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지젤은 흘끔 이쪽의 얼굴을 살피는 하인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하인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단란하기 그지없던 후작 부부가 아침부터 또 싸웠는지, 후작 부인이 기어코 짐을 쌌었다는 하녀들의 말 때문에 사용인들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다들 잔뜩 긴장해야 했다.
“왕궁으로 심부름 가본 적 있지? 황국에서 온 제인 경을 찾아서 전해주게.”
“아무런 전하는 말 없이 이 서신만 주고 오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지젤은 하인이 재차 확인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신은 필요 없으니, 그것만 전하고 바로 오거라.”
저 서신을 다이한이 본다 한들 상관없었다. 중요한 내용은 없었고, 오늘 왕궁 후원에서 황녀를 만나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거였다. 지젤은 아직은 후작저에 꼭 있어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도 내에서 별거하는 귀족 부부가 많으니, 지젤이 이렇게 잠시 나가 있겠다 해도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서 수도 내 별장이나, 다른 저택에 가있어도 되는 일이었다. 후작 얼굴을 보면, 분노가 이성을 좀먹어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굴게 되었다. 그건 똑똑하게 구는 데, 이롭지 못한 일이지. 그리고 후작저 밖에서 머무는 게 이엘리야를 만나기에도 용이했다. 후작이 이엘리야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조심스레 만나야 했다.
용서하지 말라고? 다이한이 겸허히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구는 게 가증스러웠다. 과연, 언제까지 그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차라리 용서해달라고, 제발 떠나달라고 하면 일이 더 간단해질 텐데.
“지젤 님.”
하인이 나가면서, 들어서는 미아를 본 지젤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밖에 나가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미아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이제 미아도 정리할 때가 되었지. 지젤이 화장대 위의 값나가는 목걸이와 반지 몇 개를 주머니에 담으며 값을 가늠했다. 이 정도면, 수도 어디서든 새 출발 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미아, 이리 와.”
“지젤 님, 어디 나가세요?”
왜 저렇게 낡은 드레스를 입으셨을까? 미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젤이 귀금속을 챙기는 걸 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지젤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네가 내게 마음 써주는 게 항상 고마웠어.”
비앙카는 미아가 이상하다고 항상 경고했지만, 지젤이 보기에 미아는 그저 이상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좀 뜬금없이 굴고, 선을 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저택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수모를 겪었을 때 미아가 울던 걸 기억했다. 그거면, 그 정도면 그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기 충분했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은 미아를 이용했으니까.
“네?”
미아는 지젤이 자신의 손에 쥐여준 잘그락거리는 주머니를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갑자기 이런 걸 주면서,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이거 급료하고는 별개로 내가 챙겨주는 거야.”
미아가 후작저에서 계속 일을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다이한 후작이 파산하고 나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후작저가 곧 파산할 거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지젤이 미간을 살짝 구긴 채로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
“아침에.”
목이 멘 미아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갈라지는 목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에 후작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싸우신 건가요?”
아침부터 짐을 싸기 시작한 후작 부인과 후작이 말다툼을 했다는 건 다른 하녀들에게 들었지만 점심때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화해하신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짐 가방이 침대 위에 올라가 있고, 나한테 이런 걸 주시는 걸까?
“오해가, 두 분이서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건가요? 오해는 대화로 풀면 되잖아요. 네?”
“내가 너한테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건 받아둬. 네가 요긴하게 쓰면 좋겠어.”
“싫어요, 안 받을래요.”
미아가 지젤의 손에 다시 주머니를 떠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어딜 가시려는 건데요?”
“그럼, 여기 둘 테니 나중에 네가 챙기렴.”
지젤이 깊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자, 미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젤 님, 저 짐 가방은 뭐예요?”
미아의 질문에 지젤은 대답 대신 그녀가 손짓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전부 아벨린 남작가에서 가지고 왔던 것들 중 남은 것들이었다. 여기 있는 다른 것들은 필요하면 다시 다 살 수 있었지만, 가방 안에 든 옷가지들은 아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사주신 것들이었고, 다시 돈으로 살 수 없었다. 지젤은 자신의 오른손에 자리한 결혼반지는 챙겨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이혼하는 날 후작의 얼굴에 던져줄 생각이었다.
“어디 가세요?”
“미아,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지젤은 덤덤하게 미아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하녀와 후작 부인으로 만났지만, 미아가 있어서 수월했었고 안심되기도 했었다. 확실히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지만, 이 정도면 깔끔한 이별이었다. 지젤이 그렇게 끝맺음하려 했으나, 미아는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미아.”
지젤이 반쯤 열려있던 침실 문을 재빠르게 닫아버린 미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지젤을 본 미아가 도리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왜 그러세요? 그냥 제발 여기 가만히 계세요. 이러다 또! 또 무슨 일 겪으시게 될까 봐 무서워 죽겠어요.”
미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걸 보면서, 지젤은 고개를 기울였다. 걱정이 돼서 나가지 말라는 거야? 저번에야 다쳤으니 겁먹은 걸 이해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그런 지젤을 향해 미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후작님 심기를 거슬러서 다시 예전처럼, 기억을 잃기 전으로 돌아가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그때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세요?”
“이제 그럴 일 없어, 난 나갈 거고 후작은 여기 있을 테니까.”
지젤은 다이한이 자신을 쫓아올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후작의 시야 안에 있는다면, 그는 따라오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도망치는 걸 걱정했다면 아까 아침에 어디다 묶어뒀을 텐데, 넌 다시 돌아올 거라는 개소리만 한 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아, 비켜.”
“싫어요, 안 돼요. 지젤 님 제발,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왜 그러세요? 조용히 계시면, 얌전히 계시면 아무 일도 없고. 후작님도 잘해주시잖아요.”
지젤은 미아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렸다. 그런 지젤의 반응을 보지 못한 미아가 지젤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후작님께서 지젤 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아끼시는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젤 님께서 조금만 참으시면 되잖아요. 후작님이 그만큼 잘해주시잖아요.”
“잘해준다고?”
“지젤 님, 기분 상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만 참으시면 금방 지나가요. 저한테 이야기하시고, 속상한 마음 풀고 넘어가세요. 네? 이러다 또 후작님이 폭력적으로 구시면-”
“그게 날 위한 거야?”
지젤이 조용히 묻는 말에 미아가 말을 멈췄다.
“이 저택의 평온을 바라는, 널 위한 게 아니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미아가 도리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절 위한 거죠?
“지젤 님, 저는 여태 지젤 님을 위해서. 그래서 전부 다 했어요.”
“네가 지금 말하는 게, 정말 날 위한 거라고? 넌 지금 내가 후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하는 거잖아.”
“네! 그래야 예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젤 님께서는 기억 못 하시겠지만, 지젤 님은 그저 밥을 먹는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셨잖아요. 그렇게 두 분이서 싸우시는 악순환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세요?”
“그게 날 위한 거라니 무슨 소리야, 싸움이 되는 게 껄끄러우니 나보고 다 참으라고?”
“그러니까, 후작님은 원래 그런 사람이지만 지젤 님은 참으실 수 있잖아요!”
미아의 말에 지젤이 아연해져서 입을 벌린 채로 숨을 멈췄다. 물론, 내가 순종적인 후작 부인으로 5년을 있었다지만, 너무하잖아. 그녀는 미아의 말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어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투성이였다.
“이번에도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지젤 님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세요?”
“내가 너한테 그런 걸 노력해달라고 한 적 있니?”
“아니요, 그렇지만 저는 지젤 님을 위해서 했어요! 의원이 지젤 님이 불임인 걸 후작님에게 이야기할 때도, 샤론이 찾아와서 지젤 님에게 남자가 있다는 헛소리를 할 때도.”
지젤 님이 원하지는 않으셨지만, 지젤 님을 위해서 했다구요. 격앙된 어조로 설명하는 미아의 말을 들은 지젤이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를 밀어냈다. 목매달아 죽은 하녀야, 손에 남은 상흔으로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미아, 너 정확하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의원을 어떻게 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흥분한 미아가 지젤의 어깨를 밀어서 그녀를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지젤은 그런 미아를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우면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언뜻 보면 절박하게 호소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밑에 분노가 깔려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마시고, 제발 저희 조용히 살아요. 지젤 님, 그럼 행복해지실 수 있어요.”
“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사람들을 해친 거야?”
지젤의 질문에 미아가 어깨를 움츠리는가 싶더니 대답을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지젤은 자신의 어깨를 꾹 누르고 있는 미아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네가 그 의원을 죽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