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다이한을 마주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지젤은 비위 좋게 고기를 씹어 삼켰다. 오스틴을 이용해 바르한 자작저에 갔지만, 허탕이었다. 자작은 행선지도 밝히지 않은 채 부재중이었다. 이엘리야를 제일 먼저 찾아야 했다. 얼마나 무서울까. 지젤은 의식적으로 이엘리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조급하게 굴지 않기 위함이었다. 비앙카도 없는 마당에 섣부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내일모레가 합방일인 건 잊지 않고 있겠지.”
덤덤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다이한 때문에, 지젤은 챙-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거칠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뭐라고?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본 다이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좋든, 싫든 후작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니.”
“후작께서 크게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하.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숨을 토해내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지젤이 말을 이었다.
“당신 눈에는 내가 진정 후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여기 앉아 있는 걸로 보이나요?”
“여태 네 의사가 중요했던 적이 없는데, 내가 네 의중까지 알아야 하나?”
지젤은 다이한의 연녹색 눈을 빤히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속을 긁어내리는 그의 말에 격정적으로 반응해줬을 것이다. 접시를 집어 던지고 와인을 뿌려대며 소리 질렀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다이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불안하세요?”
그녀의 물음에 다이한이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걸 본 지젤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입가에 비소를 머금은 지젤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황태자도 내보내고, 차분하게 마주 앉아있는 꼴을 보니. 도망이라도 갈까 불안하신가 봐요.”
다이한은 지젤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5년 동안 어느 정도 그의 행동 패턴을 읽게 된 지젤은 소리 내 웃었다. 그는 초조해지기 시작하면, 매사 강압적으로 굴었다. 이렇게 보니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엿보이는 불안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처럼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회피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세요.”
명백하게 다이한을 겨냥한 말이었다. 지젤은 다시 식기를 손에 들고 고기를 썰어 입에 집어넣었다. 굶으면 그녀의 손해였다. 비앙카가 사라지고, 불가피하게 독초 섭취를 중단하면서 금단증세가 일어나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다이한은 그 꼴을 가만히 보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젤이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녀가 작게 탄식하자, 반사적으로 다이한이 지젤을 내려다봤다. 그런 그를 보며 지젤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걸 본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에 비해 살짝 과장된 표정과 말투는 다이한을 조롱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합방은 제가 의무를 다하지 못할 테니, 굳이 필요 없겠네요.”
다이한은 주먹을 꽉 쥐고 지젤의 푸른 눈이 웃음기를 담고 휘는 걸 바라봤다.
“저 불임이라.”
그녀의 말에 옆에서 석상처럼 서있던 집사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지젤은 그런 집사와 하녀들을 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행위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 굳이 서로 불쾌하게 몸 섞을 필요 없잖아요?”
이혼하자고 하려나. 근데 어쩌지. 이쪽은 아직 이혼해줄 생각이 없는데. 지젤은 고기를 씹어 삼키며 후작의 답을 기다렸지만, 다이한은 입을 다문 채로 서있기만 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지젤은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이것도 알고 있었나? 반응이 뭐 저래. 다이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니, 당장에 입에 든 걸 뱉어내고 게워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자를 따라갈 생각은 없다?”
다이한이 싱긋 웃고 있는 지젤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방금 그녀의 의중이 중요하지 않다 말한 사람이 묻는 말치고는 모순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는 후작님께서는 모든 걸 다 알고도, 이혼하실 생각이 없고요.”
저는 이해가 안 가지만. 지젤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다이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이혼을 운운해.”
“걱정 마세요. 어차피 이혼해봤자 가지도 못해요. 제가 가봤자, 앞길 창창한 황태자 저하 발목 잡고 늘어지는 일이 될 텐데.”
다이한은 지젤이 의연하게 말을 잇는 걸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마저도, 그 잘나신 황태자를 위해서. 황태자를 걱정해 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프면서도 다행스러웠다.
“후작님께서 그 어떤 일도 사과하지 않겠다 하시니.”
내 여동생을 또 죽이려 하는 일마저 미안하지 않다 하니. 지젤은 다이한이 무릎 꿇고 했던 말들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 생각하고 고민했지만, 답지 않게 애처롭게 굴던 그가 그저 괘씸할 뿐이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인간. 5년 전 남작가를 불태운 일로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운 거겠지.
“후작님께 사과를 구걸할 수 없는 전 여기 남아야죠.”
지젤이 다이한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허공에서 얽힌 서로를 향한 시선이 집요했다. 독기로 가득 차있는 푸른 눈이,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에 반짝였다. 다이한은 그걸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결혼식 때 봤던 그녀의 눈이 저랬던 것 같았다. 그때는 저걸 보고도 아프지 않았는데, 오히려 짜증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스멀스멀 손목을 타고 올라온 후회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때 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널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네 가족을 도왔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다이한의 입매가 어그러졌다. 그렇지만 그랬더라면 지젤은 지금 자신의 곁에 없었을 것이다.
“네가 아이를 못 낳는다 한들, 넌 후작 부인이야.”
지젤의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믿기로 한 다이한은 성큼 걸음을 옮겨 식당을 벗어났다. 그는 기어코 증오라는 족쇄로 그녀를 사로잡았음에 안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 다시는 지젤의 미소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그를 공포스럽게 했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이었다.
“후작님.”
식당을 나선 다이한의 뒤에 선 한센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런 한센을 돌아본 다이한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품에 든 쪽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마지막.”
한센은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작은 종이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긴장한 그를 보며 다이한이 친절하게 반복해서 경고해줬다.
“정말 마지막이니, 똑바로 해.”
살벌한 다이한의 목소리가 한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종이를 받아 든 한센이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숙였다.
“화가는 아벨린에 다녀온 다음에 적당히 때를 봐서 치워.”
“네.”
한센은 바르한 자작저를 어슬렁거리는 오스틴을 우연히 잡아낸 게 정말 신이 도운 일이라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5년 전 일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후작님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사실 애초에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먼 길 택하신 후작님에 대한 원망이 조금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센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군의 결정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
다정했던 후작 부부의 불화에 후작저는 소란스러웠다. 사용인들은 집사의 눈을 피해, 황태자가 급하게 후작가를 떠난 게 싸움의 원인 중 하나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무료한 저택의 일상을 흥미롭게 만드는 주제였다.
“아까 굉장히 살벌하더라고.”
“두 분이 싸우신 거지? 근데, 불임은 또 무슨 소리래.”
“불임이면 둘째 마님 들여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에, 평소에 그렇게 단란하시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녀들이 모여서 속닥거리는 걸 들은 미아는 손톱을 잘근거렸다. 지젤 님, 왜요? 왜 그런 걸 이야기하시는 거죠? 후작님이 또 화를 내시면, 그래서 또 불행해지시면 어쩌시려고. 미아는 지젤이 안락한 삶을 위해서라도, 후작에게 굽히고 들어가기를 바랐다.
“소문대로 황태자 저하랑 진짜 뭐가 있는 건가?”
“에이, 황태자가 뭐가 아쉬워서? 내 생각에는 별채야. 소문도 젊은 남자라고들 하잖아.”
“별채?”
“그 화가랑 오늘도 단둘이 있었잖아. 후작님께서 그래서 화가 나신 거지.”
“그런가? 하긴 지젤 님 별채에는 여태 혼자 가셨잖아.”
자기들 좋을 대로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을 빼고는 아무도 지젤을 걱정해주지 않았다. 미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
“두 자매가 별로 안 닮았네요.”
낡고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은 바르한 자작이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비슷한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자세히 보면 눈매도 안 닮았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은 조용해서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엘리야는 그의 쓸데없는 말에는 대꾸해주지 않았다.
“자작님이 여기 주인인가요?”
이엘리야가 창밖을 주시하며 입구부터 화려한 건물이 누구의 것인지 물었다.
“제 명의는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제가 운영 중이죠.”
후작 부인 모르게 꿍쳐놓은 비자금이랄까. 다른 사람 명의로 구매해놓은 여관 겸 주점은 수도 중심에 있어서, 부수입이 꽤나 쏠쏠했다. 비상시에 이렇게 숨어있기도 괜찮았다. 마차만 저택으로 보낸 자작은 창가에 서서 취객들로 소란스러운 1층 입구를 내려다보는 이엘리야를 보며 말했다.
“밤새 그렇게 서있을 건가요? 앉아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차하면 나가야 하잖아요. 황국 기사들 너무 만만하게 보면 안 돼요.”
보아하니 자작님은 검술하고는 거리가 머신 것 같은데. 이상한 곳에서 순한 도널드도 황국에서는 이름 날리는 기사였다.
“저희는 무력으로 이길 수가 없으니, 도망치는 데 집중해야 해요.”
이엘리야가 슬쩍 자작을 훑어보며 결론 짓자 테오는 빠르게 수긍했다. 그는 그런 쪽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황가랑 후작이 동시에 영애를 쫓고 있다면 수도는 너무 위험해요. 지젤 님과의 만남을 다음으로 기약하고, 아예 다른 곳에 가있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테오의 말에 이엘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맞을 수도 있지만, 언니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그녀의 본가를 불태워버린 후작이 기어코 언니도 위협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이런 위협은, 애초에 도망쳐 나오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각오한 일이니 괜찮아요.”
“그래도 지젤 님을 만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무서우시면 당장이라도 발 빼세요. 언니는 저 혼자 만날게요.”
겁쟁이라고 욕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이엘리야가 오른 눈썹을 까딱이며 하는 말에 테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녀가 자작저에 사람을 보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자작님이시니 대놓고 위협은 못 할 테니까요.”
이엘리야의 말에 테오는 눈살을 찌푸리고 가만 앉아있었다. 어쩌지, 이걸 두고 가. 아니면 위험 감수하고 후작 부인을 불러? 여기서 괜히 꼬투리 잡혔다가 장부까지 들통나면, 계획이 완전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약속한 돈 받고 깔끔하게 사라지는 게 목표인 테오는 좀 난감해졌다. 대체 뭐 때문에 쫓기는 거냐고 물으려고 그가 입을 열었으나, 이엘리야가 더 빨랐다.
“저 사람. 저번에 그 화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