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4)화 (124/135)

124.

잡음이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왕궁에 당당하게 들어서게 된 이엘리야에게로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된 공주의 복위식을 열려고 했으나, 이엘리야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해 그걸 거절하고 바로 국정에 참여하겠다 선언했다.

지젤은 이엘리야가 당연히 원래 이름인 마리를 쓸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엘리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엘리야는 자신이 평생을 써왔으며, 사랑하는 아벨린 남작 부부가 지어준 이름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마리라는 이름을 써야 널 더 많이 따를 거야.”

지젤이 이엘리야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마리는 살아 돌아온 공주의 이름이고, 이엘리야는 멸문한 남작가 영애의 이름이니까. 생각보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별거 아닌 단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니, 나는 계속 내 이름을 쓸 거야. 나는 마리 공주가 아닌 남작가의 둘째 딸, 언니의 동생, 이엘리야잖아.”

그녀의 고집에 지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야는 그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친딸처럼 키워준 부모님에 대해 존경을 표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지젤의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래서 지젤이 왕국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지젤이 떠나고 싶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작은 마지막 조사를 끝마치고 모레쯤 후작저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원수에게 가택연금이라니 가당치도 않지만, 자수를 했기 때문에 도망갈 리 없다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이엘리야는 얼른 즉위식을 끝내고 왕위에 올라, 반역죄로 후작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안의 즉위식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 황녀가 황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황제의 이름으로 사신이 도착했다. 황제는 성혼한 지 오래되어 황가의 일원은 아니지만, 황국에서 나고 자란 왕비가 저지른 잔악무도한 일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왕국의 국민들이 황국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왕국의 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는데, 이엘리야는 그게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이엘리야뿐이 아니었다.

“황국과 거리를 두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 기회에 친황국파들을 철저히 배척해야 합니다.”

달리아 백작의 말에 이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국의 사람이 왕을 죽였다는 사실이 잊히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황국 입장에서 왕국은 꽤 쏠쏠한 조공을 가져다주는 나라이니, 언제 다시 슬쩍 발을 들일지 몰랐다.

“허면, 마가렛 왕비의 형은 광장에서 집행함이 좋겠습니다.”

이엘리야의 말에 달리아 백작은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광장에서 형을 집행할 것을 권했다. 이엘리야는 그 생각에 동의했다.

다이한 후작과 그의 기사 한센에 대한 형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왕을 시해한 조지 콜튼과 마가렛의 사형은 빠르게 집행되었다.

무덤에서 꺼내 올린 부패가 많이 진행된 시체에서 독살의 흔적을 발견했고, 조지 콜튼이 상세하게 범행을 실토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엄연한 반역죄였으므로 아무도 편을 들지 않았고, 항변하지도 않았다. 같이 엮여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목이 날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왕비 마가렛은.”

광장의 중앙에 선 이엘리야는 왕궁 기사들이 의식 없는 마가렛 왕비를 억지로 세워 그 목에 밧줄을 거는 걸 보면서 눈으로 지젤을 찾았다. 분명, 근처에서 보고 있겠다고 했는데. 귀족들뿐만 아니라 군중들이 잔뜩 몰려와서, 지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젤은 어찌 되었든, 후작 부인인지라 표면적으로 근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엘리야와 함께 다닐 수 없었다.

“선왕을 독살하고 반역을 도모했으며,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이엘리야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리는 사이, 절뚝거리는 조지 콜튼을 교수대로 끌고 가던 기사들에게 누군가 접근했다. 조지 콜튼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지젤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조지 콜튼.”

“물러서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기사 중 한 명이 후작 부인인 지젤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하는 말에도 지젤은 조지 콜튼을 보며 말을 이었다.

“후회해?”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 지젤을 본 조지 콜튼이 힘없이 소리 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듣고 싶어서,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그는 후작 부인을 처음 왕궁으로 불러냈던 날이 떠올랐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인 걸 그때 알았는데, 왕비님의 말씀대로 무리를 해서라도 죽였어야 하는 건데. 그때, 자학적으로 뺨을 때리던 지젤을 죽이라는 왕비의 명을 따랐더라면 적어도 일이 이렇게는 되지 않았겠지. 조지 콜튼은 뭔가 기다리듯 자신을 보는 푸른 눈을 마주한 채로 입을 열었다.

“왕비님께서도 그러하시겠지만, 널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해.”

그의 대답에 옆에 서있던 기사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작 지젤은 홀가분한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왕비님께 전해드려. 홀로 남은 아드님 너무 걱정 말라고.”

웃으며 말을 하던 지젤이 덥석 조지 콜튼의 멱살을 잡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곧 따라갈 테니까.”

기껏해야 마지막 인사나 나누리라 생각했던 기사들이 놀라서 지젤을 조지 콜튼 경에게서 떼어냈다. 그러자, 조지 콜튼이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야, 약속했잖아.”

조지 콜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젤에게 소리쳤다.

“약속! 약속이 다르잖아!”

“그만, 앞으로 걸어!”

“살려주겠다고,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잖아!”

조지 콜튼이 악을 질렀지만, 지젤은 답하지 않고 기사가 이끄는 대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지젤의 붉은 머리가 허리께에서 살랑거렸다. 그게 꼭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조지 콜튼은 후작 부인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조나단을 죽일 리 없었다. 그저, 그저 자신을 괴롭게 하기 위해 하는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교수대에 올라선 조지 콜튼은 의식도 없는 마가렛의 목과 자신의 목에 걸린 밧줄을 보고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후회하는 건, 지젤을 죽이지 못한 게 아니었다. 죗값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랬다면 그는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형을 집행하라!”

이엘리야가 굳은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는 군중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눈을 감았다.

지젤은 교수대 중앙에 선 이엘리야와 양쪽에 목이 매인 왕비와 조지 콜튼을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하고, 허무했다. 저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단 몇 분이면 되는 일을 몇 년을 돌아왔으니. 지젤은 이엘리야가 앞쪽 귀족들 틈에서 눈으로 자신을 찾는 걸 알면서도 더 멀리 사라졌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정이 좀 넘은 조용한 왕궁을 가로질러 걷는 지젤의 얼굴은 홀가분해 보였다. 그녀는 뒤따르는 시녀 하나 없이 홀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장식이 거의 없는 하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지젤의 붉은 머리가 유독 짙어 보였다. 왕자궁에 들어서기 직전 지젤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작게 탄식했다.

보름달이 유난히 크고, 밝았으며 푸르렀다. 그걸 눈에 담아낸 지젤은 호위기사 하나 없는 왕자궁에 들어서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조나단을 보살피지 않았고, 그게 지젤을 마음 아프게 했다.

그렇게 멈춘 그녀는 마가렛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늘 죽은 마가렛 또한 달리아 안나 왕비와 남작이 증오스러워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필요해서 그리했을 뿐이지.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지만,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다. 모순적인 분노였다. 지젤은 시선을 내리깔고, 왕자궁 가장 안쪽의 조나단이 잠들어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렇게 복도의 중간쯤 걷던 지젤을 누군가 휙 잡아당겼다. 사람을 다 물렸는데, 누구지? 놀란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다이한이 지젤의 손목을 잡아챈 채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서있었다.

그녀는 다이한이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길 나돌아 다니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만해.”

그가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지젤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그만하라니, 난데없는 말이었다. 이제 와서.

“날 계속 감시라도 했나봐?”

이미 다 끝난 마당에. 지젤이 이죽거리며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힘으로 다이한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만하라고.”

다이한이 이를 아득 물고 하는 말에 지젤은 아린 손목을 노려보며 물었다.

“어떤 걸?”

다이한은 지젤이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자야 황국 여론 만들기에 신경이 쏠려서 지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못 읽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제 그만해.”

“너야말로 그만해!”

가증스럽게, 이제 와서 누구보고 뭘 그만하래. 지젤이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혹여라도 그걸 누가 들을까 걱정된 다이한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지젤은 등에 닿는 딱딱한 벽에 기대서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분노로 일렁이는 걸 보면서 그녀는 이를 아득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마가렛은 죽었고, 뒷배 없는 왕자만 남았으니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가 잇새로 내뱉는 말이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나, 지젤은 그 말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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