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지젤 님이야 워낙 생각도 많고, 고민도 많으신 분이니 도망쳤다고 하지만.”
테오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는 되게 의외네.”
그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이 만든 자리에서 후작에게 다시 찾으러 왔니 어쩌니 했었는데. 테오가 뭐 때문에 황태자가 벌써 변심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데, 이엘리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 황제 얘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말죠.”
이엘리야가 이제는 즉위한 이안의 호칭을 정정해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테오가 눈치 없이 묻는 말에 이엘리야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아주 멀쩡히 업무 잘 보시고, 잘 먹고, 잘 주무신다니까.”
이엘리야는 제인에게 전해 들은 말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둘은 이안이 너무 멀쩡하게, 식사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뭔가 이상하다고 호소했다. 이엘리야는 그게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품에 끼고 안 놓아주더니, 없어졌는데 찾지도 않아? 황국 내에서 찾는 시늉을 두어 번 한 것 같기는 한데, 그건 의미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그 공작인지 뭔지는 황국으로 안 가는 겁니까?”
테오가 아침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슬쩍 꺼내며, 이엘리야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이엘리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몸이 아파서 당장 떠날 수가 없다는데, 내쫓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황국의 공작인데.”
이엘리야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테오는 짧게 혀를 찼다. 왕궁에 남아서 본의 아니게 조나단 보모를 맡은 그는 황국 공작인지 뭔지가 신경 쓰였다. 잠잠해질 때까지 왕자궁에 처박혀있는 중이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시녀들이 떠들기로는 꽤나 잘생겼다던데. 그런 테오의 마음을 읽을 리 없는 이엘리야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여행이든, 뭐든 돌아오기만 하면 좋겠네요.”
“머리를 식히러 가신 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테오가 이엘리야를 위로하기 위해 다정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 테오의 말에 비앙카는 지젤이 머리 식히러 멀리 떠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려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보자고 했으니 그걸 믿는 수밖에 없었다.
***
도널드는 제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원래도 자신의 단장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그가 이해하기 힘들었지마는. 요즘 정도가 심했다.
“문제가 있다니까.”
제인이 엄지손톱을 잘근거리며,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걸 가만히 보던 브루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단장님 말씀은.”
도널드는 자신의 옆에 앉은 브루노가 하는 말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브루노는 단장이 드디어 미친 게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단장이 물러나고 나면, 그 빈자리를 남은 사람들이 채워야 했다. 그는 그렇다면 빈자리들을 메꾸면서 자신도 진급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설레발을 쳤다.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거죠?”
그런 이상한 소리를 계속하시는 거죠? 브루노는 조심스레 그녀를 떠보듯 묻는 걸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널드는 브루노가 10년 안에 단장이 되겠다며 그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인에게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그렇게 되면, 음흉한 속내를 가진 브루노가 미친 제인에 의해 고통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게 문제라고.”
제인의 반복된 단어 선택에 도널드는 괴로웠다. 문제라니까. 문제라고. 문제가 있다니까? 그 소리를 내내 들으니, 잠꼬대를 할 지경이었다. 사실 아직 잠꼬대는 해본 적이 없지만, 혼잣말로 저도 모르게 문제라는 말을 내뱉고 놀라서 펄쩍 뛴 적이 있었다. 이게 바로 세뇌인가 싶어졌다.
“단장님이야말로 문제십니다. 아니, 다 잘 해결된 마당에 왜 그러세요?”
“지젤 님이 없는데, 저 인간이 너무 잘 지내잖아.”
제인의 말에 도널드는 어쩌면 후작 부인을. 아니, 지젤 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건 자신의 단장이 아닐까 싶어졌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집념을 보일 수 없었다. 그냥 식었나 보지. 눈꼴시게 굴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고깝기야 했지만, 마음이 떠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생각보다도 빨리 잊어서 놀랍기는 하지만.”
“윗분들이야 원래도 변덕이 심하잖아요. 새삼 문제랄 것까지는 없다니까요.”
브루노와 도널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제인은 속이 답답해졌다. 도널드는 그런 제인을 보며, 혹시 지젤을 놓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저러나 싶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나.
“왜 멀쩡하신 폐하를, 자꾸 이상한 놈 못 만들어서 안달이세요?”
“그거 불경죄 아닙니까.”
“폐하가 멀쩡해 보여?”
흥분한 제인이 대뜸 도널드의 양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며 눈을 희번덕였다.
“눈을 보면 은은하게 광기가 돈다니까?”
검은 눈을 가만히 보면, 이게 평소랑 다르게 반들거린다고. 제인의 말에 도널드가 얼굴을 구긴 채로 입을 열었다.
“어-, 확실한 건 단장님 눈에서는 광기가 엿보입니다.”
눈에 흰자위가 보이세요. 도널드가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 제인이 깊게 한숨을 쉬며 그를 놓아줬다.
“다들 멍청이야?”
진짜라니까, 왜 모르지. 제인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안은 은은하게 돌아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일단 반응이 이상했다. 분명 지젤 님이 떠나는 꼴을 보고 잠들었는데, 황궁에 와서 별말이 없었다. 지젤 님에 대한 어떤 말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제인이 숨죽이고 눈치만 보자, 그걸 보다 못한 엘레노어 황녀가 이안에게 슬쩍 물었다.
“데려와? 필요하면, 차라리 찾아달라고 해. 뒤에서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찾을 수 있으면, 찾아.”
이안이 큰 기대 하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하자, 엘레노어 황녀는 딱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기사들을 풀어 찾는 척을 했다. 그게 다였다. 그걸 보고도 이안은 별말이 없었다. 끼니를 한 번 거르는 법이 없었고, 잠을 못 자고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다. 예전처럼 술을 먹어야만 겨우 잠드는 그런 일도 없었다. 제인은 그래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엘레노어는 신경쇠약으로 말라가는 제인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당황스러웠다.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당장 찾으러 가겠다며 떠날 줄 알았는데.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즉위식을 받아들였다. 이안을 묶어서라도 즉위식을 진행하게 하려던 그녀로서는 어딘지 난처하기까지 했다.
엘레노어 황녀는 늦은 밤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혀 해야 하는 일들을 군말 없이 해내는 이안을 바라봤다. 원하던 광경이었고,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안은 대신들과 귀족들을 대할 때도 그 어떤 돌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너무 깔끔해서 이질적이었다.
“파혼을 정말 하려고? 광산을 헬렌에게 주겠다고?”
이안은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에서, 흘끔 자신의 누나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응.”
“그 여자를 찾는 게 아니라면, 굳이 파혼할 필요 없잖아?”
이안은 엘레노어의 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뭔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랍에 든 작은 상자를 꺼내 보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벨벳 상자를 본 엘레노어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누가 봐도 보석 상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열어 보인 상자 안쪽에 반지 한 쌍이 자리 잡고 있었다. 푸른 사파이어를 중심으로 작은 다이아몬드와 은으로 세공된 반지는 언뜻 봐도 아름다웠다.
“이거 원래는 내 약혼반지였어.”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지젤의 눈처럼 푸른색 사파이어로 나름 신경 써서 준비했거든. 이안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자랑하듯 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지젤이랑 하나씩 나눠 끼려고 했지.”
엘레노어는 드물게 가만히 서서 이안의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나직하고도 고요하게 말을 잇는 이안의 표정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흉포한 분노를 담은 채 일그러져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중간에서 허튼소리만 안 했더라면.”
그가 화를 참듯 숨을 한 번 참아내며, 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네 번째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마 지금쯤 내 약지에 자리하고 있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지젤의 손에도 잘 어울렸을 거야.”
정말 잘 어울렸을 텐데. 이안이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게 너무 안타깝고, 짜증스러워서 이걸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낸 장인을 죽여버리려다 참았어.”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얘기해. 그-”
“나는 계속 참는 중이니, 건들지 말라고.”
그 여자를 찾아달라는 거냐 물으려던 엘레노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잘라먹은 이안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있었음에도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화가 난다고, 내 누이를 죽일 수는 없으니까.”
“미안한데, 그쪽이 날 찾아와서 먼저 제안한 거야. 너보다 이엘리야가 더 소중했던 거지.”
엘레노어가 비소를 머금으며 하는 말에 이안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상관없었다. 누가 먼저 떠나라 했든, 뭐 때문이든. 이제 그런 이유 찾기는 지겨웠다. 지젤이 제멋대로 했으니 그도 제멋대로 할 생각이었다.
“지젤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파혼은 하고 광산을 내주겠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곱씹어 봤어?”
엘레노어가 따지고 드는 말에 이안의 곧게 뻗은 눈썹이 어그러졌다.
“그렇게, 헬렌 미스틱하고 날 엮어주고 싶어?”
광산뿐만 아니라, 헬렌과의 결혼은 이안에게 득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런 것도 설명해야 하는 게 답답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이득이 되는 대로 움직여야지. 이제 이안도 황제가 되었으니, 더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을 텐데.
“1년만 기다려.”
“뭐라고?”
“1년 있다가, 내 시체를 가지고 헬렌 미스틱이랑 뭘 하든.”
엘레노어는 이안의 말을 듣고 아연해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무슨 시체?
이안이 그런 누이를 가만히 보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관심 없으니까, 그때 가서 알아서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