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7)화 (127/135)

127.

이안을 따라 황국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지젤은 한센과 미아, 후작을 떠올렸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이엘리야의 옆에서 일을 거들어주느라 바빴고, 황태자가 이엘리야의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작가에 가볼까 고민하던 지젤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터에 가봤자였다. 대신에, 지젤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잘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왕궁의 지하 감옥에 갇힌 한센은 찾아가지 않았다. 한센도 어렴풋이 자신의 끝을 예감할 것이었고, 굳이 가서 확인 사살하고 싶지 않았다.

후작저로 가기 전, 자신을 찾아온 비앙카를 보며 지젤은 환하게 웃었다. 이쪽이 부르기도 전에 먼저 와주는 눈치 빠르고, 똑똑한 아이였다. 비앙카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지젤을 마주봤다.

“제법 잘 어울리네.”

그렇게 칭찬한 지젤은 비앙카가 입고 있는 왕궁 기사단 정복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더 이상 여장할 필요는 없기에 짧게 자른 붉은 머리가 푸른색 정복과 정말 잘 어울렸다. 이렇게 보니, 평민이 아닌 번듯한 귀족가 영식 같았다. 사실, 기사단에 평민은 드물었지만 공주 뒷배로 들어갔으니 누가 뭐라 할까. 어차피 하는 일도 다를 텐데.

“여기.”

비앙카의 소매의 끝이 풀린 걸 보면서, 지젤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비앙카는 어딘지 아슬아슬해 보이는 지젤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젤이 그런 비앙카의 소매 끝 매듭을 묶어주며 설명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고리를 만들어야 풀리지 않아. 지젤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지젤 님.”

“응?”

지젤이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5년 동안 여성복만 입힌 게, 속상할 정도로 잘 어울리네.”

네 얼굴이 워낙 미인상이라 그 옷들도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지젤이 장난 섞인 투로 웃으며 하는 말에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같이 갈까요?”

그의 물음에 지젤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비앙카에게 물었다.

“황국에 가고 싶어? 우리 비앙카, 그릇이 커서 왕국 기사단으로는 만족이 안 될까?”

“혼자서는.”

비앙카의 말에 지젤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다들 지젤이 황국에 간다고 알고 있지만, 비앙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5년 동안 붙어있으면서 그녀에게 대해 많이 알게 된 비앙카가 말을 이었다.

“혼자서는 자리 잡기 힘드실 겁니다.”

어딜 가시든. 비앙카의 말에 지젤은 잠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테오한테 다정한 사람이라 칭찬해줬지만, 정말 다정한 사람은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보기보다 정이 많아서,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고 여장도 불사하며 곁을 지켜줬다. 심지어, 이엘리야를 구해주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의 형이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걸 잘 알기에, 지젤은 비앙카가 더 고마웠다. 그런 아이에게, 고단할 게 뻔하니 혼자 못 가겠다며 같이 힘든 길을 가자고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만큼 고마워.”

너는 돈을 받은 만큼 했다고 하지만. 지젤은 진심을 담아 비앙카에게 고맙다 말했다. 지젤이 비앙카의 투박한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정말로. 지젤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비앙카가 그녀의 손을 꼭 맞잡으며 말했다.

“같이 갈게요.”

“그럴 필요 없어. 의뢰는 끝났잖아.”

“지젤 님께서.”

비앙카가 드물게 지젤의 말을 반박했다.

“언젠가 저보고 동생 같다고 하셨잖아요. 어느 동생이 누이가 이렇게 떠나는 걸 보내줘요.”

“그래서야.”

지젤이 고개를 내저으며 비앙카의 손등을 토닥여줬다. 비앙카는 작고 메마른 손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걸 조용히 내려다만 봤다.

“너도 완벽하게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봐야지.”

“그럼, 지젤 님은요?”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지젤은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테오도 그렇고, 날 많이 걱정해주네. 우리 처음에는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 지젤은 잠깐 고민하다가 양팔을 벌려 비앙카를 당겨 안았다. 목석처럼 굳어 서있는 그를 끌어안은 지젤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이엘리야를 잘 부탁해.”

지젤의 말에 비앙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이게 좋은 결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복수를 하겠다고 자신을 깎아먹던 것보다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5년을 참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지젤이 원하는 대로 그녀를 마주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도 널 잘 챙기고.”

이엘리야가 시킨다고 해서, 너무 험한 일까지 하지는 말고. 지젤은 묘한 부분에서 아이같이 구는 비앙카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비앙카가 그런 지젤의 어깨를 꽉 잡아 쥐며 눈을 감았다.

“네.”

지젤은 자신과 엮여 고달픈 일만 가득했던, 불쌍하고도 고마운 비앙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했다. 테오에게서 받은 자금 대부분을 비앙카와 이엘리야의 명의로 남기기는 했지만, 지난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그것들은 완전한 보상이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지젤은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오시나요?”

비앙카의 물음에 지젤은 쉽게 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 잊히고 나면, 혹은 너희가 너무 그리워지면. 내가 많이 치유되고 나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또 보자.”

지젤의 기약 없는 약속에 비앙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정말 가기 싫어질 것 같으니, 이만 갈게.”

지젤이 비앙카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소리 내 웃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홀로 남은 비앙카는 지젤이 묶어준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

“텅 비었네.”

지젤은 말 그대로 텅 빈 후작저에 들어서며, 쓰게 웃었다. 반역죄라는 소리에 사용인들이 다 도망갔는지 사람이 없는 듯했다. 기사들을 이끌던 한센 경이 감옥에 갇힌 탓일까. 혹시나 연루될까 두려웠는지 입구를 지키는 후작의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왕국 기사단들이 감시하던 저택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지젤은 이엘리야가 써준 허가증을 내밀고서야 저택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기사들은 해도 다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찾아온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는 했지만 허가증이 있으니 막지는 않았다.

지젤은 그렇게 저택에 들어서며 인상을 구겼다. 먼지 하나 없고, 언제든 환하도록 촛불을 켜놓은 걸 보니 누군가 집을 돌보기는 돌보는 것 같았다.

“지젤 님.”

지젤은 남아있는 노집사를 보고 작게 수긍했다. 비록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부족했지만,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노집사를 미워하는가 고민하다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에게는 악감정이 없었다.

“아직 계시네요.”

노집사는 지젤의 옅은 미소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님께서 계시니까요.”

지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노집사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택 연금중이니까, 이 저택 어딘가에는 있겠지. 지젤이 저택 안을 살피는 걸 보던 노집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후작님을 보러 오신 겁니까?”

그의 물음에 지젤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엘리야가 써준 허가증을 내밀었다.

“네, 차나 한잔할까 해서요.”

지젤이 덤덤하게 하는 말에 노집사는 잠시 주저했다. 그녀의 친정을 불태운 게 후작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 지금, 지젤을 저택으로 들이는 게 현명한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집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별채에 가셨는데, 금방 오실 겁니다. 항상 드시던 차를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우리가 항상 먹던 그 찻잎이 아직 남았나요?”

“네.”

지젤은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요.”

“집무실에 주로 계시니, 그곳에 가있으세요. 제가 후작님을 마주치게 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집사가 다른 찻잎으로 차를 내어온다고 해도 괜찮았다. 이미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지젤은 장갑 안쪽에 든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2층으로 올라섰다. 계단을 올라서면서 지젤은 이 저택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계단을 다 올라섰을 때쯤, 지젤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다 끝났음을 깨닫고 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다이한의 집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원목으로 이루어진 책장과 책상, 그리고 검은 가죽 소파를 훑어보면서 그녀는 이곳에서 무릎 꿇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다. 다 마무리가 된 일이라 그런 걸까.

지젤은 본인이 평온함에 굉장히 놀라며,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이 전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수도승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지젤이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이 집사가 쟁반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후작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

“혹시.”

찻잔과 찻주전자를 내려놓던 노집사가 지젤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지젤은 자신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집사에게 물었다.

“미아는 어떻게 되었나요?”

“미아는.”

잠깐 굳어있던 집사는 찻잔을 마저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서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수도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미아가 가지고 있던 귀금속들은 그 가족들에게 전해줬습니다.”

그의 말에 지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구나, 죽었구나. 후작이 지하실에 끌고 갔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미아가 전부 자백했습니다. 의원을 찾아가 살해하고, 황국 기사단을 찾아온 샤론까지 죽인 것도. 화가를 죽이려고 했다고 시인도 했습니다. 사람을 둘이나 죽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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