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그냥 다 포기하고 죽어버리라며,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을 응시하던 지젤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차에서 죽었어야 하는 건데.
“지젤, 그게 아니야. 너와 나 그리고 이엘리야 모두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었잖아.”
“5년 동안, 난 죄 없는 너와 이엘리야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생각에 숨 쉬는 것조차 죄악 같았어. 내 존재 자체가 재앙이라 믿으면서 살았는데-.”
“설령 우리가 죽었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돌아오지 못한 건 내가 충분히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이안은 차라리 지젤이 눈물을 흘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젤이 초점을 잃은 눈으로, 마치 내면이 텅 빈 인형처럼 말을 이어갔다.
“죄스러워서. 그래서 기꺼이 나를 내놓았는데, 다이한은 여태 내가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도 속아줬더라.”
그러니 그마저도 의미가 없었던 거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다이한의 이름에, 지젤의 손을 잡고 있던 이안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젤의 얼굴을 살폈다. 후작에게 가지고 있는, 어떠한 감정의 찌꺼기라도 찾으려는 듯이 집요했다. 그걸 눈치 못 챈 지젤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안, 우리 이제 예전으로는 못 돌아가. 이제는 안 돼.”
풋풋했던 예전과 감정의 골이 깊어진 지금의 간극을 좁히기란 불가능했다. 서로가 각자의 입장에서 쌓아온 감정의 결이 달랐다. 지젤의 다음 말을 예상한 이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그만.”
이안이 손을 들어 지젤의 입을 막았다. 흉포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는 아드득 이가 갈릴 정도로 분을 삼켜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씨근덕거리는 그의 이마에 솟아오른 핏줄이 꿈틀거렸다.
“내가 숨겼으니 네가 화내는 건 당연한데. 밀어내지 말라고 내가 애원했던 건, 그새 잊은 건가.”
이안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까지 본 지젤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데 놀랐다. 다이한과의 대화 이후로 내면의 무언가가 끊어진 기분이 들었다.
“난 예전처럼 널 사랑할 수 없어.”
지젤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난 그때처럼 널 따라서 어디든 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어.”
그걸 들은 이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화를 억누르며 그녀의 턱을 꾹 매만진 그는 방금 들은 지젤의 말을 곱씹었다. 감수하겠다고 했는데도, 나한테 고작 한다는 말이.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라, 붉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난 너한테 사랑해달라고 한 적 없어.”
옆에 있으라고 했지. 이안이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지젤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지젤이 차라리 욕을 하고 뺨을 때리면 모를까, 떠나보내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다정하게 그녀의 이안으로 남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또 끝내려고 하면 그도 방도가 없었다. 잠깐 그렇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이안이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다.
“여태 숨겨서 미안해.”
나도 알아.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굴었는지, 그래서 네가 홀로 얼마나 괴로웠을지.
“네 마차사고 소식을 듣고, 이엘리야가 황궁에서 도망쳐서 찾지를 못해서 그랬어.”
지젤의 푸른 눈이 커다랗게 변하는 걸 보면서 이안은 쓰게 웃었다.
“이엘리야는 네가 걱정돼서, 널 보려고 5년 만에 도망친 거야.”
이안이 지젤의 입에서 손을 천천히 떼고는 그녀의 뺨을 스치듯 매만지며 경고했다.
“화내는 건 좋은데, 이런 식으로 내 한계를 시험하지는 마.”
함부로 단정 지어서 날 보내려고 하면, 우린 더 힘들어질 거야. 난 그길로 이걸 다 끝내고, 널 납치해서 황제궁에 데려가는 수밖에 없거든.
“황제궁 자체가 넓어서 답답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지젤 양은 똑똑하니까 어떻게 도망칠지 모르니, 내 침실에 꼼꼼히 잘 묶어둬야지.”
어미 새처럼 널 하나하나 거둬 먹이고, 입히고 하면 나야 즐겁겠지. 이안이 생각만 해도 흐뭇한지 방금과는 다르게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즐겁지 않을 테니 착하게 참는 중이라고.”
이안이 조곤조곤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며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감금계획을 가지고 있다 설명하면서, 그걸 실행하지 않고 있는 게 자랑스럽다는 어투였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인데, 퍽 대단한 배려를 한다는 듯 일러주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떻게 하면 널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중인데. 왜 자극을 해.”
이안이 얄궂은 표정으로 웃으며, 지젤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일단 이엘리야를 찾고 나서 다시 화를 내.”
“어디, 어디 있다는데?”
내 걱정을 해서, 날 보러 오는 중이라니. 지젤이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국경은 넘은 거야? 언제 사라져서, 어디까지 찾아본 건데? 방금까지 무표정했던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혼자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불쌍한 내 동생.”
지젤이 탄식처럼 내뱉은 말을 들으며 이안은 주저했다. 이미 충분히 아파 보이는데, 이런 얘기까지 하면-. 그래도 숨길 수는 없어서,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후작가의 기사들도 걔를 찾고 있어. 5년 전 일의 증인이 될 테니 처리하려는 모양이야.”
이안의 말에 지젤이 눈을 부릅떴다.
“뭐?”
지젤은 이어지는 이안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귀를 찢는 이명을 견디면서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무릎 꿇었던 후작의 눈물이 그녀를 향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지젤은 새삼스럽게, 자신을 위해서라도 후작을 용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무력한 분노가 결국, 그녀를 불태워버린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
오스틴은 대뜸 그림을 그려달라 불러낸 바르한 자작의 저택 앞에서 눈썹을 긁적였다. 어째 입구부터 후작가보다 화려한 것 같았다. 자작이 유흥을 즐기며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이라더니, 돈을 펑펑 쓰는 모양이었다. 스텔라 때문에라도 마주치기 껄끄러운데. 자작 부인 그림을 그려달라는 얘기면 어쩌지. 못 그릴 건 없지만. 오스틴은 짧게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는 보였다.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 곤란하네.
확실히 후작 부인의 영향이 보통이 아니기는 했다. 그저 소개 한 번 시켜준 걸로, 너도나도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대니. 후작 부인이 갑자기 왕국으로 가는 바람에 백작 부인이 황태자 약혼녀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하지 못해서, 마음이 찝찝했다. 조금 더 간을 보다가 움직일까. 집사가 안내해주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오스틴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정원에 앉아있던 바르한 자작이 그런 오스틴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체격이 이렇게 큰 남자였나? 바르한 자작이 생각보다 키가 커서 놀란 오스틴이 말을 더듬는데, 자작이 그의 말을 끊어먹었다.
“이렇게 직접 얼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반가워라. 바르한 자작이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와 악수를 하게 된 오스틴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방금 무슨 뜻이지. 목을 잔뜩 움츠린 오스틴이 자작에게서 한 발 물러서는데, 자작의 뒤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 남자애가 눈살을 찌푸렸다. 바르한 자작이 실수했다는 듯 사람 좋게 웃으며 오스틴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오스틴. 화가인데, 내 아내의 애인이기도 해요.”
이엘리야에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서 오스틴을 부른 게 절대 아니었다. 테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고말고. 이건, 계속 말을 아끼는 이엘리야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생각보다 그가 후작 부인의 편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야 이쪽도 진위를 판단하지.
“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 스텔라가 별장 가면서 아예 끝난 건가?”
“오해가 있으신, 그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합니다.”
놀란 오스틴이 바르르 몸을 떠는데, 자작은 태연했다. 이상한 대화가 이어지자 이엘리야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바르한 자작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그건 상관없고. 후작 부인께서 네게 맡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라던데.”
“일이요?”
하녀, 루나에게 손짓한 바르한 자작이 의아한 듯 묻는 이엘리야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지젤 님에 관한 추문이 돌고 있거든요. 황태자와 굉장히 친밀하다는.”
비앙카는 지젤의 부재 여부와 상관없이 입 가벼운 엘로이 백작 부인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비앙카에게 이엘리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데리고 있다는 걸 알리지는 않았다. 후작이 알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걸 보니, 지젤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야 맞는 상황 같았다.
“엘로이 백작 부인에게서 뭔가 건져냈나?”
하녀가 쟁반 위에 금화 주머니를 올려둔 채 이쪽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걸 본 오스틴은 잠시 눈을 끔뻑거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뭐야? 후작 부인이 자작이랑 한패인 건가? 당장 코앞의 금화에서 눈을 못 떼던 오스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백작 부인 말이, 황태자 약혼녀가 후작 부인이 개망신당하고 쫓겨나길 원한다고. 그래서 후작에게 압박을 줘서 이혼시킬 거라고 했습니다.”
“헬렌 미스틱?”
이엘리야가 눈살을 확 찌푸리며,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황태자가 이를 갈더니 언니랑 다시 잘되는 건가? 아니면, 일방적으로 또 괴롭히는 건가? 이안의 성격을 아는 이엘리야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언니가 후작과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황태자가 복수라도 하겠다고 일부러 약혼녀를 이용하는 거라면, 가만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약혼녀가 무슨 공작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엘리야는 자작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하녀는 오스틴에게 금화 주머니를 내줬다. 오스틴은 그걸 들고 눈치를 잔뜩 보다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붉은 머리 소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앉아있는 걸 보면 차림새는 평민이어도 귀족인가 보지. 그녀를 흘끔거리던 오스틴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남동생 로한은 외교적 협상에서 공을 인정받아 작년에 가문과 별개로 공작 작위를 받았고, 남매의 아버지는 후작이죠.”
“우리 아가씨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걸까.”
되게 궁금해지네. 바르한 자작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이엘리야를 내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엘리야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대답하기 곤란해서 적당히 미소 지었을 뿐인데, 그걸 본 테오는 반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살짝 장난기 어린 눈이 접히면서, 그 위의 반듯한 눈썹까지도 휘어서 보는 사람을 몹시 난감하게 했다. 말 그대로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