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6)화 (126/135)

126.

로한 미스틱은 누나의 허튼 짓으로 황태자의 분노 어린 부름에 응해야 했다. 누나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네가 잘 해결하라며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면서 요양을 가버렸다. 항상 누나보다 한 발씩 늦는 그는 본인이 먼저 드러눕지 못한 것에 통탄하며 왕국으로 향해야 했다. 대신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걸릴 거리를 3일씩 소요했다. 그는 그렇게 도살장에 들어서는 가축처럼 아주 슬프고도, 괴롭게 왕국으로 향했다.

왕궁에 아주 늦게 도착한 로한 미스틱은 갑작스럽게 황국 출신 왕비가 사형되고, 죽은 줄 알았던 공주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주아주 느리게 오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로한만큼이나 왕궁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주 오래 걸리셨네요.”

황태자의 최측근인 제인 경이 흘끔 로한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그 불신 어린 눈길에 로한이 격하게 기침을 터트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몸이 좀 아파서 먼 길 오가기가 힘든데, 저하께서 부르시니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독특하게 위기를 회피하는 인간이네. 제인이 멀쩡해 보이는 젊은 공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놈도 싹수가 노란 놈이니, 가까이하지 말아야겠다. 그녀가 그렇게 결론지으며 응접실로 그를 안내하는데, 복도를 거닐던 로한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엘 님?”

그 말에 제인은 작게 탄식하며 걸음을 멈췄다. 공작이 이엘리야를 알던가? 제인이 잠깐 고민하며, 뭔가 설명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개를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대신들을 데리고 복도를 걷던 이엘리야가 제인을 발견하고 살풋 웃었다.

“제인 경.”

로한은 푸른 눈을 예쁘게 접어 보이며 웃는 이엘리야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아는 엘이 맞다고 확신했다. 비록 평소와는 다르게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 아닌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까지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있었지만 그가 아는 엘이 맞았다. 여전히 웃음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엘 님!”

로한이 놀라서 이엘리야에게 다가서자, 이엘리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생각하던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아보고 탄식했다.

“공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무슨 일이. 머리가 왜?”

더듬더듬 답지 않게 바보처럼 구는 공작을 보며, 제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엘리야는 시녀들이 깔끔하게 다듬어줘서 처음보다야 깔끔해진 머리끝을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미스틱 공작님께서는 무슨 일이십니까?”

“저는 황태자 저하께서 부르셔서-”

“이엘리야 님, 원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달리아 백작의 재촉에 이엘리야가 눈을 찡그리며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제인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자, 얼결에 같이 허리를 숙인 로한은 한참을 눈을 깜빡였다. 제인은 너그럽게도 그의 시야에서 이엘리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줬다. 이윽고, 이엘리야가 완전히 사라지자 로한이 제인에게 다급하게 질문들을 던졌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하라니요? 엘은, 엘 님은 황녀님의 외가 쪽 영애가 아니었습니까?”

“공작님.”

제인은 눈을 크게 뜨고, 어버버하는 로한에게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일깨워줬다.

“일단, 분노를 삭이려 애쓰시는 중인 저하부터 뵈러 가심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목숨 부지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인이 친절하게 그를 이끌며 하는 말에 로한은 숨을 멈추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

지젤은 뻔뻔하게 조나단의 침실을 차지한 테오를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찼다. 애석하게도 내쫓기도 애매하고,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악의는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두는 것도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조나단을 잘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인 건 맞으니. 지젤은 입 안이 쓴 걸 느끼며 테이블에 놓인 초코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이 벌컥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쿠키 더 가져오라 할까?”

이안이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앉은 지젤을 보며 묻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로한 미스틱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고 막 돌아온 이안이 그런 지젤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지젤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대며 입을 열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

“쿠키? 안 먹는다니까.”

지젤이 입을 오물거리며 눈살을 찌푸리자, 이안이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로 손을 움직였다. 지젤은 자신의 손을 본인의 뺨에 이끄는 그를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왜 저렇게 우울해 보이지. 설마, 황녀가 뭔가 이야기했나? 지젤이 덜컥 겁을 먹고 침을 꿀꺽 삼키자 이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젤.”

“응.”

지젤은 어딘지 기죽은 듯한 이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손에 든 쿠키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안이 몸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즉위식을 미룰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이안의 말에 지젤은 당연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사실, 이안이 지금 이렇게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즉위식은 당장 내일모레고, 황제가 되기 전부터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그 날짜를 맞춰야 했다. 황녀가 얼마나 수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황태자가 직접 움직이는 거랑은 달랐다.

“나랑 황국에 갔다가, 다시 오면 어떨까?”

이안의 물음에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이한의 형이 곧 결론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당장 사흘도 안 남은 즉위식보다는 늦을 것이다.

“후작의 형 집행을 잠깐 미뤄둔다거나 해서.”

“황국과 왕국은 중혼을 인정하지 않으니, 내 이혼 문제도 해결해야 하잖아.”

“이혼은 무슨, 명백한 혼인 취소 사유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지젤이 눈썹을 어그러트리며 묻는 말에 이안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혼인 취소에 필요한 법이 있다면 새로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배우자의 가족을 살해하면, 혼인이 취소되고 재산이 몰수된다든가 하는. 듣기에도 꽤 그럴듯한 법이었다. 물론, 황태자 본인의 주관적 판단이었다.

“나야, 널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지.”

지젤은 이안이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걸 보면서 잠깐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즉위식이 급하니까, 잠깐 떨어져 있을까?”

그렇게 헤어지는 게, 차라리 좋을지도 몰랐다. 이안은 즉위식 이후에 바빠서 금방 이쪽을 잊을 테고, 그러고 나면. 자신도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문득 지젤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살을 찌푸렸다.

“싫어, 넌 나랑 떨어지고 싶어?”

“아니, 절대 아니지.”

지젤이 입꼬리를 끌어 내린 채로 울상 짓는 그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이안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어여쁜 걸, 황궁에 데려가면 다들 눈독 들일 텐데.”

지젤은 그의 흉부가 걱정을 가득 담고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들 눈을 다 멀게 할 수도 없고, 어쩌지?”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지젤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큰 발언이었다. 일단, 객관적으로 지젤은 그렇게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안이 다른 사람들을 해칠 일은 없었다.

“왜? 이렇게 예쁘고, 반짝이니 엄한 새끼들이 다 꼬여들 게 뻔한데.”

그런 그녀의 속을 단숨에 읽어낸 지젤이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이쯤 되니, 이안의 심미안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자신을 안쓰럽게 보는 지젤을 보며 작게 소리 내 웃고는 그녀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즉위식에서 같이 약혼식을 하고, 그다음에 결혼식 준비를 하자.”

“천천히 하자.”

“빨리 해야지, 내 사람이라고 널리 알리기 위해 하는 건데.”

“너무 유난이라 욕먹을까 봐 그렇지.”

지젤의 걱정에 이안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욕하는 것들 입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반지는 즉위식에 맞춰서 준비가 된다고 했으니, 그때 약혼을 하고. 결혼식은 웨딩드레스부터 시작해서 준비할 게 많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한 달 정도 있다가 하면 될 것 같아. 꽤 상세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이안을 보면서 지젤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참으려 애썼다. 그러나, 귀신같은 눈치로 지젤의 기분이 가라앉는 걸 알아챈 이안이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지젤.”

“응.”

“뭐가 걱정이야?”

예리한 그의 질문에 그녀는 입을 작게 벌렸다. 뭐가 걱정이냐고? 내가 떠나고 난 다음에 네가 느낄 배신감. 난 이제 너무 지쳐서 도망치는 건데. 왕궁이든, 황궁이든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황궁에 가서 황제인 이안의 옆에서, 그를 불신하고 초라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근데 홀로 남은 너는 비록 짧은 시간일지언정 또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위선적인 걱정들이 끊이질 않아서. 그녀는 자신의 입술이 떨리는 걸, 이안에게 들킬까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내가 황궁에 갔다가 네가 상처 받을까 봐. 아무래도 난 꼬리표가 붙었잖아.”

“넌 정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지젤만 옆에 있으면, 그깟 상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누가 황제를 상처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엘레노어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공작은 늙은 황제가 죽으면, 그때 같이 정리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도 그와 지젤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저 옆에서 웃어만 줘.”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이안이 지젤의 작고 가는 손가락에 자신의 손을 엮어 깍지를 끼며 부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