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9)화 (129/135)

129.

사랑이 될 수 있는 걸까. 지젤은 가만히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애썼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그걸 그만뒀다. 두통이 일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지젤은 최대한 덤덤하게 보이려 애썼지만, 찻잔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다이한은 지젤이 자신에게 내어주지 않은 찻잔을 혹여라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갈까 주시했다.

“내가 기억을 잃은 척, 네 말을 잘 듣는 걸 보니 제법 괜찮았어?”

“그게 중요해?”

“아니면, 왕비에게 뺨을 맞고 왔다 했던 그날부터? 그때, 당신 나 되게 불쌍하게 봤잖아.”

길가에서 다친 강아지를 보는 사람처럼, 걱정하고 동정했잖아. 지젤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말들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뭔가 부성애 같은 걸 느꼈나?”

다이한은 지젤의 비웃음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찻잔만 바라봤다. 극약일까,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리는 약일까. 시간이 좀 걸린다면, 옆에서 기다려줄까? 끝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이한은 이런 생각들을 지젤이 알면 소름 끼쳐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응? 언제부터 사랑했는데?”

“그러는, 넌.”

“뭐? 널 언제부터 사랑했냐고?”

지젤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며 되묻자, 다이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황태자를 언제부터 사랑했는데.”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천천히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이안을 언제부터 사랑했냐고. 어느 순간 스며들듯,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거기까지 생각한 지젤은 불신을 숨기지 못하고 다이한을 올려다보며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네가 날 처음부터 사랑했어?”

다이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지젤을 눈에 담았다. 그는 지금은 죽은 마가렛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럼, 그거 사랑 아니야.”

지젤이 몸이 잘게 떨릴 정도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이한은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지젤을 보며 침묵을 고집했다. 그녀가 그런 그에게 다시 말했다.

“네가 하는 그건 사랑이 아니야.”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냉담한 얼굴로 그녀를 대하던 그 표정이 선명했다. 결혼식 날 밤, 그가 했던 조롱들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네 가족과 미하엘을 죽이겠다 손등을 짓밟던 발도 떠올랐다.

“그건 사랑일 수가 없어. 다른 이유를 말해.”

“사랑해서 그랬어.”

마지막 순간까지 지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이한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숲에서,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막 가져다 붙이지 마. 그건 그렇게 쓰이는 단어가 아니야.”

네가 네 면죄부로 이용할 수 있는 말이, 감정이 아니라고. 지젤은 무표정한 다이한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랑한다고?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고? 그럼 왜 나한테 처음부터 고백하지 않았어? 차라리 그랬더라면. 적어도 상황을 최악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할수록 지젤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아니, 네가 날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미안해.”

다이한의 사과에 지젤이 입을 벌린 채로 푸른 눈을 깜빡였다. 지젤의 손에 들린 찻잔이 떨리며, 찻잔을 가득 채우고 있던 찻물이 범람했다. 그는 지젤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뚝뚝 흐르는 투명한 눈물을 엄지로 스치듯 닦아주며 사과했다.

“무지한 내가 내 감정 때문에, 이기적으로 굴어서. 네 인생을 휘둘러서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노래도 부를 수 없게 만들어서. 네 가족도, 사랑도, 꿈도 잃게 해서. 지젤은 정작 본인의 눈물을 닦지도 못하면서 이쪽의 눈물을 걱정하듯 닦아내는 다이한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마저도, 네 탓해서 미안해.”

네가 날 견뎌내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 비난해서 미안해. 다이한이 헐떡이며 내뱉는 말에 지젤은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그가 그런 지젤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고백했다.

“근데, 정말로 사랑해서 그랬어.”

“만약에 내가.”

지젤은 자신의 얼굴에 닿는 다이한의 손을 천천히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이 뭔지 몰랐더라면.”

다이한은 순순히 그녀가 밀리는 대로 멀어지며, 지젤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 걸 기다렸다. 두어 번 심호흡을 끝낸 지젤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사랑이 뭔지 몰랐다면.”

그녀의 다음 말을 예상한 다이한이 쓰게 웃었다. 지젤은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날 사랑해서 그랬다고 믿었을지도 몰라.”

내가 너처럼 무지했더라면, 이렇게 날 아프고 괴롭게만 하는 사람이 주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을지도.

“드문드문 느껴지는 네 다정함에,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지젤이 얼굴을 적신 눈물을 손으로 훑어내며 본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적어도 내게는 그래.”

“나는 사랑이었어.”

다이한이 지젤을 보며 덤덤히 설명했다. 무지하고, 애정을 못 배운 나는 그게 사랑이었다고. 동의를 구하지도,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은 그는 그게 멍청한 본인의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지젤은 그런 그에게 찻잔을 내밀며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럼, 증명해봐.”

다이한은 지젤이 아까부터 손에 꽉 쥐고 있기만 했던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끝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한 게 네 나름대로의 사랑이라는 걸 증명해.”

다이한은 지젤이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며,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지젤을 향해 물었다.

“끝까지 있어줄 건가?”

지젤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 삼켜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한은 망설임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지젤은 그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보며, 입 안의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본인이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이한을 용서할 수 있나? 비로소, 그를 용서하는 걸까? 그럼 이제는 편해질 수 있을까.

찻잔의 바닥이 보이도록 비워낸 그는 그걸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젤은 그가 뭘 하는 건지 조용히 주시할 뿐, 그를 따라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가 집무실 책상에 가서 앉거나 침실로 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지젤의 옆으로 왔다. 그가 조심스레 지젤의 어깨에 기대앉으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마지막이잖아.”

지젤은 목을 간질이는 그의 금발을 느끼며 입을 틀어막았다.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우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복수를 다 끝내고, 드디어 모든 것들과 작별하는 건데 왜. 지젤은 다이한을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그가 그녀에게 다정한 면모를 보여줬다 한들, 과거의 일들이 희석될 순 없었다.

“그러니, 조금만 자비를 베풀어.”

지젤이 아무 말이 없자, 다이한이 지젤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지젤은 어딘지 편안해 보이는 다이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그녀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지젤은 잠깐 주저하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5년. 5년 동안 매일 보던 얼굴이었다. 매일같이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이었는데.

다이한은 오른손을 들어 구겨진 지젤의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지젤은 그의 오른손에 끼워진 다이아 반지를 보고 작게 실소했다. 다이한은 기괴하게 일그러진 지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본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다이한은 지젤의 푸른 눈동자와 동그란 이마, 붉은 머리카락, 오뚝한 콧날. 따스한 입술 따위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치 그림을 덧그리듯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는 이게 본인의 마지막임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적어도 지젤을 대신해 초상화를 끌어안고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가늠하던 지젤은 이제는 정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요하게 잠든 다이한을 옆으로 밀어낸 뒤 눈물을 다 닦아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부터 문 앞에 서있던 노집사를 보고 입을 열었다.

“칼 있나요?”

“카, 칼을 왜-”

지젤은 집사에게 그런 걸 물은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이한의 책상 서랍에서 능숙하게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집사는 날카로운 쇠붙이를 든 지젤을 경계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부욱-.

지젤은 단검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찢어냈다. 캔버스가 단검에 찢겨나가는 기괴한 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그렇게 누굴 그린 건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어서야 검을 내려놓았다.

왕궁의 시위들에게 알려야 하나, 아니면 이 또한 공주의 뜻인가, 고민하던 집사는 지젤이 문 쪽으로 다가서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그런 노집사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다이한이 일어나거든,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말해주세요.”

재판은 받아야겠지만, 여차하면 다이한은 도망칠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다. 지젤은 거기까지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오늘부로 이제 그와 자신의 악연은 끝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 그렇게 결론 내리기로 했다.

“사, 살아계십니까?”

“하루 정도 지나면 깨어날 테니, 걱정 마세요. 다시는 보지 말자고 전해주세요.”

그녀의 부탁에 놀란 집사가 소파에 누워있는 다이한을 향해 달려갔다. 지젤은 그런 그에게 어떤 설명도 다른 말도 남기지 않고 홀가분하게 후작저를 떠났다. 다니엘 후작가에서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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