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3)화 (123/135)

123.

품에 안긴 지젤의 서글픈 웃음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안이 그녀를 달래듯 눈가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푸른 사파이어를 볼 때마다, 널 떠올릴 수 있도록.”

네 눈동자보다 영롱한 색은 내지 못하겠지만. 이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하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서,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해, 지젤 아벨린.”

고백을 내뱉은 이안의 붉은 입술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올라갔다. 지젤이 그의 입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나도 사랑해.”

정말로. 지젤이 강조하듯 덧붙인 말에 이안의 눈이 기쁨을 담고 예쁘게 접혔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지젤의 하얀 손을 잡아 손가락마다 입술을 꾹꾹 내리누르며 약속했다.

“우리가 함께하는 한 네가 괴로워하는 일이 없도록 할게.”

“그래.”

그녀가 얼굴 두껍게 알겠노라 대답했다.

“약속할게. 네 지난날을 다 잊을 만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지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의 손을 덮는 이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지젤이 황국에 가서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을 좀 내려놓길 원했다.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누군가 지젤을 그를 헐뜯는 데 이용한다면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궁에 가서 어떤 모략과 고통이 있을지언정 지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가 그녀를 미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태 그러했듯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그의 속삭임에 지젤은 작게 탄식했다. 네가 변하지 않을까. 내가 이번에 가버리면, 넌 정말 내가 지긋지긋하고 미워질 텐데. 어쩌다 그런 걸 만나게 되었던 걸까, 하고 후회할 텐데. 지젤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제 품에 다 끌어안을 수 없는 이안을 꽉 부둥켜안았다.

***

재판에 서게 된 다이한은 엉망이 된 한센과 조지 콜튼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족들 중 몇몇은 둘을 보면서 고문을 통해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게 아니냐고 떠들었다. 지젤은 그게 가장 후작답다는 생각을 했다.

“왕국에서 손꼽히던 기사들 몰골이.”

헤넌 공작이 탄식하듯 내뱉은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둘의 몸 상태는 처참해 보였다. 당장 조지 콜튼만 해도 얼굴이 붉고, 노란 피멍이 잔뜩 피어오르고, 얼굴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한센은 하반신 전체에 붕대를 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이한은 그런 한센을 잠깐 살피다가, 지젤을 올려다봤다. 지젤이 복수한 것일까. 그럼, 자신도 저렇게 불태워 버리고 싶어 할까?

무미건조한 다이한의 얼굴을 본 지젤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다이한이 죄를 후회하며 우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굳이 가까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젤은 금색 휘장이 걸린 검은색 정복을 입고 반듯하게 앉아있는 다이한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 싶은 건 더 처절한 후작의 모습이었다.

다이한은 지젤이 무슨 이유에선지 자리를 뜨려는 걸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를 가는 걸까, 이런 걸 보고 싶었을 텐데. 그는 지젤이 조금 더 뒤로 물러나는 걸 보면서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 받는 게 싫은 건가.

다이한은 쓸데없고, 지루하고 형식적인 언쟁과 논쟁이 오고 가는 사이 지젤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걸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서야 내 몰락을 볼 수 있는데, 왜 정신이 다른 곳에 가있을까.

“후작님께서 시키는 대로,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웠습니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개미 목소리보다 작게 중얼거린 한센의 증언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아니, 그럼 애초에 후작 부인과 결혼은 왜 한 거람.”

“왕비가 후작 부인을 그렇게 괴롭히던 이유가 있었네!”

“그럼, 후작 부인은 자기 가문을 불태운 남편이랑 계속 살았단 말이야?”

귀족들이 저들끼리 속삭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다이한은 그걸 굳이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어차피 아는 내용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젤의 안색이 어두운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기뻐해야지. 웃어야지.

다이한은 지젤이 자신만큼이나 재판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불려 나온 머리가 희끗한 시녀들과 시종들이 이엘리야의 목에 걸린 루비를 보고 탄식했다. 그게 죽은 왕비가 친정아버지에게 받았던 목걸이임을 알아본 몇몇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엘리야 목 뒤쪽의 작게 찍힌 점을 확인했다.

“공주님이 맞습니다!”

시녀들이 놀라서 소리치고는 이엘리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엘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보는 나이 든 시녀들을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가!”

헤넌 공작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말에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우물쭈물 답했다.

“왕비님의 딸인 마리 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목 뒤의 점의 위치가 똑같고, 루비 목걸이도 왕비께서 백작님께 받았던 목걸이가 맞습니다.”

보석이 세공된 모양새를 보면 목걸이는 확실하다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넌 공작은 이를 아득 물었다. 그러고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겨우 목걸이랑 점 따위로 공주인 걸 입증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짓-”

“그럼 마가렛 왕비가 남작가를 불태우려 했던 다른 이유를 설명해 보시오! 이엘리야가 마리 공주이고, 왕비는 그걸 알았기에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우려고 한 겁니다.”

달리아 백작의 예리한 지적에, 헤넌 공작이 이를 아득 물었다. 다이한 후작은 어딘지 전의를 상실한 듯 보였으나, 여기서 패배하면 끝이었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면, 여태 공들여 쌓은 탑이 그대로 무너지는 일이었다. 벌써 후작의 측근들 중 절반 이상이 황가를 뒤에 둔 이엘리야의 뒤에 붙어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달리아 백작 측근이야 당연히 이엘리야의 편이었으니,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다이한 후작은 지은 죄가 있어서 이대로 포기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바르한 자작 때문에 재정에 타격을 입은 마당에 권좌까지 뺏길 수는 없었다. 지젤은 발악하는 헤넌 공작을 보며 자신의 친구인 공작 부인을 떠올렸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과하거나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콜튼 경! 뭐라고 말을 좀 해보세요. 꼴은 그게 뭡니까, 누구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겁니까.”

헤넌 공작의 말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조지 콜튼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안의 협박을 떠올렸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황태자가 즉위식을 앞두고 왕궁에 왔을 때,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말을 좀 해보란 말입니다!”

헤넌 공작이 흥분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소리치자,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가렛 왕비님이.”

그는 조나단에게는 죄가 없다는 걸 알았다. 모든 걸 실토하면, 어린 왕자를 살려주겠다고 했으니 황태자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어야 했다. 반역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지 콜튼은 아벨린 남작가가 불타던 날, 검을 사용하지 않은 걸 깊게 후회했다.

“왕께서 승하하시기 전날, 독을 줬습니다.”

조지 콜튼의 놀라운 발언에 모두 숨을 멈췄다. 달리아 백작 또한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내가 마가렛 왕비의 명으로 전하를 독살했습니다. 죽은 시체의 입에 은을 넣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자백에 다이한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젤은 깔끔하게 다 끝낼 생각인 것 같았다. 다이한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지젤을 한 번 더 살피고는 어깨를 굳혔다. 깔끔하게 다 정리할 거라고. 퍼뜩 떠오른 생각에 다이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공작이 허탈하게 숨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왕을 시해했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귀족들이 하얗게 질린 채로 공작에게서 멀어졌다.

“황국 출신 왕비가 기어코 왕국의 왕을 시해했다니.”

누군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헤넌 공작은 이마를 부여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나버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반역입니다! 마가렛 왕비를 당장 왕비궁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백작의 측근인 남작이 고함을 지르듯 한 말에 백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셋의 사형은 집행될 것이다. 한센은 자신을 빼돌려 수도원으로 보내달라 했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그때 불타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 속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지젤은 큰소리가 오고 가는 귀족들의 중앙에서 꼿꼿하게 서있는 이엘리야를 보며 쓰게 웃었다. 황가와 달리아 백작이 힘을 실어주니 이엘리야는 금방 자리 잡을 수 있겠지. 지젤이 황국으로 떠난다는 말에 이엘리야는 섭섭한 듯했지만 지젤을 붙잡지는 못했다.

지젤은 자신 없이도 잘해낼 하나 남은 가족을 생각하며,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 그대는 후환이 남지 않게 정리를 잘해.’

엘레노어 황녀의 말을 떠올린 지젤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이엘리야에게 후환이 될 사람. 어리고, 불쌍한 조나단을 떠올린 지젤은 자리에서 일어서 재판장을 벗어났다. 내가 없어도 잘할 수 있도록, 가족으로서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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