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6)화 (96/135)

96.

“정말 똑똑하시네.”

제인이 감탄을 하며, 기지개하듯 굽혔던 허리를 쭉 펴냈다. 이엘리야는 엘레노어가 그녀를 쫓아 황국을 떠나고 나서야, 움직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도망간 척만 한 거였다. 엘레노어가 떠나기 전까지는 황궁에 숨어있다가, 역으로 황녀를 쫓아 움직인 거지.

“그러니, 내가 못 찾지.”

제인이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경에서는 다니엘 후작저로 간다는 여자를 고용해서, 가발 씌우고 금화를 잔뜩 쥐여주기까지 했다. 가짜 이엘리야를 눈앞에서 빼앗겼던 도널드가 그 뒤를 추적해 찾아가자, 여자는 후한 사례금에 그리했었다 고백했다. 붉은 머리 여자가 자신은 수배범도 범죄자도 아니니, 좀 도와주고 돈 받는다고 벌 받지 않을 거라 꼬드겼다고 말이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되게 난감하다. 그지?”

“네, 네에. 윽-.”

도널드가 애써 대답하고는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해냈다. 제인은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다.

후작가의 기사들은 멍청해서 붉은 머리 푸른 눈 여자만 찾아다녔지만, 그녀가 가발을 썼을 것이라 예상한 제인은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을 일일이 살펴봤다. 근데도 못 찾았으니, 이미 은신처를 정하고 숨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떤 변장을 하고, 어디서 뭘 하시기에 우리가 못 찾는 걸까.”

제인이 다리를 꼬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그 밑에 깔린 도널드가 고통 어린 신음을 토했다.

“하-.”

엎드려 뻗친 도널드의 등에 편안하게 앉은 제인은 입을 삐죽였다.

“후작저로 오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30분째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도널드의 목과 팔을 타고 땀이 줄줄 흘렀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도널드가 결국 못 참고 한마디 토해냈다.

“단장님, 저 이대로 죽을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께는 호강 못 시켜드려,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쇼. 도널드의 엄살에 제인이 짧게 혀를 찼다. 치사하게 부모님을 끌고 오다니.

“감사히 여겨.”

제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도널드가 기다렸다는 듯 풀썩 땅으로 엎어졌다. 입으로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제인은 너무 무거웠다. 시큰거리는 팔꿈치와 손목을 매만진 도널드가 울상 지었다. 그런 도널드를 매정하게 내려다본 제인이 말을 이었다.

“네가 놓친 게 가짜 이엘리야 님이어서 망정이지, 진짜 이엘리야 님이었으면 넌 죽었어.”

“여섯 명을 혼자 상대했는데, 칭찬은 아예 안 해주십니까.”

너무해. 도널드가 서럽게 코를 훌쩍이며 하는 말에 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바로 이엘리야 님을 쫓아가지 않은 건, 그 비앙카인지 뭔지 하는 걸 믿어서 그런 거잖아?”

이엘리야 님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서. 네가 뭔데 그걸 함부로 판단해. 제인이 꾸욱 도널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혼나야지.”

“전 당연하게, 후작 부인께서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찌 되었든, 그럼 후작 부인도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걸 안 것 같으니 또 난리가 나겠네.”

“무슨 난리요?”

“네가 후작 부인이면, 5년 동안 동생 감금한 황녀랑 그걸 숨긴 황태자를 가만둘까?”

제인의 말에 도널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눈을 감았다. 신관 같은 직업을 선택할걸. 왜 기사 따위를 하겠다고 설쳐서, 이런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걸까. 이쪽이 먼저 찾아서, 황태자가 후작 부인에게 인도해야 그나마 그림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엘 님께서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제인은 도널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엘리야가 어디서 언니를 만나려고 할까? 눈이 마주친 도널드와 제인은 동시에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 먹고살기 너무 힘들었다.

***

“당장은 저희 언니를 못 본다는 말인가요?”

바르한 자작은 스테이크 썰던 칼을 허공에 휘두르며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이엘리야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바로 지젤을 만나게 해줄 수는 없었다. 왕궁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그는 아직 그녀가 미심쩍었다.

진짜 이엘리야 아벨린인가? 확실히 평민 행색을 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식사 예절이 지적할 곳 없이 깔끔했다. 5년 전에 불타 죽었다던데. 남장까지 하고 언니를 찾으러 왔다고. 누구한테 쫓겨서 머리카락까지 자른 걸까. 아니면, 그냥 그럴듯하게 생긴 사기꾼인가.

“다니엘 후작저로 서신을 보내면, 다이한 후작이 알게 될 텐데. 그건 안 된다며?”

다이한 후작이라는 말에 이엘리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르한 자작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가 진짜 후작 부인의 여동생인지 가늠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왕궁에서 만나는 건 위험해.”

계속해서 말이 짧은 테오를 보며 이엘리야가 나이프를 직각으로 세워 스테이크에푹 꽂았다. 식사 예절에는 많이 어긋나지만, 위협으로는 적합한 태도에 테오가 말을 이었다.

“-요.”

그는 이상하게 그녀의 눈치를 보게 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이엘리야는 껍데기는 멀쩡하게 생겼지만, 속은 멍청한 것 같은 자작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절 어디다 팔아넘기실까 많이 걱정했는데. 나쁜 분이 아니라 다행이네요.”

“인신매매는 적성에 안 맞아서. 그건 그렇고 내가 후작 부인과 친분이 두텁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도 될까요?”

“소문으로 들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절 보자마자 저희 언니 이름을 불렀잖아요.”

“이름?”

“보통 귀족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잘 안 부르죠. 언니가 입궁을 안 해서 방법도 없었고.”

이엘리야의 말에 바르한 자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닮았는데, 아니 안 닮았는데 분위기가 비슷하달까. 아니, 안 비슷한데. 뭐라 해야 하지 이걸. 이쪽은 고양이나 살쾡이보다는.

“그리고, 자작님 착하게 생기셔서요.”

그건 멍청하게 생겼다는 얘기죠. 뒷말을 삼킨 이엘리야가 포크로 감자 샐러드를 퍼먹으며 미소 지었다. 그걸 본 테오는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첫인상이 좋다는 얘긴가?

“뭐-.”

어딘지 민망해진 그가 괜스레 입을 삐죽이며 이엘리야의 시선을 피했다. 하긴, 내가 얼굴로는 빠지는 사람이 아니지. 피아노 앞에 앉으면 더 잘생겨 보이는데. 문득, 그는 간만에 피아노나 좀 쳐볼까 싶어졌다.

“자작 부인께서는 안 계신가요?”

이엘리야는 자신이 이렇게 대놓고 식당에 앉아있어도 되는지 궁금해져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테오가 작게 탄식하며 등받이에서 몸을 떼어냈다.

“별장에 가있어요. 이제 이혼할 거라.”

그가 멍청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이고는 미간을 구겼다.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방금 되게 바보 같았다.

“별거 중이신가 봐요.”

여자 문제겠지. 이엘리야는 단박에 결론 지었다. 얼굴 괜찮게 생긴 귀족 남자들이야 뻔했다. 거기다 앞에 앉은 남자는 젊기까지 했다. 언니는 왜 이런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까.

“아내가 남자가 많아서요. 결혼 때부터 고질적인 문제도 있었고, 이제 서로 상호 합의하에.”

문득, 자신이 왜 이런 걸 주절거리는지에 대해 의문을 느낀 테오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죄송해요.”

방금 그 말들의 진위 여부가 어찌 되었든, 눈앞의 남자에게 하루 이틀이라도 신세 져야 하는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테오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굉장히 화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언니랑 만나기 전까지만 부탁드릴게요.”

테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오묘한 게, 아마 아까 너무 놀라서 그런 것 같았다. 갑자기 벽에 밀쳐지면 누구든 놀랄 수밖에. 그가 본인을 다독이기 위해 가슴께를 손으로 토닥였다. 그걸 본 이엘리야는 확실하게 지능이 평균 이하인 사람이라 결론지었다.

***

지젤은 쌕쌕거리는 숨만 내뱉고 있는 왕비의 옆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조나단은 지젤에게 조금 툭툭거리다가, 다시는 약한 동물에게 힘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걸 들은 지젤은 문득, 자신이 뭐라고 뻔뻔하게 조나단에게 그런 걸 가르치나 싶어졌다.

“조나단 님은 정말 당신 안 닮았어요.”

그래서 힘드네요. 지젤은 거의 뼈만 남은 왕비의 손목을 매만지며, 미약하게나마 맥박이 뛰는 걸 확인했다.

“다이한 후작은 대체 왜 나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냥 죽여버렸으면 되는 일을. 나중에 당신을 쳐내고 내가 공주라는 걸 입증해서, 왕궁을 삼킬 생각이었나. 다이한이 답해주질 않으니 그녀는 마가렛에게 묻고 싶었다.

“다이한이랑 당신이 그런 사이였다면, 더욱- 이해가 안 가요.”

왕비랑 은밀한 사이였다는 소문이 진짜라면, 왕비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지젤은 무릎 꿇고 울던 후작의 잔상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후작이 자신을 향해 고백하던, 추악한 감정이 역겨웠다. 감히 확언하건대,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면 그럴 수 없었다.

“하긴, 이제 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지젤이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마가렛의 팔을 이불로 덮어줬다. 꽤나 다정한 손짓이었다.

“어차피 우린 다 같이 죽을 건데.”

순서만 좀 다를 뿐, 결말은 똑같을 텐데요. 다이한이 지난 5년 동안 애써 속아준 것일 뿐이라 해도, 지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이한이 지젤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진작 엎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보니. 그저 지젤이 삶을 연명하기 위해 그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웃으면서 다정하게 굴 필요도 없으니 잘된 일이지. 그녀가 본인을 위로하며 미소 지었다. 그 정도 결말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지젤이 자리를 비우고,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비앙카는 새벽에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복용량을 늘린 시점에 잘못해서 약을 끊었다가는 들키기 십상이었다. 문제는 후작 부인도 없는데 다이한 후작이 과연 이걸 서재에서 마실 건지였는데, 후작은 항상 찻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노집사와 하인 몇만 눈 뜨고 있는, 아무도 없는 새벽 주방에 홀로 선 비앙카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차가 아니라 술에 타야 자연스러울까, 하는 고민이었다. 잎의 뒷면이 붉은 풀잎을 짓이겨낸 비앙카는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퍼뜩 놀라 몸을 돌렸다.

“후작님,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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