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지젤은 약 기운 속에 살벌한 말을 내뱉는 이안의 등을 쓸어내리며 계속 사과했다.
“미안해.”
이안이 계속해서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이겨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지젤에게 물었다.
“너 나한테 왜 이래?”
지젤은 분노가 가득 담긴 이안의 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안이 그녀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나한테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도망을 쳐? 날 사랑한다면서, 날 혼자 두겠다고? 아니, 그렇게 안 둘 건데. 이안이 이를 아득 물고, 지젤의 등을 꽉 움켜쥐었다.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듯 구는 그를 보며 지젤은 울상 지었다. 근데, 이쯤에서 떨어져야 했다. 엘레노어와의 약속이었다. 황국이 아닌 왕국 안에서 사라질 것. 그녀는 힘이 빠진 이안을 밀어내며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인과 약속한 수신호였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안간힘을 써서 다시 지젤을 껴안은 이안이 그녀를 원망했다.
“응? 내가 뭐 잘못했어? 그래서 그래?”
말을 해. 고칠게, 그게 뭐든 고칠 수 있어. 바꿀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지젤은 애달프게 그녀를 설득하려 하는 이안을 보며,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지젤, 약혼이 싫어서 그런 거면 안 해도 괜찮아.”
마차가 멈춘 걸 느끼면서, 이안은 지젤을 붙잡고 설득했다. 당장 지젤을 놓치면, 정말 못 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지젤을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좀먹었다. 하나 남은 가족인 이엘리야에게는 황국에 간다고 하고, 날 떠나겠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겠다는 소리 같았다. 그건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제발 그냥 옆에만 있어. 그러기만 하면 뭐든 할게. 정말 뭐든 할 수 있어.
“약혼, 결혼 이따위 것들이 싫은 거면 욕심 안 낼게.”
지젤이 이안의 뺨에 짧게 입 맞추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널 망치고 있어.”
“아니야.”
이안이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정했지만, 지젤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이안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아프게 잡아 누르며 으르렁거렸다.
“아니라고.”
“당장 너한테 해가 되고 있잖아.”
왕국 스캔들을 해결하느라, 즉위식 직전에 가는 황태자가 어디 있어. 지젤이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이안이 분노를 터트렸다. 날 버리려는 주제에, 그런 알량한 동정 따위 집어치워. 그가 입 안을 맴도는 거친 말들을 애써 삼켜내며 헐떡였다.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내가 네가 필요하다고 하잖아.”
“즉위식 잘하고, 정말 존경받는 황제가 되길 바랄게. 그랬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빛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멀리서나마 기도할게.
“내가 어디 있든, 항상 네 편이야.”
지젤은 그가 자신을 빨리 잊기를 바랐다. 황국에 돌아가서 정신없는 일상에 치이다보면 구질구질한 첫사랑, 이기적인 여자애 따위 금방 잊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기가 싫어서, 그냥 가라고 했던 건데. 넌 날 위해 이 모든 일들을 도와줬는데도,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지젤은 새삼 본인이 얼마나 악랄한 인간인지 되새기며 그를 끌어안았다.
“어디, 어디 갈 건데.”
이안이 몰려오는 약 기운을 더는 견디기 힘든지 눈을 반쯤 감으며 하는 말에, 지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안이 다시 물었다.
“내가 잘하면, 그러고 있으면 다시 돌아올 거야?”
지젤은 절박하게 자신의 옷자락을 손에 쥔 채로 묻는 이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쟁이도 이렇게 교활하지는 않을 텐데. 지젤은 완전히 잠든 이안의 얼굴을 두어 번 정도 쓰다듬다가 이제는 힘이 풀린 이안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마차 문을 열었다.
“꼭 안 가셔도 됩니다.”
문 앞에 서있던 제인이 무척이나 찝찝하고 불쾌한 얼굴로 지젤에게 말했다. 엘레노어야 미스틱 가문에게 주기 싫은 광산이 아까워서 이러는 거지만, 제인은 이러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가 답지 않게 지젤에게 주절거리는 걸 다 엿들은 탓도 있었다.
“엘레노어 황녀님께는, 말씀을 잘 드려보는 게 어떠세요? 중간에 이안 님이 깨어나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고-”
“이엘리야를 돕는 조건으로, 떠나겠다고 한 거라. 제가 안 떠나면 이엘리야를 괴롭히실지도 몰라요.”
제인은 태연하게 말하는 지젤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있는 걸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지젤이 그런 제인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고마웠어요.”
제인은 얼결에 그걸 마주 잡고 흔들며, 껄끄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작은 쇠구슬이 마음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 게, 죄책감 같았다. 그녀는 지젤의 손을 쉽사리 놓아주지 못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뭐라고 말을 전해드릴까요? 황녀님께서는 지젤 님이 혼자 도망쳤다고 해달라 하셨지만.”
그래도, 뭔가 전하고 싶다는 말씀이 있으시다면 돌려서라도 제가, 어떻게든 전달해드릴게요.
지젤은 제인의 답지 않은 친절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냥 이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걸 전달을 해드릴게요.”
“아니요, 그 이야기는 아까 직접 했으니까, 굳이 따로 전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지젤의 말에 제인은 당신이 없었던 5년 동안 황태자는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려다가 말았다. 그걸 이야기한다고 지젤이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건 그녀의 죄책감만 키우는 말이 될 뿐이다. 제인은 차라리 이 두 남녀가 평민으로 만났었더라면 행복했을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
눈을 뜬 다이한은,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살짝 어지럽기는 하지만 멀쩡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지젤을 떠올린 그가 주위를 살피고는 침대를 벗어났다.
지젤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죽여 마땅한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날을 갈며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으면서. 자신을 죽이지 않은 지젤에게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의미 없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내달려 지젤의 침실, 서재까지 뒤진 다이한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던 집무실에 들어섰다.
“하.”
그가 허탈하게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갈가리 찢겨 남은 게 없는 초상화를 보면서, 다이한은 고개를 떨궜다. 지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도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오만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지젤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했다. 지젤은 본인을 위해 그를 제 인생에서 완전하게 배제시켰다.
잠시 그렇게 앉아있던 다이한은 몸을 일으켜, 붉은색으로 칠해진 캔버스 조각을 손에 움켜쥐었다. 다이한은 그게 정말 지젤과의 마지막이었음 억지로 받아들여야 했다.
***
지젤 다니엘, 그러니까 지젤 아벨린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왕궁에 도착한 건 나흘 뒤였다. 이엘리야는 왕국 기사단을 이용해 실종된 언니를 찾으려 했으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동시에 가택 연금 중이던 다이한 후작마저 감옥으로 이송되던 중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수까지 했으며, 사형을 선고받을 때도 평온하던 후작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도망쳤는지에 대해 떠들고는 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나돌았으나, 교수대에 가기 직전에 겁을 먹고 도망쳤으리라는 소문에 힘이 실렸다.
“마음먹고 숨으면 찾기 어렵습니다.”
테오가 잠든 조나단을 안은 채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 이엘리야에게 설명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지젤 님이 보통 독한 사람이 아니신지라.”
어설프게 숨을 생각이셨다면, 애초에 사라지지 않으셨겠죠. 테오가 조나단을 침대에 눕히며 하는 말에 이엘리야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을 참으며 비앙카를 바라봤다.
“어디 가겠다든가, 어디가 좋다더라. 이런 사소한 말이라도 생각나는 거 없어요?”
아무거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봐. 절박한 이엘리야가 비앙카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자 그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도를 자주 보시기는 했습니다.”
“지도? 어디? 왕국? 황국? 아니면, 동대륙?”
“세계 지도를 보셨습니다.”
지명도 잘 안 보이는, 이만한 종이에 대륙을 다 적어둔 지도. 비앙카의 설명에 이엘리야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뭔가 알 리가 없지. 아무리 언니가 걱정되어도 세계를 다 뒤질 수는 없었다.
테오가 그런 이엘리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계 여행을 간 건가?”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비앙카가 눈썹을 까딱이며 하는 말에 테오가 입을 삐죽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알려주고 가야지.”
이엘리야는 지젤이 자신과 비앙카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주고 떠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이 얼마 없을 텐데,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야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부유한 후작저에서 지냈던 언니가 잘 지내고 있을지 확신이 안 들었다.
“황태자, 아니 황제는 뭐랍니까?”
테오가 이안을 거론하자, 이엘리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차며 테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 태도에 상처받은 테오가 비앙카를 바라봤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러자, 비앙카가 차분하고 덤덤하게 설명해줬다.
“즉위식을 무사히 끝내셨다고 합니다.”
“지젤 님은 안 찾고?”
“네.”
그의 대답에 테오가 눈썹을 과장되게 들어 올렸다.
“안 찾았다고? 세기의 사랑인 것처럼 굴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