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9)화 (109/135)

109.

“괜찮으니 말씀해주세요.”

지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대화를 하고 있는 백작과 그녀,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지젤은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리려 애써봤다. 이엘리야가 친동생이 아니라든가, 뭐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이 없었다.

“이엘리야가 하고 있는 목걸이, 왕비의 유품인가요?”

언젠가 달리아 백작이 자신의 목에 걸린 루비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걸 떠올린 지젤이 작게 웃었다.

“후작 부인.”

“한센 경이 지금 기절해있는데, 정신을 차리거든 백작저로 데리고 오라 해놓았습니다.”

“한센이라 하면 후작의 기사?”

“네, 제가 달리아 안나의 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백작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이엘리야가 진짜 손녀일지도 모른다는 기쁨보다는 이 모든 일이 너무 가혹하다 느껴졌다. 그럼, 후작 부인은 왜 여태 괴로워해야 했단 말인가.

“후작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속 후작의 옆에 있던 사내이니, 무슨 말을 할지 좀 기다려 보죠.”

지젤이 차갑게 그의 말을 잘라먹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묘하게 동정 섞인 백작의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에 소리를 지르고, 울고 싶었지만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이상 생각하기가 힘드네요.”

백작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서, 아니, 감히 어떤 기분일지 짐작도 하기 어려워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린 남작도, 다이한 후작도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 건지. 그는 왜 남작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아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어린아이가 권력 싸움에 휩쓸려 희생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 상황을, 각자의 사정을 모두 헤아릴 수 없던 백작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

침실을 안내받은 지젤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졸리지 않았지만, 상황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숙면밖에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를 괴롭혔다. 왜? 어째서? 당장에 후작의 멱살을 잡고,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지젤은 누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뭐 해.”

지젤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는 이안을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백작가의 호위도 변변치 않으니, 이엘리야의 안위가 걱정이네.”

아무리 1층이라지만 이렇게 밤중에 함부로 창을 타고 들어올 수 있다니.

“후작가야 원래도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여기는 정통성이 있는 가문인데.”

믿음이 싹 사라지네. 지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이안이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그의 검은 눈이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을 냈다.

“왜 왔어.”

지젤이 차갑게 내뱉는 말에 이안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참담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두고 죽으려고 독초를 먹었다는 사실에 분노했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그 찰나가 지나고 나자, 분노는 자책으로 바뀌었다. 넌 계속 죽고 싶었구나. 죽으려고 했다니. 내가 다시 돌아왔음에도 네가 살아갈 이유는 될 수 없구나. 내 오만함이 무심으로 변질되어, 네 아픔을 또 놓치고 있었으니. 네가 모든 걸 끝내고 그저 편히 쉬고 싶어 하는 걸, 내가 너무 늦게 눈치채서.

“손은 또 왜 그래?”

너무 말이 없는 이안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지젤은 그의 오른손에 감겨있는 붕대를 발견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걸 보며 이안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다쳤어.”

“어쩌다.”

“와인 잔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깨졌어.”

그의 설명에 지젤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손에 쥐고 있는다고 깨지는 물건이 아닐 텐데.

“조심해, 황태자가 이렇게 다치고 다니면 사람들이 허술하다 흉을 볼 테니까.”

“미안해.”

이안이 대뜸 사과하고는 지젤의 손에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고양이 같은 그 행태를 가만 보던 지젤이 입을 열었다.

“뭐가.”

“전부 다.”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 나에게 화를 내. 마치 그녀가 자책을 못 하게 하려는 사람처럼 이안은 본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네 사과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감흥이 없어.”

지젤이 차갑게 감상을 내뱉자, 이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에 닿을 때까지 사과할게.”

그러니, 어디 가지 마. 이안이 지젤의 손목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촉촉하고 뜨거운 감촉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보던 지젤은 문득, 정말로 지금 당장 다이한의 사과를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릎 꿇는 것 따위가 아니고 바닥을 기면서 비는 걸 보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걸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다 내 탓일까?”

충동적으로 입을 연 지젤은 본인의 어디가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지젤은 살짝 기운 침대를 핑계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안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 탓이 아니야.”

“나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 그렇지 않고서는 후작이 이럴 이유가 없으니까.”

“아무도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안의 말에 지젤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건, 네가 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젤은 이안에게 덜 추해 보이고 싶었기에, 오늘처럼 감정 조절이 어려운 날에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데, 이만 가줄래?”

그녀의 축객령에 이안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지젤은 그걸 알면서도 이안을 양손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이안은 지젤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그녀는 유난히 위태로워 보였고, 괴로워 보였다. 지젤은 주저하는 이안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는 미소 지었다.

“가면무도회 때 보자.”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이안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말없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그는 홀연히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지젤은 그가 사라지는 걸 끝까지 보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럴 리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모든 게 덧없게 느껴졌다.

***

백작가의 지하실에 묶인 한센은 무감각해진 다리를 움직여 보려 애썼다. 화상으로 녹아내린 다리를 본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음을 실감하고 절망했다. 단시간에 염증이 올라오는 피부를 보며 한센이 씨근덕거렸다.

“젠장!”

그가 주먹으로 애먼 돌바닥을 내리치며 씩씩거렸다. 이러면 죽느니만 못했다. 그걸 창살 밖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비앙카는 계단을 내려오는 지젤을 발견하고 문에서 비켜섰다. 해도 안 뜬 이 시간에 내려온 걸 보면, 깊게 잠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한센 경.”

지젤은 이따가 내일 있을 가면무도회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로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센이 그런 지젤을 노려봤지만, 덜덜 떨리는 주먹이 그가 얼마나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보여줬다.

“우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터놓고 얘기하지.”

그래도 그간의 정이라는 게 있는데, 악독한 계집. 한센이 이를 악물고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도에 대해 고민하는데 지젤이 말을 이었다.

“왕비가 찾은 마부가 뭐라고 했길래, 내가 달라아 안나의 딸이 아니라는 걸, 확언할 수 있지?”

한센이 쉽사리 대답하지 않자, 지젤은 시선을 돌려 습한 지하실을 둘러봤다. 뭐랄까, 대부분 귀족가의 지하실 용도가 그러하듯 사람 죽이기 적절한 환경인 것 같았다.

“내가 경을 살려둔 이유는 그대가 막 내뱉은 말이 흥미로워서야. 근데 입 다물고 있으면 내 흥미가 식지 않겠어?”

지젤의 협박에 한센은 잠시 갈등했다. 그렇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후작이 구해주러 올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목숨이라도 보전하는 게 옳았다.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후작께서 술주정뱅이 마부를 심문했을 때.”

“힘들 텐데, 간략하게 얘기해도 좋아.”

지젤이 너그러운 배려라도 해주는 어투로 말했다. 지금 이것보다는 더 깊고 진한 대화겠지만.

“어차피 후작님과 다시 나눠야 할 이야기니까.”

“마차 사고 때, 죽지 않은 마부가 어찌할 바를 몰라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한센이 아까보다는 고통에 익숙해졌는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벨린 남작 부부가 죽은 왕비의 품에서 살아남은 공주를 데리고 가는 걸 봤다고 했습니다. 공주 목에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고.”

“그 아기가 이엘리야라는 소리인가?”

비앙카는 지젤이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묻는 말에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지젤 님의 동생은 나이가 맞지 않았지만, 한 살 차이는 마음먹으면 속일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목걸이가 뭐라고 확신할 수 있지? 당장 내 보석함에 있는 루비 목걸이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데.”

“후작님이 아벨린 남작에게 찾아갔을 때, 남작은 지젤 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젤 님은 친딸이 맞다고 했지만, 후작께서 협박-”

쾅-!

더는 듣기 싫어진 지젤이 거센 발길질로 창살을 걷어차자 한센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지젤이 한센을 향해 그만하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이고는 비앙카를 보며 말했다.

“후작저에 들르지 않고, 백작가에서 무도회로 갈 거라고 전해줘. 한센은 일단 여기에 두고. 이엘리야한테는 말하지 마. 단 며칠이라도 그냥 편하게 쉬게 해줘.”

지젤은 후- 하고 숨을 한 번 토해내고는 차분하게 지하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다이한을 만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로 너무 설레는 나머지, 이번엔 진짜 그를 죽일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