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21)화 (121/135)

121.

모두 입을 다물고 갑자기 끼어든 이엘리야를 바라봤다.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걸어 나온 이엘리야가 지젤의 옆에 서서는 고개를 기울였다. 짧은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아닌 바지로 된 남색 정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순간 남자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걸 본 다이한의 입매가 드물게 미소를 머금고 늘어졌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내가 죽었다 알려진 공주다.”

지젤은 이엘리야가 아닌 자신을 보며 하는 말을 듣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끝인가?”

이엘리야는 끝까지 자신의 언니를 위협하는 후작을 보며 이를 아득 물고 입을 열었다.

“다이한 후작은 마가렛 왕비와 함께 나를 데려다 키운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웠습니다. 그 저택 안에 있던 모두가 산 채로 불타 죽었습니다.”

“그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헤넌 공작은 아벨린 남작이 거론되고 나서야, 후작 부인이 왜 달리아 백작 옆에 서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건 단순히 이쪽을 폄훼하고 깎아내리기 위한 말들이었다. 달리아 백작 측은 후작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정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후작을 밀어내려는 달리아 백작의 음모가 분명했다.

“이건, 달리아 백작의 모함입니다. 후작님을 경계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후작의 측근 중 누군가 소리친 말에 이엘리야가 멀찍이 서 있는 이안을 손짓하며 말했다.

“마가렛 왕비와 후작은 나 또한 살해하려 했으나, 황태자 저하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엘리야가 황태자를 거론하자 다들 문가에 서있는 이안을 한 번, 중앙에 앉은 다이한을 한 번 올려다봤다. 사람들이 일렁이며 동요하는데도, 다이한은 지젤만 바라볼 뿐 딱히 반응이 없었다. 지젤은 그게 후작이 포기한 것인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쩌려고 저렇게 멀뚱멀뚱 앉아만 있는 걸까.

다이한은 지젤의 푸른 눈을 보며, 평소보다 더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세심히 훑었다. 증인을 데리고 왔으려나. 증인이라 하면 한센 혹은 조지 콜튼. 다이한은 지젤을 가만히 보면서, 그녀가 원하는 게 자신의 재판인지 고민했다. 재판을 한다 한들 후작의 작위를 박탈시키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웠다. 이엘리야가 복위한다 한들 저 어린애가 국정 운영을 해낼 리 없었다.

“이건 아벨린 남작이 내게 전해준 달리아 안나 왕비의 유품이며.”

이엘리야가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는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당시 안나 왕비를 모시던 시녀들을 증인으로 부르겠습니다.”

“그 시녀들과 달리아 백작과 짜고, 우리를 농락하려는 게 아닙니까?”

헤넌 공작의 말에 이엘리야가 작게 웃었다.

“의심하는 것까지 뭐라 하지는 않겠으나, 결국 진실은 밝혀질 테니 공작께서는 입을 좀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공주라니,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어린 여자애가 공작에게 쏘아붙이는 광경에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이엘리야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벨린 남작가가 불탔던 그때, 황태자 저하와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후작의 기사들을 보았고, 저와 저하 이외에 목격자도 있습니다. 기꺼이 증언하겠다고 합니다.”

“후작의 측근인 한센 경과 마가렛의 충실한 종, 조지 콜튼을 증인으로 확보했으니.”

이안은 지젤에게서 눈을 못 떼는 다이한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성질 같아서는 재판이고 뭐고, 눈을 파내고 저 멀리 추방시키고 싶었다.

“황태자의 이름으로 이에 대한 정식 재판을 열 것을 명한다.”

이엘리야를 거드는 황태자의 말에 다이한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재판. 증인과 증거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못해도 서너 달은 걸릴 테고, 황태자까지 이엘리야의 편이니 친황국파는 분열될 터였다. 달리아 백작은 독립적인 왕국을 원하는 보수적인 인사지만, 이엘리야의 편에 황태자가 섰으니 파벌 싸움이 애매해졌다.

다이한은 저 뒤쪽에 로브를 쓴 채 앉아있는 엘레노어를 발견하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 황녀까지 제 편으로 두다니, 잘된 일이었다. 말도 못하는 어린 왕자보다는 이엘리야가 여러모로 다루기 편하겠지.

“갑자기 공주라고 나타나서 후작님을 이렇게 모함-”

“내가.”

헤넌 공작이 다이한 후작의 측근들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데, 다이한이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지젤은 또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한의 시선에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그의 연녹색 눈이 가볍게 웃음을 담고 휘었다. 웃어? 왜? 그런 표정을 처음 봐서 지젤은 눈을 깜빡였다.

“이엘리야 아벨린이.”

재판까지 질질 끌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걸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다이한이 고장 난 인형처럼 서있는 지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달리아 안나와 함께 사라졌던 공주임이 사실이라 증언하겠다.”

“후작님!”

다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지젤은 이명 때문에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운 건 지젤뿐만 아니라 이엘리야, 달리아 백작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의 얼굴에만 유일하게 분노가 끓어올랐다.

“저 새끼가.”

이안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는데도, 다이한은 입을 열었다.

“아벨린 남작가의 방화.”

“후작님, 일단 사람들을 물리심이 좋겠습니다.”

헤넌 공작이 큰소리를 치며 후작을 말리는데도, 다이한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재판이 길어지면, 자신은 유리했다. 자신의 편에 서있는 귀족들이 쉽게 권력에서 물러날 리 없었고, 황태자의 압박에 재판을 열지언정 증인 혹은 이엘리야를 죽일지도 몰랐다.

“아벨린 남작이 달리아 안나의 딸인 공주를 데려간 것을 목격한 마부를 살해했다는.”

지젤은 다이한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후작이 분에 차서, 고함을 지르거나 말도 안 되는 뻔뻔함으로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든가 하는 건 상상했지만. 저런 건 예상치 못했다.

“그 모든 혐의 또한 인정한다.”

“세상에.”

헤넌 공작이 허탈하게 의자에 주저앉는 걸 끝으로 다이한은 입을 닫았다. 지젤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다이한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 와서 뭐 하는 짓이냐는 지젤의 비난을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젤은 자신의 시선을 처음으로 피하는 그를 보면서 기가 차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이렇게 끝내겠다고?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하면, 그러면 면죄부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젤이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다른 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젤은 이엘리야에게서도 백작에게서도 멀어지기를 택했다. 백작이 그런 후작을 말없이 보다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당장 다이한 후작을 연행하라!”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 일방적으로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주장하는 중 아닙니까!”

헤넌 공작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소리를 치자, 왕궁 기사들이 어물쩍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공작과 백작이 팽팽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 속에서 다이한이 차분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자수까지 한 마당에 도망칠 생각 없으니, 가택 연금으로 마무리하심이 어떻습니까.”

다이한이 자신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는 황태자에게 제안했다.

“가택 연금으로 마무리?”

이엘리야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자, 다이한이 그녀를 흘끔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나를 당장 벌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입증할 게 많을 테니. 후작저에서 곱게 기다리겠다는 건데.”

달리아 백작은 후작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이엘리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후작저에 가둬두는 것만으로도 친황국파의 기를 죽일 수 있었다. 당장 감옥에 집어넣기에는 귀족들을 다 납득시키지 못했다.

“혹여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조사에 협조하세요.”

달리아 백작의 말에 왕궁 기사들이 후작의 양옆에서 연행이라도 하듯 따라붙었다. 이엘리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에 후작을 무릎 꿇게 하고, 속죄하게끔 하고 싶었으나 그럴 힘이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도망가려고 하면 죽여.”

이안이 옆에 서있던 도널드에게 속삭이자 도널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한의 뒤를 따랐다. 지젤은 그 모든 일들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정리가 된다니.

“후작이 자수했으니, 금방 끝나겠네.”

어느새 지젤의 뒤로 다가선 엘레노어 황녀가 속삭였다. 엘레노어는 우습게 구는 후작을 보며 비소를 머금으면서도, 일이 빨리 끝나게 되어 다행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시원한 복수를 해내지 못한 후작 부인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지젤의 등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황가의 딸인 마가렛의 잔악한 행동을 사과하는 의미로, 이엘리야의 국정 운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할 거야.”

지젤은 엘레노어의 말에 감사의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지젤은 엘레노어가 그렇게 해주는 것에 대한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엘레노어가 그런 지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니, 그대는 후환이 남지 않게 정리를 잘 해.”

우리가 떠나고 난 다음에 혼자 남을 이엘리야를 위해서.

“걱정 마세요.”

지젤은 엘레노어가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엘리야에게 방해가 될, 나중에 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