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100)화 (100/135)

100.

지젤은 다이한의 표정과 손짓,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다이한도 마찬가지였다. 다이한이 손짓하자, 서재 앞에 서있던 집사와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엘로이 백작을 끌어냈다. 사람이 질질 끌려가는 걸 흘끔 내려다본 지젤이 한 발 더 다이한을 향해 다가섰다. 모두가 서재를 나가고, 문이 조용히 닫히고 나서야 다이한의 입이 열렸다.

“정확하게 어디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데, 그게 중요한가요?”

후작이 이엘리야를 데리고 있다면, 어디서 봤는지보다 중요한 게 많았을 텐데. 지젤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다이한을 훑었다. 두 번은 빼앗길 생각 없었다.

“지젤.”

다이한이 드물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황태자나 황녀가 말했을 리 없었다. 황국의 입장에서 자신은 아직 쓰기 좋은 체스 말이고, 실질적인 왕족이 왕자가 전부인 지금은 더 그랬다. 조공과 세금 받자고, 황국에 거부감이 심한 왕국까지 직접 다스릴 생각은 없을 테니까. 그럼 정말로 누군가 이엘리야를 보고 일러줬다는 소리인데.

“어쩌다 운 좋게, 황태자가 살아 돌아오니 눈 뜨고 꿈이라도 꾸는 모양인데.”

그의 신랄한 단어 선택을 들은 지젤은 예전처럼 흥분하거나 소리를 질러 일을 망치지 않았다.

“5년 전에 다 불타 죽었다고, 새삼 내 입으로 일깨워줘야 하나.”

다이한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 묻은 하얀 손을 닦아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덤을 파헤쳐서 뼈라도 꺼내줘? 그걸 손에 쥐여주고 나면 인정하려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인간성을 상실한 다이한의 말에 지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나한테 할 말이 그게 전부인가요? 조롱?”

“그럼 이제 와 새삼 위로라도 원해?”

지젤의 푸른 눈이 명백한 경멸을 담고 있는 걸 보면서도 다이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 해줄까. 황태자처럼 품에 안고, 애처럼 어르기라도 해줄까.”

그럼, 만족하려나. 다이한이 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며 하는 말에 지젤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이한은 그런 지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가치가 있었나요?”

후작이 5년 전에 대체 왜 날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오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언제나 그렇듯 다이한은 이유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고, 지젤은 그를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지젤은 엘로이 백작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별채로 향했다.

***

오스틴은 굳은 얼굴로 별채에 들어선 지젤을 보고 오늘은 어떻게든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는 방금 엘로이 백작이 피 칠갑이 된 얼굴로 마차에 실려 쫓겨나는 걸 보고 왔다.

“바쁘신 건 알지만, 정말로 조금이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시간을 내어주세요.”

“엘로이 백작이 황태자의 약혼녀랑 연줄이 있다고.”

백작 부부가 이안의 약혼녀랑 손잡고 날 이혼시키고 싶어 한다니. 후작한테 그런 얘기를 대놓고 하다가 맞아서 실려나간 건가? 멍청하고 경솔하네. 자작가에 다녀왔다는 오스틴의 설명을 들은 지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르한 자작이 같은 편이라 망정이지, 오스틴의 태도가 너무 가벼웠다. 눈앞에서 돈만 흔들면 바로 주인을 바꿀 개였다. 그럼 이번 일회성으로 끝내야지.

“그런데, 자작님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오스틴이 물감을 짜내면서 슬쩍 물었다. 스텔라와 자신의 사이도 자작에게 들은 모양인데, 그럼 자작이랑 친밀한 건가.

“스텔라에게도 말했지만, 자네와 스텔라 같은 사이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지.”

“아니!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닙니다.”

스텔라랑 끝난 지가 언젠데. 오스틴이 뻔뻔하게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큰돈을 턱턱 내어주시니 물은 겁니다. 자작저는 처음 가봤는데 굉장히 화려하더라구요.”

“자작이 사업이 잘돼서.”

지젤이 짧게 그렇게만 대답하고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내가 이엘리야라면, 5년 만에 돌아와서 어디로 갈까. 날 보러 와야 하는데, 후작과 황녀는 피해야 해. 그럼 대체 어디로 갈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비앙카가 이엘리야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는 거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 안전하면서, 나를 만날 수 있는 곳. 아벨린? 아니지.

“근데, 자작님께서도 누구를 후원하시는 모양입니다.”

후작 부인이 너무 굳은 얼굴로 앉아있자, 오스틴이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살짝 웃어줘야 좋은 그림이 나올 텐데, 저렇게 미간을 구기고 있으면 곤란했다. 어찌 되었든 후작에게 그림을 보여줘야 돈을 전부 받을 텐데.

“바르한 자작이 후원을 한다고 해?”

지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오스틴이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평민 남자애를 데리고 계시던데요. 붉은 머리에 되게 예쁘장하게 생긴.”

오스틴이 붓을 든 손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붉은 머리 남자애는 딱히 자작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으니. 사용인은 아닐 것이라 예상한 오스틴이 자신의 추론을 설명했다.

“손이 고운 게 저처럼 그림 그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오스틴이 말을 이으며, 아주 가는 붓으로 바꿔 들었다. 원래 귀부인들은 그림 그리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줘야 좋아했다.

“물감을 많이 만지면, 손이 금방 상하거든요. 화가들은 티가 납니다.”

“붉은 머리 남자애? 들은 게 없는데.”

“지젤 님만큼은 아니지만, 예쁜 푸른 눈을 가지고 있던데요.”

오스틴의 말에 지젤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지젤 님, 살짝만 고개를 기울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스틴.”

지젤이 모처럼 직업 정신을 발휘해서 그림을 그리려던 오스틴을 불렀다.

“붓 내려놓고, 심부름 좀 해줄래?”

오스틴의 미간이 확 구겨졌지만, 지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르한 자작이 이엘리야를 데리고 있다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이상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사람이 이렇게 바람도 좀 쐬고 해야지.”

이엘리야는 속 편하게 마차에 앉아서 미소 짓고 있는 바르한 자작을 마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언니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혹시 일부러 저희 언니를 못 만나게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이렇게 마차 타고 수도 구경이나 할 때인가 싶어져서요. 이엘리야가 정색을 하며 하는 말에 테오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걸 즐기던 자작이 갑자기 저택에 칩거하면 의심을 산다. 자작 부인이 요양까지 간 마당에 그런 소문까지 보탤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엘리야 혼자 저택에 두기에는 어딘지 불안했다.

“영애께서 절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이엘리야가 입을 삐죽이며 마차 밖을 내다봤다. 활기차고, 행복해 보여서 짜증스러웠다.

“짜증 나네요.”

테오는 이엘리야가 생각보다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전 쫓기는 몸이라서, 빨리 언니를 만나야 하는데 이렇게 나돌아다니기나 해야 한다니.”

“원래도 후작 부인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 조바심 내지 말아요. 나도 첩자들이 접선하듯 만나고는 했으니까.”

“후작이 그렇게 언니를 감시하나요?”

“연회장에서 지젤 님과 말 섞고 있으면, 누가 죽일 듯 쳐다보고는 하죠.”

“인성도 수준 미달인 인간이 의처증까지 있다고요?”

이엘리야가 짐짓 걱정스러운 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 묻자, 테오가 자신의 미간을 톡톡 손짓했다. 주름 생길라.

“그래서 남작가의 화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설명해 줄 생각은 없고?”

의상실 앞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자 바르한 자작이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처음에 미리 양해 구했잖아요. 자세히 설명 못 한다고.”

“그건 알겠는데, 아직까지는 그쪽이 진짜 이엘리야가 맞는지 의심돼서.”

사뿐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바르한 자작이 이엘리야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걸 무시하고 훌쩍 뛰어내렸다. 누가 봐도 남자애 같은데 에스코트를 받으면 의심 살 게 뻔했다.

“여긴 왜요?”

“단벌 신사도 아니고, 계속 같은 옷만 입고 있으니까.”

바르한 자작이 멋쩍게 그녀에게 무시당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금 그건 좀 과했지.

“깨끗하게 알아서 잘 빨아 입고 있어요.”

이엘리야가 더럽지 않다고 항변하는 말에 테오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뿐인 동생 홀대했다고 나중에 내가 지젤 님께 무척 혼날지도 모르니, 그냥 들어가면 좋겠는데요.”

지젤 님이 생각보다 성격이 고약하거든. 부부는 닮는다던데, 가끔 후작보다 더할 때가 있어. 바르한 자작의 말에 이엘리야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언제는 진짜인지 아닌지도 의심된다더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옷을 사주실 거면, 조금 더 저렴하게 파는 가게로 가시든가.”

지금 전 평민 남자애라고요. 이엘리야의 지적에 테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런 데서 맞춤으로 입어야 더 예쁠 텐데. 지금 옷은 너무 투박하고 원단 자체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까끌거렸다. 손목이나 발목을 보면 여린 피부가 쓸린 게 보였다.

“원단을 좀 싼 걸로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니까. 왜 고집을 부리시지.”

“고집은 누가 부리는 중인데.”

이엘리야는 슬슬 짜증이 나서 마차에 다시 올라타려 했다. 테오가 그걸 막기 위해 손을 뻗자 이엘리야가 그걸 매섭게 쳐냈다.

“손은 함부로 안 대셨으면 좋겠는데.”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굉장히 공격적이네.”

이엘리야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한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기울였다. 쫓기는 사람도 자신이고, 급한 사람도 자신이니 어지간하면 참겠는데. 굳이 이 인간이랑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엘 님!”

놀란 이엘리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저 끝에서부터 도널드가 기겁을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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