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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3)화 (113/135)

113.

남작의 설명이 있었음에도 지젤은 털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 그에게 손톱을 세웠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지젤이 손목을 그은 그날에도, 왕비의 염원대로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아벨린가를 태워버린 다음에도. 그는 본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왕비와 척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니,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줘야 했다. 그가 지젤을 위해 왕비에게서 등을 돌리는 희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모든 일들 중 일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보 같은 일을 하는 지젤의 탓이었다. 그녀가 원망해야 하는 건, 주제도 모르고 감당 못 할 아이를 키운 남작이었다. 순간적인 동정심에, 찰나의 분노에 멍청한 짓을 하는 건 다이한이 아닌 그들이었다.

지젤이 기어코 목소리를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양 연기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 다시 시작하자는 말에 다이한은 그걸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워 자문했다. 노래 때문에, 그래서 욕심이 났던 건데. 어딘지 이제는 지젤의 노래를 듣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대체 왜 욕심이 났던 걸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찝찝했지만, 지젤이 조용하니 그의 일상도 평온해졌다. 그게 만족스러워져 그는 더 이상 답을 구하지 않았다.

***

다이한은 왕비가 지젤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날, 왕비궁에서 퉁퉁 부은 뺨을 한 채 주저앉아 있던 지젤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얀 뺨이 퉁퉁 부어서 그녀의 머리색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온 힘 다해 내리쳤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푸른 눈에 눈물이 가득 올라 차 있었다. 그게 꾸며낸 것인지, 고통 때문에 터져 나오는 생리적인 울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때리지 않았습니다. 저 영악한 년이 제 스스로 때린 겁니다. 콜튼 경을 포함하여, 여기 있는 모두가 봤어요. 심지어 날 겁박까지 했습니다!”

“외람되게도 후작 부인께서 자학적인 행동을 하신 것을 저도 보았습니다.”

왕비가 소리를 지르고, 조지 콜튼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도 다이한은 그것 또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젤의 눈시울이 더 붉게 달아오르며 푸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예, 제가. 제가, 저를 때렸나 보네요. 아니, 네.”

그 순간, 다이한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가 굳은 것같이 가슴께가 아파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 그렇게 많이 울렸는데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요 근래 웃기만 했던 얼굴이 눈물로 젖어 드는 걸 보자 숨이 턱 막혀왔다.

“제가 그랬습니다. 왕비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녀가 자신의 턱을 쥐고 있던 다이한의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마치 그의 손이 자신을 구해줄 동아줄인 것처럼 애처롭게 굴었다. 왕비가 직접 오더라도 후작 부인을 함부로 내어줘선 안 된다고 언질을 해뒀더라면, 그랬더라면 네가 이런 자학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지 몰랐다. 다이한은 겁에 질린 것처럼 파르르 떠는 지젤을 보다가,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뺨을 다시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같이 돌아갈 것이니, 먼저 나가 있어. 한센.”

눈물을 뚝뚝 흘리던 지젤이 불안한 듯 다이한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한센에게 이끌려 나갔다. 그 광경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던 왕비가 기가 찬다는 듯 숨을 토해내며 소리를 질렀다.

“저거 당장 수도원이든, 신전이든 집어넣어야 해요! 제정신이 아닌 계집이란 말입니다!”

마가렛이 뻔뻔하게 기사를 데리고 궁을 나서는 지젤의 뒷모습을 보며 흥분해서 더 크게 소리쳤다.

“내 말 들으세요! 저런 걸, 후작저에 데리고 있으면 큰일 날 겁니다!”

다이한이 아무 말 없이 마가렛을 빤히 보고만 있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우리 후작께서 저 정신병자 같은 여자애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오늘부로 후작저에 두신 사람들 다 물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다이한이 가볍게 오른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워낙 불안증이 과한 왕비를 생각해서 모르는 척 그냥 뒀건만, 이제는 치워야겠다. 깔끔하게 결론 내린 다이한이 고개를 까딱였다.

“자정까지 시간 드릴 테니, 깔끔하게 치우시고. 마가렛 님께서는 이제 후작저에 관여하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뭐?”

“그리고, 다시는 내 아내에게 손대지 마세요.”

“다이한!”

“왕비께서 저와 얼굴 붉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왕비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지젤이 제정신이 아니건만. 애초에 굳이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부터, 그때부터 이상했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설마 했는데, 공주를 이용해 이제 와 자신을 위협이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마가렛이 다이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후작을 망치고 있어요. 평소와 다르게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애초에 저 여자와의 결혼 자체가 억지였어요.”

왕비는 다이한이 해결책이라고 가져온 방법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반대해도 다이한은 기어코 지젤과 결혼을 했다. 지젤이 저택에서 그렇게 패악을 부려도 수도원으로 보내기는커녕 품에 끌어안고 놓지를 못한다. 이건 다이한답지 않았다.

“그걸 후작도 모르지 않을 텐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지금만 해도 누가 봐도-”

“지젤은 다니엘 후작가의 사람이며.”

마가렛의 말을 차갑게 잘라낸 다이한이 드물게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왕비의 말에 딱히 틀린 구석은 없었으나, 그는 그걸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턱 근육이 움찔거릴 정도로 분노를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지젤의 뺨이 계속 그의 머리를 장악했다.

“내 아내입니다.”

“다이한.”

마가렛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내쉬며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이한에게 다가섰다.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다이한의 주먹 쥔 오른손을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차분하게, 우리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줄 테니.”

다이한은 자신을 잡아끄는 마가렛을 냉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왕비님께서는 제게 명분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명분?”

다이한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다소 거칠게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공개적으로 등 돌릴 명분 말입니다.”

“다이한.”

정색을 한 마가렛이 그의 이름을 짓씹어 뱉었으나, 다이한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함부로 내 저택에 발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후작이 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서있는 조지 콜튼 경을 지나치며 다이한이 경고했다. 지젤을 왕궁으로 데리고 온 콜튼 경을 바라보는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일순 번득였다.

“허락 없이 후작저에 들어서는 것들이 사람 흉내 내는 쥐새끼인지, 쥐새끼 같은 사람인지 내 구분을 잘 못하니. 실수로 경을 죽이기라도 하면 피차 곤란하지 않은가?”

그의 말에 조지 콜튼이 아무 말 없이 꾸벅 고개만 숙였다. 그걸 본 다이한은 걸음을 재촉했다. 속에서 뭐가 들끓어서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왕비궁을 빠져나오면서, 다이한은 본인이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왕비가 제멋대로 굴어서? 일정이 어그러져서? 저택의 생각 없는 것들이 순순히 후작 부인을 내어줘서?

후작저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한센이 다가오는 다이한을 발견하고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앉아 있는 지젤이 보였다.

만약에 오늘 왕비가 마음먹고 지젤을 죽이려 했다면. 마차에 태운 다음 언제나 그렇듯 불가피하고도 적당한 사고사로 위장할 계획이었다면. 그럼 지젤은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한은 우뚝 멈춰 섰다. 그래서 화가 난 건가?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뭔가 더-.

“후작님.”

한센이 인상을 찌푸린 채 서있는 그를 부르자, 다이한은 굳은 다리를 움직여 마차에 올라탔다. 어쩐지 지젤을 마주하기 껄끄러워진 그가 고개를 그녀의 반대로 돌렸다.

“후작님.”

지젤이 자신을 부르자, 다이한은 아까보다 정돈된 지젤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를 마주 본 그는 분노의 나머지 이유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지젤에게도 화가 났다. 왜 자학적으로 구는 걸까. 꼭 그래야 했나. 그가 손을 들어 한눈에 봐도 쓰려 보이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지젤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후작님, 손이 시원해요.”

지젤이 다이한의 커다란 손을 뺨에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순순히 손을 내어준 다이한은 속이 메슥거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가운 그의 손에 부어오른 피부의 열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이 화끈거려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도 마냥 바보는 아닌지라, 왕비와 조지 콜튼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날 처음으로 다이한은 지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속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단순하게 이제 더는 그녀가 아픈 걸 그만 보고 싶었다.

마차가 후작저를 향해 출발하면서, 바퀴가 돌아가는 덜그럭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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