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가을 무도회 첫날, 왕궁 연회장은 소란스러웠다. 모두들 저번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사냥대회 때의 한을 풀려는 듯, 한껏 꾸민 채로 신나게 떠들며 먹고 마셨다.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사교계가 거기서 거기다 보니 자세히 보면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지젤이 미리 맞춰뒀던 금색 장식이 달린 푸른 정복과 눈가만 가리는 장식 없는 가면을 쓴 다이한은 연회장 중앙에서 눈으로 지젤을 찾았다. 노래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다들 다음 곡을 함께할 파트너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서, 지젤을 단박에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연회장에 조용히 들어서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바로 발견했다. 부부는 보통 같은 색을 입는데, 이제 부부 놀이가 끝난 터라 그런 형식적인 건 지키지 않을 모양이었다. 다이한은 지젤의 다음 행동을 예상했다. 저기 구석에서 매의 눈을 하고 그녀를 찾는 황태자에게 가려나.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지젤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새빨간 루비로 장식된 구두와 노출이 적은 긴팔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눈가만 가리고 있는 붉은 가면은 은을 칠해서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 또한 그녀의 붉디붉은 머리 색깔과 잘 어울렸다. 어느덧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다음 노래가 시작할 때쯤 지젤이 다이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게 정말 의외라서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그녀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불가항력이었다.
춤을 추기 위해 자연스레 몸이 밀착되고, 각자의 허리를 붙잡게 되었다. 연회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다이한은 황태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주시하는 걸 깨달았다. 그가 황태자를 약 올리기라도 하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데, 지젤이 그에게 속삭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당연하게도, 지젤이 이유 없이 자신과 춤을 출 리 없다는 걸 잘 아는 다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엘리야는-”
“아니.”
지젤이 그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먹고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다이한은 붉은 가면 사이로 빛나는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눈썹을 어그러트렸다. 지젤도 가면 사이로 보이는 그의 연녹색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침착하게 속삭였다.
“나한테 해야 할 말, 설명해야 할 게 있잖아요.”
그렇게 말을 하는 지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화가 난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소름 끼치도록 차분할 뿐이었다.
“내가 매번 물었잖아요. 할 말 없냐고.”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잠시, 둘은 그렇게 말없이 음악에 몸을 맞춰 춤을 추는 데 집중했다. 결국, 노래의 중반쯤 다다르자 지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요?”
“무엇을.”
“나는 달리아 안나의 딸이 아닌데.”
지젤의 말에 다이한이 그대로 멈춰 섰다. 계속해서 춤을 이어나가던 그녀의 구둣발에 발이 밟혔음에도 다이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지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젤이 그런 그의 허리를 확 잡아 이끌며 속삭였다.
“맞다고 거짓말했잖아요.”
나는 내가 대단한 거짓말쟁이인 줄 알았는데, 후작님을 이길 수가 없네요. 지젤이 고개를 까딱이자, 다이한은 줄 달린 인형처럼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지젤이 그런 다이한의 눈을 피하지 않고 올려다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뭐든 대답을 해보라는 그녀의 태도에 다이한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다고. 다이한이 자신의 내면에서 커지기 시작하는 불안을 애써 숨기기 위해 딱 한마디 내뱉었다. 그걸 들은 지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으며 휘어졌다.
“그래서?”
지젤이 이제는 우습다는 듯 맑게 소리 내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꾹 눌렀다. 다이한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껴안았고, 지젤은 그걸 밀쳐내지 않았다.
“나.”
다시 평온을 찾으려는 듯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던 지젤이 춤을 추기 위해 발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신 이해해보려고 하고 있어.”
“이해?”
“당신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유가 뭐든. 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믿고 있다고.”
여기서 날 더 실망시키고 싶다면, 굳이 만류하지는 않겠지만. 지젤이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하자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다이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악스러운 힘에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한데 지젤은 그러지 않고 인내심을 가졌다.
“당신이 나한테 변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지젤이 달콤한 목소리로 어린아이 어르듯 속삭였다.
“그러니, 뭐든 지껄여봐.”
다이한은 절대로 지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본인조차 이해가 안 가는데,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다이한의 입이 열렸다.
“네 노래를 들었어.”
이번엔 지젤이 우뚝 멈춰 서야 했다. 계속해서 춤을 멈추는 두 사람을 보며 주위에서 수군거렸지만, 둘 다 그걸 개의치 않았다. 지젤은 언제 내 노래를 들었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산에서 들었을 테고, 꽤 예전 일이 분명했다. 근데, 그게 이 모든 거짓말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
“그래서, 네가 내게 위안이 되어서.”
다이한이 처음으로 지젤의 앞에서 진심 어린 속내를 토해냈다. 그게 본인 스스로도 역겨웠지만, 그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솔직해졌다.
“네 노래 들어야 외롭지가 않아서.”
그게 외로움이라는 걸 몰랐는데, 네 노래를 엿듣고 나서야 알았거든. 내가 그때 유일하게 외롭지 않다는 걸. 다이한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지젤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지젤이 그의 말을 되새기다가 그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동시에 노래가 끝났다.
“노래?”
빌어먹을. 아버지가 집시처럼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할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노래를 들었구나.”
그래, 그게 이유라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지젤이 마치 납득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휙 몸을 돌렸다. 다이한은 자신에게 등 돌리는 지젤과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황태자를 보고는 그녀의 어깨를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이한이 마치 족쇄처럼 지젤의 몸을 옥죄었다.
“황태자는 네가 아니어도 괜찮잖아.”
그가 절박하게 지젤를 끌어안고 점점 다가오는 이안을 주시했다. 지젤은 다이한이 숨을 헐떡이는 걸 무심히 올려다봤다.
“네게 애정을 갈구하지는 않을 테니.”
제발. 다이한이 지젤을 으스러트릴 것 같은 힘으로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옆에만 있어.”
내가 죽기 전까지만이라도. 다이한은 기어코 진실을 알게 된 지젤이 자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볼지 알고 있었다. 욕심. 욕심이었다. 네 좋을 대로 상황을 이용했다는 황태자의 비난이 맞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운 좋게 지젤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지젤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그게 뭔지 몰라서.
“가지 마.”
“차라리 빌어봐요.”
지젤이 그의 애원에 조롱하듯 답했다.
“내가 빌면, 가지 않을 건가?”
지젤은 애절하게 붙잡는 다이한이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 이게 사랑일 수가 없었다. 날 좋아한다면 남작가를 불태웠을 리 없었으며, 무릎 꿇는 내 손을 지르밟고 조롱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걸로 이렇게 협박해, 자신을 속일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야 했다.
그 모든 폭력들을 무지한 사람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사랑한다면,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지금이라도 그는 살아남은 이엘리야를 데려와 선처해달라 빌었어야 했다. 그때라도, 무릎 꿇던 그때라도 솔직하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아니지, 사과조차 기대하지 말라고 했던가?”
다이한이 이죽거리는 지젤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팔에 힘을 줬다. 지젤이 그런 그의 팔을 단순히 아프게 하기 위해서 손톱으로 할퀴었다. 그의 팔뚝에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혔다. 다이한은 그럼에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어차피 지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을 증오하는 그녀를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비참함을 지젤은 알 필요 없었다. 그는 감히 그녀에게 용서를 바라지 않고,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양심이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잖아.”
다이한의 호소와도 같은 말에 지젤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지젤은 푸른색으로 물든 그의 손톱 뿌리를 보고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 후작님 이것도 속아주셨지.”
다정도 하셔라. 지젤은 사람들을 밀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다이한의 목을 간질였다.
“정말 죽어주시려고, 그냥 다 받아 드신 건가요? 왜?”
다이한은 그게 과거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죗값을 받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어차피 그에게 답을 바라지 않았던 지젤이 혼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안 왔더라면, 이엘리야가 살아있는 줄 몰랐더라면. 난 당신 죽이고 같이 죽었을 텐데 참 아쉽겠네요.”
“너는 왜.”
네가 왜 죽겠다는 건데. 다이한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어 들어 올리고 하는 말에 지젤은 눈을 감았다. 내가 죽는 게 걱정된다는 듯이 굴지 마.
“그걸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요?”
“내가 죽고 난 뒤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난 널 보내줄 생각이 없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다이한 자신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발단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기이한 집착을 고백했다. 지젤은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그의 음성을 더는 견디기 힘들어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지금 안 놓아주면, 정말 내가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손 떼요. 이안 따라갈 생각도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그제야 다이한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지젤은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이안을 외면한 채로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곧 황태자가 다이한을 스쳐 지나 지젤의 뒤를 쫓았다. 그걸 보면서 다이한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결국 영원한 거짓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건데. 다이한은 그걸 몰랐던 미련한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