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5)화 (125/135)

125.

“충분해? 누구 마음대로?”

“지젤.”

단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지젤은 그게 그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지젤이 양손으로 그의 몸을 밀어내려는데, 다이한은 밀리는 대신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병을 빼앗으려 했다. 가벼운 몸싸움이 있었으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지젤은 다이한을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야? 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기어코, 네 손으로 끝내야 해?”

“뭐?”

“차라리 반역에 가담했다고 교수대에 세워.”

병 안에 든 액체가 뭔지 단박에 파악한 다이한이 지젤의 눈앞에 작은 유리병을 들이대며 화를 냈다. 그러자, 지젤이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다.

“넌 날 비난할 자격이 없어!”

네가 죽인 사람들이 몇인데, 네가 널 위해서. 지젤이 짓씹듯 내뱉는 말들을 들으며 다이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단순히 네 일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네 편의를 위해서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들을 내가 다 아는데. 감히 누가 누굴 비난해.”

다이한은 지젤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말들을 부정할 수가 없음에 입을 다물었다. 지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 다 나한테 돌을 던져도, 넌! 넌 나한테 감히 훈계해서는 안 된다고.”

설사 이 문제로 사형대에 오른다 해도 다이한은 자신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원한을 토해내듯 말을 쏟아내는 지젤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충혈된 눈에 터진 실핏줄이 그녀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보며 그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다이한의 어깨를 검지로 꾹 누르며, 비난한 지젤이 그의 손에서 다시 병을 빼앗으려 했다. 지젤이 그의 손을 할퀴어내는데도 아무 반응 없던 다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다 옳아. 이건 가증스러운 짓이었다. 입장을 바꾼다 하면, 다이한은 지젤보다 더 간단한 방식으로 조나단을 해치웠을 것이었다. 마가렛과 비슷한 방법으로 움직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다이한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젤의 푸른 눈을 내려다봤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원하면, 네가 필요하다면 내가 해줄게.”

그러나, 그는 지젤이 자신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이한의 말에 지젤이 숨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지젤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다이한을 보며 울상 지었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이러지 마.”

지젤은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혀서 다이한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걸 바라만 봤다. 지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내였다. 갑자기 나 대신 왕자를 죽여주겠다고? 나는 이러지 말라고? 지젤은 매번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들쑤셔놓는 다이한이 역겨웠다. 성큼 걸음을 옮겨 침실로 향하는 다이한을 보면서 지젤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네가 이겼으니까, 꺼져.”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한 말에, 다이한이 뒤를 돌아 벽에 기대서 있는 지젤을 바라봤다. 지젤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다이한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그 말에도 다이한은 어떤 반항 없이 손에 약병을 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그렇게 왕자궁 밖으로 나가는 다이한을 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삐뚤어진 방식일지언정, 자신을 사랑하는 다이한을 보면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기만 하면 일이 편할 텐데, 다이한은 지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뜨기 전까지 차가운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지젤이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끝이 없었다. 다이한과 완전히 끝내지 않는 이상, 여길 떠나도 떠나는 게 아니었다.

***

다이한이 떠나고 맨손으로 조나단의 침실에 들어선 지젤은 침대에서 곤히 잠든 조나단을 보고 작게 탄식했다. 조나단을 왕궁에 둬봤자, 여기저기 치이거나 이엘리야에게 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데리고 떠날 수도 없었다. 생모를 죽음으로 내몬 여자와 함께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촛불 하나 켠 채로 홀로 잠든 조나단을 보면서, 지젤은 울상 지었다.

지금은 다들 정신이 없어서 조나단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주변 정리가 끝나면 이엘리야 다음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아이를 괴롭힐 게 뻔했다. 달리아 백작은 아이는 그냥 두자고 했지만, 그 측근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정말로 반역죄에 엮어 버리면-.

“지젤 님.”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놀란 지젤이 휙 고개를 돌리자, 커튼 뒤에 서있던 테오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지젤 님이셔서 다행이네요, 얼결에 숨었는데.”

그가 하늘하늘한 흰 커튼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제대로 숨겨지지도 않아서 난감했는데 말입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지젤은 시종 차림새를 하고 있는 테오를 보고,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숨겠다고 한 곳이, 누구도 못 찾을 거라고 장담한 곳이 설마 왕궁은 아니겠지?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었잖아.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테오는 지젤의 푸른 눈이 희번덕이는 걸 보면서 콧잔등을 구기며, 뺨을 긁적였다. 딱히 뭘 한 건 아닌데, 그냥 걱정도 좀 되고. 이대로 가버리기 싫었다고 해야 하나.

“왕자님이 절 놀아주고 계셨습니다.”

“놀아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정말로.”

사실, 말도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았지만. 테오가 반질거리는 특유의 뻔뻔함을 이용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더니, 왕자님께서 절 침실에 숨겨주셨는걸요.”

“뭘 해?”

“술래한테서 숨는 놀이인데, 모든 어른들이 술래라고 하니 여기 숨겨주셨습니다.”

“하, 그러니까 네가 그 놀이를 하느라 아직 떠나지도 않고 있었다?”

“아니죠, 지젤 님.”

테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왜 그렇게 말을 못 알아들으세요.

“놀이인 척 숨어있었던 거죠. 제가 진짜 숨바꼭질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텁. 테오는 지젤에게 잡힌 멱살을 슬쩍 내려다보고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때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음, 많이 아프려나. 그러던 중 그는 지젤의 손목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뼈가 도드라진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을 구겼다.

“왜 이리 마르셨어요?”

“당장 수도 밖으로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그냥 두고 갈 수가 있어야죠.”

“뭐?”

테오가 짐짓 진지하게 지젤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젤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조나단을 눈짓했다.

“골치 아픈 일도 있으실 것 같고.”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네 다정은 필요 없어.”

지젤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하는 말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동 먹고 대강 넘어가주나 했는데, 안 통하네.

“상황 봐가면서 수도를 벗어나려 했는데, 일이 점점 커지더군요. 왕자님 혼자 방치되는 것 정도는 예상했고, 왕자님은 저를 유난히 잘 따르셨으니 그거 이용해서 눌러앉았습니다.”

테오가 조용조용 설명하는 말을 들으면서, 지젤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진작 도망치고도 남았을 인간이 왕궁에 있다니. 수상해도 이렇게 수상할 수가 없었다. 테오가 그 의심의 눈초리를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도망가기 어려워졌으니, 한동안 여기 있으려고 합니다.”

똑똑한 테오는 이엘리야에게 흥미가 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안 돼, 나가.”

“저 당장 쫓겨나면, 귀족들한테 맞아 죽습니다?”

“네가 자초한 일이지.”

지젤의 매정한 말에 테오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잠든 조나단의 작은 손을 꼭 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조나단 님을 걱정하시지만, 챙겨주실 수는 없잖아요.”

그 말에 지젤이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걱정 안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어린 동생 혼자 왕궁에 있는 것도 신경 쓰이실 거고.”

테오가 슬쩍 이엘리야 이야기를 하자, 지젤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살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당장에 도망치게 도와달라 얘기해도 모자랄 판에, 왕궁에 머물겠다고 하다니.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네 얼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여기 어떻게 머물겠다고? 수도 밖으로 나가는 걸 도울 테니까, 원래 계획대로 돈 가지고 사라져.”

돈 좋아하는 인간이니, 가서 그거 가지고 놀면 될 텐데. 왜 이러는 거야? 지젤의 말에 테오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황국에서 온 작곡가 정도면 어떻습니까? 얼굴에 큰 흉이 생겨서 가면 쓰고 다니는 거죠.”

조잡한 설정을 가만히 듣던 지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네.”

“돈 많이 벌었다지만, 이 잘난 얼굴 망칠까 칼 닿는 게 싫어서요. 시골이나 다른 대륙 가서 숨어 살아야 하는데 그러느니 왕궁에 있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마.”

“그렇지만, 지젤 님. 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생각해보세요.”

“편견?”

테오가 지젤을 다정하게 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조나단 님이나, 이엘리야 님 옆에 누구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앙카는 워낙 무뚝뚝해서 큰 위로를 못 해줄 텐데.”

그의 말에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내려다봤다. 비앙카 형제가 왕궁에 들어오기로 한 걸 어떻게 안 거지? 지젤은 이엘리야가 은밀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결론 내렸고, 가장 적합한 인물로 비앙카를 택했다. 비앙카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복위가 끝나는 대로 기사단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저는 비앙카가 못 하는 걸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님이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게 돕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네가 가장 나쁜 길로 인도할 것 같은데 말이지.”

지젤의 말에 테오는 크게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샐쭉거렸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지젤이 석연치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한숨 쉬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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