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하나만 먹으라더니, 먹고 나면 그다음에 또 하나만 더 먹으라고 반복하잖아.”
지젤의 예리한 지적에 이안이 입꼬리를 처연하게 끌어 내리며 말했다.
“진짜 마지막.”
정말로. 지젤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잘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안이 보조개가 푹 파일 정도로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이안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내며 마주 웃었다. 이안은 자신을 보고 웃는 지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제가 달리아 안나의 딸이라는 걸 뭘로 입증하죠?”
이엘리야가 슬쩍 끼어들자,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흘끔거리고는 찻잔을 지젤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지젤이 그 찻잔을 들지 않고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자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잘 먹고 있었는데.
“달리아 안나를 모시던 사용인들을 찾았으니, 네 신체적 특징하고 끼워 맞추기를 할 거야.”
“신체적 특징?”
지젤의 설명에 이엘리야가 미간을 구겼다.
“네 팔꿈치 옆의 움푹 파인 흉터나 목 뒤의 점이라든가.”
“겨우 그런 걸로 내가 공주인 걸 입증하겠다고?”
“네가 가진 루비 목걸이를 설명만으로 알아보는 시녀도 있어. 그게 왕비의 물건임을 입증할 테고.”
이안이 짜증스럽게 이엘리야를 노려보며 말을 툭 던졌다. 오늘 점심과 아침 통틀어 감자 한 알도 안 먹은 것 같은 지젤이 신경 쓰여 미치겠는데, 저게 자꾸 흐름을 깼다. 지젤이 그런 이안의 손등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수도원으로 보내주는 조건으로 한센 경이 증언하기로 했어. 후작이 마가렛 왕비와 함께 목격자인 마부를 죽이고, 네가 공주라는 증언을 듣고 남작가를 불태웠다고.”
다리를 잃은 한센은 자신을 수도원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지젤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그가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콜튼 경도 증언할 거야.”
이안이 툭 던진 말에 이엘리야가 아닌 지젤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지 콜튼도?”
“응.”
가볍게 대답한 이안은 아직도 지젤의 약지에 자리하고 있는 다이아 반지를 보며 욕을 삼켜냈다. 그가 준비하는 사파이어 반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 조잡한 반지를 해줄 수는 없으니까,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조지 콜튼이 순순히 증언을 한다고?”
“당시 후작과 마가렛이 방화를 지시했고, 아벨린 남작이 공주를 데려갔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지젤은 이안이 자연스레 그녀의 약지에서 후작과의 결혼반지를 빼내는 걸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엘로이 백작 부인에게 보여준다고 낀 다음에 빼질 않아서 저걸 계속 끼고 있었네. 지젤은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이아 반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왕자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했지.”
이안의 말에 지젤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조나단은 죄가 없었다. 조나단은 그저 어린아이였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 후작의 마지막 방패가 되어줄 아이였다. 지젤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걸 보면서 이안과 이엘리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안은 지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이엘리야는 잔혹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조나단이 없어지는 쪽이 이롭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
“수도 내 대부분의 귀족들이 당했습니다. 대대적으로 수사를 해야 합니다.”
귀족 중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한 말을 이어받듯 엘로이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기사단을 뭣들 하는 겁니까, 고발장이 수십 장 쌓였는데 왜 조사 시작도 안 합니까!”
“아니, 본인들이 돈놀이하고 잃은 걸로 왕국 기사단을 이용하려 하다니.”
“돈놀이? 지금 말 다했는가!”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귀족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데, 그 사이에 앉은 다이한은 말이 없었다. 바르한 자작의 사기 행각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다들 꽤나 궁금했는지, 귀족들 뒤로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작위는 없지만, 각 귀족가의 구성원들이었다.
다이한은 입구에 서서 이 모든 상황을 구경하듯 눈을 반짝이는 황태자를 빤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황태자는 굳이 상석을 마다하고 뒤에서 귀족들이 하는 짓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런 다이한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배에 기름 낀 귀족들이 저들끼리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게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다이한 무너트릴 생각에 꽤나 즐거웠다.
“후작님! 말씀 좀 해주십쇼. 가장 큰 손해를 보셨지 않습니까.”
“무슨 도박하다 돈 잃은 것까지, 왕궁에서 해결해줘야 합니까?”
“아니, 이건 엄연히 사기꾼이 존재하잖아!”
“바르한 자작이 뭔가 사정이 있겠죠.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사기꾼 취급하는 건 좀-”
“사정? 돈 싹 쓸어서 증발했는데, 아직도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해?”
큰소리를 내는 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서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쿵-!
당장 치고받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격앙된 그곳에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모두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달리아 백작이 문진으로 원탁을 내리찍은 걸 보면서, 다들 눈을 끔뻑거렸다. 달리아 백작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이한 후작을 빤히 바라봤다.
“그것보다 중요한 안건이 있습니다.”
달리아 백작의 측근들이 뭔가를 각오하듯 숨을 들이마시는 걸 보면서, 다들 주섬주섬 제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다이한은 백발의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자칫 잘못되면, 다 죽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백작은 후작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왕과 선왕비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난데없는 말에 다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인상을 구기는데, 백작이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전하의 친딸이며, 나의 손녀인 이엘리야 달리아의 복위를 요구합니다.”
회의실 안에 고요한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손녀라니?”
“죽은 안나 왕비의 딸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백작이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그 무슨 말입니까?”
헤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백작에게 따져 물었다.
“손녀라니? 딸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리냔 말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내 안나 왕비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공주님을 찾았으니, 복위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백작이 덤덤하게 하는 말에 다이한은 짧게 혀를 찼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고. 이엘리야가 진짜 공주라는 걸 부정하는 일은 쉬웠다. 이엘리야가 공주라는 걸 증명하려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여러 증좌가 있어야 하고 부정은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이었다.
달리아 백작이 증인을 만들어내고,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다이한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국의 분위기도 안 좋다던데, 여기서 저렇게 한가롭게 굴어도 되는 걸까. 어차피 지젤은 자신을 두고는 못 떠난다. 적어도 살려둔 채로 떠날 수는 없을 터였다.
“난데없이 공주라니, 이게 무슨 허튼 수작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헤넌 공작의 입에서 큰소리가 튀어나오자 귀족들 전체가 한 번 더 술렁였다.
“허튼 수작이라니, 공작은 말조심하시오!”
“말조심은 누굴 보고 말조심하라는 건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분열을 일으키려고 작정을 한 겁니까! 20년도 전에 죽은 공주가 갑자기 살아있다니.”
공작이 탕탕- 원탁을 내려치며 하는 말에 백작이 입을 열었다.
“죽은 듯 살아야 하는 사정이 있었으니, 공작님은 말을 삼가주셨으면 좋겠군요.”
“후작님, 저 어이없는 소리를 계속 들으실 겁니까? 공주가 살아있다뇨? 달리아 백작은 단합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저희를 분열시키려는 겁니다!”
헤넌 공작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다이한에게 물었다. 공작이 먼저 큰소리치고 나서준 덕분에 대강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자리를 끝낼 수 있는 분위기였다. 황태자는 와있지만 이엘리야는 여기 없는 건가. 그렇게 결론 내린 다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시에 달리아 백작의 뒤쪽에서 로브를 쓰고 앉아있던 사람이 조용히 일어섰다.
“후작님께서.”
다이한은 로브를 벗어내고 성큼 앞쪽으로 걸어 나오는 지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이 끼어들다니, 이렇게 되면 노망난 노인네의 헛소리로 결론짓기는 어려웠다. 지젤은 다이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달리아 백작의 옆에 섰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후작 부인의 등장에 헤넌 공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후작 부인께서 왜-?”
“후작님께서 다른 분들에게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군요.”
지젤이 다이한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다이한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런 식으로 정면 돌파해서 한 번에 터트릴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지젤의 성격상 하나하나 섬세하게 목을 죄듯 괴롭혀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정말 황태자를 따라갈 생각일까. 그래서, 이렇게 조급할까.
“설명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헤넌 공작이 다시금 다이한에게 답을 요구하는데도 다이한은 지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지젤은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와중에 지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엘리야가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살아남은 달리아 안나의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