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놀란 지젤은 울던 것도, 화내던 것도 멈추고 고해 성사 하듯 무릎을 꿇은 다이한을 바라봤다. 그녀가 수백 번을 상상했던 장면인데도, 희열은커녕 우습지도 않았다. 지젤의 앞에 무릎 꿇은 다이한이 그녀의 손을 꽉 잡지도, 그렇다고 아예 놓지도 못하고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 사과할 수 없어.”
갈라지는 목소리가 절박하고도 가증스러웠다. 다이한의 오른눈에서 주르륵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지젤의 시선이 매끈한 뺨을 스치고, 툭- 떨어지는 눈물을 좇았다. 무릎까지 꿇은 남자가 입으로는 용서를 구하지 않겠다 하는 게 기이했다.
“그걸 듣고 나면, 넌 날 떠날 거니까.”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이유였다. 변명의 축에도 속하지 못하는 비열한 해명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다이한은 그 끝이 파멸뿐일지라도 지젤을 놓아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 수렁으로 끌어 내리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럴 수 없었다. 다이한의 눈이 지젤의 손목에 남은 흉터로 향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용서도 바라지 않아.”
그는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허상과도 같은 일상을 매일 겪으며, 처음이 달랐다면. 조금만 다르게 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깨어나면 바스러질 꿈과 다를 바가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정말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롭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젤은 이미 그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넌 널 위해서, 날 용서하고 떠나고 싶겠지만.”
무지했던 나를 용서해달라 애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지젤은 다이한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를 두고 나아갈 게 분명했다. 그녀가 그를 인생에서 완전하게 배제시키고,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을 이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기대하지 마.”
연녹색 눈에 일렁이는 가혹한 집착이 올가미가 되어 지젤의 목에 걸렸다. 아연한 표정으로 다이한의 말을 듣고 있던 지젤이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지젤이 오랜 시간 지니고 있었던 의문을 실체화시켰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뭐 때문에, 대체 뭐 때문에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꼬아버리는 건데? 내가 어디까지 바닥을 내리치고, 괴로워해야 만족하는데.
“내가 이러는 이유가 뭐든, 네가 내 아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의미 없지.”
다이한은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또다시 그때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어서, 지젤은 주먹을 쥐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졸렬한 인간.”
“맞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는 지젤의 비난을 그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정말 지젤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행복을 바라며 보내주는 게 옳았다. 황태자는 그렇기에 지난 5년을 찾아오지 않고 버텼을 테지만, 다이한은 그처럼 그녀의 행복을 우선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지저분하고, 더러운 감정을 칭하기에는 과분한 정의였다.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다이한의 말이 맞았다. 지젤은 그가 얼마나 최악의 인간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인간이 내 손에 놀아나 주지 않았다고, 분해서 울고 앉아있는 건 어린애나 하는 짓이었다. 지젤은 이제는 멈춘 눈물을 손으로 차분하게 닦아냈다. 그러고는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동안 조나단 님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찾지 마세요.”
다이한은 그대로 굳어 앉아있을 뿐 떠나는 그녀를 붙잡거나 따라가지 않았다.
***
미아는 지젤이 시키는 대로 짐을 싸면서, 애꿎은 입술을 짓씹었다.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과 장신구들을 챙기면서도 그녀는 불안해졌다. 후작님과 싸우신 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이신 거지? 지젤은 말없이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만 보고 있었고, 결국 미아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젤의 표정이 결혼 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불안했다.
“지젤 님, 혹시 후작님과 무슨 일 있으세요?”
미아가 지젤의 뒤에 서서 걱정을 가득 담은 채로 물었다.
“혹시 또 다투신 건가요? 뭐 때문인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미아.”
지젤이 미아가 아닌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조용히 짐만 싸줘.”
“아예 안 돌아오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니.”
냉담한 지젤의 태도에 미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본능적으로 미아는 지젤이 또 후작저를 벗어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계시면 모두가 행복한데,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저도 이렇게 지젤 님을 위해서 움직이고, 매사 지젤 님을 걱정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이제는 돌아갈 친정도 없으시면서, 왜? 불안이 원망으로 변모하기 직전 지젤이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비앙카가 오면, 왕자님 뵈러 갔다고 전해줘. 너도 내 걱정 말고 푹 쉬고.”
“그-, 네.”
마지못해 대답한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실을 나섰다. 지젤은 미아가 손톱을 잘근거리며 방을 나서는 걸 봤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
테오, 그러니까 바르한 자작은 단단히 토라져 있던 조나단의 마음을 반나절 만에 풀어냈다. 그는 지젤이 왜 왕자에게 화를 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조나단이 원하는 만큼 카드놀이를 해 준 그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후작 부인께서 약한 동물이 아파하는 걸 보고 놀라신 모양이네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화부터 냈단 말이야.”
내 카나리아도 가져가버리고. 조나단이 조커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삐죽였다.
“원래 강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만나면 왕자님께서 먼저 사과하시는 겁니다?”
조나단이 통통한 볼살을 부풀리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멋지십니다.”
적당히 칭찬해 준 바르한 자작은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아침부터 놀기만 했던 조나단이 오후 수업을 들으러 떠나고, 그는 별생각 없이 왕궁 한 바퀴를 돌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잠깐 멍하게 걷기만 하던 그는 곧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엘로이 백작가에 드나드는 조지 콜튼이 신경 쓰였다.
“내가 거기까지 해결해 줄 필요는 없지만.”
약속한 돈만 받고 떠나면 되니까. 근데 후작 부인에게는,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가만히 서있어도 위태로워 보이는 게, 보지 않으려 해도 계속 눈에 들어오는 여자였다. 창가에 멍하니 앉아있는 걸 보고 있자면, 꼭 비 맞은 고양이 같았다. 아니, 고양이는 너무 작고 얌전했다. 그는 잠시 적절한 비유를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에 사는 살쾡이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작곡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적당히 귀족들 후원받아 먹고살던 그에게 후작 부인은 변수였다. 그녀는 그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주었고, 그건 꽤나 즐거웠다. 그래서 그도 그녀에게 변수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그렇다고 지젤을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 모든 일이 다 끝나고 후작이 몰락하고 나면, 가는 길이 달라지기 전까지는 같이 재미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돈을 들고 도망가 숨어 살 산을 마련해둔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운 남기고 헤어지는 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나 좋다는 여자는 많으니까. 이상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분수대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그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걸 떨쳐낼 새도 없이, 몸이 벽에 쿵- 밀쳐졌다. 등에서부터 울리는 고통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뭐라고 항의할 새도 없이 작은 손이 입을 꽉 틀어막았다.
“쉿.”
테오는 자신을 벽에 몰아붙인 붉은 머리 남자애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공격당한 건 이쪽인데, 왜인지 푸른 눈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는 자신을 벽에 밀치고 덮치듯 막아선 이엘리야를 보고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박력 넘치게 벽치기를 해본 적은 있어도 당한 적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큰소리 내지 마요.”
이엘리야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의 어깨를 벽에 짓누르며 눈썹을 까딱였다.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엘리야는 손을 떼내었다.
“물어보니, 당신이 바르한 자작이라고 하던데.”
남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여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얼굴이 가까워지고 몸이 밀착되었다. 반사적으로 테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엘리야가 툭툭 그의 뺨을 검지로 치며 물었다.
“맞아요?”
붉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보고 잠깐 고민하던 테오는 작게 탄식했다. 그는 눈앞의 소년이 저번에 상단 앞에서 마주쳤었던 사람이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맞는데, 이게 무슨 짓-”
테오의 목소리가 좀 커지자, 이엘리야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놀란 그가 몸을 움츠리는데, 이엘리야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테오는 숨을 멈춰야 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응.”
그는 드물게 기가 죽었다. 힘으로 확 밀어낼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소년의 얼굴과 몸이 묘하게 선이 얇은 탓인 것 같았다. 투박한 옷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미안한데, 우리 언니 좀 만나게 해줄래요?”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멱살을 꽉 잡고 있는 손을 보면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언니?”
여자야? 다행이다. 그가 눈을 끔뻑거리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예쁘더라니.”
그는 자신이 남자를 보고 동요하지 않았다는 데 먼저 안도했다. 뭐라는 거야. 이엘리야는 그런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자작님께서 저희 언니랑 친분이 두터우시다 들었어요.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사실, 왕궁까지는 들어왔는데 지젤이 입궁을 하지 않아서 선택한 차선이었다. 후작 부인이 왕자를 보러 자주 온다더니, 소문이 과장된 건가 싶을 만큼 오질 않았다. 황녀가 무슨 일인지 후작저에 머문다니, 거기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궁에서 숨어 지내는 건 한계가 있었다.
“전 이엘리야 아벨린이라고 해요. 5년 전에 죽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겠지만, 좀 도와주세요.”
아벨린이라고 하면, 후작 부인? 테오가 얼굴을 확 구기고는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이것 좀 놓아주지?”
도와달라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잖아. 테오가 고개를 까딱이며 하는 말에 이엘리야는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들고 그의 명치를 꾹 눌렀다.
“대답 먼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니까 이건, 부탁이라는 형식을 가진 협박이었다. 그걸 단박에 알아들은 테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과격한데.”
“제가 못된 걸 많이 배워와서.”
이엘리야가 싱긋 눈을 휘어 웃어 보이며 하는 말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이 뭐에 대해 긍정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젤과는 또 다른 분위기에 판단력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