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주변 정리 얼마나 걸려?”
바르한 자작은 장식이 전혀 없는 단출한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지젤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의자에 기대앉은 후작 부인은 많이 피로해 보였다. 무도회 때도 후작이랑 되게 이상하더니, 아예 후작저를 나온 걸 보면 무슨 큰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동생 문제 때문에? 후작을 재판에 회부해야 해서? 이래저래 골치 아픈 문제는 맞았다.
다이한 후작이 재산을 절반이나 잃든, 진짜 파산을 하든. 다이한 후작이니까 쉽게 무너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럼, 허울뿐인 자작이라도 남아서 후작 부인 편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테오가 지젤이 앉은 의자 근처를 서성이며 짧게 혀를 찼다. 어쩐다.
“테오.”
지젤이 답을 재촉하듯 그를 부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는 당장 내일이라도 가지고 있는 돈 전부 챙겨서 여기를 뜰 수 있습니다.”
“귀족들이 네가 도망갔다는 걸 눈치채려면 얼마나 걸릴까?”
“상환 날짜는 아직 멀었으니, 제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져야 할 텐데.”
“그럼, 열흘 정도 걸리나?”
지젤의 질문에 그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요, 그보다는 빠를 겁니다. 사흘? 늦으면 일주일 정도 걸릴 텐데. 급하십니까?”
“그럼, 내일 당장 떠나.”
예상 못 한 대답에 얼빠진 테오가 눈을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너무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조금 더 끌어모으실 줄 알았는데요.”
“후작이 다 알고 있거든. 근데 우리 바르한 자작에 대해서도 이미 아는 것 같아서.”
지젤의 말에 테오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이한 후작이 다 아는데, 날 살려둔다고? 본인 재산의 절반을 사기 쳐서 나를 놈을 살려둘 성격이 아닌데. 테오는 가만히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지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는 작게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대체 어쩌다 후작 같은 인간이랑 엮이신 겁니까.”
그 후작이 본인 재산 절반을 사기로 잃어도 좋다고 속아주다니. 원래도 다이한이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은 했지만 정도가 심했다. 지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테오를 보며 뻐근한 목을 매만졌다.
“그간 얼굴 보며 쌓아온 정이 있으니 서운하긴 하지만, 우린 여기서 안녕이겠네.”
지젤이 말과는 다르게 홀가분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바르한 자작은 똑똑하고, 능청맞아서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저야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지젤 님은 어찌 하시려고요?”
테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말에 지젤은 쓰게 미소 지었다.
“넌 다정한 사람이야.”
우리가 이 조잡한 일을 준비하던 때도, 다 끝난 후에는 후작 부인이 어떻게 도망가실 건지 물었지.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근데, 네가 다정하다고 돈 더 챙겨주는 거 아니니.”
“지젤 님.”
“넌 네 몫을 두둑이 챙겨서 깔끔하게 떠나는 데 집중해. 일을 망치지 않도록. 가명으로 지니고 있는 수도 내의 재산도 다 정리하고.”
괜히 어설프게 얽혀서 피 보지 말고. 지젤의 단호한 대답에 테오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지젤이 충고를 덧붙였다.
“최대한 조용히, 깔끔히. 아무에게도 행적을 알리지 말고 멀리 떠나.”
“지젤 님.”
지젤은 걱정이 가득 담긴 테오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지젤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불나방 같은 사람을 말릴 수 있는,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테오는 이엘리야를 잠깐 떠올렸다가 쓰게 웃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같이 가자고 말도 꺼내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용해지면, 그때 다시 뵙죠.”
테오가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며 서재를 나서는 걸 보면서, 지젤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
바르한 자작이 사업상의 문제로 항구 도시로 떠난 지 사흘 만에, 수도 내에서는 그가 재산을 정리해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모두 헛소문이 참 우습다며 여유롭게 웃었지만, 자작이 사라진 지 일주일이 넘어가자 다들 발을 동동 굴렀다. 거기에 후작 부인이 후작저를 나와 수도 중앙의 저택에서 머문다는 얘기까지 떠돌자 모두 급하게 바르한 자작을 찾아 헤맸다.
그들은 자작이 자작저의 이름으로 된 재산을 그대로 두고, 투자금 대부분을 들고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두꺼운 이중장부를 찾았지만, 그건 그들의 투자금의 행방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자작의 무역 사업은 허울뿐이라는 게 들통났다. 새로운 항로를 찾았다며, 운항비를 십분의 일로 줄여 어마어마한 수익을 남길 거라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자작은 배를 타본 적도 없으며, 그가 이미 계약을 끝냈다던 동쪽 대륙의 상단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바르한 자작에게 큰돈을 내어준 귀족들은 모두 뒤집어졌고, 투자를 하지 않은 귀족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었다. 모두가 바르한 자작의 행방을 찾았고, 개인적으로 현상금까지 건 귀족들이 수두룩했지만 아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자작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아니, 후작 부인은 뭐라도 아실 것 아닙니까!”
지젤은 자신을 찾아온 엘로이 백작 부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침묵을 뭐라 해석했는지 엘로이 백작 부인이 다시 큰소리를 쳤다.
“애초에 바르한 자작에게 투자하라 떠들고 다니신 건 후작 부인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지젤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 투자하라 부추겼나요?”
지젤이 말간 푸른 눈을 뜬 채로 덤덤하게 물었다. 그 꼴을 본 엘로이 백작 부인은 기가 막혀서 어항의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분명, 후작도 큰 금액을 투자했을 텐데 응접실에 태연하게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후작 부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투자를 권유하지 않았어요. 후작님께서 투자를 하셨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죠.”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요? 후작 부인께서 워낙 자작과 친분이 두터우시고, 후작님이 믿고 거금을 쏟아부으셔서-”
“그래요, 개인적으로 내가 그 사업에 관심을 보여서 저희 남편이 큰돈을 투자했어요. 근데, 제가 부인 돈을 빼앗아 바르한 자작에게 강제로 쥐여줬나요?”
“하.”
엘로이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를 악물고 지젤을 노려봤다. 그러자,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한테 이럴 게 아니고, 자작 부인인 스텔라를 찾아봐야죠. 나도 피해자고, 남편 볼 면목이 없어서 후작저를 나와서 지내는걸요.”
“정말 자작의 거취에 대해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셨으면서? 자작이 사라지기 전날 여기 찾아온 걸 제가 봤어요!”
엘로이 백작 부인이 따지고 들며 지젤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스텔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요양 간 별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고, 자작이 이 저택에 들어서는 걸 자신은 분명 봤다. 그래서, 백작 부인은 지젤이 아예 모른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돈이야 모르겠고, 당장 자신의 돈이라도 건져내려면 누구보다 빨리 조용히 찾아야 했다.
“백작 부인.”
지젤이 집요한 엘로이 백작 부인을 보며 소리 내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작이 어딨는지 알면, 내 남편이 가만 뒀을까요? 우리 후작저 영지의 절반 이상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엘로이 백작 부인은 자신을 깔보듯이 훑는 지젤을 보며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후작 부인은 뭔가 알 텐데.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다. 바들바들 떨며 지젤을 노려보기만 했다.
“엘로이 백작님께서도 가지고 계신 영지 대부분을 저당 잡히셨다면서요?”
지젤이 그녀를 측은하게 보며 묻는 말에 백작 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지젤은 옅은 동정에 그대로 허물어져 내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젤 님. 저 바르한 자작 꼭 잡아야 해요! 그냥 어디로 갔는지만 말씀해주세요. 저희는 농작으로 먹고사는 가문인데, 당장 반년도 못 버티고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게 뻔해요. 제가 저희 남편 설득해서 투자한 건데, 저는 후작님이 그렇게 큰돈을 내어주길래-”
“부인은 항상 입이 가벼워 문제네요.”
“네?”
지젤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이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후작이 큰돈 투자했다는 소리를 옮기셔서 재산을 잃으셨고, 내가 황태자와 바람났다는 소문을 퍼트려 내 신의를 잃으셨잖아요.”
백작 부인이 놀라서 숨을 멈추는 걸 보면서, 지젤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이 기회에 수도 생활 청산하시고, 백작님과 함께 수도원에 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그, 그게 무슨-”
“뭐, 부인이 젊은 화가랑 재미 본 걸 백작님이 아직 모르시니 다행이네요. 뒤에서 저의 불륜에 대해 떠드신 분이, 본인도 그런 관계를 즐기실 줄은 몰랐지만.”
“지젤 님!”
백작 부인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걸 보면서 지젤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자작은 여기 온 적이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려고 오신 거면 그냥 돌아가심이 좋겠네요. 정 힘드시면 잘생긴 화가 품에 가서 기대세요.”
지젤이 신랄하게 내뱉는 말들을 들으면서 엘로이 백작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지젤이 가볍게 턱짓했다.
“이만 나가세요. 계속 저와 자작을 엮으려 하면, 저는 백작님께 가서 화가 이야기를 할 거랍니다.”
지젤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피라미 같은 백작 부인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저런 여자 상대해줄 시간 없었다. 지젤은 귀족들이 당장 파산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왕궁에 모여드는 때를,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