그럼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음, 그러면 잠시만요. 솔직히 저는 아직도 당신을 완전히 믿지를 못하겠어요. 그러니 제 호위 기사가 내일 아이들이 떠날 때까지 함께 있어도 될까요?”
윌리엄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 부하를 따라가라고 하십시오, 아이들이 내일 아침까지 지낼 여관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네, 좋아요. 그럼 저는 당신과 함께 제가 지내는 여관으로 가는 거로 하죠.”
“알겠습니다. 데릭.”
아이들의 곁에 내내 서 있던 남자의 이름이 데릭인가 보다.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다 들었겠지? 출발하라.”
“알겠습니다.”
“윌리엄 경.”
“예, 아가씨.”
“수고해 줘. 그리고…….”
허튼짓을 하는지 제대로 감시하라는 말 대신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흩어졌다.
나는 남자와 함께 내가 지내는 여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우리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그게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는 것도 지루해서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어, 그러니까 나중에 확인차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왠지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남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서둘러 이유를 덧붙였다.
“이든입니다.”
“이든…….”
나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남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레이디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벨이에요.”
“벨…….”
이든이라고 하는 남자도 내 이름을 듣더니 나직이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남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겉모습만으로도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내가 한눈에 그가 귀족 영식이라는 걸 알아봤듯이 그도 내가 귀족 영애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을 말하지 않고 이름만 말하자 살짝 의구심이 듦과 동시에 그럴 이유가 있을 거라 이해를 하는 거일 테지.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또 다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일자 나는 아까부터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귀족이 서커스단의 아이들을 위해 직접 나선다는 게 꽤 특이했다.
물론 나도 어쩌다 일에 휘말리긴 했지만 나 같은 경우는 우연이 만들어 낸 상황들이었다.
하지만 아까 내가 물었을 때 망설이긴 했지만 막힘없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낸다는 거로 보아 남자는 자주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우연히 서커스단에서 아이들이 납치돼서 학대를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우연히…… 라는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대답이 석연찮았지만 그걸 물고 늘어지기엔 명분도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나는 이 남자가 사기꾼이 아니길 바라며 아이들이 앞으로 무사히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럼 아까 공연장 주위에서 저와 부딪힌 건 뭔가를 살피기 위해서인 건가요?”
“네. 그러고 보니 아까 줄타기를 하던 아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디께서 데리고 있으셨군요.”
“맞아요. 저도 우연히 길을 가다 아이가 서커스 단원들에게 맞고 있는 걸 보고 구해 줬던 거였어요.”
나는 ‘우연히’라는 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 뒤 정면을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시선이 따가웠다.
“웬만하면 이런 일에 휘말릴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레이디께서도 대단하시군요.”
“그런가요? 제 생각엔 누구라도 저처럼 행동했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누구라도 레이디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흘깃 쳐다봤다.
왠지 그의 눈빛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과찬이십니다. 저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하시는 것 같은 분께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어쩐지 좀 부끄럽네요.”
몇 마디 대화를 해 보니 아이들을 데려다 뭘 어떻게 해 볼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이렇게 서커스단의 아이들을 항상 구출하시는 건가요?”
“모든 아이들을 다 구출할 수는 없습니다. 제국을 돌아다니는 서커스단은 수십 개가 있고 그들을 일일이 찾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겠네요. 어? 다 왔어요. 저기예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여관 앞에 당도했다.
나는 여관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메리의 방을 찾았다.
“메리.”
그런데 문 안쪽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메리, 나 들어간다.”
“아, 아가씨?”
그제야 안쪽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그녀가 무서운 속도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곤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재차 불렀다.
“아가씨……?”
“자세한 건 이따 설명해 줄게. 아이는?”
“안에 있어요.”
“그래?”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이가 단숨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벨!”
“어머, 얘! 너 지금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거야.”
메리의 혼내는 듯한 말투에 아이가 금세 주눅이 든 얼굴로 애처롭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아이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메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메리, 괜찮아. 내가 그러라고 했어.”
“하지만 아가씨……!”
나는 그만하라며 고개를 살짝 가로 저었다.
어차피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메리는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내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레이디?”
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이든이라는 남자가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체격 때문인지 그가 들어오자 어쩐지 방이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내 손을 맞잡더니 손에 힘을 주었다.
“벨…….”
그러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낯선 남자를 보고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인 뒤 아이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분은 너희를 도와주신 분이야.”
“네……?”
“동생들도 이분이 구해 주셨어.”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남자를 쳐다봤다.
“이 아이예요. 그 아이들이 말한 5번 아이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런데 남자가 아이에게 좀 더 다가오자 아이가 여전히 경계를 하며 내 드레스 자락 뒤로 몸을 숨겼다.
“나쁜 사람 아니야. 너희를 도와주실 분이야.”
나는 재차 설명하며 뒤로 숨은 아이의 몸을 이끌어 내 옆에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임에도 힘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여관에 도착한 뒤에 제가 다시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하죠.”
아무래도 아이의 상태를 보아 여관까지는 함께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자, 동생들 만나러.”
동생들을 만나러 가자고 말하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나와 손을 잡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이는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런 아이의 행동이 귀엽다는 생각과 함께 손을 맞잡았다.
우리 셋은 아이들이 지내고 있는 여관을 향해 출발했다.
두 사람은 말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도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라 간간이 아이와 내가 몇 마디 하는 것 외에는 우리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계속 함께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낯선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이곳이 아이들이 지내고 있는 여관입니다.”
“네, 그럼.”
나는 붙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고는 아까와 똑같이 아이와 눈을 맞대기 위해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뒤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 여기 이분이 앞으로 너와 네 동생들을 돌봐 주실 거야.”
“……네?”
어쩐지 아이가 꽤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너희들은 이분이 잘 아는 고아원으로 가게 될 거야. 거길 가면 너희같이 서커스단에서 구출된 아이들이 많다고 해.”
“…….”
“그곳에 가면 지금과 같은 떠돌이 생활은 안 해도 될 거야. 잘 지내야 해. 알았지?”
내 말에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모른 척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가던 길이 있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제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약속해 주세요.”
“약속합니다.”
물론 말 몇 마디로 사람을 함부로 믿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이 남자는 믿음직스러웠다.
사람을 겉만 보고 믿으면 안 되지만 어쨌든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그럼 믿을게요.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제 호위 기사와 함께 가면 돼요. 그러니 제 호위 기사를 불러 주시겠어요?”
“그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들어가자.”
그런데 남자가 아이에게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남자를 따라 들어가라며 아이의 등을 밀고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나에게 할 말 있어?”
“……사셨잖아요.”
“응?”
“저를 사셨잖아요. 그럼 절 데려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어? 그게…….”
“샀다는 게 무슨 뜻이죠?”
생각지도 못한 말이 아이에게서 흘러나오자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와중에 남자가 나를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내가 이렇게 몰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내 떳떳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길을 가다가 아이가 서커스 단원에게 맞고 있는 걸 봤다고 했잖아요? 아이를 구하기 위해 그자들에게 돈을 건네주게 되었어요.”
나는 남자의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했다.
“벨.”
아이가 나를 부르더니 내 손을 붙잡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마치 남자를 보지 말고 자신을 보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돼요?”
“뭐?”
“말 잘 들을게요. 그러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안 돼. 나는 집으로 가는 게 아니야. 그렇기에 널 데려갈 수는 없어.”
나는 아이의 절실한 표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애초에 널 데려갈 생각이 아니었어. 미안, 하지만 이분이 너와 네 동생들을 나보다 잘 돌봐 주실 거야. 그러니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
아이는 이제 내 말에 대답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호위 기사를 불러 주세요.”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아이의 얼굴을 외면한 채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뜨는 것을 택했다.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여관으로 들어갔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는 끝까지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