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4)화 (114/135)

114.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지젤은 사교계에 입성하자마자 큰 관심을 받았다. 처음에는 왕비 눈치를 보던 귀부인들도 후작이 그녀를 과보호하는 걸 보면서 슬쩍 태도를 바꿨다. 처음에 후작은 지젤이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해 걱정했는데, 그건 덧없는 걱정이었다. 방금까지 하하 호호 떠들다가도, 등만 돌리면 서로를 헐뜯는 세계에서 그녀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2년쯤 지나자 귀부인들의 모임은 지젤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뒤에서는 그녀를 어리고 운 좋은 년이라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입이 닳도록 지젤을 칭찬했다. 그럼에도 다이한은 지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후작 부인.”

잠시 지젤과 떨어져있던 다이한은 그녀에게로 다가서는 청년을 보고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요즘 들어 계속해서 지젤의 주위로 어린 애들이 꼬였다. 그런 다이한의 바로 옆에 서있던 바르한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후작 부인께 말이나 붙여보려는 사내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다이한은 그런 자작의 말에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다이한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자작이나 저놈이나 거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후계 없는 노부부의 양자가 된 작곡가 행세나 하던 사기꾼, 달리아 백작이 연결해준 것이 분명한데 자작은 친왕국파가 아닌 다이한의 옆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호승심 때문인지.”

가벼운 농담을 하며 지젤에게 샴페인 잔을 쥐여주는 청년을 보는 다이한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걸 본 바르한 자작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후작 부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관계였다. 그는 후작 부인에게 실없이 웃으며 최선을 다해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남작가의 둘째가 곧 수도에서 쫓겨날 것이라 직감했다. 후작은 지독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다.

“감히 후작 부인을 욕심낼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있으리라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청년의 손등 위로 지젤의 손가락이 살짝 스치는 걸 보면서, 다이한은 바르한 자작의 비난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가지려 하는 사람에게는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는 걸, 오만한 그는 몰랐었다. 지젤과 함께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왕비는 버려야 했었다.

***

지젤은 후작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행했다. 왕비가 대놓고 그녀를 미워해도 꿋꿋하게 왕궁에 가 제 몫을 해냈으며, 늙은 집사와 함께 후작가 여기저기를 손보며 꼼꼼하게 영지를 살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뒤에서 무얼 하든 그녀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조용히 모르는 척했다. 달리아 백작과 내통하고, 왕비의 침실에 들어가는 향초까지 손쓰고 있다는 건 조금 늦게 알아챘지만 괜찮았다. 그는 겸허하게 그녀의 칼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평민이 황태자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기꺼이 본인의 입을 꿰매고 눈을 가려서 죗값을 치렀을 것이다. 바르한 자작이 지젤이 만들어낸 사람이며, 그를 이용해 자신을 파산시키려 한다는 걸 알게 된 날. 그때도 그는 그게 지젤이 받아야 하는 정당한 위자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태자와 처음 마주한 날, 혼절한 지젤을 끌어안고 후작저로 들어서며 다이한은 불안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 평민이 황태자라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지젤을 침대에 눕히며 그는 조용히 절망했다. 이렇게 꼬일 수가 있을까. 예전에 공작이 언뜻 말하길 황태자는 워낙 정치에 무심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황제가 주도하는 큰 행사가 아니라면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왜 5년 전에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를 뒤흔들까.

다이한은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젤의 곁을 지켰다. 기절한 지젤이 눈을 뜨면 당장이라도 이 모든 걸 그만두고, 황태자를 따라나서겠다 선언할 것 같았다. 그럼, 그는 또다시 폭력으로 그녀를 옥죄어 미움받을 걸 알면서도 5년 전과 같은 일을 반복할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이한은 얕은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지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널 만나지 말아야 했었다. 그랬다면 욕심내지 않았을 테니. 아니. 숲에서 네게 먼저 말을 걸었다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너는 그 더럽고 불행한 아이를 반겨줬을까? 그랬더라면, 어쩌면. 같은 가정들이 계속해서 다이한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왕비에게서 널 빼돌리려고 뱉어낸 무모한 거짓말의 무게를 알아야 했다. 멍청했고, 무지했던 변명으로는 덮을 수 없는 죄였다.

“황태자 저하께서는 왕궁에서 지내시는 거죠? 제가 내일 왕자님을 뵙기 전에 찾아뵙고 사과드릴게요.”

눈을 뜬 지젤이 그런 그를 보며 민폐 끼쳐 미안하다 사과하는 걸 보면서, 그는 겁먹고 주저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해서, 그 마음이 나에 대한 미움보다 커서 떠나겠다고 하면 보내줄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에도 서재로 올 건가?”

겨우겨우 혀를 움직여 뱉어낸 말이 본인이 듣기에도 비겁했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을 보며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몸이 안 좋지는 않아요. 당연히 내일도 가겠죠.”

“그래.”

뭐 그런 걸 걱정하냐는 듯한 지젤의 태도에 그는 안도했다. 지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볼 생각이라면 괜찮았다. 그녀는 황태자를 따라가지 않을 테고, 그럼 그는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끝까지 모른 척한다면, 다이한도 먼저 아는 척할 생각이 없었다. 지젤이 정당한 복수라는 이름으로 그를 징벌할 생각이라면 그는 기꺼이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다이한은 끝까지 스스로의 이기심과 무지함을 모른 척했다. 무지를 핑계로 그는 제 눈을 가렸다.

***

지젤은 후작을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면,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조잡한 가면을 집어 던진 지젤은 발코니에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하는 그녀의 뒤로 웃음과 음악이 끊임없이 흘렀다. 그게 그녀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 거지 같은 가면무도회를 망치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을 느꼈다.

당장에 다 집어치우고, 후작의 가슴에 칼을 꽂아 지금 그녀가 느끼는 고통의 반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마치 사랑이라도 한다는 듯 애절한 어투로 말을 내뱉는 다이한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분노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혀를 짓씹었다. 차라리 한센이 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껄였다면 좋았을 텐데.

“지젤.”

뒤에서 들려오는 이안의 목소리에도 지젤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안이 걱정돼서 따라온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다이한에 대한 분노를 삭이는 게 더 중요했다.

“괜찮아?”

“아니.”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질수록 그녀는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후작의 말을 그대로 믿은 스무 살의 자신이 한심했다. 어리고 순진했다는 핑계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믿을 수 없으니 마부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 했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일을 공론화시켜서 왕비며 후작이 가족들을 건드릴 수 없게 했어야 했다. 애원하고 무릎 꿇었지만 무력하고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유가 되지 못했다.

“지젤.”

“안 괜찮으니까, 혼자 있게 내버려 둬.”

후작은 진짜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공주를 처리하는 동시에 멍청한 그녀도 차지했다. 상황에 맞춰서 편하게 쓸 수 있는 카드였겠지. 여차하면, 왕비를 내쫓고 공주로 이용해먹고. 반대로 일이 틀어지면 진짜 공주가 아니니까 친왕국파를 무력화시키고.

“후작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눈을 부릅뜨고 몸을 바들바들 떠는 지젤을 본 이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응? 무슨 일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젤은 이안도 원망스러웠다. 넌 뭐 했어? 아는데, 네가 황제와 황녀에 의해 입이 틀어막혀 황궁에 갇혀 지냈다는 걸 아는데.

“내가 달리아 안나의 딸이 아니라는데.”

그녀의 말에 이안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들었다.

“진짜는 이엘리야라는데.”

그녀의 말에 이안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지젤의 결혼식 날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남작을 떠올렸다. 지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저하밖에 없다던 남작은 지젤을 빼돌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장 후작저에서 지젤을 끌어내 오려던 이안을 만류하고, 준비가 끝나면 남작저로 부를 테니 지젤을 데리고 황국으로 가달라고 부탁했었다. 당장 왕국만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나 이안이 남작저로 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불에 타버린 뒤였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지젤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이안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녀를 위로할 말이 없었다. 문득 그는 언젠가 지젤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애들일 뿐이라 말했던 게 떠올랐다. 이안은 갑자기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미안해.”

그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가 미안해.”

“이안, 제발 혼자 있게 해줘.”

이미 다 지난 일이었고, 멍청했던 건 지젤도 마찬가지니 이안의 사과는 의미가 없었다. 깊은 분노 뒤에 찾아온 무력감이 지젤을 천천히 좀먹었다. 지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널 떠나지 말아야 했는데, 끝까지 네 옆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불현듯 지젤이 갑자기 발코니 밖으로 뛰어내릴까 불안해진 이안이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지젤은 그런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으며 무표정한 지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이엘리야한테는 뭐라고 말을 하지.”

충격받을 동생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해? 후작이 미쳐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바보같이 그저 놀아났을 뿐이다?”

이엘리야를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한다니. 그 상황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누가 목을 콱 조르는 것처럼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숨 쉬는 게 고통스러워서 지젤이 크게 소리 내 헐떡이며 몸을 떨었다. 그 소리에 놀란 이안이 지젤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아.”

이안이 지젤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을 거야.”

허황된 그의 위로에 지젤이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지 않았다.

“내가 같이 있을게.”

이번엔 정말로. 이안이 지젤의 어깨가 움츠러질 정도로 힘줘 그녀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이안의 손바닥 상처가 터졌는지, 하얀 붕대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지젤은 그런 그에게 기대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이를 악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