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6)화 (106/135)

106.

첫 만남에 본인의 신분을 밝힌 황태자는 언니를 구해야 한다며 후작저로 가려는 이엘리야를 황국으로 끌고 갔다. 그사이, 갑작스러운 화재로 남작가의 식솔들이 전부 사망했다는 소식이 왕국 전체에 퍼졌다. 황태자가 남작가에 먼저 보냈던 시종 한 명이 그 화재에 휩쓸려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남작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택으로 불러들인 신원 불명의 붉은 머리 여자의 시체가 이엘리야가 되어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건대, 아버지는 아마 지젤을 빼돌리려고 시간을 벌기 위한 대역을 섭외하려 했던 것 같았다.

“저하께서는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여기 있다가 후작에게 죽고 싶은 건가?”

“절 황국까지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잖아요.”

이엘리야의 말에 황태자는 도리어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지젤의 여동생이니까.”

이엘리야는 그제야, 언니가 겨울마다 만나던 사람이 황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태자는 후작과 지젤의 혼인 자체를 취소시키겠다고 이를 갈았으며, 지젤이 달리아 안나의 딸인 것을 알려줬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그녀는 지젤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지젤이 평생을 함께 살아온 자신의 언니라는 건 틀림이 없었다. 하나 남은 사탕을 항상 양보해주던 그녀의 언니였다.

이엘리야가 옆에서 본 황태자는 계속 초조해했으며, 끝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지젤의 이야기를 할 때는 가끔 웃다가, 이내 당장 그녀를 구하지 못함에 절망스러워했다. 그런 그의 분노와 희망이 무색하게도 황태자는 1년 동안 구금되었고 이엘리야는 황녀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후작은 우리 편에 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야. 네가 입 다물고 조용히 황국에 있으면, 시골 귀족 영애로 살 때보다 나은 삶을 보장하지.”

황녀의 말에 처음에는 왕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악을 썼지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렇게 순응하는 척 기회를 노려야 했다. 황태자는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굴었고, 그건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이엘리야는 그렇게 황국에서 많은 걸 배우고, 스스로를 다듬으며 숨을 죽인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네 언니가 후작과 그리 행복하게 산다는 소리를 듣고, 또 피를 봤던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리는 말에 이엘리야는 적당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니는 언니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엘레노어가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엘리야는 지젤이 후작과 잘 산다는 소리에 절망하는 황태자를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언니가 잘 살고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언니를 구하러 가기 전까지, 언니가 후작과 단란하게 잘 살고 있다면 잘된 일이었다. 비록 나중에 충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지젤은 후작에게 복수하고 동생인 자신을 보듬어줄 게 당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숙해져야 했다. 언니와 만나서 모든 것을 해내려면 그녀는 더 성장해야 했다.

이엘리야는 황태자의 즉위식 날, 황궁이 혼란스럽고 모두가 방심했을 때 왕국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그녀의 앞에 제인의 서신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었다.

“예상 못 한 마차 사고. 대회 시작 전 정비까지 마친 다니엘 후작가의 마차가-”

자신을 떠보듯 엘레노어가 내민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이엘리야는 분을 삭여야 했다. 이제는 기어코 하나 남은 내 언니까지 데려가려 하는 후작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5년 전 후작의 선택은 두 자매의 인생은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

가뜩이나 어두운 밤, 장대비가 쉼 없이 내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뒤덮는 어둠과 빗물이 지젤의 눈을 가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지젤 님, 길이 미끄러워 위험합니다!”

바한은 드물게 이성을 잃은 채로 숲길을 내달리는 후작 부인의 뒤에서 소리쳤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광기 어린 사람처럼 돌진해서 좋을 게 없었다. 자정이 좀 안 돼서 출발했는데, 벌써 새벽이 되었는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있었다. 평소의 후작 부인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딱히 말릴 방도도 없었다.

“그래도 길을 다 기억하고 계시네.”

아우, 추워. 바한이 어깨를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고는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지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몰았다. 늦었나? 내가 멍청해서, 또 바보같이 굴어서. 이미 늦었을까? 지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숨을 헐떡였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입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나 때문에 또.”

절로 흘러나온 한마디에 지젤이 으득, 애꿎은 혀를 짓씹었다. 언덕의 오르막길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달리는데도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히이이잉!

흥분한 말이 크게 울며 있는 힘껏 뛰었다. 뒤에서 바한이 무어라 소리치는 걸 듣지 못한 지젤은 불타 버린 남작저에 다 도착하고 나서야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서워서 한 번도 오지 못했던, 이제는 남작가의 흔적을 찾기 힘든 그 땅에 들어선 지젤은 건물의 잔해 속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짧은 붉은 머리 여자애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서있는 걸 본 지젤은 홀린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변해서 놀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비에 젖은 땅이 질퍽거리며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을 손으로 연신 훔쳐내며 지젤은 계속해서 걸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진흙탕이 된 땅 때문에 발이 푹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젤은 이제는 많이 커버린 이엘리야를 보고 입을 벌린 채 숨을 헐떡였다.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자 안도감이 그녀를 삼켰다. 동시에, 덜컥 겁이 났다. 날 미워할까? 이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생각할까? 갑자기 무서워진 지젤은 동생을 향해 다가가는 걸 멈췄다. 두어 발자국 남기고 멈춰 선 지젤을 보며 이엘리야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비에 젖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자매는 말이 없었다. 쏴아- 하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물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벽처럼 느껴졌다. 지젤이 이엘리야를 위아래로 훑으며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데, 이엘리야의 입술이 달싹였다.

“안녕, 언니.”

그 한마디에 왈칵 쏟아지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지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젤이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울기만 하자, 이엘리야가 지젤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와락 지젤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흠뻑 젖은 두 자매가 서로를 끌어안고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미안해.”

지젤이 이엘리야를 부둥켜안고 사과했다.

“언니가 너무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서, 언니가 그때 너무 바보같이 굴어서. 당하기만 해서, 그래서 너무 미안해. 지젤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사과에 이엘리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언니 혼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엘리야가 지젤의 팔을 움켜쥐고 하는 말에 지젤은 고개를 내저었다.

“울지 마.”

이엘리야의 눈가에 엉겨 붙은 붉은 머리카락을 지젤이 떼어내줬다. 불쌍한 내 동생.

“이제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언니가 같이 있잖아.”

지젤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하는 말에, 이엘리야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지젤의 품에 파고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오른 안도감이 이엘리야를 덮쳤다. 그제야, 이엘리야는 지난 5년 동안 스스로가 외로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엘리야가 안기는 걸 보고, 지젤은 우는 걸 멈췄다. 지금 이렇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젤은 그런 이엘리야를 꽉 끌어안고 숨을 들이마셨다. 후작과의 악연을 끝낼 날이 다가왔다.

***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소파에 앉아 와인 잔을 들었다. 후작이 너무 조용하니 불안했다. 조용히 있을 놈이 아닌데, 지젤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재판을 열고 싶은 건가. 엘레노어는 후작을 조금 더 이용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안은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내일쯤에는 잘 지내는지 확인할 겸 보러 가야지.

“얼굴 보고 싶은데.”

무작정 찾아가면 화를 낼 테니, 이유를 만들어야겠지. 이엘리야가 지낼 곳은 정한 건가. 이혼은 언제 하려나, 아니면 그냥 죽여버리려나. 이안이 그런 고민을 하며 와인을 홀짝였다.

“저하.”

제인이 나직하게 부르는 말에 이안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습니다.”

저하께서 이렇게 후작저를 나오신 다음부터는 더 그렇습니다. 제인은 후작 부인이 황태자를 달래서 내보낸 이유가, 그때 그 주방의 찻잎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길거리에 떠도는 고양이가 측은하다고 전부 집에 들일 수 없는 것처럼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서 모른 척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황태자 남매와 다르게 양심이 있는 인간인 것 같았다.

“정말로 제가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그 생각만 하면 여기가 막 너무 아픕니다.”

제인이 본인의 명치께를 꾹 눌러 보이며 하는 말에 이안이 결국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제인을 본 이안이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미친 건가.”

갑자기 본인 식욕 떨어졌다는 소리는 왜 하는 거지. 모처럼 지젤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았던 이안이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프면 의원에게 가서 얘기해. 그것도 내가 알려줘야 할 정도로 멍청한가?”

그 말에 제인이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얼굴을 구겼다. 이안이 그런 제인을 흘끔 보고는 손에 든 와인 잔을 살짝 흔들었다.

“후작 부인이.”

큰 결심을 한 제인이 겨우 한마디 내뱉어놓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보는 이안의 눈매가 단박에 싸늘해졌다.

“그러니까, 지젤 님이 후작이랑 동반 자살하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방에서 뭘 좀 봤습니다. 제인이 눈치를 보며 겨우 뒷말을 잇자, 이안의 손에 쥐어진 와인 잔에 금이 가더니 쩍 갈라졌다. 그러고는 이내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제인은 이안의 팔뚝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와 반짝이는 유리 파편들, 보랏빛 와인을 보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하.”

이안이 거친 숨을 토해내고는 우둑, 고개를 꺾었다. 유리잔을 맨손으로 움켜쥐어 깨는 황태자를 보며 제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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