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34)화 (134/135)

134.

지젤은 마음씨 좋은 꽃집 주인의 배려로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게 위에 딸린 좁은 다락에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마지막에 봤던 이안의 눈물이 떠오르고는 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결혼은 했겠지. 이 작은 마을에선 황국에 대한 소문을 듣기가 어려웠다. 다들 먹고사는 데 바빠 황국까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엘리야의 즉위식이 끝나고 난 뒤, 왕국 사람들은 돌아온 공주에 대해 칭송하고는 했다. 지젤은 나중에 이엘리야를 만나면 즉위식에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이엘리야도 이제 더는 날 찾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완전히 잊히고 난 다음에 얼굴만 보러 가자. 그녀는 본인을 그렇게 다독였다. 잘된 일이야. 그런 생각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그리움이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 젖어 든 베개를 내려다볼 때마다 지젤은 참담해졌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울지 않았는데, 잠들고 나면 눈물이 흘렀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젤은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열심히 가게 일을 하는 데 집중했다. 새벽에 나와서 사람들이 주문한 꽃다발과 바구니를 만드는 일은 꽤나 즐거웠다. 뾰족한 가시를 꼼꼼하게 잘라내고, 미관상 보기 좋지 않은 가지와 잎을 다듬는 일은 제법 재밌기까지 했다. 적성에 잘 맞아서 다행이야. 지젤은 걱정했던 것보다 소탈하게 잘 살아가는 스스로가 뿌듯했다. 단순하게 일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이안 생각을 덜 할 수 있었다.

“비앙카.”

열심히 장미의 가시를 잘라내던 지젤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지젤은 꽃집 주인인 마티스가 가게에 들어서는 걸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수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젤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젤은 그가 죽은 아내를 보러 매일같이 공원묘지에 다녀온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말하길 마티스의 아내는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죽었기에,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에야 겨우 공원묘지에 묻어줄 수 있었다고 했다. 지젤은 그에게 그런 걸 아는 체하지 않았다.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걸 떠나서도 완전하게 이해 못 할 그의 슬픔을 어쭙잖게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온 지 벌써 반년이 다 돼가네.”

“벌써 그렇게 돼버렸네요. 이제 곧 한여름이 되겠어요.”

“내 나이가 이제 마흔인데, 매일 후회해.”

마티스가 뜬금없이 하는 말에 지젤은 손에 든 붉은 장미를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항상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는 사이였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뭔가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나?

“어떤 후회요?”

“아내와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내가 용기가 없어서 청혼을 못 했거든.”

지젤은 마티스의 갈색 눈에 생기가 도는 걸 보면서 작게 탄식했다. 그녀는 문득 이안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마을에 사는 비슷한 또래들은 전부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을 했는데, 난 무서워서 말도 못 꺼냈어. 거절당할까 봐,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지.”

마티스는 갑자기 흘러들어 온 지젤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쳤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다락에서는 새벽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 되면 멀쩡하게 웃고 떠드는 지젤을 보면서 그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아내랑 더 많은 시간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해. 그래서, 비앙카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티스.”

지젤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언가 설명하려 하는데 그가 더 빨랐다.

“네가 처음 왔을 때쯤, 왕국 기사단들이 여자 하나를 찾아다닌 걸 기억해.”

마티스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던 지젤의 하얀 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황국 기사단들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어. 이 구석진 마을까지는 안 올지도 모르지만.”

항구 쪽에 와있다고 들었어. 마티스가 짤막하게 덧붙인 말에 지젤이 미간을 구긴 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걸 저에게 일러주세요?”

“붉은 머리는 아니지만, 푸른 눈에 목소리가 독특한 사람. 한참 수배령이 떨어졌을 때, 수도에서 온 여자를 내가 알고 있거든.”

지젤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 알고도 받아줬군요.”

지젤은 솔직히 놀라서, 작게 수긍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쪽에 아예 관심이 없는 마티스보다는 인근에 다른 상인들이 더 빨리 눈치챌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유심히 날 관찰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마티스, 말할 수는 없지만 내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일단, 여태 숨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얘기를 꺼낸 건 떠나주길 원해서라고 생각했다.

“작년에 다니엘 후작가와 아벨린 남작가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었지.”

그의 말에 지젤이 쓰게 웃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인 이야기였는데 자수까지 했던 다이한이 사라지면서 더 시끄러워졌었다. 지젤은 다이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마티스가 그런 지젤을 가만히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넌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 떠나올 정도로 마음이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이야.”

지젤은 그 말에 양심에 찔려서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었다. 그녀는 겁쟁이여서 도망쳤을 뿐이다. 이안을 따라가기에는 황궁이 무섭고, 이엘리야 곁에 있기에는 왕궁에서의 과거가 너무 짙어서 도망치는 걸 택한 비겁한 사람이었다.

“잘 몰라서 그러세요. 그렇게 떠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저한테 화도 많이 났을 테고. 어쩌면 미워서 찾는 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도 못 잊어서, 잠결에도 이름을 부를 사람이라면.”

마티스가 덤덤하게 하는 말에 지젤은 눈을 깜박였다. 그랬나? 자면서 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래층에 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군 건가. 그녀는 갑자기 창피하고, 부끄럽고 동시에 여태 그걸 이해해준 그가 고마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티스가 그런 지젤을 보며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용기를 내봐.”

“제가 이제 와 용기 내는 게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겁한 일인데요. 제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지금 돌아가면 욕하고 내쫓을 거예요.”

“욕먹고 사과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

“네?”

“마을 사람들은 계속 여기 있을 테고, 네가 돌아오면 반겨줄 거야.”

너도 알겠지만, 정이 많은 시골 사람들이잖아. 그가 안심하라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하는 말에 지젤은 울상 지었다. 이기적인 그녀와 달리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게 그녀를 서럽게 만들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울컥해서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마티스는 그렇게 한참을 지젤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

도널드는 다시 이 작은 나라로 돌아오게 된 신세를 한탄하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라진 지젤 아벨린 찾기에 가장 열심인 황녀와 단장이 얼굴을 아는 기사들이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한 달째 왕국을 떠도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는 멀쩡했는데, 엘레노어 황녀님과 제인은 유난스러웠다.

황제께서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황태자 때 생각이 잘 안 났다. 이안은 이제 그저 화가 난다고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타당한 이유를 대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건 정말 크나큰 발전이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히려 성숙해지기까지 한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왜 그럴까.

도널드는 예전에 이엘리야를 찾아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의미 없이 항구 근처를 빙 돌았다. 그는 기적처럼 지젤을 찾아낸다든가 하는 꿈은 버린 지 오래였다. 반년 전에 꼭꼭 숨어버린 사람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엘리야 님도 너무하셨지.”

도널드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엘리야는 왕국에 황국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만난 도널드에게 반가움을 표하면서도, 그에게 당장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물 한 잔도 내어주지 않는 그녀에게 무척 서운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이해는 했다. 그래서 도널드와 기사들은 황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비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생선이 엄청나게 크네.”

그가 상자에 쌓인 등 푸른 생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찾으라는 지젤은 안 찾고, 생선 구경이나 하고 있는 걸 들키면 큰일이 날 테지만. 어쩌겠나. 다들 못 찾는 사람이 갑자기 떡하니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없고, 포기하면 편했다. 적당히 시간 보내고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도널드가 나무 바구니에 담긴 조개를 구경하기 위해 몸을 쭈그렸다.

“이건 얼마나 합니까?”

평생 내륙에서 살았던 그가 처음 보는 조개가 담긴 바구니를 손짓하며 상인에게 묻자, 무심한 상인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저게 얼마라는 거야. 그가 미간을 구기는데, 아까부터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지젤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은화 세 개 달라네요.”

“아, 은화 세 개.”

고맙습니다. 도널드는 친절한 여성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는 질문을 하나 더 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겁니까?”

“저는 구워 먹으면 좋더라고요.”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그는 고민했다. 브루노까지 여덟 명인데, 얼마나 사가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거지.

“황국에서 다들 잘 지내요?”

지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도널드를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예, 다들 잘 지냅니다.”

황국은 엘레노어 님과 이안 님께서 꽉 잡고 계셔서 딱히 이렇다 할 큰일이 없거든요. 도널드가 무의식중에 대답하며 고심했다. 먹어보고 싶은데, 혼자 먹을 수는 없잖아.

“저 그냥 갈까요?”

“네?”

찾는다길래 왔는데. 지젤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묻는 말에, 도널드가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그 상태로 잠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붉은 머리 여자를 보고 경련을 일으키며 펄떡 뛰어올랐다.

“세상에, 지젤 님!”

지젤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그를 보며 소리를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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