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2)화 (122/135)

122.

죽은 줄 알았던 공주, 이엘리야가 등장했다는 소식은 반나절 만에 수도 밖으로 퍼져나갔다. 다이한 후작은 공식적인 가택 연금 전, 하루에서 이틀 정도 간단한 조사를 위해 왕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엘리야는 엘레노어 황녀와 함께 왕궁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녀를 마주한 엘레노어는 연신 혀를 찼다.

“아무리 남장을 했다지만. 머리를 굳이 그렇게 잘라야 했을까.”

네 머릿결에 들어간 금화만 해도 얼만지 아니. 엘레노어의 비난에 이엘리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급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눈썹도 마찬가지야, 평민들도 그런 스크래치는 없어.”

길이를 떠나서, 지저분하지 않도록. 이엘리야는 황녀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투박해 보일 필요가 있었는걸요. 그래서 안 들키고 잘 왔잖아요.”

이엘리야의 웃음기 어린 설명에 황녀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그 뒤에 서있던 제인은 음울하게 미소 지었다.

“이엘리야 님 잡겠다고 저희가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시죠.”

“그러고 보니, 저 도널드한테 직접 사과해야 하는데.”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자신이 아프게 했던 도널드를 떠올린 이엘리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미간을 구겼다.

“아닙니다, 도널드도 이엘리야 님께서 악의가 없으셨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찌 되었든, 무사히 잘 오셨잖습니까.”

제인이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무사히 잘 왔으니 되었다고? 쓸데없이 시간과 인력을 낭비한 거지. 나랑 대화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엘레노어가 이엘리야가 쓴 진술서를 꼼꼼히 살펴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렇게 요란하고, 복잡하게 오지 않아도 다른 길이 있었을 거라고.”

이엘리야는 자신과 마주 앉아있는 황녀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이야 상황이 바뀌어서 황녀가 자신의 편에 서기로 했지, 마가렛이 눈 뜨고 있었더라면 이엘리야를 내쳤을 사람이었다. 이엘리야를 아끼는 마음과 별개로 황녀는 황국에 이익이 가는 선택을 했을 사람이었다. 그래야, 그래야만 황녀로 존재할 수 있으니까.

“전 후회 안 해요.”

이엘리야가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진술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그마한 게 고집은.”

엘레노어는 빠진 내용 없이 꼼꼼히 서술한 이엘리야의 진술서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이엘리야의 유려한 글씨체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후작이 난데없이 자수한 건 황당했지만, 이엘리야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중심을 잃은 후작의 측근들은 빠르게 허물어질 터였다.

아벨린 남작가의 화재 이후 이엘리야가 황궁에서 생활했었다는 건 황가와 가까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곧 황제가 될 황태자가 이엘리야의 뒤에 서있다는 것도 모두가 알고.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황국에 거부감이 있는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이엘리야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지 몰랐다. 그러나, 이엘리야는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달리아 안나 왕비의 친딸이었다. 왕국의 사람이었으며, 개국공신 달리아 백작의 유일한 손녀였다. 더불어 황국은 이엘리야가 복위하는 즉시 왕국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힐 테니, 민심을 되찾기에도 완벽했다.

“네가 현자 뺨치도록 똑똑하다 해도, 버겁고 힘들 텐데 넌 그만큼 현명하지도 않잖아.”

엘레노어가 진술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하는 말에 이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네가 내뱉는 말의 무게가 달라질 테고, 그 대가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어.”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어가 그녀를 비웃었다. 척 봐도 물렁물렁하게 생긴 애가 뭘 각오하겠다는 건지. 엘레노어는 황궁에 처음 와 기본적인 식사 예절도 지키지 못하던 소녀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 이엘리야는 아직도 어리고, 순해 보였다.

“널 가시밭길로 인도하려는 자들이 쉼 없이 꼬일 거야.”

“그런 사람들은 황국에서도 수없이 겪었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이엘리야를 보면서, 황녀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네게 관심 보이던 어설픈 사기꾼들 물리치는 수준이 아닐 거라고. 후작 같은 인간이, 마가렛 같은 인간들이 계속 나타날 거야. 목적 없는 악의가 네 뒤를 쫓아다닐 테고.”

황국에서 지내면, 적당히 괜찮은 가문에 들어가서 황녀인 나를 뒤에 세우고. 네 마음대로 다 휘두르며 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너 하고 싶은 것만 잔뜩 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엘레노어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저 어린애 아닙니다. 그렇게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아니. 넌 멍청하게 네 목을 깨끗하고 닦고, 그들에게 검을 쥐여 줄 사람이야. 나와 이안과는 달리 사람을 믿으니까.”

“엘레노어 님.”

이엘리야는 걱정 아닌 걱정을 잔뜩 하고 있는 황녀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 정말로 괜찮아요.”

엘레노어가 그런 이엘리야의 푸른 눈이 반짝이는 걸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아무것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거야. 결혼도, 아이도, 국정도.”

“걱정 마세요.”

제인은 이엘리야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엘레노어의 손을 꼭 잡는 걸 보고 어깨를 굳혔다.

“잘해낼 수 있어요, 황궁에서부터 여기까지도 혼자 잘 왔잖아요.”

이엘리야가 황녀를 간만에 봐서 감을 잃었나? 제인은 황녀의 성격상 그걸 떨쳐내고, 신랄하게 한마디 쏘아붙일 거라 예상했다. 기본적으로 엘레노어는 남과 닿는 걸 소름 끼치게 싫어했다. 언젠가 어느 영식이 그녀의 손을 허락 없이 잡았을 때, 황녀는 그 영식의 손목을 베어버렸었다. 그러니, 이엘리야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런 제인의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어코 그리하겠다니.”

황녀는 이엘리야의 손을 밀어내지도, 잡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묵했다. 제인은 엘레노어 황녀의 얼굴에서 씁쓸함을 읽어내고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황녀는 이엘리야를 아끼거나, 챙겨줄 수 없었다. 그건 이엘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잘 지내도록 해.”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이듯 한 말에 이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히 잘 지내세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제인은 뒤늦게 탄식했다. 이제 이엘리야는 황국과 각을 세울지도 모르는 소국의 사람이었다. 이엘리야가 그런 제인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인 경도, 도널드랑 브루노도. 기사단 사람들과 황국 사람들 모두 잘 지내길 바랄게요.”

이엘리야는 이제 왕국의 공주였고, 황녀는 황가의 사람으로 둘은 외교적으로 얽힌 사이였다. 그건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제인은 이엘리야가 자수를 새겨줬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서로를 위할 수 있는 그 시간을 잠시 즐겼다. 엘레노어 황녀는 그날 오후 조용히 황국으로 돌아갔다. 제인은 이안 곁에 남아야 했다.

***

소파에 앉은 지젤은 지도가 붙은 역사책을 만지작거렸다. 지젤은 후작저나 후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왕궁에서 이안과 함께 머물렀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내일, 후작을 제외한 원로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바르한 자작에 대한 수사를 어서 진행해 달라는 소리는 사그라들었다. 사기당했던 귀족들은 대부분 달리아 안나 왕비를 배척했었던지라 괜히 유난 떨어 이엘리야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본인들이 사람을 써서 그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지만 성과는 없어 보였다.

수도는 떠들썩했으나, 왕궁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처럼 고요했다. 지젤은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친 채로 생각에 잠겼다. 다이한은 속죄의 의미로 순순히 죽어주겠다는 걸까.

“오래된 역사책인데, 이게 좋아?”

지젤은 옆에 찰싹 붙은 이안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적절하게 표현할 무슨 동물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늪지대에 거머리가 이렇게 들러붙는다던데, 딱 그 꼴이었다. 이안은 그런 지젤을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잡아당기며 다시 물었다.

“응? 공부가 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냥.”

큰 이유는 없어. 이안의 물음에 지젤은 태연하게 거짓말로 대답했다.

“근데, 왜 계속 그걸 만지작거려?”

“나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밖에 가보질 못했는데.”

지젤이 책의 뒤에 붙어있는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되게 넓구나 싶어서.”

이안은 지젤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지도를 덧그리듯 쭉 미끄러지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 있는 산은 이안도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데려다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나랑 같이 다니자.”

“너랑?”

“응.”

“황제께서 한가하게 나랑 놀러 다닐 수 있나.”

“그건 황후께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안이 톡 검지로 지젤의 코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지젤은 할 말을 잃었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하얀 뺨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매일 놀러 다닐 순 없지만, 계절에 한 번씩은 다닐 수 있을 거야.”

다정하게 소곤거린 이안은 지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젤은 그를 따라 황국에 가겠다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가지 않겠다고 하지도 않고 있었다. 지젤은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무리해서 안 가도 좋아.”

지젤의 중얼거림에 이안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지젤은 이안의 환한 웃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옅게 미소만 지었다. 나만큼 끔찍한 인간이 있을까.

“내가 생각해봤는데, 사파이어 어때?”

“어떤 걸?”

갑자기 보석? 지젤의 물음에 이안이 그녀를 번쩍 끌어안아 제 무릎 위로 올려 앉혔다. 강제로 그와 마주 안게 된 지젤의 미간이 주름졌다.

“결혼반지 말이야.”

시간이 촉박해서, 결혼식 이후에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지젤은 말갛게 반짝이는 이안의 검은 눈을 보고, 울상 짓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같이 가겠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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