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7)화 (97/135)

97.

비앙카는 바로 자신의 뒤에 서있는 다이한을 보고 몸을 떨었다. 항상 보는 얼굴이지만 이렇게 보니 위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그가 손만 뻗어도 자신의 목을 조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후작은 표정의 변화 없이 비앙카의 앞에 놓인 것들을 훑었다. 그걸 눈치챈 비앙카는 고민했다.

이길 수 있을까? 찻주전자와 찻잎, 그리고 생소한 약초가 늘어진 주방 작업대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이대로 지하실로 끌려가면 온갖 고문을 다 할 게 뻔했다. 후작은 사람을 죽이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죽기 직전까지 괴롭히는 데도 능숙했다. 힘으로 그를 제압하는 게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하는데,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후작이 경고했다.

“쓸데없이 소란 피우지 마.”

“네?”

이대로 조용히 죽이려는 건가. 비앙카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이한은 그런 비앙카를 지나쳐 그가 짓이기고 있던 정체 모를 잎을 그대로 뜨거운 물이 담긴 찻잔에 넣었다. 그걸 보면서 비앙카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그는 그런 비앙카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흰색에 금박으로 고급스럽게 장식된 찻잔이 그의 굳은살 박인 손에 들린 게 이질적이었다. 다이한은 그대로 그걸 단숨에 씹어 삼켰다. 비앙카는 그렇게 후작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후작님-.”

비앙카는 아연해진 얼굴로 처음으로 말을 더듬어야 했다. 그게 뭔 줄 알고. 아니, 알면서?

“주인의 부재와 상관없이, 시킨 일은 계속해.”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다이한은 얼굴을 구긴 채로 파르르 떠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를 보고 짜증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 애초에 아는 티를 낼 생각도 없었기에, 이렇게 따져 묻는 게 귀찮기만 했다. 그는 비앙카가 남자인 것도 알고 있었다. 이 하녀 행색을 한 놈이 지젤에게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한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다이한은 지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는 게 좀 짜증스러웠지만 참아냈다.

“알고도, 여태 계속 알고 계셨는데 왜?”

비앙카가 권태로운 듯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내려놓는 다이한을 보며 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다이한은 그런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돈 몇 푼에 움직이는 얄팍한 목숨 부지하려면, 네 주인은 내가 아는 걸 몰라야겠지.”

이미 간파당했다. 언제부터? 비앙카는 다이한의 심정을 감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로 해독제를 먹는 건가? 그러기에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깐 그가 다이한의 손톱에 혈색이 없는 걸 보고 더 혼란스러워했다.

“네 주인과 내 심기 모두 거스르지 말고, 여태까지처럼 움직여.”

“절 안 죽이십니까?”

다이한은 그 말에는 어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여지를 남겼다.

“부디 그 혀 놀림 신중히 해서 값싼 목숨 부지하길 바라지.”

다이한은 누군가의 납득을 바라지 않았기에 한 번 더 경고하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비앙카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있어야 했다. 비앙카는 지젤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늪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조나단의 바로 옆 침실을 사용하게 된 지젤은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왕궁에서 편하게 잠들기란 어려웠다. 그건 후작가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여긴 조지 콜튼이 찾아오기도 쉬운 곳이니까. 그때, 창문 바깥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창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섰다. 사뿐하게 착지하는 소리를 들은 지젤은 고민했다. 대범하게도 들어오네. 후작이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밖에서 감시하고 있는 후작가의 기사들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지젤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라오는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 익숙한 향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 잘 알았다.

“안녕.”

이안이 눈을 게슴츠레 뜬 지젤의 뺨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보고 싶어서 빨리 왔어.”

“기껏해야 이틀 지났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널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봐.”

이안이 주책맞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지젤의 옆에 털썩 누웠다.

“문 앞에 후작의 기사들이 있어.”

“그래서, 네가 싫어할까 봐 창문으로 들어왔지.”

밤중에 검을 들면 화낼까 봐.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이안이 지젤의 품으로 파고들며 미소 지었다. 이안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목을 간질였다. 자연스레 그를 껴안는 자세가 된 지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미 후작의 문제로 머리가 충분히 복잡한데, 이안까지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왜 눈이 부었을까.”

이안이 지젤의 턱 끝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지젤은 어둠 속에서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이안이 조금 무서워졌다.

“나 정말 잠깐 한눈팔았는데.”

또 무슨 일이 있어서, 귀한 눈물 뚝뚝 흘렸으려나. 사실, 지젤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멍청한 후작 때문이겠지. 대체 그 새끼를 언제 죽일 수 있는 걸까.

“속상하게.”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손을 위로 뻗어 지젤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지젤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이안의 등을 쓸어내려 줬다. 후작이 다 알고도 속아줬다는데. 그걸 들으면 넌 뭐라고 할까. 사실, 인과응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이렇게 다정한 널 보내고 얻은 게, 고작 이따위 것들이니. 초점을 잃은 지젤의 눈이 오른 손목의 흉터로 향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그녀가 또다시 본인의 어리석음을 하나하나 헤아리는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쩌지, 나 고백할 게 있는데.”

네가 또 울까 봐,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지네. 이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작게 읊조렸다. 사실은 미움받을까 두려웠다.

“상황이 정리되면 이야기하려고 했거든. 또 걱정에 잠 못 이룰까 봐.”

지젤은 답지 않게 변명부터 하고 있는 이안의 검은 눈을 빤히 내려다봤다. 지금 상태라면 뭐든, 그렇게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이안이 그런 지젤을 꽉 끌어안고는,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생기 잃은 파란 눈을 본 이안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엘리야가 살아있어.”

이안에 입에서 흘러나온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에 지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이게 꿈인지 아니면 약의 부작용으로 망상을 보는 건지 고민했다. 지젤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입술을 달싹였다. 목이 메어서 말이 흘러나오지 못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이안이 지젤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젤은 그의 품에 안기고서야, 이안이 긴장해서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살아있다고?”

“네 여동생.”

그게 무슨 뜻인지 인지를 못 하는 사람처럼 굳어버린 지젤을 본 이안이 다급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지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기울였다.

“5년 전에, 너희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저택이 불타는 걸 봤고, 이엘리야가 근처에 숨어있는 걸 발견해서 황국에 데려갔어. 후작이 죽이려고 했다기에-”

지젤은 이안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너.”

지젤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가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한테 복수한 거구나.”

이엘리야가 살아있는 걸 숨기고, 조금이나마 더 괴롭기를 바라면서. 죄책감에 시달려보라고. 지젤이 양손으로 이안의 몸을 밀치자, 이안이 멍한 표정으로 그대로 밀려났다. 지젤이 본인의 말을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때는 내가 기억을 잃은 줄도 몰랐잖아?”

후작이랑 도란도란 산다는 얘길 듣고, 오지 않았다며. 너무 미워서 앙갚음했구나. 지젤이 단숨에 상황을 정리하며 하는 말에 이안이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이안이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구는 걸 보며 지젤은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잘못하면 또 이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던 그녀는 굳이 버텨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졌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때는 내가 힘이 없어서 이엘리야가 증인으로 나설 수도 없었고, 후작을 처낼 수가 없었어. 나는-”

“5년 동안. 단 한 번도. 한 문장이면 되는 걸 알리지 않은 게, 복수가 아니라고?”

“지젤,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니야.”

지젤은 이안이 거친 숨처럼 토해낸 문장을 되새기며, 왼쪽 배를 부여잡았다. 위가 배배 꼬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내장을 녹여버리는 것 같은 쓰린 물이 턱 밑까지 역류했다.

“이엘리야는 왜 날 보러 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하게 그에게 물으려 애썼다. 조금만 잘못해서 이성을 놓으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살아있었는데,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을 날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뭐야.

“오지 못한 거야. 후작은 황국에서 이용하기 편한 사람인데, 이엘리야가 그때 일을 고발하면 사용하기 곤란해지니까. 내가 1년 동안 구금당했던 것처럼, 이엘리야도 5년 동안 갇혀 지냈어.”

지젤은 이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듯 시선을 내리깐 그녀의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론 부족했다. 5년을, 5년 동안 생사 한 번 알리지 않은 이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너랑 같은 이유구나.”

지젤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을 최대한 깊게 들이마셨다. 이안의 말을 곱씹을수록 상황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울지도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족들 죽인 후작이랑 너무 잘 살고 있으니, 얼굴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