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5)화 (115/135)

115.

제인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 황태자를 흘끔 올려다보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와서는 애처럼 헤헤거리기만 해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지만, 황궁에서는 매일같이 보던 얼굴이었다. 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제인은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지금 차분하게 분노를 씹어 삼키고 있었다.

“달리아 안나 왕비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 시종들 다 찾아와.”

“네.”

아벨린 남작과 마부가 죽었으니, 이엘리야가 공주라는 걸 증명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그때 당시 왕비와 공주를 봤던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했다.

“조지 콜튼은?”

그가 제인이 납치해 와 고문하고 있는 마가렛의 기사에 대해 물었다.

“후작이 아벨린 남작가를 불태웠다는 건 인정하지만, 왕비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지 콜튼은 생각보다 충직한 기사였고, 왕비나 왕궁에서의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불구로 만들어도 좋으니, 빨리 실토하게 만들어.”

그의 말에 제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냈다. 엘레노어 황녀가 알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몰랐다. 왕을 시해한 걸 입증하면, 왕비의 아들인 왕자는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왕자 나이가 어리니 목숨을 건질지 모르겠지만, 왕궁에 계속 두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달리아 안나의 딸이라는 걸 입증한 이엘리야가 왕궁에 들어서게 되면, 황국에 호의적으로 굴던 귀족들은 몸을 사리게 될 터였다. 그럼 황국 입장에서는 곤란해졌다.

“저하, 황녀님께서는-”

“이깟 소국 없어도 황국은 잘 돌아가.”

이안이 제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단언했다.

“즉위식 이후에 움직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이한 후작의 뒤에는 황국의 공작가가 있습니다. 괜히 문제라도 생겨서, 황제께서 선위 전에 마음을 바꾸시면.”

“미스틱 가문이 약속한 금광을 받아먹고 싶어서라도, 그런 일은 막을 테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제인은 황태자의 단호한 태도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로한 미스틱 공작이 오고 있다고는 합니다.”

제인의 말에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지젤을 데리고 여길 떠야 했다. 주위를 좀 환기시켜 주고, 편히 쉬고 좋은 것만 보여주면 금방 괜찮아지겠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움직여.”

지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안은 불안했다. 정말로 홧김에 후작과 같이 죽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후작 부인의 침실에 들어선 하녀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밤새 잠도 안 자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던 지젤이 해가 뜨자마자 침실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낡은 가방에 오래된 옷들을 챙기는 후작 부인을 보며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뒤늦게 나타난 노집사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마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지젤은 대답하지 않았고, 다이한은 그걸 아무 말 없이 문에 기대서서 빤히 바라봤다. 다이한은 지젤이 챙기는 것들을 보며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5년 전 지젤이 후작저로 챙겨왔던 남루한 드레스들, 비루한 구두, 촌스러운 장갑과 모자들을 보면서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부 나가.”

“후작님, 대체 두 분이서 무슨 일이-”

“나가.”

노집사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걸 알면서도, 다이한은 답해주지 않았다. 지젤의 낡은 가죽 가방이 어느새 꽉 찬 걸 보면서, 다이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하녀와 집사가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가며 문이 닫히자, 그제야 그의 입이 열렸다.

“나가서 황태자 따라가려고?”

다이한이 어제보다는 훨씬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지젤은 다이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흘끔 바라보다가 화장대 서랍을 뽑아 들었다. 여기 어디에 결혼식 때 가져온 귀걸이가 있을 터였다.

“지젤.”

“아무 말도 하지 마.”

당신이랑 말 섞고 싶지 않아. 지젤이 덤덤하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짐 챙기는 걸 마무리했다. 다이한은 그걸 가만히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나간다 한들 넌 다시 돌아올 거야.”

“왜?”

지젤이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빤히 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다시 돌아온다고? 그건 무슨 자신감이지? 아, 이혼해주지 않을 터라?”

“넌 나를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후작이 차분하게 지껄이는 걸 들으면서 지젤은 눈을 감았다. 어제 무도회에서 가지 말라면서, 감정적으로 굴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는 평소의 무감각한 후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걸 마주하고 있자니,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내가 용서하고 떠나는 걸로, 너에게 복수한다면?”

너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럴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서 그냥 가버리겠다면? 그걸로 복수하겠다면. 지젤이 이를 악물고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다이한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분노로 얼룩진 지젤의 푸른 눈을 보며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까.”

다이한이 씁쓸하게 중얼거린 말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지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네 인생을 망친 나를 네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게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 아니라 그럴 수 없을걸. 그러지 못할걸. 차라리 오늘 이 후작저를 불태우고 내 심장에 칼을 꽂을지언정 너는 날 용서할 수가 없을 텐데.

“나도 이제는 제법 널 안다고 자부해서 하는 말인데, 넌 그럴 수 없어.”

“당신이 날 안다고?”

“네가 날 용서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

적어도 그건 장담해.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말을 반박하고자 입을 열었던 그녀는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젤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당장 뒷일 생각하지 않고 그를 죽이고, 재판을 받고 사형대에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앙갚음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 포기하고 홀연히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도망치고 싶었으며, 벗어나고 싶었다.

“후회해? 그때, 뭐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그런 얄팍한 후회라도.”

애초에 그런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든가. 우리 가족을 살려줄 걸 그랬다든가. 아니면, 그래. 적어도 내 분노와 슬픔 정도는 이해해줄 걸 하는 후회. 죄를 고하고 모든 걸 만회하려고 노력이나마 해볼 걸 하는. 지젤이 더듬더듬 그를 설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하는 말들을 들으며 다이한은 눈을 감았다.

“적어도 이안이 황태자로 돌아왔을 때, 나한테-”

“날 용서하지 마.”

다이한이 지젤의 말을 자르고는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지젤은 입을 벌린 채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용서하지 말라고. 저번에도 이런 말을 했었다. 사과할 수 없다고. 지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이한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띵한테, 동시에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이한은 눈만 깜빡이고 앉은 지젤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곳을 빠져나왔다.

***

부부 싸움에 끼게 된 오스틴은 초조했다. 후작 부인이 왕궁에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그만 일이 꼬여서 후작에게 들키는 바람에-. 후작은 그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을 뿐 후작 부인처럼 당근을 흔들지는 않았다. 그러니, 후작 부인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설명하고 사과해서 만회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중간에 후작의 뜻대로 말을 전달한 게, 얼마나 큰일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래도 심각한 일은 아니길 바라야 했다. 그는 처음 약속대로 왕궁에 제발 보내달라 무릎 꿇고 빌 생각이었다. 후작과 후작 부인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 이게 대체 무슨 일들인지 모르지만 후작 부인이 자신을 왕궁에 들여보내 줄 유일한 사람인 건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기사가 애먼 자신을 붙잡는 바람에, 그래서 일이 엉망이 되었다.

별채를 벗어나지 말라던 노집사의 말을 불가피하게 무시하는 상황이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작가에 온 뒤로 일이 엉망이었다. 그놈의 후작 부인 초상화도 상상으로 그려내야 했다. 돈은 이미 거금을 받았고 후작 부인이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스틴이 심호흡을 하며 후작 부인의 침실 문에 노크하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무슨?”

놀란 오스틴이 고개를 돌렸다가 미아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지금, 설마 지젤 님의 침실에 들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초상화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왜 그러죠? 급한 일인지라 무례를 알면서도 이리 왔습니다.”

“별채에 가 있으시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내가 직접 전할 겁니다.”

“왜요?”

오스틴은 오묘한 표정을 한 채로 자신을 보는 미아를 마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긴히 드릴 말씀이라 그렇습니다. 꼭 제가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럼, 중요한 용건이 있으시다고 전해드릴 테니 복도 끝 빈방에 가 계세요. 거기가 지금 바닥을 뜯어낸 상태고, 다시 덮는 공사를 내일 아침에 할 거라 오늘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을 거예요.”

미아의 제안에 오스틴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속이고 후작의 말대로 거짓된 이야기를 전한 후작 부인이 안 만나줄까 봐 침실로 찾아온 건데, 이러면 안 만나주지 않을까? 그런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미아가 입을 열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 꼭 뵈었으면 한다고 제가 잘 전할게요.”

그제야 오스틴이 침실에서 한 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가 옅게 미소 지으며 오스틴을 복도 끝 쪽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지젤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후작 부인은 그런 가벼운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소문이 지젤을 괴롭히고 있었고 후작은 무슨 일인지 문제의 화가를 내쫓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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