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2)화 (112/135)

112.

“바쁘신 후작님께서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예고 없는 다이한의 방문에 적잖이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벨린 남작이 그를 마주 보며 찻잔을 든 손을 잘게 떨었다. 다이한은 여기저기 많이 낡은 응접실을 쓱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벨린가의 영애에게 청혼하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남작은 잠깐 그대로 굳어 있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본인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후작에게 물었다.

“누구-, 누구에게 청혼을 하신다는 겁니까?”

“첫째 따님이 이제 스물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후작님께서 저희 지젤과 밖에서 만나신 적이라도 있습니까?”

“이름이 지젤.”

지젤 아벨린. 다이한이 몇 년 만에 알게 된 지젤의 이름을 입 안에 굴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젤과 얼굴 마주 보고 말 섞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 어째서 청혼을?”

남작은 다이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더 당혹스러워했다. 저건 결혼을 허락받으러 온 남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혼기가 지나고 있는 영애에게 미혼인 내가 청혼을 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이유가 당연히 필요했다. 귀족들의 결혼 시장은 철저한 계산하에 돌아갔다. 더군다나 황국의 신임을 받는 젊은 후작, 눈앞의 미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줄 선 영애가 가득할 텐데 굳이 왜. 게다가 만난 적도 없다고?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일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비합리적인 청혼이라면, 보통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서일 텐데. 그렇다고 후작이 사랑에 빠져서 청혼하러 온 것 같지도 않았다. 냉하고 무덤덤한 표정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만난 적도 없는데, 갑자기 청혼이라니. 남작은 고민하다가 정중하게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후작님, 지젤은, 저희 딸들은 조용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아이들 심성이 워낙 여리고 소박하기도 하여, 큰 저택이나 귀족가를 이끌 수 있을 만한 그릇이 안 됩니다. 아비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참금도 대줄 수 없는 형편이라-”

“지참금 따위를 계산한 결혼이었다면, 애초에 여길 오지 않았을 겁니다.”

다이한이 이쯤 되니 권태로운 듯 남작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일순 아벨린 남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의심이 가득 담긴 눈을 빤히 보던 다이한은 그냥 쉽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왕비께서 다 아십니다. 남작 부부가 아기를 데려가는 걸 본 사람을 찾으셔서.”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지.”

권태로운 표정의 다이한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제 입으로 말합니까? 아니면, 남작님께서 설명해주실 겁니까?”

남작이 아까와는 다르게 감정의 동요를 능숙하게 숨기고, 날카로운 눈으로 다이한을 마주 봤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맹수는 맹수라고, 남작이 다이한을 훑는 시선이 매서웠다. 묘한 침묵이 흐르고, 그마저도 지루해진 다이한이 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달리아 백작이 참으로 고마워하겠습니다. 손녀를 저리 잘 키워줬으니.”

말을 마친 다이한이 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든 상자를 꺼내 남작의 앞에 내려놓았다. 다이한답지 않게 나름 신경 쓴 반지였다. 가장 유명하다는 보석 세공사에게 웃돈을 주고 급하게 받아낸 다이아 반지였다. 남작이 그걸 내려다보면서도 말을 아끼자, 다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굳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 이쪽 편에 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적어도, 왕비님께서 거슬리지 않게 느끼시게끔.”

“기회라니.”

대체 결혼이 무슨 기회란 말인가. 이건 엄연한 협박이었다. 자신의 딸인 지젤을 볼모로 삼고 이쪽의 숨통을 서서히 죄어올 게 뻔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허술하게 발뺌했다가 후작을 자극이라도 하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작이 본인의 안일함을 자책하는 사이 다이한이 느긋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얌전한 후작 부인 정도면, 적당하겠죠.”

“후작에게 무슨 득이 된다고, 내 딸을 후작 부인으로 만들겠다는 겁니까.”

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다이한은 지젤을 곁에 두고 싶었다. 정확하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난생처음 겪는 기분이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욕심이 들끓었다.

“왕비의 약점을 좀 쥐고 있을까 싶어져서, 장성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려 한다면.”

여차하면, 뭔가 틀어지면 그때라도 차선책으로 쓰려고. 사실 그렇게까지 계산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뱉어놓고 보니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그러면 설명이 됩니까?”

“무슨! 지젤은 아닙니다. 지젤은 제 딸이 맞습니다.”

지젤을 공주라고 착각하고 있단 말인가?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젤은 자신의 딸이 맞았다. 다이한은 그런 남작을 빤히 바라보고는 딱 한마디 내뱉었다.

“글쎄.”

“아닙니다! 지젤은 정말 제 딸입니다. 정말로, 지젤은-”

“왕비께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십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지젤은 진정 제 친딸입니다. 어디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겁박하여 내 딸들을 해치려 한다면,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남작님.”

소모적인 말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닌데,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서야. 다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부르자, 남작이 반사적으로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다이한은 잔뜩 긴장한 남작을 고요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든, 무엇에 이용되든. 일단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남작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다이한의 말뜻을 어렴풋이 알아들은 남작은 그대로 떠나가는 다이한의 등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가 두고 간 반지 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불쌍한 내 딸들. 힘없는 남작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올랐다.

***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후작이 날 보러 왔다니? 알아듣게 설명해.”

낡은 저택을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의문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다이한은 오래돼서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내려오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내려다봤다. 푸른 눈이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고, 하녀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다. 말간 그녀의 얼굴을 본 다이한의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엉뚱한 소리라는 말까지 들을 일인가.”

다이한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지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푸른 눈이 노란 샹들리에 빛에 반짝여, 살짝 청록색 같기도 했다. 크게 뜬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는 표정이 사냥꾼을 마주한 짐승 같았다. 겁을 잔뜩 먹은 게 한눈에 보였다.

“혼기가 찬 그대에게 청혼하러 온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지젤이 다이한의 말을 곱씹기라도 하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따지듯 말했다.

“청혼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이한은 그게 왜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궁금해서, 지젤의 얼굴을 쭉 훑어 내렸다. 가늠하듯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전쟁 영웅께서, 고작 저 같은 이에게 청혼하다니요?”

당황스러운 상황에 겁을 먹은 게 분명한데도, 지지 않기 위해 따지고 드는 게 꽤 인상 깊었다. 어떤 성격일까 궁금했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청혼하러 온 이에게 하는 인사말치고는, 굉장히 무례하네.”

“무례를 범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저희는 일면식도 없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드린 말씀입니다.”

상식을 따지려면, 자신이 아닌 남작에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다이한은 눈에 힘을 주고 이쪽을 향해 따지고 드는 지젤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감사히 여겨야지.”

“감사요?”

어딘지 황당하다는 투로 지젤이 되묻자, 그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처럼, 고작 이런 집안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이니.”

다이한의 말에 지젤이 입을 벌린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젤의 붉은 입술이 할 말을 찾지 못해 뻐끔거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겁먹은 고양이처럼 근처로 다가오지 못하고 이쪽을 쳐다만 보고 있는 이엘리야를 본 다이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그녀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누가 진짜 공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지젤을 내려다보는데도, 지젤은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지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걸 본 다이한이 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처음으로 불러본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지젤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그녀와 잘 어울렸다. 그게 그녀의 이름이니, 당연한 일인데 그는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감상이었다.

“그래, 지젤.”

다이한이 다음을 기약하고 그렇게 등을 돌려 남작가를 떠나려는데, 지젤이 절박하게 그를 불렀다.

“후작님!”

그녀의 부름에 멈춰 선 다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선 그는 말없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젤이 호소라도 하듯 다이한을 향해 말을 쏟아냈다.

“후작님, 죄송하지만.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허니, 과분한 청혼을 물러주세요.”

지젤이 정말 두려운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말에 다이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쓸데없는 대화와 감정 소모는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누구랑 결혼을 약속했든, 왕국에서 후작가보다 나은 집안은 없을 테니 그녀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이 상황에 대한 납득이 필요한 거라면.

“남작님께서 지젤 양에게,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군요.”

다이한은 지젤이 아닌, 계단 위에 서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고는 그대로 저택을 나섰다.

“조지 콜튼이 마부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왔습니다.”

옆에 바짝 붙어 선 한센이 속삭이는 말에 다이한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보나 마나 왕비가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조지 콜튼이 움직였을 테지.

“내어주지 말고, 죽여.”

이제 쓸모없으니. 저택을 나온 다이한은 한센을 향해 한마디 툭 던지고는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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