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33)화 (133/135)

133.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인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 건가. 엘레노어는 황제이자 자신의 동생인 이안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동생이 했던 발언을 다시 상기시키고 보니,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딱 1년만 기다리려고.”

내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못한 걸 지젤도 알 테니까. 이안이 반지 상자를 닫고, 소중하게 서랍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뭐?”

“즉위식으로부터 1년, 반듯하게 제 할 일 다 하면서 기다렸는데도 안 오면.”

엘레노어가 다시 만년필을 집어 드는 이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죽어버리려고.”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인이 옳았다. 이안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런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장례식은 오겠지. 걱정돼서라도.”

“너 지금 나 협박하니? 애가 밥 안 먹겠다고, 떼쓰는 수준이네. 내가 네가 죽도록 그냥 둘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이안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엘레노어는 자신이 따지고 드는데도 큰 반응 없는 동생을 보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황궁이 시끄러워지고 물질적 손해를 보더라도, 지젤을 찾아와서 데려다 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정말 미친 거야?”

가만 보고 있자니 이안은 단순히 그녀를 협박하거나, 겁주기 위해서 저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황녀께서 뭐라 생각하든, 관심 없어. 이안이 무심한 투로 내뱉는 말을 들은 엘레노어는 기가 찬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뭐, 다시 오겠다고 약속이라도 한 거야? 그래서 1년을 기다리겠다는 거야?”

“잘하고 있으면 오겠다고 했는데.”

뒤에서 그런 약속을 했다고? 엘레노어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시선을 내리깔자 이안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근데, 모르지. 우리 지젤은 거짓말쟁이니까.”

전과가 있는 사람이잖아. 내가 너무 징징거리는 걸 못 견디고, 적당히 고개 끄덕여준 다음에 잊었을 수도 있지. 그래도 그의 마음 한편에는 착실하게 주어진 바를 잘 맡아서 행하면, 지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존재했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만큼 굳건하고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왜 죽겠다는 건데? 돌아온다며.”

황당함이 잔뜩 묻어나는 엘레노어의 물음에 이안은 자신의 얄팍한 인내심이 1년짜리라고 이야기해주려다 말았다. 그는 그것보다 더 솔직하고 노골적인 생각을 끄집어냈다.

“화가 나서.”

“화가 나서 죽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입에 담지 마. 차라리 데리고 오라고 윽박질러!”

“그러면.”

이안이라고 그러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매 순간 그런 충동을 느꼈다. 언젠가 경고했던 것처럼 지젤의 입을 막고, 발을 묶어서 가둬두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그 미친 후작 놈하고 다를 게 뭐야. 싫어. 그건 못 해.”

그렇게는 안 할 거야. 그는 지젤이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미웠다. 자신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 동전 같은 양면적인 마음이었다. 이안은 지젤이 불리해지거나, 조금만 상황이 틀어지면 제일 먼저 자신을 버린다는 사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지젤에게 겨우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된다는 게 비참하기까지 했다.

“어차피 나한테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날 버리고 간 걸 후회하고 아파했으면 좋겠어.”

언뜻 들으면 심통 난 어린애처럼 그저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피붙이는 지금 진심이었다.

“난 여태 계속 일러줬어. 지젤이 없으면, 살고 싶지 않다고. 근데 다들 무시했잖아?”

당사자인 지젤마저도 그의 마음을 재단하고, 가볍게 여겼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본인을 쉽게 잊을 수 있으리라 단정 짓다니. 날 이렇게 모를 수가.

“그러니,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엘레노어는 가만히, 아주 가만히 이안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안의 철없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철이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절대로 지젤을 향한 이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두고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담담한 어투로 내년에 죽겠다 예고하는 황제를 보며, 엘레노어는 다급해졌다.

이안은 말없이 조용히 나가버리는 황녀를 붙잡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젤을 찾아서 억지로 데려온다 한들, 또 같은 상황을 맞이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위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도망칠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지젤이 제 발로 그를 찾아와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

황궁으로 가던 마차에서 내린 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지젤은 바다를 보러 갈까 싶어졌다. 후작저에 있을 때는 깊은 산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자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나오니 마음이 변했다. 답답함을 느낄 수 없는 탁 트인 곳을, 끝없이 펼쳐진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여차하면 도망치기도 쉬울 것 같았다. 혹시나 누구든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쫓아온다면,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가버리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목줄을 끊어내 도망친 가축처럼 자유로움을 느꼈다.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미 끝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니, 이기적이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후련하면서도, 시원섭섭했다.

그녀는 변장이랄 것도 없이, 갈색 가발 하나만 쓰는 걸로 꽤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여정 내내 지젤의 목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종종 누군가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기도 했다.

“목소리는 왜 그런가?”

지젤은 여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건너편에 앉은 여관 주인이 던진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갈색 눈을 반짝이며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아버지, 아가씨한테 뭐 그런 걸 물어요?”

노인의 딸로 보이는 지젤 또래의 여자가 본인의 아버지를 말렸다. 그녀는 지젤의 눈치를 보며 난처해했는데, 지젤은 그 무례한 질문이 크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아서 놀랐다. 후작 부인으로 있을 때는 받아보지 못한, 아주 오랜만에 듣는 물음이라 신선해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 그때 일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런가. 여관 주인의 물음에 모두 고개를 돌리고, 지젤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제법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호기심 혹은 동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사람들에게 지젤은 웃으며 답했다.

“많이 아팠었거든요. 그 뒤로 이래요.”

지젤이 본인 목을 손짓하며 대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은 건강하고?”

“네, 죽을 뻔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지젤이 웃으며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노인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네.”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킨 노인이 대견하다는 듯 그녀에게 한마디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젤은 푸른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그 이상 어떤 말도 없이 난감해하는 제 딸의 부축을 받고 제 갈 길을 갔다. 홀로 남은 지젤은 가만히 그 말들을 곱씹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도 지젤은 종종 어릴 적 큰 병을 앓은 뒤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해야 했다. 이엘리야가 왕국에 수배령을 내려 지젤 아벨린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후작 부인이었던 지젤 아벨린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화장하지 않고 장신구며 장갑이며 빼고 나니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손목의 흉터가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건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더 궁금해했다.

돈을 그리 많이 챙기지 않은 그녀는 여비로 적지 않은 돈을 썼기 때문에 바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일자리를 구하면서, 지젤은 이곳에 오길 잘했다며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항구 도시라 외지인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는 이곳도, 그녀에게 일거리를 주기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비싼 돈 주고 만들어 놓은 그녀의 신분증이 위조되었다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산이나 숲 근처로 갔더라면, 더 배척되었을 게 뻔했다.

지젤은 귀족 집안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기 때문에 하녀로 일하고 싶었지만, 그게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소개받고, 신뢰받는 사람들만 귀족들의 저택으로 들어가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지젤은 얼마 전 이유 모를 병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의 꽃집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항구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마을에 있는 꽃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혹여라도 병이 옮을까, 꽃집 근처도 오지 않으려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젤이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서야 전염병에 대한 걱정을 던 사람들이 꽃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주인에게는 안된 말이었지만, 지젤은 그래서 일을 배우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이라고?”

지젤은 마차에서 꽃을 내리던 짐꾼 중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꽃을 가게 안쪽으로 옮기며 대답했다.

“수도에서 하녀 일을 했었어요.”

“수도? 그 멀리서 여기는 왜 왔는데?”

“참, 궁금한 것도 많다. 비앙카, 굳이 대답할 필요 없어.”

옆에서 꽃구경하고 서있던 빵집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열심히 대답해줘봤자, 저 아저씨들 기억도 못 해. 내가 그제부터 밀가루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안 가져오는 걸 봐라!”

“아, 내일은 가져올게.”

지젤은 짐꾼 아저씨가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수도 귀족 중 절반이 파산했잖아요. 저도 일하던 곳에서 봉급만 겨우 챙겨서 나왔거든요.”

“비앙카도 고생이 많았구먼.”

짐꾼 중 하나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지젤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지젤은 실제로 하녀로 일했던 비앙카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었다. 비앙카라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녀에게 화를 낼 것 같지 않았다.

“아, 누군가 빵집에 밀가루를 안 가져다주는 바람에 나도 고생이 많아! 정말로 내일 빵 만들 게 없으니, 내일은 꼭 가져와!”

빵집 아주머니가 하는 말에 아저씨들이 움찔 어깨를 떨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지젤은 꽃과 화분을 열심히 가게 안으로 옮기며, 조용하고 소박한 지금의 일상에 만족했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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