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지젤은 예쁘게 웃고 있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종이를 찢어버렸다. 비싼 게 틀림없을 두툼한 종이가 부욱- 소리를 내며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말도 안 되는 짓이었고,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헬렌은 앞으로 이안의 인생에 있을 모든 일에 도움이 되어줄 사람이었다.
“다시는 이런 얘기 하지 마.”
“그건 너 보여주려고 두 번째로 쓴 서신이야. 첫 번째로 쓴 건 이미 보냈어.”
이럴 줄 알기는 했는데. 이안이 그래도 조금 속상하다며 지젤의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빨리 칭찬해.”
“언제 보냈는데? 아니야, 사람 보내서 다시 가져와. 파혼은 안 돼.”
이안이 지젤의 손을 억지로 들어서 제 머리에 얹었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개처럼 쓰다듬어달라는 말에 지젤은 입 안의 혀를 짓씹었다.
“어서 잘했다고 해줘.”
이안이 그런 지젤을 재촉하듯 그녀의 손을 뺨에 문질렀다. 그러고는 이를 세워서 손바닥 안쪽 살을 잘근거렸다. 그 찌릿한 통증에 지젤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너 즉위식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아니잖아.”
“어쩔 수 없지.”
“어쩔 수가 없어? 너 진짜-.”
지젤은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까 네 누나가 날 싫어하지. 나 같아도 싫어했어.
“난 네가 안 가면, 안 갈 거야.”
즉위식? 알아서 하라고 해. 이안이 정말 남의 일 얘기하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지젤을 내려다보는 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슴푸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얘기했고, 착하게 기다리고 있잖아.
“어딜 나 혼자 보내려고.”
이안이 지젤의 속내를 꿰뚫어 본 사람처럼 속삭였다. 시간 끌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이안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으며, 그녀의 작은 손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따스한 체온에 지젤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지젤의 손을 단단히 감싸 쥐고 있었다.
“난 네 거니까, 네가 옆에 두고 잘 챙겨야지.”
떠나길 기다리면서, 방치하는 건 직무유기야. 지젤의 손에 얼굴을 기댄 이안이 눈을 감고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요망한 입꼬리가 교태롭게 휘어 올라가는 걸 보며, 지젤이 입을 열었다.
“넌 지금 네 인생을 망치고 있어.”
잘못된 선택이라고. 지젤이 화를 낸다기보다는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네가 누릴 수 있는 것들, 나 때문에 망치게 되면 넌 후회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있는 곳이 어떻게 나락이야. 눈을 뜬 이안이 지젤의 손바닥에 연신 입 맞추며 웃었다.
“근데, 난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좋아해.”
조곤조곤 어여쁜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다 좋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삐죽 심술이 솟아오른 그가 지젤의 약지를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잘근잘근 조금씩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그럼 어디 안 가고 내 옆에 있겠지. 지젤이 들으면 소름 끼쳐 할 발상이었다. 기이한 공복감과 동시에 차오르는 충족감.
“나 이틀 정도만 국경에 다녀올 거야. 보고 싶어도 참아.”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지젤은 이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안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 지젤의 머릿속이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길 바랐다. 그런 이안의 바람이 무색하게, 지젤은 아까 본 다이한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뭐였을까.
***
오스틴은 엘로이 백작가의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지젤이 귀부인들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자마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편에 비해 젊은 백작 부인은 오스틴을 보자마자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은 백작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네 번째 방문이었다. 그리고, 단 네 번 만에 그는 이미 백작 부인과 꽤나 친밀해졌다. 어느 정도냐면, 백작 부인 등에 점이 몇 개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일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후작 부인 그림은 다 그린 거야?”
엘로이 백작 부인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그에게 물었다.
“요 근래 후작 부인께서 워낙 바빠서, 그림은커녕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오스틴은 지젤에게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빨리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봐, 금방 함락시킬 수 있다니까. 근데 숨결 소리가 불쾌하니 떨어지라니.
“그래? 하긴, 그 여자 좀 이상하지.”
엘로이 백작 부인이 코웃음을 치며 구겨진 드레스를 탁탁 털어냈다. 오스틴은 꽤 괜찮은 남자였다. 젊고, 준수한 외모에 적당히 똑똑한 남자는 찾기 어려웠다. 후원이나 그림 핑계로 편하게 만날 수 있고, 뒤끝 없이 언제든 내칠 수 있는 예술가.
“이상해요? 왜?”
과장되게 눈썹을 들썩인 오스틴이 백작 부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물었다.
“원래도 이상한데 요 근래 더 그러지. 왕자한테 소리를 지르지 않나, 어린 게 기고만장해서는-.”
“그 여자 되게 싫어하나 봐? 사이가 안 좋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봐. 오스틴이 묻는 말에 엘로이 백작 부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후작 부인 험담할 상대가 줄어든 요즘 이럴 때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야 했다.
“좋아할 이유가 없는 거지. 하여튼, 대충 그려주고 나와. 곧 거기 뒤집어질 테니까.”
“뒤집어진다니? 나 그림 완성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 어린 여자가 복에 겨운 줄 모르고, 황태자랑 바람났거든. 후작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난리 날걸?”
“의외네. 우아한 귀부인의 정석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스텔라에게 들었던 얘기를 또 들으려니 지겨웠다. 오스틴이 그런 권태로움을 숨기고 놀란 듯 중얼거리자 백작 부인이 입을 삐죽였다. 황태자와의 치정은 그 우아한 후작 부인이라는 명칭을 깨기 위함이었다.
“우아하기는. 곧 후작 부인이 이혼당하거나 쫓겨날지 몰라.”
“후작이 꽤나 아끼는 것 같던데, 정말 쫓겨날까?”
“그래야 할걸? 안 그럼 후작도 황국에 밉보일 테니까.”
“누구?”
“황태자의 약혼녀가 후작 부인을 거슬려 해. 남편이 어쩌다 연이 닿은 모양이야.”
엘로이 백작 주인이 오스틴의 어깨에 기대며 느긋하게 하품했다.
“황국에서 이름 날리는 권력가 집안 딸인데, 후작 부인이 아주 개망신을 당하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리길 원해. 곧 황후가 될 사람이니 후작도 눈치가 보이지 않겠어?”
오스틴은 그걸 들으며 입을 삐죽였다. 일이 잘못 돌아가면 후작 부인한테 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그는 이걸 지젤에게 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골똘히 고민하느라, 엘로이 백작 부인의 남편 험담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
해가 아직 떠오르지도 않은 새벽, 다이한은 여느 때처럼 서재에 앉아서 지젤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이미 맞은편에 그녀가 앉아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지젤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기다렸지만, 시간만 흘러갈 뿐 지젤은 오지 않았다.
그는 집사에게 아내가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걸음이면 갈 수 있는 그녀의 침실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그 시간 동안 그는 무표정하게 반쯤 열린 문만 바라봤다. 평소처럼 서신을 읽지도, 차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어제 날지 못하는 새를 들고 선 채로 무너져 내리던 지젤을 떠올렸다. 그게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제 지젤을 두고 돌아선 것을 후회했지만, 동시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제부로 지젤의 질긴 인내심이 기어코 끊어진 모양이다.
“5년.”
그게 네 최선이었던 거지. 다이한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단란한 부부 놀이는 이제 그만하기로 한 건가.”
낮은 목소리가 고독하게 서재를 울렸다. 해가 완연하게 하늘을 밝히고, 지젤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다이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재를 나서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그는 곧 괜찮아지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황태자는 떠날 사람이고, 지젤과 자신은 여기 고여있을 테니 괜찮았다. 그리고, 서재의 문 앞에 도착한 다이한은 그대로 굳어 섰다.
“지젤.”
다이한은 지젤이 언제부터 문 앞에 서있었던 건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젤은 그런 다이한을 지나쳐 항상 앉는 소파 왼쪽 자리에 자리 잡았다. 다이한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만 보다가 문을 닫았다.
“놀이.”
다이한의 말을 곱씹은 지젤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눈 가리고 아웅 한 건 나지. 당장 이안을 대하는 다이한의 태도만 해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지난 5년의 시간을 허비한 게 될까 무서워 그걸 애써 모르는 척했다.
“똑똑하신 분이 유치한 연극에 같이 놀아나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지젤이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절 기만하는 게 재밌으셨냐 물어야 할까요.”
후작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져 묻지도 않고 조용히 지젤 쪽으로 걸어왔다. 지젤은 그걸 보면서,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다이한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그때처럼, 분노와 원망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게 이제는 두렵고 아파서,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쉽사리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잠깐 주저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하자고 했던, 네가 처음 서재에 찾아왔던 그날. 다이한의 대답에 지젤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울음 섞인 기괴한 웃음소리가 다이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어린 계집애가 가족 다 죽인 저를 잡고, 살겠다고 살갑게 구는 게 어찌나 재밌었을지. 전 상상도 안 가네요.”
지젤은 정말 오랜만에 그저 죽고 싶어졌다. 날카로운 무언가를 들고 손목의 상흔 위에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모든 게 그저, 결국엔 후작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일 뿐이니. 어리석은 지젤 아벨린. 멍청하고, 한심한 지젤 아벨린. 지젤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비웃고, 비난하며 폄훼했다. 다이한은 묵묵히 그걸 듣기만 할 뿐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게 그녀의 속을 더 뒤집어놨다.
“뭐라고 말이나 좀 해보세요. 5년 동안 즐거우셨어요?”
지젤이 신랄하게 비꼬며 눈물을 뚝뚝 떨궜다. 여전히 말이 없던 다이한은 지젤의 턱 끝에 매달린 투명한 눈물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푸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안타까웠다.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지젤은 그 커다란 손을 매섭게 쳐냈다.
짧지만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다이한이 반사적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지젤의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다이한의 손에 붙잡힌 지젤은 놓으라고 소리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숨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태연을 가장했던 다이한의 무표정이 참혹하게 이지러졌다. 다이한은 천천히 지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