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지젤은 한센이 성냥을 바라보며 절박하게 변명하는 걸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성냥한테 사죄하는 사람 같네.
“정말 지젤 님, 그 당시에는!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지젤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성냥을 든 손을 까딱였다.
“내가 이제 딱히 경에게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들어서 말이지.”
“절 죽여서 지금 얻으시는 게 없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왜-”
“경께서도, 적어도 산 채로 불태울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리하셨으니.”
말을 마친 지젤이 손에 들고 있던 성냥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훅- 떨어진 성냥의 불은 한센의 몸을 적신 기름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거세게 불타올랐다. 한센이 고통 어린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바둥거렸지만, 옷에 잘 스며든 기름은 소리 없이 활활 타올랐다.
산 채로 불에 타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살이 타는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그 지독한 냄새에 지젤이 시선을 내리깔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엘리야가 이런 걸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걸 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아벨린가의 사람들을 상기시키게 둘 수는 없었다. 한센이 격렬하게 몸부림쳤지만 발끝에서부터 허리까지 그를 삼킨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결박한 밧줄이 타오르는 순간, 목을 벨 생각으로 비앙카는 검을 뽑아 들었다.
“다, 달리아 안나의 딸은 지젤 님이 아닙니다!”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한센이 겨우겨우 말을 뱉어내고는 눈을 까뒤집었다. 그 말에 지젤이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결렸다. 지젤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혀를 움직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젤의 입이 작게 벌어지는 걸 보던 비앙카는 그대로 한센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물가 쪽으로 끌고 갔다. 당장 몸에 붙은 불을 꺼주길 바라며 그가 계속 악을 질렀다. 지젤은 그 돼지 멱 따는 것과 같은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야말로 묻고 싶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비가 그친 아침 하늘이 너무 드높아서 지젤은 눈을 감았다.
***
달리아 백작은 갑자기 지젤이 보낸 남녀에게 침실을 내어주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아무런 언질 없이 사람만 보내다니, 곧 따라올 것이라는 이엘리야의 설명과는 다르게 후작 부인은 점심때가 돼도 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심지어 여자애는 슬쩍 보면 영락없는 남자애 같았다. 지젤 밑에서 일한다는 바한이라는 자가 ‘영애’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이라 생각했을 일이었다.
후작 부인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저택에 찾아온 사람들을 굶길 수는 없었기에 그는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탁에 앉은 이엘리야와 바한을 흘끔 본 백작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 자리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세차게 내린 비를 그대로 맞았는지, 꼬질꼬질하게 들어선 소녀를 깨끗하게 씻기고 나니 얼굴이 반들거렸다. 그 옆의 남자는 평민인 게 분명했지만,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후작 부인과 무슨 사이라고?”
이엘리야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식기를 사용하는 걸 유심히 본 백작이 물었다.
“그게.”
이걸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는 건지 고민스러워진 이엘리야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면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녀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가 반짝였다. 그걸 본 백작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사정이 좀 있습니다.”
바한이 대신해서 대답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도, 백작은 그 목걸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이엘리야가 멋쩍게 미소 지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평민 차림의 소년이 하고 있기에는 너무 값비싸 보여서 부자연스러웠다.
“저희 어머니 유품인데,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받은 소중한 물건인지라.”
그걸 들은 달리아 백작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그 목걸이는 자신의 딸에게 내줬던 그 루비 목걸이였다.
***
다이한은 서재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센이 돌아오지 않고, 지젤이 사라진 걸 보니 일이 꼬인 게 분명했다. 이쯤 되니, 지젤의 걱정은 크게 되지 않았다. 보나 마나 한센이 당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무도회가 코앞인데, 말도 없이 어딜 가신 건지-.”
집사가 어쩔 줄 모르고 하는 말에, 다이한은 가면무도회가 의미가 있나 싶어져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이엘리야를 만났겠지. 이엘리야를 증인으로 세운다 한들 그는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다. 5년 만에 나타난 여자가 사기꾼인지, 정신병자인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지금처럼 후작 부인이 황태자와 바람났다는 소문이 파다한 판국에, 이혼하기 위해 후작 부인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어쩌면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서 후작 부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찾지 마.”
지젤이 이렇게 쉽게 후작저를 떠날 리가 없었다. 다이한은 뻐근한 목덜미를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한센이 죽었다면,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제 마부의 말을 들은 사람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 지젤은 죽어서도 진실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래, 그러면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피했을지 모른다.
“금방 돌아올 테니 괜히 소란 떨지 마.”
후작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 걸 보면서 집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집사는 어쩐지 다시는 후작 부인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
“후작저에 없다고?”
제인이 손에 붕대를 감은 채로 고개를 까딱이는 이안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젤이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후작가에서도 어디로 갔는지 몰라 쉬쉬하는 눈치였다. 마구간지기에 돈을 주고 물어보니, 저택 내부에서 두 가지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하나는 지젤이 황태자와 바람났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화가랑 바람났다는 설이었다. 사용인들은 화가 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별채에 있던 화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꽤 큰 차이가 있는 가설들이었다.
“밤사이에 사라지셔서 찾고 있는 듯합니다.”
“바르한 자작은?”
그 능글맞은 새끼랑 같이 있는 건가. 이안의 검은 눈이 시리게 제인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제인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괜히 엄한데 불똥 튈라 그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침에 자작저로 돌아왔다는데, 뻔질나게 잘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엘리야 님도 안 보였습니다.”
“지젤이 이엘리야랑 같이 있는 게 차라리 낫기는 한데.”
이안이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독초를 먹어? 내내 그렇게 살았다고. 그러니, 그렇게 아프지. 근데 바보같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꽃밭을 뛰어다녔다. 지젤의 속이 얼마나 문드러져 있는지도 모르고.
“달리아 백작가 쪽은?”
“도널드가 확인하러 갔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제인이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딱 필요한 말만 했다.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마음은 편한데, 지젤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는 꼴이 되었으니 난감했다. 이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낸 것인지, 아니면 더 찝찝해진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제인은 입을 삐죽였다.
***
몸에 붙은 불을 끄자마자 기절한 한센을 비앙카에게 맡기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지젤은 저녁이 되어서야 달리아 백작저에 도착했다. 이엘리야는 피곤한지 잠들어 있었고, 바한은 비앙카가 오기 전까지만 곁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지젤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물음표들을 다 떨쳐낼 수 없었다. 살고자 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한 것일까?
구겨진 승마복을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지젤은 백작가에 신세 져야 했다. 하녀장이 마련해준 옷으로 갈아입고 응접실에 앉은 지젤은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
“후작 부인.”
달리아 백작은 많이 고단해 보이는 지젤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지젤이 그런 그를 보면서 기계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갑자기 놀라셨죠. 한동안만 숨겨주세요. 후작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안전한 곳이 필요합니다.”
“그 아이, 여자아이는 누구입니까?”
백작이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핥으며 묻는 말에 지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제 동생입니다.”
“동생?”
“이엘리야 아벨린입니다.”
“아니, 아벨린이라고 하면?”
“5년 전 화재로 죽은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죠. 그때, 후작가의 기사들이 아벨린 남작저에서 하는 짓을 두 눈으로 봤다고 합니다. 증언할 수 있어요.”
“그럼 여태 어디 있었단 말인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백작이 놀라서 고개를 내젓는 걸 보면서, 지젤은 차분하고도 간단하게 설명하려 했다.
“황국에 있었다는군요. 황녀가 후작에게 해가 될까 숨겨뒀던 모양입니다. 잘하면 이걸 이용해서, 황국파들을 몰아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달리아 백작은 지젤의 침착한 설명을 들으면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의문을 쉽사리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까 식당에서 본 루비 목걸이. 착각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 여자아이가 아벨린 남작의 둘째 딸이라면.
“그 목걸이.”
달리아 백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젤이 목걸이를 만들어 냈을 리가 있나? 아니, 일이 다 끝난 마당에 그럴 필요가 없지. 나이가 한 살 차이 난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 나이 차야 부모가 그렇다고 하면 모두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릴 때, 꼭꼭 숨겨두고 키웠더라면 진실은 남작만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남작 부인은 이엘리야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었고 오래 일하던 사용인들도 전부 불타 죽었으니 억측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을 꺼내기에는, 지젤의 삶이 너무 고단하고 기구해서. 백작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달리아 안나 왕비의 물건인가요?”
지젤이 주저하는 백작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