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감히 보고도 없이 그냥 복귀해?”
가기 전부터, 왕국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니. 대놓고 일하기 싫다 하는 거지?
브루노는 자신의 단장인 제인이 새벽부터 으르렁거리며 황궁 입구로 향하는 걸 보고 입을 삐죽였다.
“단장님,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가 그래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도널드를 챙겼다.
“도널드, 걔가 왕국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때 약속하셨던 휴가 아직도 안 보내주셨잖아요.”
“내가 안 보내준대? 내가 언제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어? 언젠가는 보내준다니까.”
제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브루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뭐 자원하고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도널드는 이상한 데서 순진했고, 단장은 그걸 잘 이용해 먹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최대한 그 사이에 끼지 않으려 노력하는 방관자였고.
제인은 황궁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기사들을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선두에 선 도널드가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뛰었다.
“단장님!”
“너.”
제인이 커다란 개처럼 반갑게 뛰어오는 도널드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어 들었다. 그 뒤에 선 지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녀와 도널드가 코앞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브루노 또한 덩달아 굳어서 입만 뻐끔거렸다.
지젤의 붉은 머리가 바람에 살랑였다. 브루노는 후작 부인이 원래 이렇게 인상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나 싶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잘 지냈나요?”
제인은 지젤이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지젤이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너무 집요하게 찾길래, 내가 내 발로 왔어요. 도널드 경에게는 제가 미리 말하지 말아달라 부탁드렸고요.”
도널드에게 얘기 들어보니, 아무 문제 없는 것 같던데.
“다 끝났는데, 절 왜 찾았는지 이유나 들어보려고.”
제인은 살이 뽀얗게 오른 지젤이 화사하게 미소 짓는 걸 보며 한 손으로 눈가를 감쌌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갑자기 뭐가 명치에서부터 튀어 올라와 제인의 말문을 턱 막아버렸다.
“잘 지내셨던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제인의 말에 지젤이 소리를 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 경도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네요.”
도널드와 브루노는 생전 안 하던 낯간지러운 말과 이상한 행동을 하는 단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이상한 건 황제가 아니라 단장이 맞다니까. 제인이 얼마나 마음 불편해했는지 모르는 둘은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
황제궁에 들어선 이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고, 자신의 뒤에 선 시종들을 훑어봤다. 궁이 너무 조용했다. 해가 진 초저녁 하늘은 어두웠고, 황제궁 안에서 소란 떨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 같지만서도 지나치게 조용하니 수상했다. 잠깐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이내 걸음을 다시 옮겼다.
제인이 온종일 코빼기도 안 비치던데, 드디어 반란이라도 일으킨 건가. 이안은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으면 지젤은 분명 자신을 동정하고, 곁에 있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테니까. 그걸 직접 못 본다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무력한 패배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그걸 들은 이안은 그녀에게 더 설명해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너와 있어 겪는 괴로움보다, 나 홀로 선 외로움이 더 크다는 것을.
황제궁 중앙을 지나 침실로 향하던 이안은 정원 한쪽에서 들려오는 음색에 걸음을 멈췄다.
“오르골.”
작게 중얼거린 그가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는 노래였다. 예전에 산에서 듣던 노래였다. 그건 그의 침실에 가져다 놓고 듣지 못하고 있는 오르골이 내는 소리였다. 너무 그리워져서 차마 들을 수가 없어 장식처럼 가져다 두기만 한 오르골.
그걸 인지하자마자, 이안은 석상처럼 굳어 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치를 보며 자신에게서 멀어진 시종들을 보고, 입을 작게 벌렸다.
그가 차마 이게 무슨 소리냐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못하는 사이 노래가 끝났다. 그것에 화들짝 놀란 이안이 성큼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래 대신 흐르는 침묵이 그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방금 들었던 게 환청이면 어쩌지? 실은 이미 오래전에 미친 거라면. 그가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은 정원 구석진 곳 장미 덩굴 사이에 서 있는 지젤을 바로 찾아냈다. 지젤의 푸른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안은 지젤이 왜 여기 와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 이유와 과정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젤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존재한다는 거였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젤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사과부터 해야 하는데, 너무 이기적이고 뻔뻔한 행동이라 쉽지 않았다.
이안이 그런 그녀를 눈으로 하나하나 살폈다. 수척하던 얼마 전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스러웠다.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왜 넌 나 없이도 잘 지내.
“노래가 들려서.”
이안이 겨우 내뱉은 말에 지젤이 손에 든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침실에서 찾은 오르골이었다. 지젤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이 점점 물기에 젖어 드는 걸 보면서 조급해졌다. 그녀는 그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계속 들을 거면 돈 줘.”
지젤의 난데없는 금전 요구에 슬픔으로 일그러지던 이안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는 그 말을 잠깐 곱씹다가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은 푸스스 마른 웃음을 짓는 그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돈 대신에 박수 칠게.”
원숭이 인형처럼. 이안이 장난스레 중얼거리고는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지젤은 바로 그에게 안기지 못했다. 사과부터 해야 하는데.
“오르골 때문에.”
지젤이 오르골 핑계를 대며 잠시 주저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빨리 와.”
지금 오르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커다란 손끝이 떨리는 걸 본 지젤은 홀린 듯 오르골을 바닥에 내던지고 달렸다. 그러고는 단숨에 그의 품에 안겼다. 잡아채듯 그녀를 품에 안은 이안은 지젤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비로소 지젤이 눈앞에 실재한다고 안도했다.
“미워.”
그의 원색적인 원망에 지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이 너무 꽉 끌어안아서 숨이 막히고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젤은 자신을 자비 없는 힘으로 끌어안는 이안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밀어내기에는 그 품이 너무 따스했다. 동시에 이안이 몸을 잘게 떨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많이 미워?”
지젤이 그의 단단한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젤의 한마디에 여태 쌓아뒀던 설움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응.”
그가 자신의 허리에 감긴 지젤의 팔을 느끼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방금 뱉었던 말을 번복했다.
“아니야, 사실 안 미워해.”
이안이 지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내가 널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난 널 미워할 수도 없어. 피부를 간질이는 그의 고백에 지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그녀의 말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녀의 후회와 고통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착각이었다. 아니었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따로 있었다.
“미안해.”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야?”
이안이 촉촉하게 젖어 든 지젤의 푸른 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지젤의 둥근 이마에 입 맞추고 속삭였다.
“그거 말고.”
“내가 엘레노어 님과 널 두고 거래를 하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고. 이제 와 다시 온 것도 미안하고.”
이안은 탐스러운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을 가만 듣기만 했다. 당장에 입술을 겹치고 그 안을 가르고 들어가 맛보고 싶었지만, 들어야 하는 말이 있었다.
“너무 늦게 온 것도 미안해. 즉위식부터 시작해서 황궁에서 힘들었을 텐데, 혼자 둔 것도 미안해.”
미안한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지만, 지젤은 똑바로 사과하고 싶었다. 황녀에게 이안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젤은 이안이 죽으려 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엘레노어 황녀가 그건 자신만 알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넌 나랑 같이 죽겠다고 절벽에서도 뛰어내렸는데.”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다른 건데.”
지젤의 턱을 들어 올린 이안이 부드럽게 그녀를 종용했다.
“사랑해.”
그제야 이안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사랑하는 내 지젤. 입술이 겹쳐지고, 그는 그렇게나 갈망하던 그 안을 맛볼 수 있었다. 지젤은 자신의 입 속을 침범한 그를 더 받아내고자 입술을 더 벌렸다. 그러자, 이안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다. 안도와 함께 참아뒀던 정욕이 들끓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탐하던 중 갑자기 이안이 먼저 입을 떼어냈다. 지젤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를 올려다보자, 이안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죽을 때까지 같이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말고, 나랑 평생 같이 있는 거야.
“못 물려.”
이안의 검은 눈이 환희를 담고 휘는 걸 보면서 지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기꺼이 그러겠다고, 무를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이안이 다시 다급하게 입을 맞춰왔기에 소리를 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답 대신 이안의 어깨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이제야 의심을 버리고 확신했다. 걷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 밑으로 추락할지언정 이 안과 함께하면 견뎌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