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30)화 (130/135)

130.

황가의 사람들이 드디어 왕국을 떠나는 날, 왕궁 앞은 마차들로 가득 들어찼다. 이안은 지젤에게 불만이 많았다. 새벽부터 말없이 후작저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짜증 나는데, 가서 뭘 했는지 말을 안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본인이 얼마나 큰 서운함을 느꼈는지 나중에 따질 예정이었다. 일단, 황궁에 데려다 놓고. 이안이 음험한 속내를 숨기며 이엘리야와 지젤의 이별을 바라봤다.

“언니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엘리야가 지젤의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에 이안이 눈을 희번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황궁에 가면 고생만 잔뜩 할 텐데. 여기 있으면, 지금은 좀 정신없지만 편할 거야.”

“그건 그런데.”

지젤의 긍정 어린 대답에 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내가 떠나는데, 여기 있고 싶다고?

“언니,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후작과 한센에 대한 형도 곧 집행될 텐데, 그건 보고 가야지.”

“안 돼.”

이안이 지젤의 뒤에 서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젤이 아닌 이안의 입에서 나온 거절에 이엘리야의 눈이 세모나게 변했다. 네가 뭔데요?

“저하께서야 하루 빨리 황국에 가셔야 하지만, 저희 언니는 쉬었다 가도 되잖아요.”

“내 약혼녀 없이 약혼을 하라고?”

이안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애써 삼키며 이엘리야를 노려봤다. 이엘리야는 난처하다는 듯 웃는 지젤을 보며 어깨를 반듯하게 편 채로 기죽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지젤의 든든한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다. 이안이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약혼식이야 미루면 되잖아요?”

“안 돼.”

“왜요?”

“우리 지젤은 갈대 같아서 안 돼.”

이안이 짐짓 진지하게 내뱉은 말에 마차에 짐을 싣던 도널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갈대만큼 가늘다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닌데, 하여튼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토끼처럼 오물거리니 어쩌니 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도널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황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데, 제인은 진지하게 멈춰 서서 고민했다. 왜 갈대지. 모두가 황태자를 포기할 때도, 그녀는 항상 이해는 못 할지언정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

“갈대요? 저희 언니가 왜 갈대죠?”

“이리저리 바람 따라 휘니까.”

이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젤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 변덕이 들끓어 도망가겠다고 할지 모르니까, 마음먹었을 때 도장 찍어놓아야 해.”

지젤은 화사하게 웃으며, 살벌한 어투로 속삭이는 이안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콧잔등이 구겨질 정도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자신의 동생을 다독였다.

“이엘리야, 너무 걱정하지 마.”

“언니, 황궁이 너무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제인은 아까부터 살살 황태자의 성질을 긁고 있는 이엘리야를 보며 입을 샐쭉거렸다. 그 뒷감당 전부 우리가 할 텐데, 왜 그러십니까. 이엘리야가 더 해주지 않아도, 황태자는 길길이 날뛸 예정이었다. 제인은 황녀, 엘레노어가 맡긴 임무 때문에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너야말로 잘 지내. 잘 마무리하고.”

다정하게 속삭인 지젤이 이안을 밀어내고는, 이엘리야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안이 무언가를 할 틈도 없이 이엘리야가 지젤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그걸 본 이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언니, 자주 와야 해. 난 달리아 백작님과 비앙카가 있으니까, 걱정 말고.”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전 바르한 자작도 데리고 있잖아. 이엘리야가 작게 속닥거린 말에 지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엘리야, 내가 어디에 있든 언제나 난 네 편이야.”

지젤이 따스하게 이엘리야를 끌어안으며 하는 말에 모두들 훈훈함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황태자만 빼고 말이다. 이안의 눈가가 질투로 바르르 떨렸다.

그 꼴을 본 제인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로한 공작? 그 어린애는 왜 왕국에 남겠다는 거지. 제인은 뻔뻔하게 몸이 안 좋다면서 거짓 기침을 내뱉으며, 왕궁 한 편에 자리 잡은 공작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냈다. 당장 앞으로 있을 일이 걱정이었다.

***

황국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 지젤은 이엘리야가 챙겨준 쿠키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하얀색 슈가 파우더에 굴린 동글동글한 초코쿠키가 먹음직스러웠다. 왕국을 벗어나려면 한참 걸리니까. 지젤은 아까부터 본인이 빠졌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옆에 찰싹 붙어있는 이안을 올려다봤다.

정말 멀쩡하게 잘생겼는데,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까. 지젤은 그의 유치한 질투에 대해 뭐라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그냥 이렇게 잠시 즐기기로 했다.

“나도 해줘.”

품에 쿠키 상자를 꼭 안고 있는 지젤을 보며 입을 삐죽인 이안이 말했다.

“뭘?”

“나도 끌어안아주면서, 네 편이라고 해줘.”

“이안.”

네가 이제 곧 황제라는데. 네가 나이가 열 살, 아니, 스무 살인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질투하면 안 되지 않을까? 지젤은 하고 싶은 많은 말을 눈으로 담아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안이 미간을 구기며 입을 삐죽였다. 그걸 가만히 보던 지젤은 쿠키 상자에서 쿠키를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아-.”

이안은 잠깐 주저하는 듯하다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더니 냉큼 입을 열어 밀가루 덩어리를 받아먹었다. 달콤쌉싸름한 쿠키 맛이 입에 퍼지면서, 기분이 좀 괜찮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양 볼에는 심술보가 가득 붙어 있었다. 이 어린애가 황제가 된다니. 물론 이안이 자신의 앞에서만 이러는 걸 알지만서도. 그 간극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끔 제인은 이안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고, 엘레노어는 한심한 바보 취급을 했으며. 이엘리야는 대놓고 끔찍한 인간이라 칭했다. 그러나, 지젤이 보기에 이안은 그저 애교가 많고 그만큼 질투도 많은, 독점욕이 줄줄 넘치는 어린애였다.

“나도 똑같이 해 줘.”

어서 안아주고, 언제 네 편이라고 해. 이안이 그녀를 재촉했다. 지젤은 그런 이안을 달래려는 듯 쿠키 두어 개를 더 먹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랑해.”

지젤이 그의 입가에 묻은 흰 가루들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자신의 손가락도 깨끗하게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이안이 요구를 뛰어넘은 지젤의 고백에 고개를 기울였다.

“지난 5년 동안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밤하늘의 별이 빛나듯 이채가 도는 그의 눈을 보면서, 지젤은 살풋 웃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거짓 없이 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했다.

“난 항상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갑자기 이안이 지젤의 허리를 확 잡아챈 뒤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과 따스한 체온에 지젤의 눈이 웃음을 담고 휘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두드리는 그의 혀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이안도 그렇게 깊게 입 맞출 생각은 없었는지, 빠르게 물러났다. 지젤이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자, 이안이 뭔가를 참아내듯 작게 신음하며 지젤의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계속해.”

이안이 탁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계속 얘기해 줘.

“왜냐하면, 네가 날 사랑해줘서 난 행복했거든.”

달았다. 너무 달아서 문제였다. 이안은 지젤이 그의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달아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다. 엘레노어는 지젤의 앞에서나 그녀와 관련된 문제에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구는 그를 비난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지젤은 이안의 이성을 좀먹고,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넌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지젤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의 양 뺨을 잡아 쥐었다. 이안은 지젤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그제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가 뭐가 문제인지 묻는 말에 지젤은 입을 다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응?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이안이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뺨에 입 맞추자, 지젤이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너한테.”

그녀는 목이 메어, 가뜩이나 갈라진 목소리가 더 기괴하게 나오는 걸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더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었는데.

“너한테 사과한 적 없지?”

“네가 나한테 왜 사과를 해?”

말을 마친 이안이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가락 끝이 얼얼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가 잠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젤을 바라만 보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그녀의 사과에 불안해진 이안이 입을 열었다가, 둔해진 혀를 느끼고 쿠키 상자를 내려다봤다. 지젤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굴리는 이안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너한테 제대로 사과한 적이 한 번도 없다니, 창피하네.”

“지젤.”

이안이 기가 막힌다는 듯 그녀를 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즐겁거나, 우스워서 나온 웃음이 아닌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안은 푸스스 웃었다. 지젤이 그런 이안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

“하, 너 진짜.”

마취? 수면제? 뭔지 모르겠지만, 몸을 점점 제 뜻대로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마차가 일렁거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 똑똑한 머리로 독극물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한 거야? 이안이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 지젤을 찾아내 꽉 힘줘 끌어안으며 이를 아득 물었다.

“너 못 가.”

지젤이 고통에 신음할 정도로 그녀를 우악스럽게 품에 안은 그가 씨근덕거렸다.

“어딜 가려고.”

이안은 간사하고, 교활한 지젤을 황궁에 묶어두리라 다짐했다. 이쯤 되니, 그래도 정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지젤의 발목에 쇠사슬을 엮어두고 제 침실에 묶어둘 것이었다. 또 어떤 술수를 써서 도망칠지 모르니 자신 외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해도 아무도 자신을 비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가려면, 날 죽이고 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