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8)화 (128/135)

128.

“그래요.”

지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후작이 끌고 갔으니까, 그래. 사람을 둘이나 죽였으니 죗값을 받은 거라는 집사의 말도 옳았다. 집무실을 나서던 집사가 잠시 주저하다가 그녀에게 일러줬다.

“끝까지 반성을 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랬다고 하던가요?”

“이해 못 할 말을 잔뜩 했는데, 후작가를 위해서 그랬다고 했다더군요.”

집사가 미간을 구기며 하는 말에 지젤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집사는 어딘지 초연해 보이는 지젤을 보며, 그녀가 후작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해보려 했다가 이내 그만뒀다. 어차피 후작과 후작 부인의 관계를 제3자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불쌍한 지젤이 마음의 짐이라도 덜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무실 문을 닫았다.

***

다이한은 별채에서 오스틴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초상화를 들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굳어 들었다. 다이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지젤을 보며 초상화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액자가 어긋났다.

“맞아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은 지젤이 가볍게 인정했다. 문가에 서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다이한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돌아왔어요.”

그제야 다이한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다이한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지젤이 눈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돌아올 수밖에 없더라고.”

다이한은 그녀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재판 내내-”

“목 아프니, 앉아요.”

지젤이 그의 말을 끊어내고 한 번 더 자리를 권하자 다이한은 군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지젤은 그가 소파 옆에 세워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후회했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덤덤한 얼굴을 한 후작이 별채에서 미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오다니.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재판이 마음에 안 들었나?”

“왜 그 자리에서 본인에게 불리한 자백을 했어요?”

지젤은 다이한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그러자, 다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왔지?”

“저 초상화는 왜 가지고 왔어요?”

다이한은 지젤의 푸른 눈에 일렁이는 분노를 보고 눈앞의 찻잔을 내려다봤다. 그는 저 차가 뜻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고, 그건 지젤도 마찬가지였다. 지젤이 장갑에서 유리병을 꺼내며 재차 물었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아까까지 느꼈던 평온이 거짓인 것처럼,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이한은 이번에도 뭔가 수긍하듯 지젤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까지 기다리기 힘들었나. 황태자와 떠나야 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고.”

지젤이 재차 묻는 말에 다이한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자신이 죽인 하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 하녀가 그러더군.”

하녀라고 하면, 미아? 지젤이 날카로운 눈으로 다이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까딱였다. 뭐든, 어서 말해보라는 태도에 다이한이 말을 이었다.

“후작 부인이 아직 자신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다이한은 미아가 엉엉 울면서 하는 말들을 쉽게 흘려듣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은 미아가 정신분열증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이한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미아의 말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녀와 그의 공통점은, 지젤을 사랑한다는 점과 그녀에게 애정을 강요하는 동시에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방법으로 지젤과 억지로 결혼했고, 미아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었다. 동시에 둘 다 본인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다이한은 지젤을 소유하기를 원했고, 미아는 평온이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그래서?”

지젤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

다이한의 성의 없는 대답에 지젤은 숨을 들이마시며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당해줄 거라고?”

다이한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이 연갈색 액체로 가득 차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더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 들통난 마당에 지젤이 자신을 사랑해줄 리 만무하다는 건, 그건 그도 알았다. 근데, 그는 지젤에게 그만 미움받고 싶었다.

지젤은 다이한의 찻잔을 채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상화를 향해 주전자를 집어 던지려 했다. 그걸 빠르게 눈치챈 다이한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말렸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원하는 대로 당해줄 거라면서. 난 저 초상화를 네가 보는 게 싫어.”

내 얼굴을 네가 보는 게 싫어. 제대로 완성된 것 같지도 않은 저 그림을 들고 이제 와 애잔한 척하는 게 역겨워. 다 당해줄 거라고? 반성한다는 듯이 굴지 마. 지젤의 비난에 다이한은 이를 아득 물었다.

“차라리 조지 콜튼처럼 끝까지 악독하게 굴어. 이제 와서 덤덤히 받아들이지 마.”

지젤이 초상화를 정말 망쳐내려는 듯 다이한을 밀치고 주전자를 집어 던졌으나 빗나갔다. 사기로 된 주전자가 바닥과 충돌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고, 찻물이 초상화 끝부분을 물들였다.

“저 그림은.”

다이한은 본인의 찻잔도 집어 던지려는 지젤의 손목을 꽉 잡아 쥐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저건 내 거야.”

지젤은 다이한의 연녹색 눈에 비치는 자신의 푸른 눈을 보면서 손을 바르르 떨었다. 다이한은 다이한대로 저 그림만은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지젤은 자신을 그린 그림 한 장도 그에게 내어주기 싫을지 몰라도, 다이한은 저것만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저 그림은 줄 수 있잖아.”

다이한이 이를 악물고 하는 말에 지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저걸 가진다고 널 괴롭게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저 정도는 줄 수 있잖아.”

유일하게 그가 가질 수 있는 그녀였으며, 누구에게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아까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다이한은 지젤을 황태자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벌였고, 그래서 끝까지 이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는 지금도, 그의 마음 안에서 삐뚤어진 욕망이 그를 종용했다.

데리고 사라져 버리자,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저깟 기사들 몇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었고, 작정하고 대륙을 넘어가버리면 누구도 찾지 못했다. 지젤은 평생 자신을 미워하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 여태 계속 미움받아왔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데. 이번 생에는 틀렸으니, 사랑을 속삭이는 건 포기하고 갈증이라도 채워.

“놔.”

지젤이 힘없이 다이한의 손을 떨치려 하며 하는 말에 다이한이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심호흡하듯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재판이 마음에 안 들었냐고?”

다이한이 아까 했던 질문을 곱씹은 지젤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아까보다 색이 짙어진 듯한 다이한의 녹색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거였는데.”

죽은 우리 남작가 사람들만큼, 내가 참아야 했던 분노를 해소할 만큼. 발버둥치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길 원했어. 지젤이 눈시울을 붉힌 채 분을 참으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한센 경은 그랬거든. 내 발밑에서 몸부림치고 아파했어.”

지젤은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을 천천히 빼앗아 들고는 자신이 가져온 독약을 부었다. 다이한은 그 찰나에 스치는 그녀의 체온에 어깨를 굳혔다.

“정말 마지막으로 물을게.”

신중하게 대답해 줘. 지젤이 떨리는 목소리로 찻잔을 든 채로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노래 때문이라는 둥.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지젤은 예전에 그가 했던 얘기를 들먹였다.

“왜 그랬어?”

다이한은 지젤이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던, 그 질문을 듣고 입을 벌린 채로 숨을 멈췄다. 왜 그랬냐고. 예전에는, 결혼 초에는 나도 그게 궁금했었다.

나는 왜 네 노래를 숨어서 들었고, 잊지 못했는지. 가지 않아도 될 아벨린에 굳이 가서 널 후작가로 들여 보호하겠다는 핑계로 너와 결혼했을까. 네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지. 네가 날 죽이고자 독약을 먹는 걸 알면서도, 그걸 마실 수밖에 없는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만회하고자 하는지. 왜 널 놓아주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정말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지젤이 그의 손에서 빼앗았던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널.”

다이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젤은 그의 붉어진 눈가에서 흐르는 투명한 눈물을 보고 작게 탄식했다. 다이한은 그녀가 어차피 이해 못 할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굳은 혀를 움직였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랑해서.”

지젤은 그가 저번에 무릎 꿇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는 사과할 수 없다며 울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랑을 고백하며 울고 있었다. 항상 굳건했던 사내가, 재판을 받는 내내도 고개 한 번 숙이지 않던 후작이 우는데 통쾌하기는커녕 속이 쓰렸다.

“널 사랑해서 그랬어.”

다이한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젤은 눈물로 젖어 드는 다이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다봤다.

“사랑이라니.”

그 모든 폭력적인 행동들을 포장하기에는 밝고 희망찬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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