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슬슬 일어나지.”
툭툭-.
뺨을 내리치는 손짓에 기절했던 한센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엘리야는 그런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5년 전에는 그렇게 무서웠는데 허무하네.”
이것도 인간일 뿐인지라. 어깨 대충 지혈해서, 밧줄에 꽁꽁 묶은 뒤 나무 밑에 내던져두니 별거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젤과 바르한 자작이 잠들어있는 오두막을 살폈다. 자매의 재회 이후 일행은 비앙카가 숲속에 숨겨둔 오두막에서 비를 피해야 했다. 지젤은 긴장이 풀렸는지, 깊게 잠들어서 아침 해가 완연하게 떠올랐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매는 밤새 서로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공유하며, 위로하고 사과했다. 이엘리야는 퉁퉁 부은 눈을 꾹 내리누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어제 했던 얘기 마저 해볼까?”
“무슨 이야기.”
한센이 태연하게 발뺌하는 걸 보면서, 이엘리야는 기가 차다는 듯 웃고는 단검을 빼내 들었다.
“우리 언니가 달리아 안나의 딸이 아니야?”
“어제 그쪽이 날 도발하려고 아무 말이나 했듯이, 나도 그랬을 뿐인데.”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려 애쓰는 한센을 내려다본 그녀가 손에 든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죽일 수는 없었다. 5년 전 화재 사건의 재판이 열린다면, 증인으로 세워야 했다. 후작을 몰락시킬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남자였다. 고문이 좀 곁들여져야겠지만.
“그 마부를 찾았다는 얘기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실토하는 게 좋을 거야.”
상큼하게 미소 지은 이엘리야가 한센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쭈그려 앉고는 단검 날을 세웠다. 그러고는 한센의 오른 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의도가 확실한 그녀의 협박에 한센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 죽여본 적도 없는 어린 아가씨가 허세가 심하네.”
“그러니까, 사람이 참 신기해. 이런 거 하나 잘린다고 죽지는 않으니.”
이엘리야가 그의 귀를 쭉 잡아 늘이자, 한센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노려봤다.
“나 정말로, 나쁜 짓 많이 배워왔거든.”
원래 어린애들이 그런 건 더 빨리 배워. 작게 속삭인 이엘리야가 단검 든 손을 들어 올리는데, 오두막에서 막 나온 지젤이 그녀를 불렀다.
“이엘리야.”
그러자 이엘리야가 조용히 손을 내렸다. 언니한테 굳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알고 보니 언니가 공주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잔인했다.
“거기서 뭐 해?”
“히죽대길래 얄미워서 두어 대 후려쳤어.”
“아.”
이엘리야가 태연하게 답하는 걸 슬쩍 본 비앙카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손에 든 단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젤은 그런 이엘리야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며 계획을 설명했다.
“넌 달리아 백작가로 가 있어. 거기서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으면, 언니가 찾아갈게. 거기가 제일 안전해.”
“달리아 백작?”
“가서 설명해줄게. 바한이랑 먼저 출발할래? 나랑 비앙카는 할 일이 있어서.”
지젤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한센을 슬쩍 눈짓하고 비앙카를 보자, 단박에 알아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 백작저라면 후작이 쉽게 들어설 수 없으니, 지금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지젤이 떨떠름하게 서있는 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바한, 이건 장부에 적어둬요. 값을 후하게 치를 테니.”
“하, 제가 먼저 영애를 모시고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바르한 자작이 지젤을 흘끔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본 지젤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자작저로 돌아가고, 급하게 항구에 다녀왔다고 둘러대. 어차피 무도회가 내일모레니, 그 물자 관련해서 일이 있었다고 하든가.”
후작이 자작까지 쉽게 죽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는 일단 엄연하게 왕국의 귀족이었으며, 여러 귀족들의 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니, 괜히 자작을 건드렸다가는 후작가가 뒤집어질 게 뻔했다.
“저 사람은?”
이엘리야가 한센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지젤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유용하게 쓰일 사람이니까, 비앙카가 잘 숨겨둘 거야. 걱정 말고 먼저 가.”
물비린내가 나는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젤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처럼 개운한 아침이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녀는 잠시 그걸 만끽했다.
***
바르한 자작에 이어 이엘리야까지 다 떠나보내자, 지젤은 조용한 숲을 휙 둘러봤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었어.”
한때는. 어려서 뭘 모를 때는, 그게 소박하고 작은 꿈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만큼 이루기 어려운 꿈이 없었다.
“그래서 후작이 독초에 대해서 안다고?”
“네,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비앙카의 간결한 대답에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자조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나 혼자 웃기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었네.”
지젤이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행동력 좋은 비앙카가 한센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단숨에 지젤의 발치에 내던졌다.
“윽!”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그가 고통 섞인 신음을 토해내는 걸 보면서, 지젤은 옅게 미소 지었다.
“같이 온 기사 세 명은 그 자리에서 해결했는데, 한센이 돌아가지 않으면 후작이 반나절도 안 돼서 알아챌 겁니다.”
“고생 많았네, 고마워.”
지젤은 어제 젖은 상태로 이리저리 구겨진 자신의 승마복을 툭툭 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한센 경의 올곧은 충직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지. 그러니, 내 편으로 회유해도 넘어오지 않을 테고.”
“후작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옆에 뒀는지는 아십니까?”
그녀를 비난하는 한센의 말에 지젤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지젤이 고민이라도 해보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떤 마음으로 옆에 뒀는데?”
그녀의 말에 울컥한 한센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태 5년 동안 후작님 이용해 먹고는, 지금 그걸 몰라서-”
“어떤 마음으로 무릎 꿇는 내 손등을 짓밟고, 내 가족을 태워 죽였는지 나는 짐작이 안 가.”
지젤이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못 해.”
한센이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거였다. 그 마부를 죽일 때부터 일이 꼬였다. 그때, 거기서 후작을 말렸어야 했다. 지젤은 생각에 잠긴 한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뒤에 선 비앙카에게서 유리병을 건네받았다.
“종종 내가 비앙카에게 물어보고는 했어. 가끔 너무 잠이 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
그리고 아무래도 모르는 건, 전문가에게 물어야 가장 빠르니까.
“우린 뭐든, 터놓고 얘기하는 꽤 친밀한 사이거든.”
뭐, 나 혼자 착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투명한 유리병에 든 노란기가 도는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나와 한센의 하체를 적셨다. 다리에 미끈하게 흐르는 액체가 기름이라는 걸 알아챈 한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비앙카, 불에 타 죽는다는 게 어느 정도로 아파?”
지젤이 마치 인형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어조로 재현했다. 또렷하고 날카로운 발성이 한센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무슨!”
불에 타 죽을 것이라 직감한 한센이 바둥거리는데 지젤은 개의치 않고 입을 삐죽였다.
“상상이 안 돼서 묻는 거야. 나는 기껏해야 손목이나 그어보고 약이나 마셨잖아?”
지젤의 푸른 눈에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광기를 엿본 한센이 진저리를 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유리병을 모두 비워낸 지젤이 그걸 우아한 손짓으로 다시 비앙카에게 내어줬다.
“불에 조금만 닿아도 아프고, 쓰린데.”
대체 얼마나 아프게 죽은 걸까. 그걸 알아야, 내가 어떻게 갚아줘야 옳은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젤이 장난스럽게 콧잔등까지 구기며 웃어 보이고는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비앙카가 품에서 성냥을 꺼내 가벼운 손짓으로 불을 붙였다.
“대체 산 채로 살이 녹는 건 무슨 기분일까?”
“그런 유의 고통은 직접 경험해보셔야 압니다.”
비앙카가 지젤의 물음에 대답하듯 말하고는, 그녀의 손에 불붙은 성냥을 쥐여줬다. 지젤은 작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성냥 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내가 날 불태울 수는 없으니. 우리 한센 경의 소감을 좀 들어볼까 해.”
한센은 성냥을 들고 고개를 기울이는 후작 부인이 자신을 죽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증인으로 쓸 수도 있는데,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지금 후작 부인은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기이한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저택에, 그 안에 있던 모두가 내 가족이었어.”
지젤이 성냥이 빠르게 타오르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끝에서 시작된 작은 불이 성냥을 좀먹으려 타올랐다.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되고자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흘러가도록 뒀더라면, 모두가 괜찮았을 거야. 한센은 지젤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허리 밑이 다 기름으로 젖은 상태에서 후작 부인이 쥐고 있는 성냥은 위협적이었다.
“한센 경. 구구절절 떠드는 사람의 성의를 봐서 뭐라고 대꾸라도 해주지 그래.”
지젤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하는 말에 그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왕비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 마부도 처음에 왕비가 찾아낸 걸 후작님이 빼돌린 겁니다. 후작께서 지젤 님을 살리신 거란 말입니다.”
“불가피했다.”
지젤은 자신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한센과 후작의 말을 곱씹었다. 살렸다. 살려냈다. 정말 그냥 목숨만 살려놓고, 다 잃었는데 숨만 붙여놓고는 감히 생색을 내? 지젤은 딱 거기까지만 화를 내고는 감정을 추슬렀다. 한센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재판을 위해 증인으로 쓸 사람은 또 있었다. 조지 콜튼, 그쪽이 회유하기도 더 편했다.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