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황태자께서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인은 아직도 물음표 던지기를 하고 있는 조지 콜튼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도널드가 그런 제인을 보며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이미 피떡이 된 그의 얼굴로 도널드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한계치까지 얻어맞은 조지 콜튼이 쿨럭 핏물 섞인 침을 뱉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며칠 전 갑자기 황국의 기사단에 끌려와서 끝없는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고문이라기에는 투박하고 직설적인 방법이었다. 그저 샌드백이 된 것처럼 번갈아 그를 때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만.”
제인이 도널드에게 손짓하며 뒤로 빠지라 눈짓했다. 주먹에 닿은 감촉이 유쾌하지 않아서 도널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인은 잠깐 이안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품에 든 단검을 꺼내 날이 잘 갈려있는지 확인했다. 황태자가 고개 한 번만 까딱이면 손톱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계속 모른다, 모른다 지껄이면 곤란해.”
뒷짐 지고 선 제인의 뒤에 앉은 이안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본래는 창고로 쓰이는 것 같은 조잡한 오두막 천장 사이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안은 지젤과 다이한이 무도회장에서 붙어있던 꼴을 상기시키고는 작게 신음했다.
어쩌면 제인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냥 지젤을 곱게 마차에 태워서 여길 떠났어야 했다. 그러면 둘이 붙어있는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그는 다이한의 품에 이마를 기대고 서던 지젤을 떠올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 지젤의 손에서 다이아 반지가 반짝였는데.
“내 약지는 비었네.”
그가 중얼거린 말에 도널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뭐, 원래 약혼녀와의 약혼반지도 안 끼셨으니까 약지가 비어있겠죠.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저 독사 같은 놈이 마가렛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울부짖기만 하는데.
“조지 콜튼.”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이안이 그를 부르며 자신의 오른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다이아는 그 새끼가 이미 끼워줬던 거라 싫었다.
“마가렛이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우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인 왕을 독살했나?”
“아닙니다! 마가렛 님은 무관하십니다! 전부 후작이 주도한 일입니다.”
제인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조지 콜튼의 등을 걷어찼다. 능숙하게 쓰러진 조지 콜튼의 등을 짓밟고 앉은 제인은 옷이 더럽혀지는 것에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흰 옷이라, 빨래하기 힘든데. 그녀는 고통 어린 숨을 내뱉는 조지 콜튼의 오른손을 강제로 잡아 쥐고는 엄지손가락 밑에 칼날 밀어 넣었다. 제인이 자신의 손톱을 모두 뽑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조지 콜튼이 바둥거렸지만, 제인은 힘으로 쉽게 그를 제압했다.
며칠을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사내를 힘으로 짓누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안은 제인이 자신의 명을 기다리는 걸 보면서 고민했다. 그렇게 끝낼까?
전부 후작이 시킨 일이라 재판에 회부해서 죽여버리면 자신이야 좋았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베어 죽이고 싶었다. 근데, 지젤이 하고자 하는 건 단순히 후작만을 벌주는 게 아니라서. 이안이 깊게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예물을 좀 해가려고 해.”
이안의 뜬금없는 말에 제인과 도널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잠깐 주저하던 도널드가 이안에게 되물었다.
“예물 말씀입니까?”
“다이한 후작하고 비교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고민 중이야.”
“아.”
도널드가 완벽하게 이해 못 했으면서,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이 입을 샐쭉거렸다.
“독창적이면서, 완벽한 게 뭐가 있을까.”
이안이 척 봐도 어이없어하는 중인 조지 콜튼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에 어디서 읽었는데, 짐승 이빨 따위를 장신구로 썼다더라.”
“이빨을 말입니까?”
도널드가 놀라서 묻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만큼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다. 이런 과시의 의미로.”
이안의 말에 작게 탄식한 제인이 조지 콜튼의 손을 놓아줬다. 그러고는 조지 콜튼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놀란 조지 콜튼이 아까보다 격하게 꿈틀거렸지만, 힘으로 제인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제인은 원수 이빨로 예물 해가겠다는 미친놈을 모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래서, 지젤 님께서 저하 따라 황국으로 가신답니까?”
제인의 질문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딱 약속을 한 건 아닌데, 같이 가야지.
“응.”
이안의 긍정에 이번엔 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자신의 주군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도널드.”
제인이 단검을 내려놓고 도널드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뭐든 공구를 내놓으라는 말에 도널드가 난감하다는 듯 쇠꼬챙이를 건네줬다. 지금 여기는 제대로 된 뭐가 없었다. 제인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걸로 어떻게 안 죽이면서 뽑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이안이 입을 열었다.
“콜튼 경, 조금 더 쉽게 선택지를 좁혀줄 테니 잘 생각해.”
“선택지?”
조지 콜튼이 숨을 토해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난데없이 납치해서 결국 죽일 생각이면서 선택지?
“죽어가는 왕비를 구할지, 어린 왕자를 구할지.”
이안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든 조지 콜튼이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무슨 뜻이십니까?”
이안은 그런 조지 콜튼을 내려다보며 권태롭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다이아 반지 말고 뭐가 좋을까.
“왕자님은, 어린 왕자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저는 황태자께서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지 콜튼이 분에 차서 내뱉는 말에 제인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도 저 미친 황태자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단정 지어 결론 내리려던 제인은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후작 부인이라면, 조금은 이해할지도?
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안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에메랄드? 괜찮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후작 새끼 눈깔이 녹색이라는 게 떠오른 이안이 이를 아득 물었다. 루비? 아니, 이번 루비 목걸이 때문에 오히려 질렸을 수도.
“달리아 안나 왕비를 마차 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워 공주의 존재를 숨기려 했으며.”
조지 콜튼이 눈물을 툭 흘리는 걸 보면서 이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왕을 독살한 자가 누구인가?”
“마가렛.”
조지 콜튼이 흐느끼듯 중얼거리자, 제인이 툭 그의 뺨을 쳤다. 재판 때, 증언도 해야 하는데 확실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지.
“더 크게.”
“전부 마가렛 님이 시키셨습니다.”
완벽하게 패배를 인정한 조지 콜튼이 대답한 동시에 이안은 작게 탄식했다.
“사파이어.”
사파이어가 딱이네. 지젤의 푸른 눈보다 못하지만, 볼 때마다 지젤을 떠올릴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도널드는 이 와중에 반지 생각을 하고 있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주군을 불경스럽게 바라보는 건 잘못된 일이었다.
그래, 진짜 이빨로 반지 안 만드시는 게 어디야.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로 한 도널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제 진짜 황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저택 뒤쪽 테라스에 앉아 햇살을 즐기던 이엘리야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야 하는 상황도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자, 하나만 먹어보자.”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황태자가 지젤에게 쿠키를 들이밀며 헤헤거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게 자신이 아는 황태자가 맞는 건가 싶어져서 여러 번 눈을 비빈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황태자가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 지젤의 옆에 붙어서 다정하게 간식을 권하고 있다는 게 껄끄러웠다. 이엘리야가 아는 황태자는 누군가의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분히 이상했다.
이안은 사람들 눈 때문에 저택에 드나들면 안 된다는 지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예 삼시 세끼를 지젤의 옆에 붙어서 챙기고 있었다. 그는 창문으로 넘나들고 있으며,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오니 아무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찌 되었든, 어미 새처럼 붙어서 유별나게 챙기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쩐지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인이 그런 이엘리야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아-.”
어서 입 벌려.
지젤은 계속해서 자신의 입술에 쿠키를 가져와 누르는 이안을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대놓고 피곤함을 토로하는 듯한 그 행태에 이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지젤은 너무 말랐고, 그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이런 거라도 좀 먹어야지. 달달한 건, 입맛 없어도 넘어가잖아.”
“별로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지. 식사도 절반 이상 남겼잖아?”
“입맛이 없어.”
지젤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이안은 다시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그래도 날 위해서 먹어.”
이안이 짐짓 진지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입에 다시 쿠키를 들이밀었다. 지젤은 그녀의 옆에 의자를 바짝 끌어다 놓고 세심히 자신을 챙기는 이안을 보며 억지로 입을 벌렸다.
“예뻐라.”
이안이 흡족하게 미소 짓자, 지젤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좀 굶는 게 뭐라고 저렇게 걱정이 많을까. 지젤은 이안이 황국에서의 문제로 골치 아픈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티는 안 내지만 제인이 조용히 그를 불러내서 보고하거나, 밤새서워 서신과 서류를 뒤적이는 걸 보면 분명 상황이 좋지 못할 게 뻔했다. 즉위식을 미룰 수 없을 텐데, 이안은 절대 지젤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폭약을 다루듯, 지젤을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만 대해줬다. 당장에 터질까 봐 무서운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지젤은 또 이안이 안쓰러웠다. 운 없이 나를 만난 불쌍한 이안.
“우리 하나만 더 먹어볼까?”
위가 늘어야, 식사도 많이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안이 지젤을 설득하기 위해 초코쿠키를 허공에 흔들며 미소 지었다. 지젤은 이안의 조잡한 수법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