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1)화 (101/135)

101.

제인이 시키는 대로 수도 광장을 하염없이 걷던 도널드는 단장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엘리야 님이 광장을 그냥 걸어 다닐 리도 없고, 변장을 했을 텐데 단박에 알아볼 수 없겠지.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빙빙 걸어 다니다 보면 어지간한 상인들은 그를 도둑놈 보듯 경계했다. 도널드는 그쯤 되니 자신이 제일 수상한 놈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허리춤에 검 하나 차고, 하릴없이 걷기만 하는 놈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어디 갔는지 알아야 찾든가 하지. 애초에 기사단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왜 하필 이 기사단에 들어와야 했을까. 다른 선택지는 정말 없었을까. 그런 자아 성찰에 가까운 생각을 하던 도널드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티격태격하는 붉은 머리 소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있던 도널드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뭐가 짜증이 나는지 혀까지 찬 소년이 마차에 올라서면서 옆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 정확하게 인지하기도 전에 도널드는 일단 달렸다.

“엘 님!”

바르한 자작은 거구의 사내가 냅다 달려오는 걸 보고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이엘리야가 확 그의 멱살을 잡아끌어 마차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테오는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그 손길을 따라 움직이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서 출발해! 달려!”

마부가 급하게 말고삐를 잡았지만, 도널드가 더 빨랐다. 그는 거의 구르다시피 뛰어와서는 마차에 찰싹 붙었다.

“이엘리야 님!”

마차 창문에 매달린 도널드가 문을 열려고 하는데, 이엘리야가 문을 꽉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뭐 해요! 못 열게 잡아요!”

“아.”

바르한 자작이 엉겁결에 같이 문손잡이를 잡고 버티자, 도널드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엘리야를 위아래로 훑은 도널드는 경악했다. 이러니까 못 알아보지. 언뜻 보면, 천상 얼굴 좀 예쁘장한 평민 남자애 같았다. 엘레노어 황녀가 공들여 만들어낸 특유의 고아한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얼굴이! 머리가! 눈썹이! 이게 무슨 일이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닌데. 이엘리야가 콧잔등이 구겨질 정도로 인상을 쓰며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 황태자 저하께서도 이엘리야 님 찾으러 다니신다고 막-!”

이엘리야를 이렇게 찾을 줄은 몰라서 당황한 도널드가 급하게 막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엘리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잘나신 황태자 저하께서는 약혼녀 관리나 잘하라고 전해주세요.”

“네?”

“도널드, 정말 미안해요.”

이엘리야가 상황에 맞지 않게 우아하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러고는 문을 꽉 잡고 있는 도널드의 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이엘리야 본인도 아파서 이를 악물어야 했다. 미안하다 사과한 사람치고는 정말 무자비한 짓이었다.

“아파요!”

도널드가 얼굴을 확 구기면서도 마차에 꽉 매달렸다. 그러자, 이엘리야가 한 번 더 그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니까요, 정말 유감이네요.”

쿵-! 한 번 더 이엘리야가 온 체중을 실어서 그의 손을 후려치자 도널드가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진짜 아파요! 근데, 저 정말 못 놔요!”

마차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데도 도널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금 그냥 놓는 게 어때요. 이따가 떨어지면 더 아플 텐데.”

이엘리야가 다정하게 걱정하며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자 도널드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저는 진짜로, 엘 님 큰일 날까 봐 걱정돼서-. 막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엘리야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서 쓰다듬어줬다. 덩치는 차이가 좀 있지만, 어찌 되었든 도널드는 그녀보다 어린 동생이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도널드는 원래도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이엘리야가 도널드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도널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코를 훌쩍였다.

“이엘리야 님-, 저 또 놓치면 진짜 단장님께 죽어요.”

“나도 우리 언니 죽을까 봐 온 거라. 이렇게 이해관계가 달라져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쨌든, 손등을 찌른다고 죽지는 않으니까요. 날카로운 단검을 검집에서 빼낸 이엘리야가 확 손을 들어 올리자 도널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피 좀 보는 건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못 놔요!”

동시에 이엘리야가 테오의 목덜미를 뒤로 휙 잡아 빼고는 쾅-! 발로 마차 문을 걷어찼다. 문에 매달려있던 도널드는 예상외의 공격에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굴러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엘리야가 그런 그를 향해 소리쳤다.

“도널드, 너무 미안해요-!”

순간적으로 낙법 자세를 취해 네다섯 바퀴 구른 뒤에, 바닥에 널브러진 도널드는 깊게 한숨을 쉬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차라리 어디 하나 부러졌으면 덜 맞을 텐데, 젠장. 그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마차 뒤에 달린 바르한 자작가의 문장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그럼 이제 저하께 약혼녀 관리 잘하시라고 전하는 게 내 유언이 되는 건가.”

도널드가 원망을 숨기지 못하고 멀어지는 이엘리야를 바라봤다. 그걸 확인한 이엘리야가 짧게 혀를 차며 너덜거리는 마차 문짝을 억지로 맞춰 닫았다.

“제가 쫓기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잖아요. 근데, 뭐? 옷?”

바르한 자작은 이엘리야가 매섭게 그를 질책하는 걸 들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단 자작저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실까요?”

그가 공손하게 묻는 말에 이엘리야는 깊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언니 얼굴 한번 보기가 정말 너무 힘들었다.

***

“부르는 대로 뛰어다니는 개새끼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니.”

다 네가 자초해서 일어난 일이지. 후작저에서 왕궁에 오게 된 엘레노어가 이안을 향해 예리한 비난을 내뱉었다. 하라는 대로 다 해주니, 이제 그 후작 부인이 얼마나 제 동생을 잡아 휘두를지 뻔했다.

“앉아.”

이안은 눈을 세모나게 뜨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느긋하게 의자를 권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다시 말해봐.”

방금까지 침실에 있는 물건들을 다 집어 던지다가, 막 불려와서 못 들은 엘레노어를 위해 도널드는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엘리야 님께서- 남장을 하고 계셨습니다.”

“남장?”

엘레노어가 잠깐 굳어 섰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똑똑한 애니까. 그걸 예상 못 하고 못 찾아낸 너희가 멍청한 게지.”

“아까처럼 자세히 말해봐.”

이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도널드에게 손짓하자, 도널드가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폈다.

“머리를 이렇게 싹둑싹둑 자르시고.”

그냥 마구잡이로 잡히는 대로 자르신 것 같았습니다. 도널드가 친절하게 본인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는 듯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눈썹도 이만큼- 이런 식으로 스크래치가 나있고.”

그러니까 총평하자면. 도널드가 엘레노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되게 잘생겨지셨더라구요.”

도널드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엘레노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행색이 딱 평민 같았습니다. 근데 이제 되게 미남-”

“미남?”

엘레노어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제인이 뺨을 긁적였다. 맨날 드레스 입고 우아하게 찻잔을 들던 사람이라,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제인은 말없이 의자에 앉는 황녀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예뻐하던 여동생이 남동생이 되었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는지, 어딘지 전의를 상실한 사람 같아 보였다.

“바르한 자작이라.”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지젤의 사람 아닌가? 그새 찾은 건가.

“내 지젤은 똑똑하기도 해라.”

“어떻게 하면 여기서 갑자기 지젤 님이 똑똑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까?”

“황국 기사단이 못 했던 걸, 하루 만에 해내잖아.”

제인은 이안의 주접과 비난이 묘하게 섞인 말을 사뿐히 무시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엘레노어가 그런 제인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누구?”

“바르한 자작. 자작가에서 작위와 같이 받은 이름은 로엘이고, 원래 본명은 테오입니다. 지젤 님의 사람이 맞기는 한데, 글쎄요. 이엘리야 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게 정확하게 뭔지-.”

대체 왜 지젤 님이 아니고, 자작을 만나러 간 건지. 제인이 끄응 앓으며 하는 말에 잔뜩 눈치를 보던 도널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하신 말씀이 있기는 한데.”

이걸 제가 그대로 전해도 될지, 아니면 좀 순화시켜야 할지. 근데 또 순화시킨다고 고운 말이 되는 건 아닌지라. 아픈 손등을 부여잡고 선 도널드가 주절주절하는 말에 이안이 짧게 혀를 차고는 손짓했다.

“어떤 말.”

“이엘리야 님이 황태자님은 약혼녀 관리나 똑바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도널드의 정직한 전달에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제인을 바라봤다.

“헬렌 미스틱?”

더 이상 무능한 취급 받고 싶지 않았던 제인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주시하라 하셔서 헬렌 미스틱 쪽을 살폈는데, 엘로이 백작과 헬렌 미스틱이 서신을 주고받은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엘로이 백작이 후작에게 얻어맞고 끌려 나오더군요.”

“왜.”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또 지젤 님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인이 어깨를 으쓱이자 이안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뒤에서 다른 작당을 하고 있는 건가. 이안이 그다음으로 뭔가 말하기도 전에 엘레노어가 이를 아득 물고 말했다.

“로한인지, 헬렌인지. 미스틱 후작이든 공작이든 자작이든.”

헬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엘리야가 쓸데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옆에 앉은 자신의 혈육보다 이엘리야를 더 신뢰하는 엘레노어가 검은 눈을 희번덕였다.

“당장 데려와.”

무려 광산을 꿀꺽하고, 뒤에서 다른 짓을 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입을 싹 닦겠다고? 이건 황가를 무시하는 행태였다. 내가 저 바보랑 한 묶음인 걸 알면서, 무서운 줄 모르고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바르한 자작인지 뭔지한테서 이엘리야도 데려와.”

대체 머리며,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내가 직접 봐야겠으니까. 엘레노어의 말에 제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가서 슬쩍 들쳐 메고 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우 같은 누나 대신 끌려와서 곤혹을 치를 예정인 로한 미스틱을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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