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7)화 (117/135)

117.

대체 왜? 지젤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침실 문이 열렸다. 그걸 미처 보지 못한 미아가 크게 소리쳤다.

“지젤 님이 불임이신 걸 들키면 안 되니까요! 그러다 다른 여자가 저택에 들어오면, 그러면 지젤 님께 해가 되잖아요.”

침실에 들어선 다이한은 엉켜있는 지젤과 미아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지젤의 위에 올라타 있는 미아의 목덜이를 잡아끌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후작님!”

순식간에 바닥에 널브러진 미아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다이한을 올려다봤다. 지젤은 다이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미아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미아, 네가 진짜 의원을 죽였다고?”

단순히 내 불임을 숨기려고, 사람을 죽였다니. 그게 이유야?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지젤이 되묻는 말에 다이한이 깊게 한숨을 쉬며 이를 아득 물었다. 원래라면 진작에 치워버릴 것을, 지젤에게 워낙 잘해서 내버려 뒀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다이한의 피로한 듯한 표정을 읽은 지젤이 그에게 물었다.

“심증은 있었지. 후작 부인이 의원을 만나고 나온 다음에 저 하녀가 들어가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지젤의 푸른 눈에 가득 차오른 혼란을 보면서, 다이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려 애썼다. 그러나 짜증스러움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집사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난리가 났길래 복도 끝 방에 가보니, 화가가 기절한 채로 늘어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가는 끈으로 목이 졸린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본 다이한은 단숨에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끈 하나로 목 졸라 죽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멍청한 계집애는 어쩌다 운이 좋았던 걸 착각한 모양이었다. 다이한이 흘끔 지젤의 표정을 살피면서 문밖에 서있던 집사에게 눈짓했다.

“뭐가 어찌 된 건지 상세하게 들을 생각이니, 일단 지하실로 데려가.”

“지하실이요? 시, 싫어요. 지젤 님-”

지하실이라는 말에 미아가 놀라서 지젤을 향해 손 뻗는 걸 다이한이 몸으로 막아섰다. 그러고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내 화를 돋우지 말고, 곱게 따라가는 게 좋을 텐데.”

재판에 안 넘기고, 후작저 안에서 해결하는 수가 있으니까 말이지. 다이한의 말에 미아가 겁을 먹었는지 시선을 내리깔면서, 순순히 집사를 따라 일어섰다. 그걸 본 지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미아가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것도 나 때문이라니.

“잠깐, 수도에 있는 광장 옆 저택에 가있도록 해.”

정리되면 다시 부를 테니까. 다이한이 평소와 같이 권하는 말을 들은 지젤은 대답 없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자신을 위해 그리했다는 미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젤은 끌려 나가는 미아를 보고 무어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이내 조용히 닫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짐작도 안 갔기 때문이었다.

***

엘레노어 황녀는 자신을 불러낸 후작 부인이 미소 지으며 한 말을 곱씹다가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그러고는 답지 않게 뺨을 긁적이며 어깨를 비틀었다.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엘리야가 죽은 달리아 안나의 딸이라고.”

지젤은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고개를 기울이다 흘러내린 본인의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믿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라고?”

“이엘리야가 본인 원래 몫을 찾도록 도와주세요.”

“본인 몫이라 하면, 왕궁에 입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내가? 엘레노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으며, 제정신이 아닌 듯한 후작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태연하게 마주 앉아있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과 불규칙한 호흡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뭐 하러, 송장으로나마 누워있는 마가렛을 밀어내고 이엘리야를 도와?”

이엘리야를 아끼기는 하지만, 엘레노어는 황국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죽은 전 왕비의 딸이 왕관이라도 쓰면, 조공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황국으로부터 독립하자고 큰소리칠 텐데. 내가 왜?

“대신, 이안 따라 황국에 가지 않겠습니다.”

지젤이 싱그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소리는 이미 지겹게 하고 있지 않나?”

“필요하다면 이안한테는,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할 테니 이엘리야에게 힘을 실어주세요.”

지젤이 차분하게 하는 말에 엘레노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 때문일까? 피가 안 섞였다 한들 동생이 왕궁에 들어가면, 나름 여기서도 살 만할 테니까? 후작과는 아예 이혼할 생각인가.

“언제는 곧 죽어도 거짓말 못 하겠다고 하더니.”

“황국의 간섭 없이 이엘리야가 독립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해주세요. 정당한 동맹 관계로.”

엘레노어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당연히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었다. 정당한 동맹? 국정에 간섭하지 말라? 시건방지기는. 그렇지만, 후작 부인이 황국에 따라나서지 않고 이안이 파혼의 조건으로 내민 황국의 광산을 되찾는다면. 그러면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잘나신 후작 부인이 얻는 게 뭐지?”

네 법적 남편은 가장 황국의 덕을 보고 있는 사람이니, 이엘리야가 힘을 얻으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엘레노어의 물음에 지젤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며 쓰게 웃었다.

“뭐든, 하나는 제대로 남기고 가고 싶어요. 이엘리야라도 자기 몫을 되찾고,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요.”

여태,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거든요. 지젤이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엘레노어의 검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되물었다.

“그래야 지난 5년이 덜 허무하지 않겠어요?”

엘레노어는 지젤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니. 멀리 보고 따지자면, 이쪽으로는 크게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후작 부인이 나한테 악역을 떠넘기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지젤이 그건 살짝 미안한 듯 눈을 찡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이안이 난리 칠 걸 오롯하게 감당해야 할 테지만, 그래도 내가 황국에 쫓아가서 골치 아픈 것보다는 낫겠지. 지젤은 그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다.

“좋아, 난 어중간하게 가식 떠는 것들보다 솔직한 게 좋더라.”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으며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걸 보면서 지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한테 끝까지 나쁜 년으로 남을 생각에 조금 씁쓸해진 지젤은 애써 웃으려 노력했다.

***

이엘리야는 차분하게 앉아서 그녀에게 출생에 대해 털어놓는 자신의 언니를 마주하고 울상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지젤을 보자니,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지젤은 그런 이엘리야를 보며, 책이 가득한 서재 의자에 앉아서 조용하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참으면, 엘레노어 황녀님이 공식적으로 널 데리고 왕국으로 들어갈 테고. 그때 당시 시녀들을 다 불러내 입증할 계획이야. 달리아 백작은 그때, 널 처음 보는 것처럼 할 테니 목걸이 잘 챙기고.”

지젤의 말에 이엘리야가 제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미안해, 언니.”

이엘리야가 사과하자, 지젤이 소리 내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주어가 없어도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리고 순진했던 이엘리야의 탓이 아니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아무도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잖아.”

“아버지랑 어머니가 날 데려오지 않으셨으면. 언니가 이런 고초를 겪을 일도 없고-”

“이엘리야.”

지젤은 눈치를 잔뜩 보고 있는 이엘리야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게 손을 달라는 소리라는 걸 알아챈 이엘리야가 손바닥을 겹쳤다.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속상해했을 거면서 넌 왜 그래.”

지젤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왕비와 후작의 잘못이야. 그리고 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벌을 받게 할 거야.”

지젤의 말에 이엘리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왕비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지젤이 고생해서 쌓아놓은 일에 갑자기 끼어드는 꼴이라 부탁하기 민망했지만, 왕비는 자신이 끝내고 싶었다. 그런 이엘리야의 표정을 걱정이라 생각한 지젤이 그녀를 다독였다.

“이엘리야. 처음에야 힘들겠지만, 애초에 네 자리였고, 넌 강하고 똑똑하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언니 나랑 같이 있어줄 거지?”

어딘지 초연해 보이는 지젤의 미소를 보면서 이엘리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지젤이 대답 대신 곤란한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 어디 가는데?”

“난 이안 따라 황국으로 갈 거야.”

지젤의 말에 이엘리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태자는, 이안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자신의 다정한 언니가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안과 황국에 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약혼녀인 미스틱 가문의 영애도 보통 성격이 아닌데, 언니가 가서 불행해질까 걱정이었다.

“이제 나도, 나로서 살아봐야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금은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이엘리야는 황태자 말고도, 다른 일로도 충분히 심란할 지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안의 인성이라든가 하는 문제는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지젤은 그 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적당히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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