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개가 꺾인 새는 추락할 수밖에 (95)화 (95/135)

95.

집무실에 앉은 다이한은 한센이 무릎 꿇고 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절 당장 죽이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대는 절박해서 무릎까지 꿇었는데, 전혀 와닿지 않는 느낌?

“그래서 여자도 놓치고, 괴한들한테 당하기만 했다.”

“그 뒤에 추격해봤지만, 이미 사라져서는-. 죄송합니다.”

“찾아. 제대로 해결 못 하고 지젤이 알게 되면.”

다이한은 5년이 넘도록 함께하고 있는 그의 무능에 대단히 실망했다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한센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이한의 연녹색 눈에 이채가 스치며 매서워졌다. 후작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알아서 지하실로 기어 내려가 있게.”

“네, 지금 바로 재정비해서 움직이겠습니다.”

“황국 기사들이 데리고 있어도 개의치 말고 끝내.”

후작의 말에 한센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전부 5년 전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

지젤의 침실 정리를 하던 미아는 노크도 없이 들어선 비앙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인사도 없이 멀뚱히 서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앙카.”

비앙카는 텅 빈 침실을 쭉 훑어보다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래? 그래도 먼저 말을 걸기로 한 미아는 깊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집에 일이 있었다며?”

“지젤 님은?”

“왕궁에 가셨어. 언제 오실지 모르겠네.”

네가 없는 사이에 일이 많았거든. 미아가 이를 악물고 구겨지지도 않은 이불을 탕탕 펴냈다. 금방 오시겠지. 지젤 님 집은 여기니까.

“왕궁?”

비앙카가 깊게 한숨을 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동생이 살아 있었고, 그걸 황태자가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왕궁은 그가 갈 수 없었다. 정말 그럴듯한 핑계가 아니고서는 하녀가 혼자 왕궁 갈 일이 없었다. 후작도 그녀의 여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 상황이 긴박했다. 얼마나 똑똑하게 숨었는지, 국경 넘어서부터는 이엘리야의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도널드가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지한 상황에서 저택에 온 것 자체도 모험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 했다. 후작도 황태자도 신뢰할 수 없는 마당에. 서신으로 내용을 전하기에는 위험했다.

“비앙카! 찻잎이 다 떨어졌더라, 약초상에게 다녀와.”

미아가 뒤에서 하는 말을 들으며, 비앙카는 짧게 혀를 찼다. 복용량이 줄면 안 되니, 후작이 마실 차도 챙겨야 했다. 일단, 지젤이 돌아오기 전까지 버티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여동생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언니인 지젤을 찾아 후작가로 올지도 모르니까. 비앙카는 빠르게 머리를 돌리며 발을 움직였다. 화가인 오스틴을 이용해 엘로이 백작 부인의 속내를 떠보기로 한 건 어떻게 되었나 확인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일에는 바르한 자작이 제격이었다.

***

“넌 실수하는 거야.”

천하의 멍청한 저런 게 내 동생이라니. 엘레노어가 이안의 뒤에 바로 서서 악담을 퍼부었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이안은 그걸 가볍게 흘려들었다. 브루노는 그런 남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인이 사라진 도널드와 이엘리야를 찾으러 갔기에, 남매 보필을 하게 된 그는 눈치 보느라 바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놈.”

엘레노어는 서명을 하기 위해 만년필을 드는 이안의 뒤통수에 대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따위 말고 이엘리야가 내 동생이어야 했어. 대체 왜 태어났니?”

브루노가 텁- 입을 막고 막말을 하는 황녀를 내려다봤다. 듣는 사람이 다 속상하네, 너무해. 언제나 그렇듯 황녀께서는 말씀이 과하시다. 물론,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이안은 지금 자신의 광산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일방적인 파혼으로 인한 위약금으로, 그의 모친에게 받았던 금광을 양도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저쪽은 이혼도 안 했다고, 이 미련한 인간아.”

엘레노어가 이를 악물고 눈을 희번덕이며 하는 말에, 맞은편에 앉은 헬렌의 남동생은 코를 훌쩍였다. 너무 화를 내니까, 로한도 덩달아 눈치를 보게 되었다. 민망해진 로한이 괜스레 본인의 금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황녀님 성격이 새삼 정말 거침없으시구나. 파혼당한 자신의 누나보다 더 화를 내고 있는 황녀를 슬쩍 본 그는 뺨을 긁적였다.

“대체 네가 이걸 왜 내어주냐고.”

이안이 계속해서 엘레노어를 무시한 채로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기만 하자, 그녀가 그 종이를 휙 빼앗아 들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 여자가 제 발로 널 따라서 황국에 올 것 같아?”

엘레노어는 화병이 나면 그건 어리석은 제 동생 탓이라 확신했다. 후작 부인은 이안에게 흠이 되는 게 싫어서라도 황국에 올 인사가 아니었다. 엘레노어의 말에 이안이 눈썹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자의든, 타의든 어차피 내가 들쳐 메고 갈 테니.”

“뭐?”

“내가 곱게 싸안고 데리고 갈 거야.”

이불에 포근하게 감싸서. 이안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한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황태자가 납치를 계획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기분이 오묘해졌다. 황태자가 누군가를 납치한다면, 당연히 목에 줄을 매고 흉기로 협박하며 질질 끌어서 데려와야 자연스러운데. 뭐에 감싸서 어떻게 데려온다는 건지 상상이 잘 안 갔다. 이불로 목을 조르겠다는 건가? 상당히 독특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이안, 정신 좀 차려.”

그런 누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이안이 만년필을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은 로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젤이 황후가 되는 걸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문장이 빠져 있는데?”

“네? 실수! 실수입니다! 저하, 정말 실수입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이안의 지적에 로한이 경기를 일으키며 빠르게 변명했다. 성정이 포악한 황태자가 실수에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라면 욕을 잔뜩 먹고, 뭐가 날아왔어야 했는데 이안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적어.”

“아, 네.”

눈치를 보던 로한이 엘레노어의 손에서 조심스레 종이를 빼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엘레노어 님,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종이에 이안이 요구한 내용을 추가로 적었다. 파혼 통보에 치욕적이라며 격분했던 그의 가문은, 황태자가 금광을 준다는 소리에 단숨에 마음을 바꿨다. 그만큼 상징적, 천문학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여자에 빠져서 황가의 금광을 팔아처먹다니.”

엘레노어의 신랄한 비판에, 로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욕을 들어보니, 유부녀라던데. 엄청난 미인인 걸까. 엘 님 정도로? 하여튼, 길길이 날뛰던 그의 누나도 금광을 준다는 소리에 자존심을 세웠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엘레노어의 무서운 눈초리에, 로한이 덜덜 떨며 이안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안이 그걸 다시 받아서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만년필을 까딱였다.

“금광은 즉위식 때, 헬렌 미스틱에게 바로 양도해주지.”

“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같잖은 시기로 지젤에게 조금의 해라도 끼치면.”

“그 정도의 사리 분별 못 할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로한의 똑똑한 대답에 이안은 흡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경쾌하게 서명했다. 그걸 보는 엘레노어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미친놈. 저것도 동생이라고 죽일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났다.

“거슬리지 않게 조심해.”

짧게 경고한 이안이 검지로 툭툭 서명한 종이를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한은 오늘따라 인자하고, 묘하게 다정한 황태자가 적응이 안 돼서 어깨를 움츠렸다. 미친놈이 너무 상식을 가진 사람처럼 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로한이 눈만 끔뻑거리자, 이안의 눈이 금세 가늘어졌다.

“대답.”

“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로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엘레노어가 그 꼴을 보여 아득 이를 물었다.

“너 이러다 비렁뱅이 되면 그 여자가 널 봐줄 것 같아?”

“엘레노어.”

이안은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짖어대는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손해 보는 계약을 해놓고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웃는 그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는 해야, 지젤이 미안해서 날 못 떠나지.”

“뭐?”

“유산으로 받은 금광 정도는 내줘야.”

이안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지젤에게 혼날 게 기대돼서 히죽거렸다. 엄청 뭐라고 하겠지. 푸른 눈으로 걱정과 애정을 가득 담아서, 예쁜 입술로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면 얼마나 귀여울까. 품에 끌어안고, 정확하게 어떤 가치가 있는 걸 내줬는지 알려주면 꼼지락거리면서 속상해하겠지.

“그래야 도망을 못 가지.”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방을 나서는 황태자를 보며 로한은 문득, 소문이 무성한 지젤이라는 여자가 불쌍해졌다. 제정신이 아닌 놈인 걸 알고 만나는 걸까? 누군가는 경고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로한이 브루노를 쳐다보며 잠깐 고민했다. 정의감 있는 기사라면, 그 여자에게 언질이라도 해줘야 하는 게 옳지 않냐고 해볼까. 기사도라는 게 있으면 황태자가 어떤 놈인지 밝히는 게 맞았다.

“로한 미스틱.”

홀가분하게 떠나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씨근덕대던 엘레노어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내 친히 경고해주니, 뼈에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살벌한 음성에 절로 놀란 로한이 목을 움츠렸다.

“그렇게 가치 있지도 않은 네 누나 파혼값으로, 무려 황태자의 금광을 받았으니 처신 잘해.”

“네.”

로한이 재빠르게 대답했지만, 분이 안 풀린 엘레노어가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

“비싸게 받아놓고, 허튼짓하거나 작은아버지 편에 붙으면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엘레노어의 잔인한 협박에 로한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황녀가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아버지 편에 붙었던 귀족들의 최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엘레노어까지 떠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누나가 저 고약한 황가 놈들과 가족이 되지 않은 게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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