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화가?”
그녀가 창문을 손짓하며 하는 말에 테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서서 1층을 내려다본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오스틴?
“쯧.”
어쩔 줄 모르고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청년을 본 테오가 짧게 혀를 찼다. 언뜻 봐도 술 먹으러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비자금으로 숨겨놓은 건데, 어떻게 또 지젤이 알고 있었나 보지.
“아무래도 영애의 언니께서 보낸 것 같은데.”
이거 진짜 내 최후의 비자금인데 말이지. 테오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지젤이 이런 푼돈 뒤로 빼돌렸다고 욕할 사람은 아니니까. 본인 동생을 이렇게 살뜰하게 보살피는데, 이걸 빼앗지는 않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려갔다 올 테니, 이엘리야 양은 여기 있어요.”
“같이 가요.”
“위험해요.”
“그건 자작님도 마찬가지니까요. 1층에서 자작님이 걸리면, 2층에 있던 저는 도망도 못 치고 잡혀갈 테니까 같이 가는 게 맞아요.”
여차하면, 저는 자작님 밀어 넣고 뒷문으로 달릴 거라. 이엘리야가 툭 테오의 등을 치며 말했다.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서,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당당한 그녀의 설명에 테오는 조용히 눈을 끔뻑거렸다. 후작이든, 황가의 남매든. 설마 자작인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버리고 간다는 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지 않았다. 하여튼, 기분이 묘해서 테오는 앞장서는 이엘리야를 따라 방을 나섰다.
***
“후작 부인께서 이것만 전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작은 쪽지를 전한 오스틴이 잔뜩 눈치를 보며 어깨를 떨었다. 이엘리야가 그걸 받아 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직접 오기는 위험한 건가? 언니가 무슨 생각인지 알면 좋을 텐데.
“왜 비앙카가 아닌 자네가 왔지?”
이상하네, 보통 이런 일은 비앙카를 시킬 텐데. 바르한 자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오스틴을 내려다보자, 그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과하게 긴장한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이상했다.
“네?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모르면 말고.”
“죄, 죄송합니다.”
난데없는 사과에 바르한 자작은 그 뒤에서 멋쩍게 뒷머리를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다니까, 아무래도 스텔라랑 놀아나서 내가 무서운가 보지.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오스틴 대신에 이엘리야의 손에 들린 쪽지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하십니까?”
이엘리야는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에 깔끔한 필체로 적힌 단어를 읽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벨린 남작저.]
그걸 옆에서 읽은 테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벨린까지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수도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여차하면 멀지 않은 곳의 항구를 통해서 도망치기도 괜찮았다.
“알겠다고 전해줘요. 아벨린으로 가겠다고.”
이엘리야의 말에 오스틴이 주춤주춤 바르한 자작의 눈치를 잔뜩 보다가 그대로 후다닥 큰길로 뛰어 사라졌다. 그걸 보면서 이엘리야가 뭔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같이 안 가주셔도 괜찮아요.”
고향까지는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이엘리야가 의연하게 하는 말을 들은 테오가 입을 샐쭉댔다. 충분히 혼자 갈 수 있는 사람인 걸 알기는 하는데. 자작저도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는데. 논리적인 판단은 이제 너는 네 할 일 하러 가라고 외치는데, 어쩐지 혼자 보내기가 찝찝했다.
“내가 안 괜찮을 것 같으니, 같이 가죠.”
이엘리야는 바르한 자작의 과한 호의에, 대체 이 사람과 언니는 어떤 사이인가 고민하다가 집어치웠다. 지금 그보다 아벨린으로 가는 일이 더 급했다. 둘이 다시 호화로운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골목 한편 쌓여있는 상자 뒤에 숨어있던 비앙카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벨린에서 보자고 하실 리가 있나.”
이상하지. 그러자, 그 옆에 서있던 그의 형 바한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너 내 인건비, 네 몫에서 제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후작 부인이 돈도 안 준 일을 왜 자처해서 하는 건데? 바한이 투덜거리는데도 비앙카는 미심쩍은 듯 오스틴이 사라진 쪽을 가만 바라봤다.
“굳이 아벨린으로 불렀다는 게 이상해.”
“비앙카, 어차피 후작한테 다 들켰다며. 그럼 끝난 거야. 우린 손 털고 빠져야 한다고.”
그런데도 굴하지 않은 비앙카는 제법 빠른 걸음으로 달려 사라진 오스틴 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가만 보던 바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오스카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진짜. 내가 간다, 간다고. 이런 식으로 괜히 후작 일에 깊게 얽히다가 뒤지면, 네 탓이야.”
답답한지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이마 뒤로 쓸어 넘긴 그가 동생에게 경고했다. 후작에게 들켰다는 소리에 냅다 동생을 후작저에서 빼낸 그는 왜 이 복잡한 일에 다시 끼어들고자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휴, 염병할. 저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다음 생에는 내가 동생으로 태어나서 부려먹어야지.”
바한의 앓는 소리에 뭐가 어찌 되었든, 비앙카는 지젤이 여동생을 두 번 잃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
마가렛을 보러 왕비의 침실에 들어선 지젤은 침대 옆에 앉아있는 엘레노어를 보고 멈춰 섰다. 엘레노어가 그런 지젤을 가만히 보다가 들어오라 손짓했다.
“황녀님께서 왕비님과 정말 각별하셨나 보네요.”
지젤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하는 말에 엘레노어는 다리를 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는 마가렛을 싫어해.”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이 황녀에게 너무 잘 어울렸다. 지젤이 고개를 기울이는 걸 올려다본 그녀가 숨을 깊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결핍으로 뭉친 욕심쟁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가만 보면 기분이 묘해져서.”
앉아. 엘레노어가 자신의 옆 의자를 눈짓하자 지젤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딸이라는 이유로 밀려나는 걸 보면, 거울 보는 기분이 들었거든.”
엘레노어의 시각에서 따지고 보자면 마가렛도 나름 불쌍했다. 어린 나이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왕국의 늙은 왕과 결혼해야 했고, 자리를 보전하려 이를 악물고 버텨냈으니까.
“물론, 그만큼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나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
지젤은 엘레노어가 자신을 비난하려는 건지 고민스러워 고개를 기울였다. 엘레노어가 그런 지젤을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지젤을 손으로 가리키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승자가 정해졌으니 다 끝났지만.”
“엘레노어 님, 아직도 의심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엘리야는.”
지젤은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황녀를 빤히 바라봤다.
“네 여동생을 데리고 있었던 건 사과하지.”
엘레노어는 대답 없는 지젤이 그녀의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본인 마음 편하자고 한 사과였기에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얼결에 쫓기듯 황국으로 온 이엘리야는 많이 겁먹었고, 이안은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후작은 황제가 신임하는 공작의 밑에서 전쟁터를 휩쓸어, 눈으로 보이는 업적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이름만 황태자인 이안과는 달랐다.
“그때 황궁에서 우리 남매 입지가 위태로웠던지라. 괜히 황제 폐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기에 일을 조용히 덮고 싶었지.”
“저한테 말이라도 전할 수 있었잖아요.”
지젤은 자신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비난을 막을 수가 없었다. 5년 전에, 그때 이엘리야와 이안이 살아있는 걸 알았더라면 여기까지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지 몰랐다. 아니, 그걸 떠나서 살아있는 걸 알기만 했더라도 덜 괴로웠을 텐데.
“그래,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할 생각 없어. 설명해주는 거야. 이엘리야를 데리고 있던 걸 후회하지는 않아. 내 나름 최선이었으니까.”
뻔뻔한 황녀의 말에 지젤은 입을 열었다가 말없이 다물었다. 그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당시에 지젤은 감정적이고, 어렸으며 이엘리야를 지킬 힘이 없었다. 지젤의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엘레노어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 이엘리야도 언니 보러 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후작 부부가 너무 잘 산다는 소리에 이안하고 비슷한 결의 오해를 좀 한 모양이더라고.”
1년 정도 지나서는 언니를 찾지 않았지. 설명을 덧붙인 엘레노어는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꾹 삼켜내는 지젤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에 많이 아꼈어.”
황궁 사람들은 이엘리야를 엘레노어 황녀의 외가 쪽 친척, 그러니까 돌아가신 황후 쪽 가문의 영애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까운 측근들이야 이엘리야가 누군지 알고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했지만 그 외에는 다들 황족처럼 대우해줬다. 엘레노어가 그녀를 각별하게 챙기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엘리야를 무시하지도 못했다.
이엘리야는 당차고 똑똑한 아이였고, 황궁 생활에 금방 스며들었다. 엘레노어는 혼기가 찬 이엘리야를 황국 내 괜찮은 가문과 이어줘야겠다는 미래까지 그리고 있었다. 이엘리야를 예쁘고 반듯하게 보살핀 것을 나름의 면죄부처럼 생각했던 엘레노어가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엘리야의 행색이 어떠하든, 내가 그랬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
다른 건 몰라도, 애를 가둬서 거지꼴 만들어놨다는 비난은 받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이를 아득 물고 하는 말에 지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작게 한숨을 쉰 엘레노어는 그런 지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푸른 눈이 참 순진해 보였다. 얼굴만 봐서는 속내가 얼마나 썩어있을지 가늠이 어려웠다.
“이안을 존중해서, 황국에 따라오지 않겠다는 네 마음은 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엘레노어의 말에 지젤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고맙다고? 지젤의 입꼬리가 동그랗게 휘어 올라 부드럽게 호선을 그었다. 저게 용건인가 본데, 감사하고 있으니 따라오지 말라.
“황녀님께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 따라가지 않겠다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 마음은 곱게 접어 넣어두세요. 지젤의 말에 엘레노어의 곧은 눈썹이 어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