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11)화 (111/135)

111.

스물넷이 된 다이한이 왕궁에 자리 잡고 처음 맞이하는 가을의 시작쯤이었다. 왕국으로 돌아온 다이한은 산에서 노래 부르던 소녀를 다시 찾아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가끔 이른 새벽, 차가운 공기가 유난히 스산할 때 문득 노랫소리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항상 바쁘고, 정신이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충분히 여유가 없었다.

여느 저녁처럼, 집무실에 앉은 다이한이 조금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한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그가 손에 든 만년필을 움직였다.

“그 마부를 기어코 찾아냈다니.”

다이한의 옆에 선 한센이 말실수한 대가로 왕비의 기사들에게 잡혀간 마부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술집에서 마차 사고에서도 살아남은 몸이라며 허세를 몇 번 부렸던 사내는 결국 잡혀 끌려가야 했다.

“왕비께서 그런 부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시잖습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지레 겁먹고는.”

왕비는 다이한을 붙잡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일들을 얘기하고는 했다. 그중 하나가 전 왕비의 마차 사고 이야기였다. 다이한은 마가렛이 왕국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처리한 달리아 안나 왕비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어릴 적에 심부름할 때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마부와 공주의 시체를 못 찾은 걸 계속 찝찝해하셨고, 달리아 안나 왕비의 마차 사고에 관해서는 매번 좀- 예민하시지 않습니까.”

전 왕비의 시체와 마차를 일주일 만에 찾아낸지라 다들 들짐승이 물어간 게 아니냐 짐작하기는 했지만, 찝찝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워낙 짐승들이 많은 울창한 숲이고, 높은 절벽이다 보니 모두가 입을 모아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한센의 말에 다이한의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마부가 뭐라던가?”

잡혀간 지 하루 정도 되었으니, 어지간한 고문을 다 겪어봤을 테고. 그럼 모르는 사실이라도 털어놓았을 게 뻔했다. 무표정한 다이한은 큰 관심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소문이야 왕비의 기사들이 다 입을 틀어막아 수도까지 오지도 못했고, 공주가 누구든 왕궁에 와도 금방 죽은 왕비 곁으로 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아벨린 남작에 관해서 이야기하고는 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벨린?”

익숙한 영지의 이름이 나오자 다이한이 처음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아, 네. 아벨린 남작 부부가 아기를 안고 간 걸 봤다고 실토했습니다.”

한센의 설명에 다이한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아벨린.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고향 옆에 딸린 영지를 떠올리고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마부를 데려와.”

“네?”

“왕비에게는 그 마부를 내가 직접 보고자 한다고 전해.”

“데려와서 어찌하시려고요?”

한센이 다이한의 의중을 묻자, 다이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마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벨린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졌다. 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 그렇다고 산을 오를 생각은 없었다. 한센은 설명 없이 움직이는 다이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

아벨린의 광장에 마차를 세운 다이한은 고민했다. 가볼까, 아직도 노래를 부르려나. 이제는 작은 소년이 아니라 나무 뒤에 숨을 수도 없을 텐데. 검지로 툭툭- 마차 문손잡이를 두드리던 그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이제 몇 살이나 되었으려나. 다이한은 산에서 노래 부르던 소녀의 정확한 이름도, 나이도 몰랐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평민은 아닐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워낙 작은 영지다 보니 광장에 이렇게 있으면 지나가다 볼 수 있지 않을까.

“후작님.”

마차 밖에 서있던 한센이 그를 부르자, 다이한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창문에 달린 커튼을 걷어냈다. 한센이 그런 다이한을 향해 눈짓으로 일러줬다.

“저 둘이 아벨린가의 자매들입니다.”

한센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옮긴 다이한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붉은 머리 자매를 발견한 그는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릴 때 얼굴과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 소녀가 맞았다.

다만, 몇 년 사이 그가 성인이 된 것처럼 소녀도 이제 소녀라고 부르기 애매할 정도로 어른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다니 새삼 세상이 좁네.

“남작이 아내 병간호를 하겠다고 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서면서 가세가 더 기울었다더니. 바깥나들이 할 때, 데리고 다닐 사용인도 없는 모양입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웃는 자매를 보던 한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지만, 귀족 영애들이 단둘이 다니다니. 다이한은 한센의 말에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다만 가세가 기울었다는 데는 조용히 동의했다. 한센이 자매의 옷차림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왼쪽이 언니고 오른쪽이 동생이랍니다. 연년생이라는데 나이로만 보자면 언니 쪽이 공주일 확률이 높습니다.”

다이한은 자신이 아는 여자가 언니라는 걸 깨닫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벨린 남작가는 옛날에야 개국공신으로 이름 날렸지, 지금은 어지간한 시골 소귀족들보다 못한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 겁도 없이 몰락한 왕비의 딸을 키우다니.

“주제도 모르고.”

매정하게 한마디 내뱉은 다이한은 푸른 눈이 웃음기를 가득 담고 휘는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똑같은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둘은 닮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눈매가 달랐다. 둘 중 누가 달리아 안나의 딸일까. 가늠하듯 자매를 훑던 다이한의 눈이 이엘리야의 목에서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에 꽂혔다. 다이한은 잠시 그렇게 말없이 시야에서 둘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부부터 확인해보지.”

다이한의 말에 한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귀찮은 걸 싫어하시는 후작이 오늘따라 번잡스럽게 움직이시는 게 좀 의아했지만, 다 생각이 있으시리라 믿었다.

***

지하실에 앉은 다이한은 천천히 다리를 반대로 꼬며 뻐근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가 앉아있는 나무 의자에서 삐거덕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왕비의 성격상,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남겨둘 리 없었다. 남작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공주를 데려다 키우다니. 크나큰 실수를 한 게 분명했다.

왕비는 기어코 장성한 공주를 죽이고 아벨린가를 멸문시켜야 마음을 놓을 것이다. 사실, 다이한의 입장에서도 갑자기 나타난 공주라는 존재는 조금 곤란했다. 그는 이 정치 체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손녀가 살아있다는 걸 달리아 백작이 알게 되면, 친왕국파들이 들고 일어설 게 뻔했다. 그런 곤란했기에 그냥 다 없애버리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이기는 하나, 묘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 주저하게 되었다. 왜? 그가 자문하고는 답을 찾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다이한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한센이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마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걸 본 다이한이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무얼 봤다고?”

“아벨린 남작 부부가, 그, 죽은 왕비의 품에서 아기와 왕비의 목에 걸려있던 루비 목걸이를, 그 목걸이를 가지고 도망치는 걸 봤습니다.”

“그게 아벨린 남작 부부라는 건 어떻게 알고?”

“왕비께서 종종 달리아 백작가에 가실 때, 마주쳐서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다이한이 진위를 의심하듯 묻자, 이미 맞을 대로 맞은 마부가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확실합니다! 당시에는 제가 너무 무서워서, 저도 무서워서 도망친 겁니다!”

다이한은 마부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아까 본 목걸이를 한 쪽이 공주라는 얘기일 테고, 그럼 그 옆의 노래 부르던 여자애는 남작의 진짜 딸인가? 상황이 애매했다. 괜히 공주만 죽였다가, 남작이 사실을 폭로하거나 귀찮게 굴면 난감해질 게 뻔했다. 왕비는 죽이고 싶어 할 테고, 그렇다면 깔끔하게 다 죽여야겠지. 그래야 간단하게 끝났다.

그런데, 답지 않게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살려두기에는 명분이 없고, 왕비는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 할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는 걸까. 노래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한 그의 눈썹이 어그러졌다.

“왕비님께 이대로 전할까요?”

한센이 묘하게 평소랑 다른 후작을 쓱 올려다보며 물었다. 왕비야 후작이 자신의 일에 신경 써주는 줄 알고, 좋다고 마부를 내줬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번거로운 일이 늘었을 뿐이었다. 왕비가 오래전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결해주는 꼴이 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하지.”

다이한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본인이 비이성적이고, 복잡한 길로 빠지는 걸 인지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목걸이 이야기는 빼.”

“후작님.”

한센이 놀라서 만류하듯 그를 부르자, 다이한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제 다시 묻지.”

다이한이 눈을 끔뻑이는 마부를 향해 고갯짓했다.

“뭘 봤다고?”

“남작 부부가, 그 둘이 죽은 왕비의 루비 목걸이와 아기를-”

고집스러운 마부의 대답에 다이한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쇠붙이가 검집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다이한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였다.

“다시.”

다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하게 내뱉은 말에 마부가 놀라서 입을 열었다.

“아벨린 남작 부부가 아기를! 아기를 데려가는 걸 봤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누가 묻더라도 그렇게 답하는 것이다.”

다이한이 검으로 마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네 하찮은 목숨 구제받고 싶다면 말이지.”

어차피 여자가 곧 죽을 목숨이라면, 아벨린가 사람들이 다 왕비에 의해 죽는다면. 이 정도 거짓말과 눈속임은 용인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지하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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