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9)화 (99/135)

99.

“너 왜 후작을 안 죽여?”

마차를 타고 왕궁을 떠나 후작저로 돌아가는 길에서, 지젤은 맞은편에 앉은 이안을 향해 물었다. 오늘만 해도 소란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지젤의 말에 이안은 후작가의 기사들을 피해 창문을 또 뛰어넘어야 했다. 이래저래 불편하지 않나.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지젤의 어깨에 살풋 머리를 기대며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돼?”

이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드디어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이안이 굉장히 설렌다는 표정으로 지젤의 손에 입 맞췄다.

“신난다.”

“아니, 그건 아닌데.”

지젤은 커다란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벼대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당연하게 이안이 후작을 죽이면 곤란했다. 그랬다가 들통이라도 나면 정치적으로 공격당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다이한은 지젤의 몫이었다.

“네가 후작을 죽이길 바라서 물어본 게 아니야.”

“근데 왜 물어봐?”

이안이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고 지젤을 흘겨보며 입을 삐죽였다.

“내가 너라면, 가장 먼저 후작을 해결하고 싶을 것 같아서.”

“맞아.”

어느새 지젤의 장갑을 벗겨낸 이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며 웅얼거렸다.

“근데, 네가 홀가분하게 떠나려면 내가 어중간하게 마무리 지으면 안 되는 거잖아.”

넌 매사에 겁 먼저 먹는, 고민이 많은 사람이니까. 이안의 말에 지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하게 비난 어린 어조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미련이 안 남아야 오롯하게 나만을 사랑해주지.”

“내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 지을 줄 알고? 다 끝내도 널 따라서 황국 못 가.”

“그럼 내가 여기 남을게.”

엘레노어랑 제인은 길바닥에 나앉게 내버려둬도 괜찮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안이 하는 말에 지젤은 눈을 감았다. 이안이 그런 지젤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파혼도 했겠다. 여기 눌러앉을게.”

“진짜 파혼한 거야?”

이안은 광산 얘기를 하려다가 참아냈다. 정말로 잘못하면 뺨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번을 말해.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 텐데 너 없이는 싫어.”

“내가 왕비도 죽이고, 후작도 죽이고-. 다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면, 황태자 입장에서는 곤란하지 않아?”

“감당할 수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해.”

지젤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웃는 이안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엘레노어 님 데리고 후작저에서 나가줘. 이엘리야는 나도 찾아볼게.”

황국으로 가라고 해봤자 안 갈 테니까, 왕궁이든 어디든 가. 일단 후작저에서 나가줘. 지젤의 말에 이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싫어.”

깔끔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한 그가 지젤의 흰 손목을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불만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네 즉위식 전에 끝내려고 하는 거야.”

“우리 거짓말쟁이를 내가 믿을 수 있어야지.”

이안이 지젤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반듯하게 세워 앉았다. 이런 면에서 지젤은 이미 그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내가 한두 번 당해?”

거짓말을 범죄로 따지면, 넌 전과범이라고. 그가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 가득한 이안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다. 선뜻 그녀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린 이안이 매서운 눈초리로 지젤을 내려다봤다. 지젤이 그런 이안의 뺨에 다정하게 입 맞췄다.

“이건 치사해.”

매끈한 뺨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그가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지젤이 그런 그의 반대 뺨에 입 맞추며 말했다.

“우리를 위해서 상황을 좀 정리하려고 하는 거니까, 믿고 그렇게 해줄래?”

“비겁한 단어 선택이야.”

널 혼자 둬야 하는데, 그게 우릴 위해서가 맞아? 이안이 그렇게 따지면서도 지젤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겨우 이런 어린애들 같은 신체 접촉이 뭐라고, 이성이 흔들리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안.”

지젤이 그런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잡은 이안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약았어.”

이안의 비난에 지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붉은 입술에 꾹 입술을 겹쳐 눌렀다. 이안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서로의 뜨거운 혀가 빈틈없이 얽히고, 여린 점막의 예민한 부위를 훑어냈다. 지젤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던 이안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이걸 떼어놓으라고? 싫어. 이안이 뒤로 조금씩 밀려나는 지젤을 집요하게 쫓았다.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자, 다 도착했음을 먼저 깨달은 지젤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이안이 지젤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젤의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걸 본 그가 탄식과도 같은 숨을 내뱉었다.

“이엘리야 찾아올 테니까 빨리 끝내.”

이안이 눈을 감고 숨을 헐떡이는 지젤의 눈가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속삭였다.

“내가 한 번만 더 속아줄게.”

지젤은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이안이 한 번 더 입술을 겹쳐왔기 때문이었다. 후작저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아무도 내리지 않자, 집사가 의아한 듯 다가오려 했지만, 황국의 기사들이 그 앞을 막았다.

“왜-.”

집사가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지만,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마차 문이 열렸다. 다이한은 2층 집무실 창가에 서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

“비앙카가 사라졌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미아가 고자질하듯 한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미아가 쪼르르 지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고 얼마 안 돼서, 말도 없이 없어졌던데요.”

지젤은 가만히 무언가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앙카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 한센이 기사들과 사라졌었던 게 이엘리야를 쫓기 위함이었다면, 비앙카는 그걸 뒤쫓아 갔었던 거니, 알아낸 게 있을 텐데 말도 없이 사라졌을 리가. 황국 쪽에서 이엘리야를 먼저 찾도록 둘 수는 없었다. 이엘리야는 5년 전 일의 증인이 될 테고, 황녀는 그걸 막을 테니까.

“지젤 님,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도망가는 애들 한둘이 아니잖아요. 지젤 님 물건 중에 뭔가 훔쳐서 도망간 게 분명해요.”

“미아, 비앙카가 그럴 애가 아닌 걸 잘 알잖아.”

지젤이 굳은 얼굴로 주방으로 가는 걸 쫓던 미아가 멈춰 서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앙카 편만 드는 지젤이 야속했다. 주방에 들어선 지젤은 찻잎이 들어있던 통이 아예 사라진 걸 보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후작이 혹시 뭔가 눈치채고, 비앙카를-.

“후작님 서재에 계시니?”

미아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지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들었다.

“아, 네. 올라가실 거라면, 제가 차라도 준비할까요?”

“아니, 미아. 넌 가서 네 볼일 봐.”

후작이 어디까지 아는 걸까. 바르한 자작이나 달리아 백작 일이 들통난 건 아니겠지. 서재로 향하면서 지젤은 다이한이 무릎 꿇었던 것을 떠올렸다. 내 여동생을 또 죽이려고 하면서, 뻔뻔하게 내 앞에서 입을 놀려.

서재 앞에 서있던 집사가 지젤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

“지젤 님, 지금 안에 후작님께서-”

벌컥- 서재 문을 연 지젤은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누군가 피떡이 돼서 후작의 발밑에 깔려있었다. 선홍색 피가 잔뜩 튀어 고급스러운 카펫이 더럽혀져 있었다. 잠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가만히 서있던 지젤은 코뼈가 부려졌는지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봤다. 엘로이 백작이었다. 다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굳은 지젤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명색이 후작 부인이 노크를 잊은 건가.”

다이한의 커다란 손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 후작이 서재에서 백작을 패고 있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젤이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이를 악물었다. 누워서 고통 어린 신음만 내뱉고 있는 백작의 얼굴 위로 비앙카의 얼굴이 겹쳐졌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람은 때론 경솔하게 입을 놀린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있고.”

다이한이 백작의 배를 지그시 밟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걸 보면서 지젤은 그가 굉장히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백작은 지금 그 책임을 지는 중이지.”

다이한이 덤덤하게 지젤에게 설명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황태자와 같은 마차에서 내린 지젤을 추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눈치 없는 백작은 후작 부인과 황태자의 불륜에 대한 소문을 늘어놓으며 이혼을 권유했고,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처였지만, 또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아내를 욕보였으니까. 물론, 지금 이 폭력적인 행동의 기반에 지젤에 대한 분노가 아예 섞여 있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용건이 그게 다인가.”

지젤은 다이한의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그녀는 그의 저런 얼굴이 낯설었다. 처음 봤을 때, 분명 저런 얼굴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차갑다 못해 시린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어쩐지 새삼스러웠다.

“제가 아끼던 하녀가 봉급이 부족했나, 아니면 제가 뭔가 서운하게 했나.”

지젤이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섭섭하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는데.”

비앙카가 약초를 쓰던 걸 들킨 건가, 아니면 이엘리야를 쫓다가 꼬리를 잡힌 걸까.

“혹시 후작님께는 마지막 인사라도 했나요? 꽤 오래 일했던 아이라서요.”

지젤의 말에 다이한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는 이를 악물었다.

“일개 하녀의 부재 따위를 신경 쓰기에는.”

누구는 한 시간이 하루처럼 흘렀는데. 돌아와서 겨우 한다는 말이, 그 하녀의 행방이다. 내가 그 하녀 흉내 내는 놈을 죽였을까 봐? 다이한이 애꿎은 백작의 등을 꽉 눌러 짓밟으며 눈썹을 까닥였다.

“내가 좀 바쁘니, 용건이 그게 다라면 부인께서는 나가주면 좋겠는데.”

지젤은 염치없이 태연하게 그녀에게 꺼지라 말하는 후작을 가만히 바라봤다. 후작이 이엘리야를 벌써 찾은 건 아니겠지? 지젤이 성큼 서재 안으로 발을 들이자, 다이한의 연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내 여동생을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지젤의 말에 여태 무표정하던 다이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좀 중요한 용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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